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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동산의 주님의 기도! (마 26:36-46)
본문은 예수님의 생애의 마지막 주간인 목요일 밤중에 일어난 사건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잡히시던 밤에 성찬예식을 제정하시고, 감람산으로 올라가십니다. 기도하러 올라가시는데 올라 가시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올라가십니다. 가롯유다는 이미 예수님을 배신하여 떠나 버렸고, 열 한 제자들을 데리고 오시다가, 여덟 제자들은 동산 입구에 남겨 두시고, 베드로, 요한, 야고보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 깊은 곳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중요한 사건마다 이 수석제자들과 동행하시며 함께 하셨습니다. 변화산에서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실 때도 그렇고, 눅8장의 야이로의 죽었던 딸을 살리실 때도 이들 세 제자들과 함께 동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특별히 수석제자들을 데리고 겟세마네 동산 올라간 것은 그들도 함께 기도하기를 원해서였습니다. 겟세마네는 '기름 짜는 곳'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 동산에는 올리브나무가 가득하였고 한편에서 올리브기름을 짰던 곳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심정은 몹시도 외롭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있기에 인성을 입으신 주님도 고독과 고뇌가 깊어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심정을 제자들에게 이렇게 토로하셨습니다. '내 마음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이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한 것인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나와 함께 깨어 기도하자'고 부탁하시고 제자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시는데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런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곧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와 보니 그들이 골아 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외롭고 고독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다시 한번 '너희가 나와 함께 한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느냐?'하시고,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다시 한 번 당부하시고 또 다시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와 보니 제자들이 전과 마찬가지로 또 다 졸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정말 한심한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한 시간도 예수님을 위하여 깨어 있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이 왜 한시도 깨어있지 못했는가에 대한 이유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그들처럼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할/ 왜 그들이 주님을 위하여 깨어 있지 못했나요? 그 까닭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고민이 자신의 고민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고민과 자신의 고민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은 예수님의 삶의 목적과 자신의 삶의 목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삶의 목적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까지도 엄밀히 이야기하면 예수님의 제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제자였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오순절 날 성령을 받고 비로소 제자가 됩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제자들에게 있어서 달라진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 아십니까? 그것은 제자들의 삶의 목적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분명해 졌다는 것입니다. 성령 받고 거듭난 제자들은 더 이상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았습니다. 누가 더 높으냐를 가지고 경쟁하지 않았습니다. 주를 위하여 살았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아니 주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산 것이 아니라 주와 복음을 위하여 죽었습니다. /할/ 참 삶은 역설적입니다. 저들은 죽음으로 살았습니다. 죽음으로 비로소 잘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목적을 바꾸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자신이 자신의 삶에 주인이었던 것을 끊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진정한 삶의 목적을 되찾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멘!/ 다시 본문 속의 제자들을 보세요! 이제 주님은 그들을 포기하시고 다시 세 번째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하신 후에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일어나 함께 가자,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그 당시 상황을 직시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주님은 가롯유다의 배신과 십자가의 죽음이 눈앞에 왔음을 아시고 제자들에게 내려가자고 하십니다. 여기까지가 본문의 내용입니다. /할/ ◀제목 소개!▶
①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36). '겟세마네' 동산은 어디에 있는 곳입니까? 기드론 골짜기 너머 감람나무가 우거진 감람산 기슭에 있으며 예루살렘 동쪽 벽으로부터 약 1.2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겟세마네 동산은 감람산 위에 있는 개인의 정원입니다. 그곳은 평지가 아니고 산꼭대기에 있는 조그마한 동산입니다. 이 겟세마네란 지명은 아람어 명칭으로써 '기름 짜는 틀'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는 감람나무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도 그곳에는 예수님 당시의 감람나무라고 알려진 나무가 서너 그루 남아 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감람나무로 전해진 이 번역은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성경은 중국성경을 번역한 것인데 성경을 번역할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올리브'나무가 전혀 생소했기 때문에 이와 가장 유사한 나무를 감람나무로 대신 번역했다고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을 보면 그런 번역이 여러 곳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떡'이라는 표현은 사실 떡이 아닙니다. 원문에는 '알토스' 즉 빵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번역할 때는 '빵'이란 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국적인 표현을 써서 '떡'이라고 표현했다고 합니다. 어째든 감란산 기슭에 있는 겟세마네 동산에는 올리브가 나무가 많이 있었는데 실제로 동산에서 올리브 열매를 틀에 넣어서 기름을 많이 짰다고 합니다.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겟세마네 그 동산에서 예수님은 '땀을 짜고 눈물을 짜고 피를 짜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땀이 변하여 피가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그곳에는 지금도 '땀흘린 교회'가 세워져 있다고 합니다. 또 이곳 겟세마네 동산은 예수님이 습관을 쫓아 기도하신 그런 곳입니다. 눅22:39절에 보면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다'고 나와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셨고, 제자들도 그곳에 같이 갔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가롯유다도 예수님이 그곳에서 기도하시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요18:2절 이하에 기록되었습니다. 여러분, 습관이 중요합니다. 좋은 습관이 행복한 사람을 만듭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습관을 가진 신앙은 매사의 역사를 일으키는 주인공이 됩니다. /믿/ ⑴매순간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이차 대전 중에 자기 병영 가까이 있는 숲에서 몰래 기어가던 한 영국 병사가 붙잡혔는데 그는 즉시 군 상관에게 이첩되어 적과 소통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주장한 한 마디 말은 '기도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장교가 물었습니다. '기도하는 습관이 있는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기도해 보라'고 장교가 명령하자, 병사는 곧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정말 믿음으로 확신 있게 부르짖어 기도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장교가 '가도 좋다. 네 말을 믿겠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저렇게 잘 할 수가 없지' /할/ 그래서 누명을 벗었답니다. /아멘!/ 다윗도 기도의 사람입니다. 그도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탄식하며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고(시55:16,17), 다니엘은 하루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으며(단6:10), 베드로와 요한도 성전에 올라가 정해진 기도 시간을 지켰으며(행3:1), 본문에서 우리 주님이 습관적으로 기도하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기도를 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제3시, 6시, 9시에 걸쳐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일 하다가도, 길을 가다가도 그 시간이 되면 길에 서서 기도했습니다. 베드로도 그 시간에 기도하다가 고넬료 집으로 가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고넬료도 그 기도시간에 기도하다가 베드로를 청하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규칙적인 기도가 중요합니다. /아멘!/ 규칙적인 기도 중에 가장 대표적인 기도는 새벽기도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새벽기도가 참 유명한 나라입니다. 우리민족은 새벽을 좋아하는 민족입니다. 새벽에 일어나서 일하고 출근하고 교회 가는 사람은 우리나라 밖에 없다고 합니다. 원래 새벽기도는 평양에 있었던 장대현교회가 원조입니다. 일본 강점기부터 6,25가 일어나기 전까지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열심히 새벽기도를 했습니다. 정말 그때는 뜨거운 새벽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평양에 다녀온 목사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장대현교회는 간데 없고, 지금은 그 자리에 수십 미터나 되는 금칠 한 김일성 동상이 세워져있다고 합니다. 평양을 방문하는 모든 사람은 그곳부터 안내해서 참배하게 합니다. 그리고 결혼하는 북한의 젊은이들은 결혼식을 마치자마자 그곳부터 찾아가서 머리 숙여 참배부터 하는 곳이 되었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새벽기도를 하던 그 자리가 오늘날 김일성 동상 앞에 모두 절하는 장소로 변해버렸다는 사실이 얼마나 가슴이 아픈 역사입니까? /할/ 그렇습니다.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바로 기도하는 습관은 삶에 승리로 인도하게 됩니다. 습관은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원리가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반드시 승리합니다. /아멘!/ ⑵범사에 감사하는 습관이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다음주는 우리가 일년에 한 번 정정을 드리는 추수감사절입니다. ⑶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는 습관이 복을 받는 비결입니다. 계1: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⑷힘써 복음을 증거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 복을 비는 습관이 참 귀합니다. ⑸죄를 고백하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는 습관도 귀합니다. ⑹주님의 일에 힘쓰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예배드리는 습관을 꼭 가져야 하고, ⑺서로 대접하고, 착한 일을 행하는 습관, 그리고 ⑻항상 기뻐하고, 찬송하기를 기뻐하는 습관이 우리들에게 꼭 필요합니다. /믿/아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않아 있으라' 다른 제자들은 산 중턱에 머물러 있게 하시고, 수제자로 칭한 베드로, 요한, 야고보 세 제자만 데리고 갔습니다. 여기 '여기 앉아 있으라'고 하셨는데 여덟 제자를 보고 '여기 앉아서 쉬고 있으라'고 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앉아 있으라'는 말은 그냥 앉아 있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깨어 기도하라는 뜻과 연관이 됩니다. /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제자들에게도 기도를 시켰고, 자신도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는 아무나 질 수 없습니다. 오직 기도하는 사람만이 그 십자가를 질 수가 있습니다. /아멘!/
②나와 함께 깨어 기도하자고 청하신 예수님!(37-38) 여러분! 우리가 홀로 기도할 때가 있습니다. 남모르게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밤에 기도해야 할 때가 있고, 새벽에 기도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또는 금식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철야기도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역 앞에서는 전 성도가 합력하여 기도하는 것이 참 아름다운 일입니다. 예수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할/ 개인기도도 중요하지만, 성령 받은 사람들이 합심하여 기도할 때 기적과 능력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아멘!/ 우리 모두 교회를 위하여 합심하여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마6: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할/ 여기 본문에서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의 고통을 보게 됩니다. 37절에 주님이 '고민하고 슬퍼하셨다'고 했고, 38절에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다'고 하시는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이 무엇인가를 찾아봐야 합니다. /아멘!/ ⑴배신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제자인 가롯유다의 배신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여러 가지 인생의 고통을 만나게 됩니다. 가난한 것도 고통이고, 병든 것도 고통입니다. 그리고 사업에 실패한 것도 고통이고, 또한 일자리가 없는 것도 고통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들보다 더 큰 고통이 있는데, 그것은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삼 년 동안 믿었던 제자에게 그것도 돈을 받고 팔아먹었을 때,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습니까? 영국의 대 문호 셰익스피어는 '겨울 북풍한설 찬바람에 스치는 고통보다는 배신의 고통이 더 크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그 배신도 사랑으로 승화를 시켰습니다. /할/ ▶'헨리 나우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회의 신부로서 전 세계 모든 목회자들의 영성을 깨워주는 위대한 학자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치유 목회에서 거장으로 불려지는 큰 인물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예수님을 상처받은 치유 자로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뭇사람들로부터 상처를 받았고 제자들의 배신으로 상처를 받았으며 마지막 십자가의 상처를 받고 그는 거기에서 살이 찢겨지고 피 흘리면서 죽습니다. 주님의 생애는 한마디로 말한다면 상처받는 생애였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상처받고, 자기 백성들로부터 상처받고, 제자들로부터 상처받고, 마지막 하나님으로부터 십자가에 못 박히는 상처를 온 몸에 지니고 죽는 상처의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그러한 상처를 원망하지 않았고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모든 상처를 홀로 체험하신 주님은 결국 인류의 상처를 치유하시는 위대한 치유자가 되셨습니다. /할/ ▶우리에게 상처가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상처를 많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처받은 것 때문에 다른 사람을 공격하거나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받은 상처는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우리가 어떤 상처를 받으면 받은 만큼 상처받은 다른 사람을 치유하는 사람이 되라는 교훈을 결론으로 맺고 있습니다. 가난 때문에 아픔을 겪는 분이 있습니까? 이제는 그것이 사명이 되어 배고픈 이웃들을 치유하고 도와주는 사명임을 느껴야 합니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친구로부터 배신을 경험한 쓰라린 상처가 있습니까? 그것은 그것을 가슴에 품고 원망하고 살라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같이 그런 상처를 입은 사람들에게 위로하는 치유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질병 가운데서 건짐을 받은 사람이 있습니까? 바로 내 주변에서 그런 질병으로 고통 하는 사람들에게, 신음하는 사람들에게 위로하고 좋은 치유자가 되라는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내게 어떤 암병이 있다가 나았다면 병이 나은 것 때문에 나 혼자 기뻐하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그 병든 사람을 찾아가서 '나는 당신보다 더 중한 병에 걸렸는데 그 병에서 이렇게 나음을 받았으니까 당신도 나을 수 있다'고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치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할/ 내 과거가 상처로 얼룩져 있을 때 생각하면 아프고 쓰라린 나날을 살수밖에 없는 연약한 삶이지만 그것 때문에 자기 운명을 비관하거나 원망하고 상처 입힌 사람들을 증오하고 원수 맺지 말고 자기 자신이 그 상처를 사명으로 바꾸어서 치유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상처를 통해서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상처를 상처로 두지 말고 그 상처를 통해서 은혜를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때 상처 입은 치유자가 되는 것입니다. /할/ ⑵예수님의 고통은 고독에서 오는 고통입니다. 본문에 보면 그렇게 믿었던 수제자들도 함께 깨어 기도하시고 그렇게 당부하셨건만 졸고 있으니 얼마나 외롭습니까? 십자가의 길이 외롭습니다. 사명자의 길이 외롭습니다. 56절에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다 버리고 떠나갔으니 얼마나 고독하시겠습니까? ⑶십자가의 고통입니다. 십자가형의 유래는 파사 나라에서부터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파사 사람들은 '올무즈'신을 섬기는데, 그 땅 전체는 신에게 바쳤기 때문에 그 땅은 신성한 땅인 고로 죄인들을 죽일 때 이 땅에 죄인의 피가 묻으면 안 된다고 해서 높이 장대를 받아 그 꼭대기에 매달아 죽이는 것이 파사의 사형 법이었습니다. 이것을 로마가 받아 들여서 반역 법, 반란 자, 도망간 노예, 강도, 강간죄 등의 무서운 중죄인들을 데려다가 극형을 처할 때 십자가형으로 다스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자는 절대로 십자가형을 처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형은 최고의 저주의 형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저주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을 눈앞에 두고 제자들에게 기도를 당부한 것입니다. /할/ ⑷예수님의 고통은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한 육체적인 고통은 물론이지만, 그것보다도 더 한층 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무슨 고통입니까? '인류의 죄를 지고 스스로 죄인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저주받은 그런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이 고통이 정녕 견딜 수 없는 고통이어서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하는 십자가상의 절규에서 예수님의 고통의 절정을 이루게 됩니다. 38절에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란 말은 시42:5절의 인용구입니다. 여기서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인간적인 고뇌를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예수님은 졸고 있는 제자들이지만 '함께'라는 말로, 스승과 제자 사이에 긴밀함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여기 '깨어 있으라'는 현재 동사로써 계속적으로 잠에서 깨어 일어나 있으라는 그런 의미인데, 늘 신앙으로 무장하라는 말씀입니다. /할/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므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깨어 있으라'는 경계의 말씀입니다. 우리도 항상 깨어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원수마귀가 지금도 우리를 넘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말세에 살고 있는 성도들을 향하여 당부하기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고 벧전5:8-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할/
③주님의 기도의 결론은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39) 예수님은 평소에 새벽마다 기도하시고 밤마다 기도하셨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더욱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기도 생활은 평소기도와 특별기도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특별기도 중 하나가 바로 겟세마네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의 특별기도는 평소기도의 연장선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평소에 전혀 기도하지 않다가 문제가 생기면 벼락치기로 기도하는 경우를 봅니다. 물론 안 하는 것보다 낫지만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평소기도의 습관에 기초해서 특별한 기도를 할 때 놀라운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급하면 기도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평소기도하지 않으면 급할 때도 기도가 잘 안 나옵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평소 기도하는 습관을 갖고 계셨는데, 십자가 고난을 앞두고 특별히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겁니다. 또 말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겟세마네 지명의 뜻입니다. '기름 짜는 틀'이란 뜻으로 감람유(올리브기름)를 짜던 곳입니다. 정말 그 이름처럼 예수님은 진액을 쏟으며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 눅22:44절에서는 이 대목을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여기서 우리가 깊이 보아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눈앞에 두고 혼자 깊이 기도하심을 통하여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도 홀로 기도하는 법을 지금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홀로 기도하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삶의 전환기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 혼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모습이 절대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모습도 여러 가지입니다 만은 혼자 조용히 기도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혼자만의 기도의 리듬을 타고 기도하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할/ 혼자 기도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자기만의 리듬으로 기도하는 법을 배우십시오. 합심기도도 중요하고, 통성 기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리듬을 타고 혼자 조용히 오래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삶의 매순간의 일어나는 난제들 속에서, 이길 수가 있습니다. /할/ 이런 기도를 누구 했는가? 바로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그런 기도를 했습니다. 창32:32절에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과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했다'는 말이 나오는데 야곱의 기도를 여기서 씨름하는 것에 비유했습니다. 이 기도가 어떤 기도인가? 예수님이 겟세마네 기도에서 담 방울이 변하여 핏방울 된 기도입니다. 여러분, 씨름선수가 상대방을 넘어뜨리는데 젖 먹던 힘까지 쓰는 모습을 보셨지요? 그렇습니다. 기도는 땀을 짜고 눈물을 짜고 피를 짜고 생명을 짜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가 변화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납니다. 사기꾼 야곱이 승리자 이스라엘이 된 것도 이런 기도의 능력입니다. /믿/아멘!/ 눅22:41절에서는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러 기도하여'란 주님이 기도하는 모습을 말씀하신 것인데, 유대인들의 기도의 자세는 주로 서서 기도합니다. 그리고 무릎꿇고 기도하기도 하고, 돌아다니면서 기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머리를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였다는 것은 자신을 완전히 비운 절대적 겸손의 표시로써 성부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이고 적극적인 복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기도의 일 성은 '내 아버지여!'입니다. 막14:36절에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기 '아바 아버지여'란 말은 아람 어로 '나의 아버지 나의 아빠'란 뜻입니다. 이것은 정말 확신이 없이는 부를 수 없는 그런 칭호입니다. /할/ 이것은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철저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아멘!/ '만일 할만하시거든' 막14:36절에서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의미를 나타낸 말입니다. /아멘!/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두 가지 해석입니다. 하나는, '하나님!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 주십시오' 이것은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의 솔직한 고백이라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또 하나는 '이 말은 십자가를 지지 않도록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그 십자가를 질 때 당하는 무서운 고통을 이기게 해 달라'는 그런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오셨고,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여러 번 예언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신 때에도 영광을 얻을 때가 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할 때에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구주로써 메시야로써 자격을 잃게됩니다. 보통 인간도 한번 죽기로 결심하면 죽을 때까지 결심을 바꾸지 않는데,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다 짊어지시고 구속을 이루려고 예루살렘에 오셨는데, 십자가를 지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고통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다는 말씀이 맞는 말씀입니다. /아멘!/ 여기 또 '그러나'가 중요합니다. 우리도 '그러나'의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계획대로 하옵소서' 우리들의 일반적인 기도는 자기의 뜻과 목적을 이루기 위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의 기도는 나의 뜻을 이루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입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내 뜻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내 뜻은 아버지 뜻에 굴복시키는 것입니다. 기도란 내 뜻이 아버지의 뜻에 승복하고 굴복하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종종 약해질 때도 있지만 기도하면 주의 뜻을 이를 수 있는 용기도 주십니다. 교부인 '터툴리안'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의 겟세마네가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하느냐? 나약한 육신의 소욕을 좇아야 하느냐?'를 결정하는 겟세마네 기도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겟세마네 기도에서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도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할/
④'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 동안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40) 한심한 제자입니다. 지금 예수님은 얼굴을 땅에 대시고 우주적인 고민을 안고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시고 돌아와 보니 제자들은 열심히 뭐하고 있었습니까? 자고 있었습니다. 왜 그들이 자고 있습니까? 나태함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나태함 때문에 나라가 망하고, 교회가 망하고, 개인이 망합니다. 모든 원리가 나태할 때부터 망하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영적으로 나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잠을 잤습니다. 조금 전까지 만해도 '주님과 함께 가겠다. 골고다까지 같이 가겠다'고 장당하고 큰소리 땅땅 쳤던 그 제자들의 모습과는 너무나 대조가 됩니다. 제자들은 그 결과로 신랑 되신 예수님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설마 하다가 졸다가 비참한 꼴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예수님은 양속도 하고 괘심도 하겠지만 그래도 용서하시고 사랑의 마음으로 이해하시는 넓으신 마음을 가지셨습니다. /할/
⑤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는가?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기 때문입니다(41). '이 친구들아! 자고 있느냐? 마음은 깨어 있고 싶어도 육신이 약하여 할 수 없이 자고 있구나'이런 말씀이기도 합니다. 기도란 육신의 노력으로는 되지 않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적인 지혜나 의욕, 인간적인 방법으로도 되지 않습니다. 기도는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믿/아멘!/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이 말씀은 또 다른 의미에서 깨어 있어 기도해야 할 이유를 설명한 것입니다. 여기서 마음 '프뉴마'는 육신과 반대개념으로써 마음은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싶으나 육신은 항상 세상의 안일과 나태함을 쫓게 됩니다. 그래서 육신은 세상적인 쾌락과 유혹의 충동으로 이 마음의 선한 의지를 짓밟아 버리고 맙니다. 실로 마음으로는 원하지만 육신의 본심을 지닌 인간은 당면한 시험을 이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육신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깨어 기도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아멘!/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기도해야 할 중요한 이유가 본문에 나오고 있습니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눅22:40-41절에서도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까?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 왜 신앙인들이 실패합니까? 나쁜 일을 해서 실패하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을 안 해서 실패하는 것도 아닙니다. 실패하고 무너지는 결정적인 이유는 시험에 들기 때문입니다. /할/ '유혹에 넘어지고 욕심에 넘어지고 정욕에 넘어지고' 우리는 시작을 잘하고 열심을 냅니다. 그러나 시험에 들면 흔들리게 됩니다. 그래서 다 무너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마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만들어 '우는 사자처럼' 우리들을 올무에 잡아넣으려고 합니다. 우리들이 믿음으로 잘 시작했던 것도 무너지게 만듭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마귀가 벌떼처럼 달려듭니다. /믿/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는 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곤경에 빠졌을 때에는 기도가 가장 실제적인 구제의 수단이라고 교훈 합니다. 개인도 가정도 사회도 교회도 국가도 곤경에 빠졌을 때 가장 실제적인 구제의 수단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기도 밖에 없습니다. 지금은 개인이 기도할 때요, 교회가 기도할 때요, 국가적으로 기도할 때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아멘!/ 여러분, 인간관계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바른 관계입니다. 남편과 아내와의 관계도 바른 관계입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도 바른 관계입니다. 선생과 학생과의 관계도 바른 관계입니다. 교인과 목사와의 관계 역시 바른 관계입니다. 정치인들과 국민들과의 관계도 바른 관계입니다. /할/ 어러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바른 관계가 그만큼 중요하고 크다는 사실을 인정하십니까? 그렇습니다. 이 관계가 바르지 않을 때 사고가 납니다. 원망의 소리가 나고 무력이 행사되고 급기야는 깨어지는 소리가 납니다. 그러므로 모든 관계가 바라야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가 진실하게 잘 유지 될 때 우리는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 관계는 오직 기도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신앙인의 가장 큰 적은 기도를 가로막는 세력입니다. 안일주의와 제자들처럼 나태함에 빠져 살면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정립할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연약함으로 우리의 욕심만을 구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기도하다가 보면 우리가 변하고 좀 더 새로워져서 언젠가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게됩니다. 그래서 기도가 좀 서툴고 이기적이고 형편이 없어도 안 하는 것보다는 기도하는 것이 낫습니다. /믿/ 어떤 사람은 소리 지르며 통성으로 기도하는 것을 욕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절대로 욕하지 맙시다. 병원에는 점잖은 환자들도 있지만 소리 지르는 환자도 있습니다.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가 부러지고 머리가 깨어진 환자는 소리를 안지를 수가 없습니다. 교통환자는 바로 응급실로 직행합니다. 우리는 점잖게 기도할 때가 있는가 하면, 소리 지르고 눈물 콧물 쏟으면서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는 기도가 필요합니다. /할/
⑥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시는 예수님!(42-44) 44절에 '또 저희를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동일한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이 똑같은 기도를 세 번씩이나 반복하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증언부언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증언부언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반복해서 기도하는 것과 증언부언해서 기도하는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귀를 의식해서 그 마음을 사려고 하는 기도입니다. 또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무엇입니까? 확신 없이 의식적으로 형식적으로 하는 기도를 중언부언이라고 합니다. 꼭 주문을 외우는 것 같은 기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한 가지 기도 제목을 가지고 열 번, 백 번 기도하는 것은 절대로 증언부언이 아닙니다. /아멘!/ 사실 우리는 반복적인 기도를 해야 합니다. 주기도문을 우리가 반복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절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응답주실 때까지 반복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동일한 기도를 세 번이나 하셨습니다. 이 기도의 응답이 히5:7절에 나옵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할/
⑦기도도 때가 있습니다(45-46). 졸고 있는 제자들에게 오신 예수님은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느니라'고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때가 있습니다. 기도할 때 타이밍을 놓치면 안됩니다. 성경을 때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전3장에서 때가 있음을 말씀합니다. 전3:1절에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바울은 고후6:2절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외쳤습니다. '보라 때가 가까웠다'는 말씀은 원수의 손에 잡히어 최악의 순간을 맞은 그 수난의 때가 이미 온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벌써 등불을 들고 기드론 시내를 걸어 겟세마네로 통하는 길을 따라 가롯유다의 인도를 받고 자기를 잡으려고 접근하는 무리들의 험악한 발자국 소리를 멀리서 듣고 계셨을 것입니다.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우리라' 여기서 나오는 '죄인'은 배신과 고발의 첫 행위자인 가롯유다를 지칭한 말씀이지만, 더 큰 의미는 그 당시 산헤드린 공회원과 백성의 장로들과 로마의 집권세력전부를 의미합니다. /할/ 그렇습니다. 주님이 마지막 땀방울이 변하여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신 그 동산에 네 종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⑴검과 뭉치를 들고 의인을 잡으려는 악당의 무리들이 있었고, ⑵이 동산에는 갸룟 유다가 있었습니다. 그는 천인 만인 가운데에 고르고 뽑힌 예수님의 제자 중에 제자였습니다. ⑶이 동산에는 잠만 자고 있던 제자들도 있었습니다. ⑷그런데 이 동산에는 온 인류를 위해서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기도하시는 예수님이 계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누구를 본받아야 하나요? 두말하면 잔소리입니다.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아멘!/할/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보통 사람 같으면 따라 간다고 하드라도 '아니다, 너희 따위는 따라올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어야 합니다. 그러함에도 주님은 '일어나 함께 가자'고 하십니다.
▶여기에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⑴주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병신자식을 더 사랑한다'는 말과 같이 약하고 부족하고 믿음이 없는 제자들을 내어버릴 수 없는 것이 예수님의 심정입니다. ⑵다시 한 번 사명을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일어나는 자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새로운 능력을 주어 초대교회사를 빛나게 했습니다. /할/ ⑶함께 동행해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주님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⑷예수님의 승리의 모습입니다. 당당히 주음 앞에 십자가 앞에 나가셨습니다.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가롯유다의 배신으로 죄인들의 손에 넘겨질 때가 이미 곁에 온 것을 나타낸 그런 말씀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있었기에 삼일만에 부활의 승리가 있었습니다. 이 승리가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영원히 사는 영생의 길로 인도하게 하신 위대한 승리입니다. /할/ (2011년 11월 13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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