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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라! 그리하면 넘치도록 안겨 주리라! (눅 6:38)
본문은 마5-7장의 같은 배경으로 예수님의 산상설교로써 그리스도인들에게 황금률로 불리는 신앙인의 생활덕목입니다. 본문은 산상에서 주님의 같은 말씀을 들었던 제자 누가를 통해서 그 누가가 느끼고 강하게 받았던 부분을 기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교훈을 황금의 교훈이라고 말한 것은, 만약 사람들이 이 짧은 교훈을 받아드리면 황금덩어리가 인간을 부유하게 하듯, 우리의 마음속에 부유함으로 풍성함으로 넘쳐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할/ 요7:40-47절에 보면 예수님의 가르치심에 많은 민중이 동요하기 시작하자, 어느 날 대제사장과 바리세인들이 예수님을 체포해 오라고 하속들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 하속들이 예수를 잡지 않고 그냥 돌아 왔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대제사장과 바리세인들이 '왜 잡아오지 못했느냐?'고 질책을 하자, 그들이 대답하기를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이 이때까지 없었다'고 실토했습니다. 이 말은 쉽게 표현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권위가 있고, 깊이가 있고, 생명력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한마디로 우리 예수님은 그의 가르침 속에 메시아적 자기 계시를 나타내고 계시며 하늘나라 법의 선포 자로써 절대적 권위로 행동하셨습니다. 눅6:27절 이하에서 예수님이 선포하신 말씀을 보면,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 저주하는 자를 위해 축복하라!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대라'고 하십니다. 뺨을 맞는 것은 인격적 모독입니다. 그러함에도 참으라는 말은 '너희 안에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라'는 말입니다. /할/ 또 보십시오!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문제입니다. 30절에서는 '네게 있는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면서 31절에서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사랑의 교훈이요 용서의 교훈'입니다. 가장 힘있는 자는 용서하는 자요, 이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입니다. /할/ 예수님은 본문에서 성도의 '차별화를 선언'하고 계십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선대하고 축복하고 위하여 기도해 주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교는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유대교인과 달라야 하고,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하고, 죄인들과 달라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멘!/ 스테반은 돌을 던져 자기를 치는 사울을 향하여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를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소서' 이 기도에 예수를 핍박하던 사울이 깨어져 변화 받고 기독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전무후무한 사도 바울이 되었습니다. /믿/ 주님은 때로 우리들이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들의 능력은 보잘것없는데 너무 과한 요구를 하실 때가 있습니다. 본문 말씀만 해도 그렇습니다. 27-28절에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어떻습니까?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그 다음 29절을 보면 더욱 힘든 일을 요구하십니다.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 우리가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입니다. 우리들이 아브라함입니까? 사도 바울입니까? 베드로입니까? 어떻게 이런 일을 하라고 요구하실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과연 이 요구는 정말 불가능한 일입니까? 그러면 왜 이런 요구를 우리에게 하셨겠습니까? 이 말씀은 문자 그대로 행하라고 하는 뜻도 있지만, 그 보다도 '그런 정신을 가지고 세상을 살라'는 뜻이 더 강합니다. 이런 정신으로 살면 언젠가는 그 헤아림을 도로 받는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면서 오늘 본문으로 읽은 38절에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이스라엘에 두 바다가 있는데 죽은 바다가 있고, 산 바다가 있습니다. 사해 바다는 죽은 바다인데 물을 받기만 하고 주지를 않아 썩어버린 물이 되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헬몬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서 다시 요단강으로 내려보냅니다, 갈릴리바다는 고기가 약 37종이 서식하고 있다고 하는데 풍성한 바다 살아있는 바다입니다. /할/ 주님은 친히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고 하십니다. ◀제목 소개!▶ 여러분, 사해가 왜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까? 받기만 하고 줄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움켜쥐기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죽음의 바다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갈릴리 바다는 다릅니다. 얼마나 풍요롭습니까? 그 속에 수많은 물고기 떼가 뛰놉니다. 주변에 있는 수목들도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이 고여있지 않고 계속해서 순환하기 때문입니다. 요단 강을 통해서 자기의 물을 내려보낼 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죽음의 바다처럼 적막하고, 무가치한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삶은 갈릴리 바다처럼 늘 풍요롭고 축복된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삶은 '주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주시고, 예수님은 자신 전체를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주는 자를 기뻐하시고, 주는 자에게 반드시 은혜를 주십니다. 행20:35절에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물론 주는 것은 물질만 주라는 것이 아닙니다. 38절 하반부 말씀에서 '너희의 헤아리는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한 것은 쉽게 말하면 '헤아리지 말라'는 말씀이고, 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알아주고 이해해 주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만 주지말고 정신적인 것도 많이 주어야 합니다. /아멘!/ 왜 사람들이 섭섭함을 느낍니까? 자기를 알아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것보다 내가 알아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인정받으려고 하기보다 인정해주려고 해야 합니다. 그처럼 서로 인정해주고, 격려해주고, 이해해주고, 알아주면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아멘!/ 주는 자는 행복합니다. 독일의 유명한 성자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를 위해 일생을 내어주었습니다. 그의 삶 속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그의 삶은 비록 아프리카 정글에 있었지만 기쁘고 행복하고 즐거움이 넘쳐났습니다. /믿/ 슈바이처 박사는 목사이면서 교수, 철학, 신학, 의학 박사이며 문필가로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모든 것을 내어 던지고 아프리카에서 봉사하고 있을 때, 그 누가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당신 같은 사람이 왜 여기서 생명을 바쳐 일합니까?' 슈바이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말로 사람을 감동시킬만한 재주가 없습니다. 사랑을 아무리 내 말로 설명을 해도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하려고 이곳에 온 것입니다. 저는 사랑을 실천하면서 건강과 행복도 선물로 받았습니다.'라고 말했답니다. 슈바이처는 91세까지 사랑을 실천하다가 1965년 아프리카 가봉 땅의 한 병원 묘지에 묻혔습니다. 이와 같이 알버트 슈바이처 박사는 아프리카를 위해 일생을 내어주었습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삶이었습니다. 사랑 속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슈바이처 박사와 같이 있으므로 비록 문명에서 멀리 떠난 아프리카 정글에 있었어도 그는 행복하고 기쁘고 즐거움이 넘쳤습니다. /아멘!/ 여러분, '테레사' 수녀는 캘커타의 빈민굴속에서 일생을 보냈습니다. 그 당시 캘커타의 빈민굴은 너무나 비참한 상황이었습니다. 더럽고 냄새나고 병들고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일생을 바쳐서 죽어 가는 사람들을 돌보고 위로하고 용기와 힘을 준 삶을 살았는데 다른 사람보기에는 너무나 외로운 삶 같았습니다. 너무나 큰 희생 같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테레사 수녀의 일생은 큰 기쁨과 행복과 만족이 있었습니다. 왜 그런 역설적인 일이 일어날까요? 사랑을 실천하는 곳에는 우리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하나님은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본 자가 없으나 사랑하면 그곳에 하나님이 계시므로 이 테레사 수녀는 캘거타에서 사랑을 실천하므로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그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우편에는 즐거움이 넘쳐서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행복을 그 마음속에 느낄 수가 있었답니다. /할/ 그렇습니다. 주는 자가 복이 됩니다. 행복은 주는 자의 몫입니다. /아멘!/ 본문을 단락을 지어 깊이 상고해 보겠습니다. ①주라! ⑴섬기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창조 때부터 의미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사람은 일할 때 보람과 기쁨을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섬김으로 삶의 의미를 얻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그 맛에 사는 존재입니다. 그것이 인간에게 부여된 몫이기도 합니다. /할/ 인생은 책임 있는 존재입니다. 사명의 존재입니다. 그리고 기여하는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훈련하시면서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요 섬기려고 왔노라' 막10장에는 이 말씀은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다가와 이다음 주님이 성공했을 때, 우리 형제를 주님 좌우에서 일하게 해 달라고 당부한 말을 들으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마태복음에는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께 찾아와 이 다음 두 아들을 잘 돌봐달라고 청탁하는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이 말씀입니다. '너희들이 나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섬기러 왔노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할/ ▶어떤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하루는 하늘나라 천사가 잠시 세상으로 내려왔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을 찾아서 그 손에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팔찌를 걸어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천사는 자기가 가지고 온 하늘나라의 팔찌를 걸어줄 아름다운 손을 찾기 위해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손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사는 숲 속에 있는 한 외딴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집안에는 세 딸이 있었습니다. 천사는 자기가 찾아온 목적을 밝혔습니다. '저는 하늘나라 천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을 찾아서 그 손에 이 하늘나라의 팔찌를 걸어주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 첫째 딸이 얼른 나서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사님, 제 손을 좀 보세요. 얼마나 예쁜 손입니까? 제 손은 예쁠 뿐만 아니라 이 손으로 늘 화원의 꽃을 만지기 때문에 제 손에는 아름다운 꽃향기도 난답니다.' 그러자 둘째 딸이 질세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사님, 제 손도 좀 봐주세요. 얼마나 깨끗한 손입니까? 저는 제 손에 먼지만 묻어도 곧 흘러가는 맑은 시냇물로 제 손을 깨끗하게 씻는답니다.' 이번에는 셋째 딸이 말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셋째 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소곳이 한 자리에 서 있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 셋째 딸에게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자매님, 자매님은 왜 아무 말이 없습니까? 자매님에게는 손이 없습니까?' 그러자 셋째 딸은 얼굴을 붉히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천사님, 제 손은 보잘것이 없기 때문에 천사님에게 보여드리기가 민망스럽습니다. 저는 날마다 이런 저런 허드렛일을 하기 때문에 손이 너무 거칠어졌습니다. 찬물에 빨래를 하다 보니 손이 얼어서 터진 곳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듣던 천사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습니다. 그러더니 그 천사는 얼른 자기가 가지고 온 하늘나라의 팔찌를 꺼내서 그 셋째 딸의 손목에 걸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며 섬기는 손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섬기는 손이 아름다운 손입니다. 섬기는 삶이 아름다운 삶입니다. 예수님의 삶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삶은 한마디로 섬김의 삶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하나님 아버지를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못난 우리들까지도 섬겨주셨습니다. 막10:45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서 이 땅으로 오셨습니다. 말씀으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기도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 주시면서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섬기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자기의 몸 버려 피 흘려 우리를 섬기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지금도 하나님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심으로써 계속해서 섬기고 계십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삶은 철저한 섬김의 삶이셨습니다. /할/ 그렇다면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들도 주님을 본받아서 아름다운 섬김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살아야 마땅합니다. 우리의 몸도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께 드리고, 우리의 뜻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멘!/ ㈀예배도 드리는 삶입니다. 시간을 드리고, 몸을 드리고, 나의 재능(달란트)도 드리고, 물질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다음 주일을 '맥추감사'주일로 지킵니다. 절기를 지킬 때에는 공수, 곧 빈손으로 하나님에게 보이지 말라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명하셨습니다. 여러분! 물론 우리는 매 주일마다 하나님에게 헌금을 드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맥추감사 주일을 맞이해서, 금년 한 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와 축복을 생각하면서 특별한 감사의 헌금을 하나님에게 드리게 됩니다. 고후9:6-8절에 보면 '헌금의 원리'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헌금은 축복의 씨앗입니다. 다시 말해서 헌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거두기 위해서 심는 씨앗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에게 헌금을 심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축복을 거두게 하십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하여 자연의 법칙을 예로 들었습니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할/ 바로 이 자연의 법칙에 따라서, 농부는 씨를 심습니다. 바로 이 법칙이 있기 때문에, 농부는 자기가 심는 씨를 낭비한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습니다. 헌금에도 자연의 법칙은 그대로 적용됩니다. 헌금을 적게 심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그만큼 적게 거둘 것입니다. 반대로 헌금을 많이 심으면, 하나님의 축복을 그만큼 많이 거둘 것입니다. 그러기에 헌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비결이 됩니다. 잠3:9-10절에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말3:10절에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즐겨 드리는 자세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하는 것입니다. 둘째, 인색함으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 억지로 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각각'이라는 말은 '각자가'라는 뜻입니다. 헌금은 각자가 개별적으로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모두가 똑같은 금액을 정해서 일률적으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맥추감사헌금도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복을 따라서, 개인적으로 힘써 하나님에게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헌금은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드릴 헌금을 미리 마음에 정하며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억지로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우리의 마음을 보십니다. 그러기에 억지로 헌금을 드리면, 하나님의 축복을 상실하고 맙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즐겁고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기만 하면, 하나님은 과부의 두 렙돈도 기쁘게 받으십니다. /할/ ▷축복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할/ ㈁우리는 기도로 남을 섬길 수 있습니다. 중보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칭찬도 섬김의 삶입니다. 내 칭찬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도 젊은이도 어른도 모두 칭찬을 좋아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 여성들은 '젊다, 예뻐졌다' 라는 칭찬의 말 한마디면 모든 여성들은 깜빡 죽습니다. 그 칭찬의 말한 마디는 보약보다 효과가 더 좋습니다. ㈃용서도 섬김의 삶입니다. 용서할 때에 우리의 마음이 바다같이 넓어질 뿐만 아니라 우리의 생각도, 앉아있는 터전도 넓어지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용서했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광활한 땅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용서할 때에 기쁨이 샘솟았으며 우리의 얼굴이 천사의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그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용서할 때엔 그의 모습은 천사의 모습으로 변화가 되었습니다. 또 우리가 용서해 줄 때에 하나님은 우리편이 되어 주시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쫓아다닐 때 다윗은 사울을 죽일 기회가 있었으나 그를 용서해 주니까 하나님이 다윗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아멘!/ 다시 한번 스데반 집사를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는 동료들에 의해서 억울하게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를 돌로 치는 원수들까지도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습니다. 기도도 주는 것입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그가 원수까지라도 사랑해 주고,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 줄 때 그 마음이 얼마나 풍요로웠겠습니까? 그 고통 속에서도 스데반 집사의 얼굴은 천사처럼 환하게 빛났다고 했습니다. 주는 자가 복이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금년도에 남아있는 어간에 가족끼리, 이웃끼리, 형제끼리, 심지어 원수까지도 용서해 줄 수 있는 너그러운 마음이 일어나서,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시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⑵주라고 하십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나는 이웃이나 형제에게 주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친히 나에게 갚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원수도 하나님이 갚아 주시고, 상급도, 면류관도 하나님이 갚아 주시고, 축복도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주는 것이 풍요로운 삶을 사는 비결이 됩니다. 갈릴리 바다처럼 주는 삶을 살면 우리가 얼마든지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가 있게 됩니다. /아멘!/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라고 말씀하시면서 아무런 조건도 덧붙이지 않으셨습니다. 누구에게 주라는 것입니까? 누구에게든지 주라는 것입니다. 언제 줍니까? 있을 때만 주고, 없을 때는 안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무 때라도 주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으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는 태어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자가 구걸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인가 바라는 심정으로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해서 보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소리쳤습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너에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일어나 걸어라' 다른 것을 준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예수의 이름'을 주었습니다. 예수의 이름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네 이웃에게 예수의 이름을 주어야 합니다. 그 이름 속에 영원한 생명의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믿/ 베드로가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에게 예수의 이름으로 명할 때 그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언제든지 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곳에는 풍요로운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디에서 줍니까? 주는 장소가 따로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어디에서든지 주라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주는 삶을 살고, 직장에서도 주는 삶을 살고, 학교에서도 주는 마음으로 살고, 교회에서조차도 우리가 늘 주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복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이웃을 행복하게 하면 부메랑의 법칙이 되어 내게 돌아옵니다. 부메랑은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짐승을 잡을 때 사용하는 무기로써 던지면 도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남에게 사랑을 베풀고 남을 위해서 희생을 하면 그 사랑과 희생이 공로가 우리에게 도로 돌아옵니다. 요12:24절에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희생과 사랑을 통해서 내 자신이 손해를 보고 죽으면 사라진 줄 아는데 그것이 나중에는 30배, 60배, 100배가되어 열매가 되어 돌아옵니다. '주라. 그리하면 돌려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눌러 흔들어 넘치게 해서 안겨 주리라'는 법칙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 '알프레드 애들러' 박사는 그에게 찾아온 우울증 환자들에게 이렇게 처방을 해 주었답니다. '두 주 동안만 나의 처방대로 따르십시오. 그러면 당신은 건강해질 것입니다.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두 주 동안 매일 나를 잊어버리고 내 이웃을 어떻게 행복하고 기쁘게 할까 그것만 생각하고 그것에 집중적으로 노력을 하시고 내게 오십시오' 그렇게 말했습니다. 특효약을 기대했던 많은 환자들이 대부분 이 싱거운 처방에 실망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그의 처방을 따른 사람에게는 당장 효과가 나타났습니다. 남을 돕고 어려운 이웃에게 사랑을 전했더니 자기 우울증이 깨끗이 나아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항상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자기가 슬프고 자기가 우울하고 자기가 버림받고 소외되었다고 생각한 사람은 우울증의 수렁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었습니다. 부메랑의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사랑이 내게로 돌아오고, 기쁨이 내게로 돌아오고, 평화가 내게로 돌아오고, 우울증은 사라져 버리고 만 것입니다. /할/ 여러분! 우리 예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도 더 복이 있느니라' 그러니까 주는 사람도 복이 있고, 받는 사람도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더 복이 있겠습니까? 주는 자가 더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든지 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우리의 삶이 그만큼 풍요로워지는 것입니다. /아멘!/
②'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누가 주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보상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거짓말을 아니하십니다. 우리에게 빚지고 살지 아니하십니다. 반드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누구에게 사랑을 베풀어주었는데 주어도 아무런 소용도 없더라! 인사도 안 하더라! 감사의 말 한 마디 없더라!'고 적절한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섭섭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손이 크겠습니까? 하나님의 손이 크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의 손이 더 큽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보상해 주시고 하나님이 갚아주시는 것이 더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에게서 보상받지 못했다고 해서 섭섭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갈6:9절의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할/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빚지고 살지 아니하십니다. ▶19세기 중엽 미국에 '잔 록펠러'(John Rockefeller, 1839-1937)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어릴 때 이런 결심을 했습니다. '나는 장차 이 세계에서 제일 돈을 많이 번 갑부가 되리라' 그래서 그는 철이 들면서부터 돈을 버는 일에 완전히 혈안이 되어서 살았습니다. 그는 일찍이 유전에 손을 대었습니다. 그리해서 33세라는 젊은 나이에 스탠더드 석유회사의 사장이 되었습니다.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백만장자의 대열에 이미 올라서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43세에, 그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대규모의 트러스트를 형성해서 세계에서 가장 큰 재벌기업의 총수가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뒤 53세에, 그는 세계에서 단 한 명밖에 없는 억만장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소원대로 세계에서 제일 가는 갑부가 되었습니다. 이 세계적인 갑부인 록펠러가 55세가 되도록 오직 성공과 사업만 몰두하며 살다보니 몸도 쇠약해졌고 우울증까지 겹쳐 식욕도 사라지고 그러다가 쓰러졌습니다. 불치병에 걸렸습니다.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렸습니다. 잠을 자지 못해서 불면증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음식을 먹어도 소화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가 하루에 먹는 것은 기껏해야 우유 한 잔과 비스킷 몇 조각이 전부였습니다. 의사는 그를 진찰해 보고 일년을 넘기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그 동안 돈 버는 일에만 혈안이 되었기 때문에 그의 원수도 많았습니다. 그가 죽기를 바랬던 사람이 그만큼 많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드디어 그는 죽음을 눈앞에 앞두고 자신의 삶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 그는 목사님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동안 돈을 버느라고 잠도 못 자고 피곤하여 숱한 스트레스에 정신과 육체가 쇠약해졌으니, 이제부터는 남에게 베풀며 섬기는 사람이 되십시오. 얼마나 많은 돈을 가졌느냐 보다 얼마나 가치 있게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그에게 주었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그는 지금까지 움켜쥘 줄만 알았지 손을 펼 줄을 몰랐습니다. 주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모으기는 많이 모았는데 풍요로운 삶을 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심정으로 드디어 손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자기 재산의 일부를 교회에 헌금했습니다. 사회적으로 뜻 있는 일에도 많은 금액을 희사했습니다. 그는 돈을 기부해서 시카고 대학도 세웠습니다. 드디어 1931년에는 자선사업을 체계적으로 하기 위해서 '록펠러 재단'을 만들었습니다. 그 뒤 그는 계속해서 뜻 있는 일에 돈을 많이 썼습니다. 그가 손을 펼치고 나니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의 마음에 평안히 찾아왔습니다. 잃었던 잠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입맛도 돌아왔습니다. 건강도 서서히 회복되었습니다. 의사는 분명히 55세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록펠러가 얼마나 살았는지 아십니까? 98세까지 건강한 몸으로 장수했습니다. 일평생 동안 그가 자선사업에 희사한 돈이 5억 달러가 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다섯 아들을 통해서 수십 억 달러가 자선사업을 위해서 쓰여졌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무슨 모양으로든지, 누구를 통해서든지 하나님께서 반드시 보상해 주십니다. 우리가 주는 삶을 살 때에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갚아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③'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우리 하나님의 손길이 얼마나 풍성합니까? 예수님은 본문에서 다섯 가지로 말씀해 주셨습니다. ⑴'후히 되어'입니다. 지금은 옛말이 되어버렸습니다. 옛날에 쌀가게에 가면 쌀장사가 쌀을 어떻게 되어줍니까? 위를 싹 깎아서 제일 끝에 0.5cm정도 산 모양으로 만들어 줍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실 때 그렇게 주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후히 되어' 아낌없이 많이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멘!/ ⑵'누르고'입니다. 꾹꾹 눌러서 조금이라도 더 우리에게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⑶'흔들어'입니다. 흔들면 엄청 들어갑니다. 그러니까 곡식과 곡식 사이에 빈틈이 하나도 없도록 하나님께서 채워 주신다는 것입니다. ⑷'넘치도록 하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는 것을 절대로 아까워하지 않으시고, 조금이라도 더 주시려고 하십니다. ⑸'안겨주리라'입니다. 우리가 찾아갈 필요가 없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하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하나님의 축복을 한아름 우리의 품에 안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멘!/ 이만큼 하나님의 손길은 풍성한 손길입니다. /믿/ 참 행복한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하나님께서 이 풍성하신 손길로 우리 모두에게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안겨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④'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결론적인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됫박이 작으면 받는 됫박도 작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됫박이 크면 클수록 훨씬 더 큰 됫박으로 되돌려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물질을 바치거나 우리 이웃들에게 도움을 줄 때, 이것저것 따지면서 헤아릴 필요가 없습니다. 헤아리지 말고, 따지지 말고, 정성을 다해서 도와주고, 또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더 큰 것으로 우리에게 보상해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할/ ▶옛날 어떤 나라에 한 임금님이 변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민정시찰을 나갔습니다. 어느 동네에 갔습니다. 거지가 나타났습니다. 거지는 임금님인줄 모르고 변장한 임금님에게 와서 무엇인가 구걸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임금님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무조건 얻어먹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그러니 지금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무엇이든지 먼저 내게 주시오. 그러면 내가 그 대가로 더 좋은 것을 당신에게 주겠소' 거지는 가만히 생각했습니다. 때마침 그의 주머니에는 구걸해서 얻은 옥수수 알갱이가 한 움큼 들어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다 주려고 하니까 아까웠습니다. 그래서 부스럭 부스럭거리다가 5-6알을 꺼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이것이 다입니다.' 그러면서 그것을 변장한 임금님에게 주었습니다. 임금님은 품속에서 주머니 하나를 끄집어내었습니다. 그 속에는 조그마한 금덩이들이 많이 들어있었습니다. 임금님은 그 가운데서 자기가 받은 강냉이 알갱이 수만큼 금덩이를 끄집어내어서 그것을 거지에게 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당신이 내게 주었으니까 나도 약속대로 이것을 당신에게 줍니다.' 이 거지는 속으로 깊히 후회를 했습니다. '이까짓 강냉이! 다 주었더라면 저 금 주머니를 통째로 내가 받는 건데...'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십니다. 우리가 심은 그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시 한번 고후9:6절을 봅니다.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두느니라' 또 전11:1절에 '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오늘 본문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할/ 여러분! 우리가 도움을 베풀 때, 친절을 베풀 때, 사랑을 베풀 때, 또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를 베풀 때, 이것저것 헤아리지 말고 기쁜 마음으로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더 좋은 것으로 갚아 주실 줄 믿습니다. /아멘!/ (2012년 7월 1일 대예배 설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