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세상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 4:1-16)

성령충만땅에천국 2012. 8. 26. 0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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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이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전 4:1-16)

 

  1888년 한 유명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만든 사람입니다. 그는 다이너마이트를 제조한 다음에 일약 당대에 명사가 되었고 수많은 돈을 벌고 사람들의 관심과 촉망을 받는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나 언제나 하던 버릇처럼 신문을 펴서 기사를 읽기 시작하는데, 깜짝 놀랄 만한 기사를 발견했습니다. 그 서두에 자기가 죽었다는 기사가 씌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신문 기사의 보도는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세계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유명한 알프렛트 노벨이 죽다.'
  이 기사를 읽은 그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 자기 동생이 죽었는데, 신문 기자들이 혼돈하여 자기가 죽은 것으로 보도를 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사망 기사 앞에서 이 사람은 깊은 침묵과 말할 수 없는 도전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수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폭탄을 만들어서 재물을 얻었고 명성을 얻었지만, 결국 내 인생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것이 아닐까?'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폭탄을 만든 제조업자가 드디어 죽다'라고 보도한 신문을 찢어 버리면서 그는 새로운 삶을 살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는 인생의 허무 가운데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복음을 깨닫게 되었고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인간은 위기가 닥치기 전에는 자신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삶의 위기에서 겸손히 자신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훗날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쓰기로 결심하게 됩니다. 그것이 저 유명한 알프렛트 노벨의 '노벨 평화상'이 시작된 유래가 되었답니다. /할/ 어떤 상황에 처할 때 자기를 돌아보고 깨닫고 결단하고 돌이키는 자가 인생의 성공자가 됩니다. /아멘!/ ◀제목 소개!▶

 

  ①전도서의 저자와 주제와 결론은 무엇인가?
  ⑴전도서의 저자는 솔로몬입니다. 전1:1절에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다윗의 아들 가운데 예루살렘에서 왕이 된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솔로몬입니다. 그러니까 이 전도서는 솔로몬에 의해서 기록되었음을 보여줍니다. 솔로몬은 성경 가운데 세 권을 기록했습니다. 잠언, 전도서, 아가서입니다.
  이 세 권 가운데 아가서가 제일 먼저 기록되었고, 그 다음에 잠언이 기록되었고, 전도서는 제일 나중에 기록되었다고 학자들이 밝히고 있습니다.
  아가서는 솔로몬이 젊었을 때 술람미라는 여자와 나누었던 뜨거운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한편 잠언은 솔로몬이 나이 지긋한 중년이 되었을 때 그의 원숙한 삶의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지혜로운 삶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서는 솔로몬이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 자기가 걸어온 인생 길의 발자취를 돌아보면서 잘못한 것들을 뉘우치는 심정으로 기록한 것이 전도서입니다.
  솔로몬은 자신을 무엇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까? '전도자'라고 했습니다. '도를 전하는 자,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이 쓴 잠1:1절에도 보면 '솔로몬의 잠언이라'고 자기의 이름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아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솔로몬의 아가라'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유독 전도서만큼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솔로몬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 솔로몬은 전도서에서 자기 이름을 나타내는 것을 꺼렸겠습니까? 그 이유를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큰 지혜를 받았습니다. 권력도 받았습니다. 남보다 엄청난 부귀와 영화를 누렸습니다.
  그런데 육신이 너무 편해지니까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솔로몬은 많은 처첩을 거느리고 육신의 쾌락에 젖어들기 시작했습니다. 그 여자들 가운데는 이방 여인들도 있었습니다. 급기야 솔로몬은 이방 여인들의 꾐에 빠져서 거룩한 땅 이스라엘에 이방의 헛된 우상을 들여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솔로몬을 가만히 내버려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솔로몬을 징계하셨습니다. 솔로몬의 노년에 사방에서 솔로몬을 대적하는 무리가 많이 일어났습니다. 나라에 환난이 생겼습니다. 평화가 깨져 버렸습니다. 그제야 솔로몬은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쳤습니다. 그렇게 하여 참회하는 심정으로 쓴 것이 바로 전도서입니다.
  여러분, 솔로몬이라는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샬롬'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에서 나온 이름입니다. '평화'라는 뜻입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범죄하고 자기가 타락해서 자신의 잘못으로 나라에 환난이 생기고 평화가 사라졌기 때문에, 전도서에서는 평화라는 뜻을 가진 '솔로몬'이라는 자기 이름을 떳떳하게 밝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자기를 낮추고 뉘우치는 심정으로 자신의 이름을 전혀 기록하지 않고 전도서에서는 언제나 자신을 전도자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할/


  ⑵전도서의 주제가 무엇인가?
  전1:2-3절에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솔로몬이 자기의 인생을 다 살고 난 뒤에 무엇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까? 모든 것이 다 헛되더라는 것입니다. 남다르게 엄청난 부귀와 영화를 누렸던 솔로몬을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운 결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솔로몬은 이렇게 말해야 했을 것 같습니다. '내 인생은 정말 멋있었도다. 아름다웠도다. 신이 났었다'
  그러나 솔로몬은 자기 인생이 얼마나 허무하게 느껴졌으면, 이 짧은 구절 속에서 헛되다는 말을 다섯 번이나 사용했겠습니까? 이 말씀은 젊은 사람들보다는 나이 드신 분들이 솔로몬의 말에 더 깊이 공감하실 것입니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여기 '해 아래서'는 이 땅에서를 말합니다. 솔로몬은 자기가 해 아래서, 이 땅에서 많은 수고를 했지만 결국 자기에게 아무 유익이 없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땅에서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헛된 인생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할/ 여러분, 이것이 어찌 솔로몬에게만 해당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아멘!/


  ⑶그렇다면 솔로몬이 전도서의 결론을 어떻게 밝히고 있습니까?
  전12:13절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할/
  사람의 본분이 무엇입니까? 아니 본분이란 무엇을 뜻합니까? 비행기는 하늘을 나는 것이 본분입니다. 배는 물 위를 떠다니는 것이 본분입니다. 자동차는 도로를 달리는 것이 본분입니다. 기차는 레일 위를 다니는 것이 본분입니다.
  이 본분은 기차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본분은 비행기가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본분은 만드신 분이 결정합니다. 그래서 설계합니다. 그 본분대로 살아야 됩니다. 사람의 본분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사람의 본분은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이 경외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사랑에는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친구간의 사랑을 우정이라고 말합니다. 남녀간의 사랑을 애정이라고 말합니다.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것을 효도라고 말합니다. 신하가 임금을 사랑하는 것을 충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피조물인 인생이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그 단어를 경외함으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에는 두려움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참으로 존경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할/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한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백세에 얻은 아들 이삭까지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모리아산상에서 번제로 드렸습니다. /할/
  그때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창22:12절에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할/
  ▶두 번째로 그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성경은 계명이라고도 말했고, 율례라고도 말했고, 법이라고도 말했는데 이것을 모두 하나로 묶으면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것이 인생의 본문입니다. /믿/아멘!/
  ▶본분을 지키는 자에게 어떤 복이 있습니까? 시112:1-4절에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자의 후대가 복이 있으리로다 부요와 재물이 그 집에 있음이여 그 의가 영원히 있으리로다 정직한 자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어질고 자비하고 의로운 자로다' /아멘!/

 

  ②본문에서 솔로몬은 네 종류의 사람을 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의 이 네 종류의 인생들이 다 불행합니다. 심령에 낙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할/ 오늘 말씀을 받다가 혹시 '나는 그 가운데 해당하는 사람이 아닌가?'를 한번 체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이래서 그 동안 마음에 평안히 없었구나! 내가 이래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행복하게 살지 못했구나'
  신앙생활은 듣고 깨달아 잘못된 것은 즉시 고치는 믿음의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고 주님 안에서 심령에 낙을 누리게 됩니다. /아멘!/ 우리 모두 주안에서   행복하게 사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이 세상에는 학대받고 사는 인생들도 있습니다(1-3).
  솔로몬이 본문에서 논하고 있는 인생은 학대받는 인생입니다. 학대를 받으며 사니까 무슨 심령에 낙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첫 번째 종류의 인생입니다.
  1절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학대를 보았도다.' 모든 학대를 보았다고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학대가 있기 마련입니다. 가진 사람은 못 가진 사람을 착취합니다. 배운 사람은 못 배운 사람을 무시합니다. 힘있는 사람은 힘없는 사람을 억누릅니다. 이처럼 어디에나 다 학대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학대받는 사람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솔로몬이 계속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호라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되 저희에게 위로자가 없도다' 학대받는 자가 눈물을 흘리는데, 문제는 학대받는 사람에게 위로해주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다시 한번 그것을 반복하면서 이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저희를 학대하는 자의 손에는 권세가 있으나 저희에게는 위로자가 없도다.'
  학대하는 사람의 손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학대받는 사람을 마음껏 학대합니다. 그러나 학대받는 자에게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두 눈에서 눈물만 흘릴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눈물을 닦아줄 위로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비참한 현실입니까?
  솔로몬은 위로 받지 못하는 사람, 학대받는 사람의 비참한 모습을 보면서 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살아 있는 산 자보다 죽은 지 오랜 죽은 자를 복되다 하였으며' 무슨 말씀입니까? 위로 받지 못하고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솔로몬은 3절에서 심지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둘보다도 출생하지 아니하여 해 아래서 행하는 악을 보지 못한 자가 더욱 낫다 하였노라' 그러니까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이 세상에서 자행되는 악은 아예 보지도 않았을 것이니까 그것이 더 낫지 않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할/
  여러분! 해 아래 인생이 있는 곳에는 어디에나 악이 있고, 학대가 있고, 그에 따른 인생의 무거운 짐이 다 있기 마련입니다. 여러분은 힘든 일을 당할 때, 어렵고 억울하고 슬픈 일을 당할 때 어디에서 위로를 찾으십니까? 해 아래 인생은 어느 누구도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욥을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욥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습니다. 세 친구가 찾아왔습니다. 위로해주기 위해서 온갖 말을 다 해주었지만 욥이 세 친구에게서 과연 위로를 받았습니까? 오히려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믿은 사람 때문에 마음에 상처를 받게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해 아래 인생은 어느 누구도 우리에게 참된 위로자가 될 수 없습니다. /믿/
  여러분, 인생이 힘들고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우리가 어디에서 위로를 찾을 수 있습니까? 시121:1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할/
  그렇습니다. 인생이 정말 힘들고 어려울 때 해 아래 인생들에게서 위로를 찾으려고 하지 마시고,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위에 계신 분, 천지를 지으신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만이 우리의 참된 위로자가 되시며, 진정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아멘!/
  구약의 선지자 엘리야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갈멜산 정상에서 850:1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해서 참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증거한 불의 사자입니다. 그 일로 인하여 아합의 부인 사악한 이세벨의 핍박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합왕은 그를 체포하기 위해 막강한 군대를 동원하여 그를 뒤쫓아옵니다.
  엘리야는 할 수 없이 멀리 하나님의 산 호렙 산으로 피신을 가야만 했습니다. 광야 길이기 때문에 길이 험했습니다. 너무나도 힘들고 어려워서 엘리야는 어느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간구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소서'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기도를 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엘리야를 죽도록 내버려두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셨습니다. 먹을 것을 주셨습니다. 마실 것도 주셨습니다. 말씀으로 위로해주셨습니다. 엘리야에게 새 힘을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모든 어려운 곤경을 극복해냈습니다. /아멘!/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에게 어려운 곤경이 임했습니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욥3장에 보면 욥이 자기의 생일까지 저주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탄식했습니다. '내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을 텐데. 차라리 어머니 뱃속에서 죽었더라면 더 나았을 텐데'
  얼마나 괴로웠으면 그렇게 탄식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욥을 그대로 내버려두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셨습니다. 말씀으로 그의 무지를 깨우쳐주셨습니다. 위로해주셨습니다. 모든 곤경을 다 돌이키시고 회복시켜주셨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갑절의 복을 주셨습니다. 욥이 자기 친구들로부터는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그에게 진정한 위로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믿/아멘!/
  우리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 어떠한 환난을 당하든지 간에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능히 위로하실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그 분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으시고 우리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도움과 위로를 받는 참 행복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②그의 마음속에 시기심, 다른 사람에 대한 경쟁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도 있습니다(4-6).
  이런 사람들도 시기심과 경쟁심 때문에 그의 심령에 무슨 낙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4절에 보면 이 사람들이 가진 특징이 두 가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또 본즉 사람이 모든 수고와' 이 사람은 첫째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입니다. 부지런한 사람입니다. 아주 열심히 일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또 두 번째 특징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교묘한 일로 인하여' 무슨 말씀인가? 한 마디로 이 사람은 재주가 좋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절대로 실패하는 일이 없습니다. 항상 성공합니다. /할/
  여기까지는 참 좋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람이 열심히 수고해서 성공한 동기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이웃에게 시기를 받으니' 이 표현에서 학자들은 우리말 성경은 번역이 조금 잘못되어 있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내가 열심히 일해서 성공한 결과로 이웃 사람들의 시기를 받는 것'으로 번역되었는데, 그것은 문맥에 적합하지 못한 번역입니다. 내가 열심히 일해서 성공했는데 다른 사람이 시기한다면 그것은 시기하는 사람의 잘못이지 내 잘못은 아닙니다.
  원문의 뜻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 열심히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아서 성공을 했는데, 그 동기가 이웃에 대한 시기심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동기가 불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바른 동기에서 열심히 일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이 두 번째 인생은 옳지 않은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이웃 사람에 대한 시기가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보다 잘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웃이 잘되는 꼴이 보기 싫습니다. 사돈이 땅을 사면 배 아파서 죽을 지경입니다. 그래서 이웃을 짓밟기 위해서 무리하게 경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동기가 옳지 못한 것입니다. /할/
  여러분, 본문에서 솔로몬은 그렇게 해서 성공한들 결과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이것도 헛되어' 이것도 헛되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사람들의 유형은 다 하나님을 떠난 해 아래 인간들의 모습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런 성공을 기뻐하시겠습니까? 인정해주시겠습니까? 아닙니다. 인정해 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니 헛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모든 성공을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할/ 여러분, 지나가는 바람을 손으로 잡아보십시오. 잡힙니까? 잡아도, 잡아도 손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나보다 나은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과 경쟁해서 이겼습니다. 그러면 그것으로 끝납니까? 나보다도 나은 사람이 또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면 또 그 사람과 경쟁해야 합니다.
  그러니 그 일이 끝이 없습니다. 잡히지 않는 바람을 잡으려고 하는 것처럼 경쟁이라는 것도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성공도 하나님 안에서의 성공이 진짜 성공입니다. /믿/할/
  ▶그런데 오늘 성경은 경쟁심이 없는 그런 인생을 '우매자'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5절에 '우매자는 손을 거두고 자기 살을 먹느니라'
  남과 다투기 싫다고, 경쟁하기 싫다고 손을 거두어 버리고 아예 일하지 않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그런 사람을 가리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우매자'라고 했습니다. 바보라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 살을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일을 하지도 않는데 누가 먹을 것을 줍니까? 자기 살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굶어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파멸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인생도 불쌍한 인생입니다. /할/
  솔로몬이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우리는 이 두 가지 양극단을 다 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 다 잘못입니다. 언제나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6절에 '한 손에만 가득하고 평온함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것보다 나으니라' 여기에 나오는 이 사람은 그래도 한 손에는 가득한 축복이 있습니다. 우매자처럼 손을 거두고 굶어죽는 사람은 아닙니다. 필요하면 열심히 일합니다. 그래서 한 손은 가득하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과 과도한 경쟁을 하지도 않습니다. 뼈빠지게 일하지도 않고, 스트레스 도 안 받고, 긴장도 쌓이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평온함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두 손에 가득하고 수고하며 바람을 잡으려는 사람보다 낫다'는 것입니다. /할/
  그렇습니다. 두 손에 가득하면서도 만족할 줄 모르고 잡히지도 않는 바람을 잡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죽도록 고생만 하는 사람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아멘!/
  여러분!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인 우리 인생의 또 다른 삶의 본분은 무엇입니까? 창조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전10:31절에서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할/
  그렇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웃 잘되는 꼴이 보기 싫어서, 또는 내가 이웃보다 더 나아지기 위해서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이 일을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까?' 또한 '내가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리라' 이것이 늘 우리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저 사람이 나보다 잘되면 안돼. 어떻게 하든지 저 사람을 이겨야 해' 그런 마음에서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늘 하나님의 영광만을 생각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
  그리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평강, 우리 하나님만이 주시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주지 못하는 평안히 비로소 우리 마음에 넘치게 될 것입니다. /아멘!/

 

  ③자기가 최고라고 착각하고, 자기 혼자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7-12).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어울릴 줄을 모릅니다. 너무 독립심이 강합니다. 자기가 제일인 줄 압니다. 뭐든지 자기 혼자만 해야 합니다. 자기 아니면 아무도 못하는 줄 착각합니다.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인간은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이웃과 더불어 사는 존재입니다. 그럼으로 다른 사람과도 어울릴 줄도 알고, 협력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자기 혼자만을 생각하는 독불장군에게 오늘 지혜자는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7절에 '내가 또 돌이켜 해 아래서 헛된 것을 보았도다.' 무슨 말씀인가? 이런 사람은 아무리 수고해도 다 헛되다는 것입니다.
  8절 이하에서 그 사람의 주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아들도 없고 형제도 없으니' 가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육신의 가족이 없다 할지라도 우리 마음의 문을 넓게 열면 이웃 사촌이라고 했습니다. 모든 사람을 가족처럼 여기면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는 '아무도 없이 홀로 있으나'라고 했습니다. 철저하게 혼자입니다. 아내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친구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동업해서 일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철저하게 혼자입니다.
  '수고하기를 마지 아니하며' 그저 혼자서만 수고를 계속합니다. 다른 사람을 불러서 같이 협력해서 일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그 이유가 나옵니다.
  '부를 눈에 족하게 여기지 아니하면서도' 벌어놓은 부를 자기 혼자 다 독차지해도 양이 차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동업해서 일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벌어놓은 부를 나누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것이 싫은 것입니다. 그것을 나누기 싫어서, 자기 혼자 다 독차지하려고, 모든 영광을 다 혼자 차지하려고 그렇게 독립심이 강해서 혼자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 마음에 양이 차겠습니까? 결국은 허전한 마음이 되어서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내가 누구를 위하여 수고하고 내 심령으로 낙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고' 뼈빠지게 고생해봤자 누구를 위한 수고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누구를 위해서 수고한 것입니까? nobody입니다. 아무도 유익을 얻는 사람이 없습니다. 죽어서 자기가 재산을 가지고 가는 것도 아닙니다. 또 그렇다고 재산을 물려줄 아들이나 형제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가 죽은 후 재산을 관리해 줄 친구라든지 동업자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 사람에게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의 수고를 통해서 유익을 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 결과가 8절 끝 부분에 나와 있습니다. '이것도 헛되어 무익한 노고로다.' /할/


  ㉡여기서 지혜자 솔로몬은 우리에게 연합의 귀중한 진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9절에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한 사람이 독자적으로 일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같이 일하면 더 좋은 결과가 온다는 것입니다. 
  협력할 때 얻게 되는 좋은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기 위해서 솔로몬은 한 가지 예를 들고 있습니다. 광야 길을 여행한다고 생각해보세요. 광야 길은 아스팔트처럼 좋은 길이 아닙니다. 울퉁불퉁하고, 군데군데 웅덩이가 파져 있습니다. 그런 험한 길을 더군다나 밤중에 여행하게 되면 얼마나 위험하겠습니까?
  10절에 '혹시 저희가 넘어지면 하나가 그 동무를 붙들어 일으키려니와' 밤중에 여행을 하다가 한 사람이 웅덩이에 빠졌습니다. 잘못해서 발을 삐었습니다. 그래도 함께 여행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이 그를 붙들어 일으켜서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킬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혼자 여행한다고 생각해보세요. '홀로 있어 넘어지고 붙들어 일으킬 자가 없는 자에게는 화가 있으리라'
  아주 결정적으로 화를 초래할 수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위험합니까? 밤이 되었습니다. 광야는 일교차가 심합니다. 낮에는 아주 덥고, 밤에는 아주 춥습니다. 그럴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11절에 '두 사람이 함께 누우면 따뜻하거니와 한 사람이면 어찌 따뜻하랴'
  혼자이면 아무리 두꺼운 옷을 껴입어도 그 추위를 혼자서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이라서 등을 대고, 또는 끌어안고 잔다면 체온이 서로 통하기 때문에 그만큼 더 따뜻합니다.
  또 광야에는 강도가 나타날 위험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비유 가운데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당했습니다. 있는 것을 다 빼앗기고 실컷 얻어맞고 거의 죽을 뻔했습니다. 이처럼 광야 길을 혼자 여행하는 것은 아주 위험합니다.
  그것이 12절입니다.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우리말에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이 서로서로 합치고 모으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일은 협력이 필요합니다. 신앙 공동체도 서로가 선한 협력자가 될 때 서로가 유익하고 건전한 생활을 영유할 수 있습니다. /아멘!/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과 전쟁할 때 모세는 산꼭대기에서 기도하고 아론과 훌은 그 기도의 손이 내려오지 않게 붙들어 올렸을 때 그 전쟁을 승리를 거두게 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할/ 솔로몬은 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⑴한 사람보다 두 사람일 때가 훨씬 좋습니다.
  소 한 마리는 6톤의 짐을 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소 두 마리면 각각 6톤씩 12톤의 짐을 끌게 됩니다. 그러나 소 두 마리를 합쳐서 짐을 끌게 하면 24톤의 짐을 끌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각각 끄는 것보다 연합했을 때 갑절의 효과를 얻게 됩니다. /할/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을 지으실 때에 한사람으로 짓지 아니하시고 두 사람으로 지으셨습니다. 처음에는 아담 혼자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혼자 지내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비뼈를 취하여 하와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이끌어 주셔서 짝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때서야 우리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너무나 좋으셔서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눅 10장에 70명의 전도 대를 보내실 때에 둘씩 짝을 지어 파송 하셨습니다. 혼자보다 둘이 낫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고 하시며 예수 이름으로 힘을 합할 것을 명하고 계셨습니다. /아멘!/
  ⑵두 사람은 서로 도울 수가 있습니다. 여기서 맨토링 운동이 일어납니다.
  어떤 소경이 냇물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앞이 안보여 징검다리를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마침 한 사람이 왔는데 그 사람도 건너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왜 건너지 않습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지금 다리를 절어서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구하려고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이때 소경이 말하기를 '그러면 잘 됐다 나는 앞을 못 보아도 다리는 성하니까 당신은 다리는 성치 못해도 앞을 보니까 내가 당신을 업어 줄 테니 당신은 나를 잘 인도하시오' 그래서 다리를 잘 건너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멘!/
  도움을 주고받는 일이 '맨토링' 운동입니다. 성경에서도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람들은 모두가 좋은 멘토가 있었습니다. 자기를 이끌어 주는 사람, 자기를 도와주는 사람, 후견인, 후원자, 선생님, 이런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릅니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좋은 멘토는 하나님이십니다. 항상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도와 주셨습니다. 아브라함도 가정이 깨질 위기를 만나기도 합니다. 흉년들어 먹을 것이 없는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을 도와주십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은 이삭입니다. 이삭의 가장 좋은 멘토는 아버지인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이삭이 쌍둥이 아들을 낳습니다. 특별히 야곱은 아버지의 축복을 자기가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철저하게 자기 아버지를 자기 인생을 멘토로 삼습니다. 즉, 아버지의 축복을 내가 받아야겠다며 아버지의 축복을 강하게 사모하게 됩니다.
  결국 아버지의 축복을 야곱이 받습니다. 여러분도 스스로 멘토를 삼으셔야 합니다. '나는 이분을 나의 멘토로 삼고 이분의 축복을 받으리라' 이런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이분의 성공을 내가 가지리라'는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멘토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아멘!/
  ▶일본사람이 쓴 '가난해도 부자의 줄에 서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유대인들이 즐겨 읽고 자녀교육, 사회교육, 경제교육, 신앙교육에 본이 되는 탈무드에서 뽑은 내용입니다.
  유태인들이 자녀교육을 시킬 때, 지금 돈이 없고, 지금 가진 것이 없어도, 없는 자 편에 서지말고, 부자 편에 서라고 가르칩니다. 부자의 줄 맨 끝에 선다고 할지라도 그 줄에 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젠가는 부자의 반열에 설 수 있다는 말입니다.
  내가 가난하다고 가난한 줄에 서게 되면 가난을 면치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말은 부자를 멘토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성공한 사람을 너의 멘토로 삼고 너도 성공의 반열에 서라는 말입니다.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성공에 관한 멘토를 자녀들에게 교육을 시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한 마리의 물고기를 잡아주지 말고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치는 교육'입니다. /할/
  ⑶협력하는 곳에는 시너지 효과가 나옵니다.
  시너지 효과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까지 모든 분야에서 사용되어지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Syn+Eregy라는 단어가 합성된 말입니다. Syn은 '함께'라는 뜻입니다. 에너지는 힘입니다. 그래서 Synergy라는 말은 '함께 힘을 모은다'는 뜻입니다.
  인간과 인간이 합해지면 어떤 현상이 나타납니까? 1+1=2일까요? 아닙니다. 창2:7절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그 안에 영을 불어 넣으셨습니다. 그래서 한사람과 한사람이 힘을 합하면 둘이 아니라 세 명이 되기도 하고, 네 명이 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열 명 또는 백 명, 천명의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Synergy입니다. /할/
  협력할 때 기적을 이루는 것입니다. 사람이 협력할 때 극대화된다는 것입니다. 상승작용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는 '시너지 효과'라고 합니다. 가정에서도 부부들이 협력할 때 행복한 것입니다.
  기러기는 날아갈 때 한 줄 혹은 V자 형으로 무리를 지어 날아갑니다. 그것은 기러기가 혼자 날아갈 때보다 무리를 지어 V자 형태를 이루어 날아가면 서로 바람을 일으켜 날개를 올려주는 역할을 하여 71%의 힘이 덜 든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너지는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삼겹줄을 이루기 위해서는 공동의 목적을 충분히 공감해야 합니다. 동상이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서로 목적이 다르면 진정한 협력자가 될 수 없습니다.
  공동의 목적을 알고 협력해야 합니다. 자기주장이나 소견만 고집하면 파괴자요 훼방꾼 밖에 안 됩니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내가 함께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시너지 효과는 자기 역할에 성실할 때 일어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내게 맡겨 주신 명령에 충실해야 합니다. 지도자는 자기의 사명에 충실해야 합니다. 그 때 협력이 일어납니다. 월권을 해서도 안됩니다.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오직 충성입니다. /아멘!/

 

  ④세상 권력에 집착하는 사람들에게 주는 교훈도 있습니다(13-16).
  '가난하여도 지혜로운 소년은 늙고 둔하여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왕보다 나으니'
  여기에 두 사람이 있습니다. 서로 비교해봅니다. 우선 왼편에 있는 사람은 가난한 사람입니다. 반면에 오른편에 있는 사람은 왕입니다. 신분이 서로 다릅니다. 아울러 왼편에 있는 사람은 소년입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어립니다. 오른편에 있는 왕은 늙었습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습니다. 이 두 가지 요소만 살펴보면 누가 더 낫습니까? 오른편에 있는 사람이 월등히 낫습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을 결정적으로 바꿔놓는 하나의 요소가 있습니다. 지혜입니다. 왼편에 있는 사람은 지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른편에 있는 사람은 둔하다고 했습니다. 지혜가 없습니다.
  그 예를 보여주는 것이 무엇입니까? 간함을 받을 줄 모른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고집만 세어집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자기 나름대로의 철학이 고정되어 있어서, 분명히 자기가 틀렸는데도 옳은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나이 드신 분들은 그 점을 조심하셔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두 사람의 위치를 바꾸어 버렸습니다.
  왼편에 있는 사람이 더 낫다는 것입니다. 14절에 '저는 그 나라에서 나면서 가난한 자로서 옥에서 나와서 왕이 되었음이니라' 여기서 '저는'은 왼편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가난하게 태어났습니다. 심지어는 옥에서 나왔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감옥에까지 갔었습니다. 어려운 역경에 있었지만 그 모든 역경을 지혜로 극복하고 나중에 왕이 되었습니다. 권력을 차지했습니다. 그러니 왼편에 있는 사람이 더 나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15절에 '내가 본즉 해 아래서 다니는 인생들이 왕의 버금으로 대신하여 일어난 소년과 함께 있으매'
  소년이 왕이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소년이고, 가난하지만 지혜로워서 좋았는데 왕이 되니까 지혜로웠던 소년도 또 둔해집니다. 간함을 받을 줄 모르는 사람으로 변해갑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소년도 그 이전의 왕과 똑같은 모습이 되어갔습니다. 그러면서 백성들의 마음도 또 다른 새롭게 일어난 또 다른 소년에게 쏠리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권력이라는 것도 일시적이고 덧없지만, 인기와 명성도 다 그렇습니다. 영원하지 못합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됩니까? 또 다른 소년이 왕이 됩니다. 그것으로 끝납니까? 권력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그 결과가 뻔하지 않습니까? 16절에 '저희 치리를 받는 백성들이 무수하였을지라도 후에 오는 자들은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할/
  백성들의 마음은 도 다른 제4의, 제5의 소년에게로 자꾸 가게 됩니다. 그러니 이것도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정권이 그 정권이기 때문입니다. /할/
 
  ⑤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⑴세상 사람들에게는 위로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일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의 무거운 짐을 대신 져 주시고, 우리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십니다. 마11: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할/
  ⑵세상 사람들은 시기심에 사로잡혀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리려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의 우선 순위를 바로 알고 살아가야 합니다. 마6:33절에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할/
  ⑶세상 사람들은 물질 제일주의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 제일주의로 살아갑니다. 물질이 소중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이웃이 더 소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아멘!/
  ⑷세상 사람들은 덧없는 일시적인 것에 집착하면서 살아갑니다. 권력에 집착하고, 인기에 집착하고, 명예에 집착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변함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망으로 삼고, 그분을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한번 전도서의 결론을 읽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전12:13절에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할/ (2012년 8월 26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송수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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