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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두려워 말라! (사 43:1-3)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느끼는 감정이 두려움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두려움을 연구한 '휴 미실딘' 박사는 아기가 어머니 모태에서 나오며 처음으로 느끼는 두려움을 세 가지라고 설명합니다. 하나는 '떨어지는 두려움'입니다. 모태에서 세상으로 나오며 밀려서 떨어지는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큰 소리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모태는 한없이 조용했는데 세상에 나오니 각종 시끄러운 소리들이 들려서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버려지는 두려움'입니다. 모태로부터 이탈되면서 의지할 것이 없어지게 되자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은 무의식 속에 깊이 각인되어 두고두고 부정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마치 뜨거운 주전자에 데어 본 아이가 주전자 비슷하게 생긴 것만 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쉽게 두려움을 느끼고 그 두려움에 떱니다. 그래서 인간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숙명처럼 평생을 두려움과 씨름하며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두려움이 있습니다. 미국의 경제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경험했던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국민들 마음속에 두려움이 가득한 것을 보면서 어떻게 하면 국민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을지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국민에게 한 연설 중에 다음과 같은 경구가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오직 한 가지는 바로 그 두려움 자체입니다.' 이것은 당시 경기침체에 빠졌던 미국인들을 위로하기 위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거꾸로 생각해보면 두려움에 대한 두려움이 그 이면에 계속 남아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두려움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공포 속으로 몰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할/
▶어떤 분이 두려움을 야기하는 여섯 가지 요인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⑴고통의 두려움입니다. 어딘가에 부딪혀 아픈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으로 상처를 받아 나타나는 정신적 고통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⑵상실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까이 가려는데 거절당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⑶죽음의 두려움입니다. 사랑했던 사람이 내 곁에서 사라집니다.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죽음 앞에 서게 될 것이라는 현실감각이 가져다주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⑷연약함의 두려움입니다. 열심히 해도 안 됩니다. 노력해도 안 됩니다. 무언가 목표를 가질 때마다 넘어지고 실수합니다. 이 때 나는 안 되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연약함에 대해서 두려워합니다. ⑸외로움의 두려움입니다. 아무리 가까이에 있는 사람이라도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는 없습니다. 인생이란 혼자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 앞에 두려워 떨게 됩니다. ⑹혼돈의 두려움입니다. 이 세상에는 무질서가 있습니다. 그래서 혼돈 속에 뒤엉켜져 있다는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들을 해보셨거나 주위에서 보신 적은 없습니까? 그렇게 건강했는데 갑자기 질병에 걸립니다. 병원에 가서 진단해보니까 암에 걸렸다고 말합니다. 갑자기 인생의 모든 것이 막히는 것을 경험합니다. 옆에서 누군가가 기도해주고 돌보아주지만, 결국 고통 받는 사람은 바로 나 자신뿐인 것을 느끼면서 우리는 깊은 외로움의 두려움 속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어떤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런 두려움은 우리 모두에게 시시각각으로 다가옵니다. 그러고 보면 살아있다는 것은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이란 아주 인간적인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통제할 수 없는 것, 예측할 수 없는 것이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심리학자인 '아이드리언 리치'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는 모두 두려워한다. 그러나 만일 두려움이 없다면, 우리는 지나치게 흥분하게 되고, 오만불손하며, 자기 파괴적이게 된다.' /할/ 사실 두려움이란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내용 중의 하나입니다. 특히 인간이 하나님 앞에 두려움을 갖게 될 때 이것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기폭제 역할을 합니다. 그렇게 잘났던 나, 뽐내고 싶었던 나, 자신만만했던 내가 어느 날 두려움에 의해 무너지게 됩니다. 그때 우리는 두려움을 넘어서서 내게 다가오시는 영원한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할/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먼저 두려움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두려움이란 무서워하는 감정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무서워하는 감정을 말합니다. 이 두려움이 언제 생겼습니까? 성경에 처음으로 두려움이라는 말이 나오는 곳이 창3:10절입니다.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고 하나님을 피해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두려워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과 분리되면서 두려움을 느끼게 됐습니다. 원래 타락하기 전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았습니다. 이 때 두려움을 느껴본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하나님을 피해 숨게 되면서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할/ ▶어린 꼬마가 엄마와 함께 장을 보러 나섰습니다. 엄마 손을 잡고 가면서 지나가는 자동차를 봅니다. 지나가는 강아지도 봅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시끄럽게 다투는 모습도 봅니다. 꼬마는 그 어느 것도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엄마가 기다리라며 혼자 두고 잠시 어딘가 다니러 갔습니다. 갑자기 두려움이 밀려옵니다. 다가오는 강아지가 무섭습니다. 경적을 울리며 다가오는 자동차도 두렵습니다. 인상 쓰며 소리 지르는 아저씨도 무섭습니다. 그래서 두려워 울어버립니다. '엄마!' 그렇습니다. 두려움의 원인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확신하면 두려움이 찾아 와도 쉽게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떨어진 채 나 혼자라 생각하면 두려움이 찾아올 때 그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래서 두려움이란 하나님 떠난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무서워하는 감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에드 영'의 '지금 나는 두렵다'라는 책을 보면 사람에 따라 시대에 따라 느끼는 두려움이 다양하다고 설명해 놓았습니다. 우선 오늘 이 시대에 사람들이 느끼는 두려움을 조사해 보니까 무려 645가지나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람마다 두려움의 양상이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결코 두렵지 않은 일인데도 자기만 특별하게 느끼는 두려움도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은 특정 동물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거미공포증, 바퀴벌레 공포증, 개 공포증과 같은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장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고소 공포증, 폐쇄 공포증, 치과 공포증과 같은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장모 공포증, 상사 공포증, 심지어 아내 공포증과 같은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 떠나 사는 사람들은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에서조차 두려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종류는 점점 더 많아집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살다 보니 이 세상은 두려움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두려움이 가지고 있는 영향력입니다. 두려움은 감정적으로 무섭다고 느끼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일단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되면 우리 삶이 황폐화되기 시작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평안을 잃어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이란 '실재처럼 보이는 거짓 증거'일 뿐입니다. 대부분 이스라엘 병사들은 골리앗 앞에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골리앗이 자기들을 죽일 것이라는 거짓 증거에 속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골리앗이 결코 하나님의 종인 자기를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골리앗이 자기를 죽이도록 내버려두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아멘!/ 마10:29-30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하찮은 참새도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보호하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너희들을 하나님께서 내버려두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할/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장 많은 당부하시고 명령하신 말씀이 바로 '두려워하지 말라, 놀라지 말라, 무서워 말라'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분은 이 말씀이 성경에 무려 365번이나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하루에 한 번씩 그 말씀들을 묵상하며 두려움을 이기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두려움을 느끼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두려움을 느낄 때 그 두려움을 극복하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가나안의 정복자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영도해야 할 막중한 사명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을 정복해야만 했습니다. 감당할 수 없는 큰 두려움이 밀려왔을 것입니다. 자칫 그 두려움에 사로잡혀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될 상황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실을 아시고 자상하게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수1:9절에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하나님 백성에게 찾아오셔서 늘 같은 약속을 하십니다.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우상에 짝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 신음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 고난이 자기들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했기에 하늘로부터 내려온 징계라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 기간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신 것은 아닌가?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에게 관심이 없으신 것이 아닌가?' 그들은 진정으로 슬퍼하고 탄식하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찾아오셔서 말씀하신 말씀이 본문의 1절입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할/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두려움으로 가득 찬 것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렇게 강한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정신적인 공황, 영적인 두려움에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시려고 찾아오십니다. 두려움이 속에 침전되면 우울증이 됩니다. 그렇다고 두려움을 다른 사람에게 토해내면 분노가 됩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하나님 앞에 그대로 아뢰면 신앙의 축복으로 승화됩니다. /할/ ▶두려움을 이기는 비결이 성경에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①하나님께서 우리를 지명하여 불러주신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1). ㉠야곱으로 있을 때 우리를 불렀습니다. 야곱은 자기를 위하여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외삼촌을 속였던 사기꾼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약탈자요, 속이는 자요, 사기꾼이요, 인본주의의 표본'이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야곱으로 있을 때 주님이 불러 주셨습니다. /할/ ㉡야곱을 이스라엘로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야곱으로 있으면 안됩니다. 이스라엘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왜? 야곱으로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야곱의 평생에 잊을 수 없는 사건 하나가 있습니다.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한 사건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기도입니다. 몸부림을 친 기도가 있었습니다. 환도 뼈가 이골 되는 기도였습니다. 드디어 천사가 항복을 하면서 주신 말씀이 창32:28절입니다.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이긴 자'라는 뜻으로 '승리자'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길 수 있습니까? 기도로 이길 수 있습니다. /할/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여기 문장을 보면 현재 진행형입니다. 지금 바로 이 시간에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너는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⑴그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우리를 조성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창1:1절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창조'란 '히'어로 '바라'인데 '무에서 유를 만들었다는 뜻으로 조성하셨다'는 단어와 같습니다. 성경학자들 가운데는 '창조'는 본래적인 창조요, '조성'은 재창조를 뜻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삶을 늘 새롭게 재창조하시는 분이십니다. /믿/ 여기 '조성'하셨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작품이라는 뜻입니다. 키가 크든지 작든지, 눈이 부리부리하든지 눈이 작든지 모두가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작품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나는 하나님이 가장 아끼시는 존재입니다. 얼마나 대견스럽고 자랑스럽습니까? 하나님의 소유됨에 긍지를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⑵그 하나님은 우리의 구속자이십니다.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구속했다는 말은 속량했다는 말입니다. 속량이란 '대신 값을 치렀다.'는 말입니다. 또 구속이란 말은 '내가 네 대신 죽었고'라는 말입니다. 오늘 이 말씀이 깨달아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41:14절에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니라'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노예에서 구속해 내심과 같이 우리 성도들은 마귀와 죄의 종이 된 자리에서 구속해 주신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멘!/ ⑶그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하나 지명하여 불러주셨습니다. 호렙산에서 '모세야, 모세야'하고 그 이름을 지명하여 부르시듯이, 여호와의 성전에서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고 부르시듯이,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하고 부르듯이, 우리 하나님은 아주 똑똑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지명하여 불러 주셨습니다.
여러분, 우연히 내가 예수 믿게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수 십 억의 사람 가운데 나를 지명하여 불렀습니다. 정확하게 나를 지명하고 불렀습니다. 영원 전에 선택하시고, 때가 되어 지명해서 불러내시고 그리고는 '너는 내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런데 한번 부르신 것이 아니라 계속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낙심될 때마다, 우리가 넘어질 때마다, 우리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 때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의 이름을 계속 부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이 주님의 음성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 신앙이 내려갈 때, 이 음성을 들어야 하고, 세상 잠에 취할 때 이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죄악 속에 파묻힐 때도 주님의 음성을 듣고 회개하고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믿/ ㈀왜 지명하여 불러주셨습니까? 당신의 도구로 삼고자 부르신 것입니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자가 지명하여 불러주어도 대단합니다. 총리로, 장관으로, 비서실장으로 불러주어도 세상사람들이 다 부러워 합니다. 그런데 나를 창조하시고 조성하신 창조주께서 우리를 불러주셨다는 사건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아멘!/ ㈁하나님이 사람을 택하심에는 두 가지 선택이 있습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선택'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한 선택'입니다. '일반적인 선택'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택한 것을 말합니다. '특별한 선택'은 구원받은 성도들 중에서 특별한 직분과 사명을 맡기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특별한 선택을 '선택 중의 선택'이라고 말합니다. '집사로, 권사로 남녀선교회 회장으로 총무로 선택받았다'는 것은 특별한 선택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할/ ㉣'너는 내 것이라'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찾을 수 있습니까? ⑴'나의 뿌리, 즉 나는 누구인가?'의 해답입니다. 그러니까 '나의 근원, 나의 뿌리, 나의 출처, 나의 근본'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너를 창조했다'는 그 말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뿌리를 알고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인생이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 때문에 살며, 어디로 가는가?'를 아는 것이 귀한 일입니다. 어른들은 흔히 '너는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어른들은 그 말을 재미로 하지만 아이들은 심각하게 받아들입니다. 해외 입양 자들을 보면 성장하면 반드시 자신의 뿌리에 관심 갖게 됩니다. 그래서 자신의 뿌리를 찾아 나섭니다. 찾아보니 '나는 뼈대있는 송씨 집안의 자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것이 그로 하여금 자신감을 주게 되고 힘을 주게 됩니다. 그것이 뿌리의 역할입니다. /할/ '너는 내 것이라!' 그렇습니다. 우리의 몸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머리털 하나도 내 것은 없습니다.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나의 몸을 내 맘대로 하면 죄가 됩니다. 나의 몸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께 바쳐 놓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아멘!/ ▶자기 것은 누구나 사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내 것은 무엇이든 애착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젖먹이는 어머니가 그 자식을 잊을지언정 나는 잊어버리지 않겠다.'(사49:15)고 하셨고, 또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기겠다.'고 하셨고, 또 '내가 너를 내 앞에 둔 기념 책에 기록하겠다.'고 하셨습니다(말3:16). ▶내 것은 잘 간수하고 잘 보호하십니다. '잃어버리지 않게 상하지 않게 지켜 보호하시기를 눈동자같이' 하십니다(시17:8). 요10장에 예수님 '내 아버지는 만 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저희를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할/ ⑵'너는 내 것이라!' 여기서 우리는 신분의 존귀함을 알 수 있습니다. 시16:3절에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 교회는 하나님께서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의 집단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받는 축복이 존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복의 근원이 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존귀하게 여기시는 성도를 위하여 축복 권을 행사하십니다. 히6:14절에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할/ 그렇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 이제 하나님의 것이 우리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엄청난 부자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하천풍언 목사님이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미국에 갔는데 그 교회 담임 목사님과 함께 세계적으로 유명한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광하게 되었습니다. 안내를 맡은 그 목사님께서 나이아가라 폭포에 대해서 굉장히 자랑을 털어놓았습니다. 다 듣고 난 하천풍언 목사님이 '이 나이아가라 폭포가 누구 것인지 아느냐?'고 묻자 '미국 것'이라고 하니 '이 나이아가라 폭포는 나의 아버지의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어째서 당신의 아버지의 것이냐?'고 반문을 하자 하천풍언은 '이것이 어찌 미국의 것이냐 하나님의 것이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니까 이 나이아가라 폭포는 나의 아버지의 것이다.'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그 날 저녁 집회시간에 강사 님을 소개하는데 '나이아가라 폭포 주인의 아들'이라고 소개를 하자, 성도들이 그 이유를 묻었습니다. 그래서 하천풍언 목사님은 '낮에 목사님께 말했던 것과 꼭 같이 성도들에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때서야 성도들은 '아멘'하면서 각자가 '나도 나이아가라 폭포 주인의 아들이다.'라는 긍지를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는 다 같이 나이아가라 폭포뿐만이 아니라 온 지구촌의 주인의 아들딸입니다. 왜냐하면 우주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시며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지명하여 불러 주시었고 '너는 내 것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할/ ⑶'너는 내 것이라!' 이 말씀을 붙들고 큰 목표를 세우고 매달려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크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위대한 하나님이십니다. /믿/ 위대한 꿈을 가지십시오, 큰 꿈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위대한 목표, 큰 목표를 세우십시오, 일단 큰 목표를 세워야 큰 성공을 이룹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큰손을 크게 쓰시고, 작은 손을 작게 쓰십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크게 생각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여러분 크게 생각하고 말도 크게 하십시오, 말을 크게 하라고 해서 소리를 지르라는 것이 아니라 큰 말을 골라서 하라는 것입니다. 말 자체를 바꾸어야 합니다. 언어를 바꾸고 생각을 바꾸고 표현이 바꾸면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사55:8-9절에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우리는 전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를 잘 압니다. 그는 땅콩 농장의 주인이었는데 주지사가 되고,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비결은 오직 믿음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는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외국에 나가기 전에는 꼭 자기가 섬기던 교회 학교에 나와서 5학년 학생들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담임 목사님이 이제 대통령이 되어서 못 올 줄 알고 그 반에 다른 교사를 넣었는데 대통령이 왔습니다. '각하 어떻게 왔습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대통령은 세상의 직업이고, 교회학교 선생님은 하나님의 일인데 해야지요' 이런 훌륭한 믿음이 그를 대통령으로 만든 것입니다. 새벽기도도 빠지지 않았고, 대통령 중에서 자신의 딸을 흑인의 빈민학교에 처음으로 넣었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지미 카터가 새벽기도 할 때, '지미가 누구냐?'하지말고, '누가 지미를 모르느냐?'로 바꾸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대통령 출마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꿈을 가지십시오, 꿈이 바뀌면 인생이 바뀝니다. 목표가 바뀌면 삶이 바뀝니다. /할/ ㉤우리의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너는 두려워 말라'고 하셨습니다. 두려움은 신앙의 적입니다. 올 2013년도가 다 가도록 모든 두려움을 주님께 다 맡기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②두려움을 이기는 비결이 또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영원한 보호 때문입니다(2). 성도라고 해서 물 가운데로 지나지 아니하는 것 아닙니다. 불 가운데로도 지나갑니다. 이것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피해 가는 것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 해서 땅 위의 어려움에서 예외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업이 실패해서 망하기도 하고, 병에 걸려 수술을 받기도 합니다. 환난을 당하고 시험을 통과합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나라가 망하는 시련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물이 침몰케 못하고 불이 사르게 못합니다. 영원히 망하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 어떤 역경과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은 함께 하셔서 지켜주시기 때문입니다. /할/ ⑴'물 가운데로 지날 때도 함께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어떤 극한 위험이나 재앙을 만났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능히 건지신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물 가운데로 지난다고 하는 것은 출애굽 사건을 연상시킵니다. 홍해 바다에서 사람들이 맥이 풀려서 '우리는 죽었다'라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 물을 가르시고 자기 백성을 건지심과 같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보존하시고 책임지신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와 하나님의 열심히 이 구절에서 발견되어집니다. /아멘!/ ⑵강을 건널 때도 함께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십 년 광야생활을 마감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애물 하나가 남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요단강이었습니다. 그때는 모맥(밀과 보리)을 거두는 시기이므로 요단 강물은 넘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온 땅의 주 여호와의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바닥이 요단 물을 밟고 멈추면 요단 물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끊어지고 쌓여 서리라'(수3:13)고 했습니다. 우리 앞에 어떠한 장애물이 있어도 언약의 말씀을 앞세우고 나가면 하나님이 정복하게 하십니다. 앞으로 정복할 여리고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하신 말씀을 따라 여리고 성을 돌고 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외칠 때에 여리고 성은 무너졌습니다. /할/ ⑶불 가운데로 행할 때도 함께 하실 것입니다. 당신에게 불같은 시험이 와도 언약의 말씀을 붙들고 나가면 하나님이 지켜 주십니다. '사드락 메삭 아베느고'는 친구 다니엘과 같이 언약의 말씀을 지키기로 뜻을 정했습니다(단1:8/3:16-18). 그래서 그들은 풀무 불 속으로도 담대하게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천사를 보내어서 지켜 주었습니다.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은 신들의 아들과 같도다'(단3:25)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결단코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시18:8) 절대로 해 받음이 없게 하십니다. 주님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20)고 하셨습니다. /아멘!/
③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궁극적으로 구원의 승리를 주십니다(3). 2절에 이어지는 출애굽 사건과 관련되는 구절입니다. '애굽, 구스, 스바'는 똑같이 홍해가 갈라질 때 죽은 애굽 군대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구스와 스바가 함께 나옵니다. 구스와 스바의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창10장에 나오는데 같은 뿌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구스'는 '에티오피아'를 말하는데 그 당시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혔던 애굽 군대 속에는 구스도 있었고, 스바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구스와 스바는 영적인 악한 세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좀 괴롭게는 할지라도.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께서 힘써 지켜 보존하시고 끝까지 그를 천국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⑴이방은 당신의 속량물입니다. 하나님이 성민 곁에 이방을 두신 것은 복음의 도구로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민이 언약에 신실치 못할 때는 채찍으로 사용하지만 성민이 언약의 말씀 위에 서면 선교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하나님이 애굽을 제국으로 만드신 것은 애굽의 측량술과 미라를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의 불변성을 가르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바벨론을 창대케 하신 것은 바벨론의 법전을 통해서 성민에게 주신 율법을 깨닫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헬라를 복 주신 것은 헬라의 언어와 철학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이 로마를 강대하게 만드신 것은 로마의 군대력 같이 십자가의 군병이 되어서 세계를 정복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거룩한 자요 구원자'이십니다. /믿/ 이제 우리는 나의 생명의 구주 시오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달려가야 합니다. ⑵왜 예수를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믿음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히12: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여기서 '믿음의 주'라는 말은 '믿음의 근본이요, 믿음의 대상이며, 믿음의 출발점이 된다'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또 '온전케 하시는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온전'이란 말은 '완벽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완벽하신 분이십니다. 또 '완성'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십자가 구속 사역을 담당하심으로써 구원의 길을 완성해주셨습니다. 또 '성숙케 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우리는 믿음이 자라야 됩니다. 믿음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고 예수 안에서 살 때 성숙되어집니다. 올 우리교회 표어가 '복음의 진보를 이루는 해'입니다. 믿음 성숙, 인격 성숙, 예수 충만, 교회 부흥의 놀라운 축복의 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시다. /아멘!/
④이제 우리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사는 성도가 되자(롬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사는 세상은 먹기 위해 삽니다. 먹기 위해 돈을 법니다. 보다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인류는 이 지구 위에 문명을 이루어 왔습니다. 우리는 먹기 위해 부지런히 일했습니다. 국력은 높아지고 소유가 넉넉해졌습니다. 그런데 반비례하여 인간성은 상실되고 동물적 삶이 되어 버린 지가 벌써 오래되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인가?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는 곳으로 '믿음의 공동체'를 의미합니다. 흔히들 나는 좋은 교회에 다닌다고 말합니다. 사실 좋은 교회에 우선 기쁨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날마다 감격스럽습니다. 좋은 교회에 다니면 믿음이 자구 성장되고, 성장되다보면 하나님 앞에 쓰임 받게도 됩니다. 그렇다면 좋은 교회가 어떤 교회냐는 것입니다. 대형교회만 좋은 교회고, 작은 교회는 나쁜 교회냐?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예수를 생명의 구주로 고백하고 믿는 무리들의 회중입니다. 이 무리들에게 말씀의 선포가 바로 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나타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그렇습니다. 교회는 먹고 마시는 일로 시비하는 곳이 아닙니다.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쳐 나야' 합니다. 이런 회중이 모인 곳에는 문제가 안 생깁니다. /할/ ▶권위 있는 기독교 잡지사에서 목사님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제일 불편하고 무서운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었는데 재미있는 대답이 나왔습니다. 1위는 '40일 금식한 사람'이고, 2위는 '철야기도 잘 하는 사람'이고, 3위가 '신학 공부한 장로님'이라고 대답이 나왔다고 합니다. 사실 '금식, 철야, 신학'은 개인적인 영적 성장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을 받는 도구가 되는 귀중한 길입니다. 그런데 왜 문제가 되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문제를 자기의 신앙성장에 쓰는 것이 아니라 남을 정죄하는데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40일 금식하고 내려와서 하는 말이 '우리 목사님은 은혜가 없어!, 우리 장로님들 더 기도해야 돼!, 우리 남전도회가 어떻고, 여전도회가 어떻고-' 눈이 세모꼴이 되어서 누구를 칠까만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없기 때문입니다. 맞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그런 문제로 다투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자냐? 가난하냐? 병들었느냐? 건강 하느냐?'가 문제가 아니고 '의와 평강과 희락'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믿/ ⑴의는 무엇인가? 이 의는 우리가 잘 나고 많이 배워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빌3:9절에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 로서 난 의라' 이 의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너 의롭다'고 인정하신 의입니다. 선과 의는 다릅니다. 가령 '당신 한 시간 일하면 만원 주겠소!' 만원을 주었으면 의입니다. 약속을 했고 주었으니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주지 않으면 불의입니다. 오천 원을 주어도 불의입니다. 그러나 이런 저런 약속도 없이 그 사람에게 10만원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선입니다. 은혜로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의나 선은 변합니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의의 표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을 때, 하나님은 표준 대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게 인정해 주시는 것입니다. /할/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허물과 죄로 영원히 죽어 마땅한 죄인들을 부르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의롭다 하셨으니 의롭다함을 받은 성도들은 의롭게 살아야 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나라는 온갖 불의와 거짓이 난무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정말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천국의 즐거움을 누리기 위하여서는 세상 적인 즐거움을 버리고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생활이 때때로 고난이 따라오지만 이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믿음으로 인내할 수 있습니다. ⑵평강은 평안을 말합니다. 예수 믿고 불안하면 아직 신앙이 어리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예수를 믿으면 어떤 환경이나 조건도 불안이 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요14: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 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할/ 이 평안을 가지십시오! 이 평안을 가진 자는 이웃과도 화목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세상은 평화가 깨어질 때 싸움이 일어납니다. 주님은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셨습니다. 그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십시오, 그분이 우리에게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평강이 넘치는 나라입니다. 아주 상식적으로 생각하여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은 마음에 평화가 넘칠 때는 양심에 가책이 없고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바로 설 때입니다. 무엇인가 거리낌이 있고 남들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을 하고 정직하지 못할 때에는 마음에 평화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에 잃어버린 평화를 회복하기 위하여서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감사함으로 기도할 때 새로운 믿음의 평안이 임하게 됩니다(빌4:6-7). ▶영국의 여왕이 계시는 런던의 버킹검 궁전에 가보면 여왕이 궁전에 있을 때는 깃발을 올려놓는다고 합니다. '궁전에 깃발이 휘날리고 있으면 여왕이 있구나! 알고 깃발이 없으면 여왕이 계시지 않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만 왕의 왕이시오 평화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고 계신다면 언제나 우리의 삶에 평화의 깃발을 휘날릴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이 고백한대로 우리의 심령 속에 평화의 왕 되신 주님을 모시지 않으면 절대로 평안하고 즐거움의 생활을 누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들의 삶이 고달프고 외로워도 주님을 모시고 사는 자에게 항상 평화가 넘치고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주안에 있는 자에게 딴 근심 있으랴' 그렇습니다. 주안에 영생이요 주밖에 멸망이요 주안에 평화요 주밖에 근심입니다. 이렇게 주님을 모시고 의롭게 살 때 평화가 넘치고 기쁨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할/ ⑶희락은 기쁨을 말합니다. 이 희락은 '의와 평강'의 결과로서 오는 구원받은 성도가 느끼는 신령한 기쁨을 말합니다. 여러분, 기독교적인 기쁨은 절대로 이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기독교적인 즐거움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남을 근심하게 하고, 비탄케 하는 것은 기독교적인 행복이 아닙니다. 남에게 자유를 주고 평안을 줄 때 참 기쁨이 나에게 찾아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항상 기뻐하라'고 당부합니다. 이 말씀은 '항상 네 이웃에게 기쁨을 선사하라'는 말입니다. 사랑을 줄 때, 그 진리가 더 높은 것처럼 내 마음 속에 기쁨을 찾는 것보다 남에게 기쁨을 선사할 때의 그 기쁨은 한 차원 더 높은 기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쁨이 있습니다. /믿/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기쁨으로 교제했습니다. 주의 길을 평판케 하기 위해 이 땅에 온 세례 요한은 기쁨으로 광야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기쁨을 가지고 나누어주고 서로 통용하는 역사를 베풀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의 기쁨은 환경이 가져다주는 외적인 기쁨입니다. 그래서 건강하면 기쁘고 병들면 슬픕니다. 환경은 수시로 바꾸어지고 변함으로 이런 외적인 기쁨은 잠시 있다가 사라져 버리는 기쁨입니다. 그러나 주안에서 누리는 기쁨은 고난 중에서도, 흐린 날에도 기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려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의와 평강과 희락은 공동체로 나타납니다. 이 기쁨은 영원한 기쁨입니다. 환경이 이 기쁨을 빼앗지 못합니다. 바울은 감옥에서도 기뻐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 기쁨을 간직한 채, 원형극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었고, 장작더미 위에서 재물이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이 기쁨을 간직한 채 거꾸로 십자가를 받았고, 야고보 장로님은 목이 잘리면서도 이 기쁨을 찬양했습니다. /믿/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나라가 아닙니다.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화평과 희락입니다. /아멘!/ 여러분! 두려움 없이 정말로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까? 정말 평화가 넘치고 기쁨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원하십니까? 예수 안에 거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2013년 1월 27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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