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수*이동원 목사+목사님들설교

[스크랩] 창골산 칼럼 제2177호 / 네 사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성령충만땅에천국 2013. 7. 17. 08:48

창골산 칼럼 제2177호 / 네 사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제217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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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사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중풍병자를 고치시는 사건이 공관복음인 마 9:1~8, 막 2:1~12, 눅 5:17~26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보는 관점들이 비교해 보면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시점은 마가는 수일 후에 (지난 사건과 연장) 누가는 하루는 가르치실 때(지난 사건과 단절)라고 되어 있고 대상자는 마가는 무리들, 누가는 예수의 적들로 구분하고 있다.

  

    또한 이 사건의 목적은 마가는 도를 말씀(교훈을 제시)으로 누가는 이적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지붕의 형태는 마가는 히브리양식(평형)으로 뜯어내는 장면이며 누가는 헬라양식(올라가는)으로 기와를 벗기는 장면으로 표현하고 있다. 복음서마다 특색 있게 다른 관점으로 다루고 있어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중풍병자는 육체적으로 반신불수, 전신마비가 된 환자들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중풍병자(ה󰗊󰘁 네케) 의미 : 불구가 된, 죄를 깊이 뉘우치는, 절름발이의, 자기 생각으로 똘똘 뭉쳐 머리 안이 굳어져 마비되어 있는 상태를 의미하고 있다.

 

    생각이란 옥에 갇혀 혼의 인지 속에 굳어져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뤄진 생명의 피가 돌지 않아서 마비가 되어 절뚝거리는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죄를 깊이 뉘우치고 적용하면 고침 받을 자다. 하나님의 말씀과 생명이 들어와도 마비된 상태이기 때문에 제대로 움직일 수 없으며 그리스도 예수의 사상이 내 안에 자유롭게 활동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고전2:14, 3:3, 2:15-16)

 

    성경에 여러 종류의 환자들이 등장하는데 문둥병자는 말씀이 오염되어 변질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의 피로 갈아야 하는 환자며 열병환자는 자신의 감정과 혈기에 열이 넘쳐 나 있는 환자다. 또한 혈루병 환자는 생명인 피를 내면세계에서 돌지 못하고 밖으로 표출하여 레마를 쏟아버려 생명의 본질이 마르고 있는 환자를 의미하고 있다.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에게 갔더니 요단강에 일곱 번 목욕을 하라고 할 때 화를 낸 사건(왕하 5:11~12)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오늘날 나아만 장군처럼 웅장하고 그럴싸하게 멋지게 보이지만 사실은 말씀에 오염되어 변질되어 예수의 피로 갈아엎어야 하는 현대 교인들과 교회의 모습이라고 본다.

 

   요단(야르덴)강은에 가서 일곱 번을 씻으라고 한 강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상태로 되어진 생명이 흐르는 강에 내가 낮아지고 낮아져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어 내 생각이 깨어지고 씻겨 지는 강을 의미하고 있다. 나아만 장군에게 일곱 번 목욕하라는 명령의 의미는 짐승의 속성을 완전하게 깨끗이 씻으라는 명령이다.

 

   어린 아이 피부로 바꾸어졌다는 뜻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로 변화된 상태를 의미로 내가 갖고 있는 짐승의 속성이 강물 속에 씻기고 씻겨서 깨끗하게 된 차원을 의미하고 있다. 또 다시 변질되지 않도록 완전히 깨끗해지라는 의미로 본다면 나아만장군의 사건은 한낱 전설 따라 삼천리와 같은 꿈 같은 이야기가 전혀 아니다.

 

   오늘날 내가 꺾어야 하는 사건이며 반드시 나의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야 하는 장면이다. 여호수아 3:7~8 요단 물로 들어가라는 말씀은 단순히 요단강물에 들어서라는 뜻이 아니라 낮아지고 낮아지는 말씀 안에서 꼼짝 달싹하지 말고 확실하게 서라는 의미다.

 

    3절 네 사람에게 메워가지고(바이샤우후 베아르비아)라는 구절은 의미심장한 뜻으로 네 사람이 없었다면 중풍병자는 예수 앞에 설 수 없었다. 그러면 여기에 등장하는 네 사람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미 자신들도 중풍병자들과 같이 중풍 병을 경험하여 고침을 받은 사람들로서 중풍병자의 심정을 잘 알고 도와주는 것이다.

 

   여기서 네 명이란 의미는 네 사람(레바이) 어근(라바) 동침하다, 즉 하나님의 사상을 받아서 짐승의 속성이 소멸되어서 동침한 상태의 사람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로 결합된 동침 안에서 새 생명으로 들어 올렸다는 의미를 말함 (고전 12:25~27) 갈 6:1~2

 

   하나님께로부터 빌려온 빚을 탕감받기 위해 중풍병자에게 빚을 갚고자 하는 간절함의 믿음을 가진 자들이므로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믿음을 보심보다는 하나님의 사상을 받아서 적용되어진 네 사람 즉 짐승의 속성이 소멸된 성도의 믿음을 보시고 고쳐주시는 역사를 우리가 체험해야 한다. (엡2:5-6, 22)

 

    4절 지붕을 뚫어 구멍을 내고(히타르) ‘구멍을 내고’ (하타르) 뚫다, 깨뜨리다, 지붕이음을 제거하다는 뜻을 가졌는데 중풍병자가 사람의 생각으로 가득 차서 굳어 져있는 머릿속의 생각 하나하나를 마치 지붕을 덮고 있는 기왓장을 벗기듯 깨뜨려서 벗겨냈다는 뜻이다. (행9:18-19上) (딤전1:13-14)

오늘 이러한 상황이 독자들의 집에서 일어나거나 교회 안에서 일어나게 된다면 얼마나 황당하겠는가?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일어났다면 그 사건의 본질을 깨달아야 한다.

 

   5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여기서 저희는 ‘복수’로 중풍병자가 아닌 환자를 데리고 온 네 사람들의 믿음을 보신 것이다. 그들 믿음대로 중풍병자에게 생명의 역사가 있게 하시고자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고 하셨다.

 

   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로 동침되어 있는 사람들로서 중풍병자에게 자신들에게 이루어진 생명의 말씀을 나누어주고자 하는 여호와의 열심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빌려온 빚을 탕감받기 위해 중풍병자에게 빚을 갚고자하는 간절함의 믿음을 가진 자들로 남의 집에 기왓장을 벗겨내면서까지 중풍병자의 굳어진 사람의 생각을 깨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빗나가서 자기 마음대로, 나름대로, 생각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삼상6:10, 12) (눅15:30-31) 이런 생각들이 모아져서 자신의 사고틀을 마비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로 인해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고 할지라도 그 말씀이 내 영혼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중풍병자는 사람의 생각이 다 부수어지고 하나님의 생명의 피로 채워지게 되어 영과 육이 치료함 받게 되었다. 따라서 중풍병자들이 교회 밖에 많은지 아니면 교회 안에 많은지를 생각해 봄이 어떨런지, 육신적인 중풍병자인지 아니면 영적인 중풍병자인지를 구분해야 할 것이다. 육신적인 중풍병자도 고쳐야한다. 그러나 영적으로 중풍병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로 동침되어 있는 성도들이 필요한 시대다. 따라서 본인들이 중풍병자들처럼 고침을 받지 못했다면 그런 중풍병자들을 예수님 앞으로 데려올 수 없을 것이다. 본인들이 먼저 사고의 틀을 하나하나 벗겨내는 작업을 감행하지 않으면 이런 체험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자신에게 이루어진 생명의 말씀을 나누어주고자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과 보내심을 깨닫고 중풍병자의 고정된 관념을 하나하나 벗겨내어 예수님 앞에다 내려놓는 믿음이 절실하다. 교회에서 전도하라고 아우성을 치지만 이런 내용의 설교를 하지 않는 이상 전도는 유명무실해지는 것이다.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막 2:5) 중풍병자에게 네 몸이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하지 않으셨다. 다만 네 죄 사함을 받았다고 했다. 나의 생각과 영혼을 마비시킨 것은 죄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 속에 들어와서 심령과 관절과 골수 쪼개는 말씀으로 마비된 것으로 깨끗하게 치료하는 광선이다.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배우고 익히며 함께 호흡하며 삶에 적용하기까지 네 사람의 도움이 절실하게 필요하다. 나를 메고 올 수 있는 네 사람이 있는가? 지붕에 있는 기왓장을 뜯어 줄 수 있는 네 사람이 있는가? 마지막으로 예수님 앞에 내려 줄 수 있는 네 사람이 내 주변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전도는 혼자나 두 사람보다는 직접 경험한 네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무기력해 진 중풍병자를 네 사람이 합심해서 메고 와야 한다. 그리고 병자의 사고의 틀을 깨트릴 수 있거나 뜯어낼 수 있는 네 사람의 도움이 절실하다. 마지막으로 예수님 앞에 환자의 침대를 내려 줄 수 있는 네 사람의 협력이 필요하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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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      자

이준호목사

(창골산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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