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문호 목사 설교

[스크랩] 거짓 사랑은 혀끌으로 나가고 참 사랑은 손끝으로 들어 온다. (요 12;18)

성령충만땅에천국 2013. 11. 25. 09:24

거짓 사랑은 혀끌으로 나가고 참 사랑은 손끝으로 들어 온다.

 

                                                                                                 요 12;18.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가셨습니다.

유월절 6일 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기 6일전이라고 하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몰라도 예수님은 6일 후 죽으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비장한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베다니 나사로 집을 찾은 것입니다.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사랑하였던 집을 마지막으로 둘러 보는 의미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 집은 예수님이 늘 가시기를 즐기시던 집이었습니다. 그 집에는 나사로와 마리아 그리고 마르다 셋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떤 주석가는 마르다는 나사로의 아내라고 해석하기도 하지만 조금 무리가 있는 것같습니다.

부모는 일찍 세상을 떠났던 것같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이 무덤속에 들어간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남다르게 예수님을 사랑하였던 그들이었기에 예수님은 이 집에 심방을 가장 많이 가셨습니다. 그 날도 예수님이 오랜만에 오시니까 예수님을 위하여 잔치를 하였습니다. 마르다는 분주하게 음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사로와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옥합을 담은 항아리를 가지고 오더니 깨뜨렸습니다(막14;3) 그리고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이 모습을 보던 가롯유다가 말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가만 두어 나의 장사 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

 

이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대조적인 두 사랑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가롯 유다의 사랑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었습니다. 300 데나리온이나 되는 향유였습니다. 300 데나리온이란 노동자 300명 노동 임금이라는 의미입니다. 노동자가 하루에 70만원 받는다면 2000만원 가량되는 향유입니다. 나는 이렇게 비싸고 좋은 향유를 본 적이 없습니다. 어쩌면 당시 집 한 채 값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가롯유다가 말했습니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그런데 성경은 유다가 이렇게 말한 의도를 분명히 간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6)

유다는 혀끝으로만 가난한 사람을 사랑하였습니다. 속셈은 자기가 그 돈을 가지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결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 마리아는 2000만원 정도 향유를 모두 없애 버렸습니다. 예수님에게 부었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면 얼마나 좋으냐고 혀끝으로 말했습니다. 듣는 사람들은 유다가 합리적이라고 고개를 끄덕였을 것입니다. 유다 말이 맞다고 긍정하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아름다운 생각을 하느냐고 칭찬하였을 지도 모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평가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다의 실상은 나드 향유를 팔아서 2000만원을 주면 자기가 챙기려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거짓 사랑은 혀끝으로 나가 버리고 맙니다. 돈 안들어가는 사랑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만의 사랑은 하기 쉬운 사랑입니다. 그러나 참 사랑은 손끝으로 들어 옵니다.

 

마리아의 손끝 사랑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머리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아 드렸습니다. 손끝을 분주하게 움직이면서 예수님을 사랑하였습니다.

마리아를 보면 손끝에서 사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사랑입니까?

 

1. 낭비가 사랑입니다.

마리아는 2000천만원 정도되는 향유를 예수님에게 아낌없이 부었습니다. 유다가 보면 낭비였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것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지금 우리는 요한복음 12장을 보고 있는 데 바로 11장에서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신 기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은혜를 생각하면 그 가정에서 가장 귀한 것을 예수님에게 드리는 것이 전혀 아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최선을 다 하여 드렸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지금 우리 집에 오셔서 어머니를 살려 내신다면 나는 2000만원 아니라 그 이상 또 그 이상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옥합을 깨뜨린 마리아에게 큰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극구 최상의 축복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막 14;9)


나는 유 창식 중앙병원 외과 의사에 대한 고마움을 늘 간직하고 있습니다. 암이 퍼진 것이 분명한 아내의 암수술을 담당하고 정성을 다 하여 수술하여 살려냈습니다. 여름 휴가를 미루고 수술하여 주었습니다. 임파선이 넘었다고 하는 직장암에서 아내를 살려 주었습니다. 나는 지금도 그 분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자기 생명을 죽이면서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

 

한 사람이 한강에 빠져 익사직전에 있었습니다. 모두가 구경만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용감한 사람이 뛰어 들어갔습니다. 시간을 다투고 있었기에 옷도 입은 채 뛰어 들어 갔습니다. 지갑을 꺼내고 들어 갔어야 하는 데 급하여 거냥 뛰어 들었습니다. 지갑속에는 수천만원짜리 수표가 들어 있었습니다. 지갑을 물속에서 잃어버렸습니다. 그 돈을 보상하여 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는 빠져 죽어가는 사람의 머리칼을 잡아 끌었습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습니다. 그는 장한 시민상을 받았습니다. 금메달을 걸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살아난 사람은 하필이면 머리칼을 붙들고 끌어서 머리가 좀 빠지고 머리가 아프다고 머리를 볼 때마다 두고 두고 불평하고 욕하였습니다.

 

사랑은 낭비입니다. 버리는 것같지만 사랑입니다. 부질없는 짓 같으나 사랑입니다.

낭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투자가 없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유다는 입으로만 사랑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2000만원 정도의 향유를 예수님에게 부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어떤 신사가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거지 아이가 과자집 앞에서 유리창안에 쌓인 과자를 보고 있었습니다. 몹시 먹고 싶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너무나 불쌍하게 보였습니다. 그 신사는 과자 한 봉지를 사주었습니다. 그리고 “얘야! 그 과자 한 개 먹어 볼가?”하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는 과자 봉지를 꼭 안고 가면서 “안 돼요”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오빠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아끼지 않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눈에 보이고 있습니다. 서양속담에 “감사하는 마음이 잠들면 인생 전부가 잠든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낭비가 사랑입니다. 영국의 주석가 바클레이는 의미심장한 말을 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슬픔이 있습니다. 주고 주고 또 주어서 더 이상 줄 수 없어서 슬퍼하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낭비가 사랑입니다.

 

2. 진실이 사랑입니다.

마리아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칼로 예수님의 발을 닦았습니다. 머리칼로 발을 닦았다는 이야기를 본문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듣습니다. 그 후 다른 곳에서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귀한 손님이 오시면 향유를 머리에 부어 대접하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발에 붓고 머리칼로 닦았다는 것은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겸손도 보통 겸손이 아닙니다. 진실도 보통 진실이 아닙니다.

손님의 발을 닦고 발에 향유를 붓는 것은 종이나 노예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마리아의 가정은 사회적으로 고위층이었습니다. 그 증거가 있습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유대인들이 많이 모였다고 요한복은 11장 19절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많은 유대인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요 11;19)

예수님을 높이고 자신을 한없이 낮추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막 14;9)라고 칭찬하신 것입니다.

 

진실이 있어야 사랑이 빛이 납니다. 유다가 향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낫다고 한 말은 진실이 아닙니다. 진실은 도둑질하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진실을 다 압니다.

 

웰스(Wells)의 단편소설 <무덤>의 내용입니다.

인도에 재색을 겸비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왕과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살던 중 1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왕은 슬픔을 견디지 못 하여 무덤 동쪽에 동상을 세워 주었습니다. 얼마 후 서편에 왕가를 상징하는 호랑이를 조각하여 주었습니다. 1년 후 호화로운 별장도 세웠습니다. 죽은 영혼을 위로하기 위하여 웅장한 성도 건립하였습니다. 왕은 맞은 편 산에 올라가 무덤을 내려다 보며 흐믓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런데 무덤이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말했습니다.

“저 무덤을 파버려라.”

처음 목적은 분명하였습니다. 죽은 아내를 영원히 기리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과정도 진실한 사랑은 아니었습니다. 진실한 사랑이 감동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마리아가 머리칼로 예수님의 발을 닦는 사랑은 진실된 사랑입니다. 진실한 사랑이 참 사랑입니다.

 

3. 마지막이라고 여기는 사랑이 참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그 6일이 지나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항상 있는 이들이고 앞으로 얼마든지 사랑하고 구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기회를 놓지지 않고 사랑하였습니다. 마리아가 이 때를 놓쳤더라면 다시는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었습니다. 기회란 항상 있는 것은 아닙니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때가 사랑의 절호의 시간입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사랑할 때 진실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최선의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1998년 7월 24일 미국 메사츄세츠 주립대학 병원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메리 게첼이라고 하는 93살 된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심장 질환으로 쓰러져서 오랜 기간동안 혼수상태에 있던 이 할머니가 임종을 맞이했습니다. 병원에서는 몇 시간 이내로 돌아가실 것 같아 가족들을 불렀습니다. 온 가족들이 다 와서 임종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할머니 앞에 아들들, 자부들, 딸들, 사위들 그리고 손자들이 둘러 서서 조용히 할머니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제일 어린 막내 손녀 데이빗 로라인은 할머니가 흠뻑 사랑하면서 길렀습니다. 이 손녀가 할머니가 누워 있는 침대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몸부림치면서 소리를 질렀습니다.

“할머니! 할머니! 일어나! 일어나! 할머니 사랑해!”

손자는 할머니에게 키스도 하고 할머니 가슴을 두드렸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둘러 서 있는 가족들은 펑펑 울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혼수상태에 있던 할머니가 몸을 틀면서 일어났습니다. 살아났습니다. 주치의와 의사들이 보는 가운데 일어난 기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온 세계 뉴스가 되었습니다. 사랑의 소리, 사랑하는 손녀의 소리를 할머니가 들으면서 기적이 일어난 것이었습니다. 혼신을 다한 마지막 사랑이 할머니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 놓고 말았습니다.

옆 사람을 사랑하면서 내가 마지막으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여길 때 진정한 사랑이 됩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마지막을 직감하였던 것같습니다. 그의 마지막 사랑은 영원히 성경에 기록되는 참 사랑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4. 그 분의 심정을 알아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6일 후에 죽으실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참담한 심정으로 이제 마지막으로 나사로와 마리아 마르다는 본다는 심정으로 방문하였습니다. 마르다는 그 심정을 모르고 먹는 것만 만들기에 온통 시간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무엇을 먹어도 돌을 씹는 것같은 때입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예수님이 6일 후에 죽으실 것을 어렴프시나마 알았던 것같습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한 것이 장례를 준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온 천하에 알려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죽으러 오셨다고 수차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우리는 요한복음 12장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앞장 11장 53절에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일 기회만 찾고 있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마리아는 알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이런 상황속에서 예수님의 심정을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이 죽으실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장례를 준비하였습니다. 온 천하에 알려지리라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 분의 심정을 알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람들이 최고로 바라는 것은 복과 수입니다.

모두 잘 되어 복되기를 원하고,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바라고 살고 있습니다. 하나도 예외가 없습니다. 하나님도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복과 수라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 날 밤에 꿈에 나타나셔서 무엇을 줄 것인지를 물으셨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사람들이 바라는 복과 수를 달라고 하지 않고 지혜를 구하니 지혜도 주고 구하지 아니한 복과 수도 주겠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복과 수를 가장 원하고 계심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복과 수를 누구에게 주시나요? 복과 수 말하자면 만복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신명기 22장은 복과 수를 누구에게 주시는 알려 주고 있는 데 이 말씀을 접하고 정말 놀랐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노중에서 나무에나 땅에 있는 새의 보금자리에 새 새끼나 알이 있고 어미새가 그 새끼나 알을 품은 것을 만나거든 그 어미새와 새끼를 아울러 취하지 말고 어미는 반드시 놓아 줄 것이요 새끼는 취하여도 가하니 그리하면 네가 복을 누리고 장수하리라“(신 22;6-7)

 

무슨 의미인가요?

하나님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물들이 모두 생육하고 번성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어미 새도 잡아 먹고 새끼 새도 잡아 먹으면 생육하고 번성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 주면서 어미 새를 놓아 주어 날라가 다시 알을 낳고 새끼를 까서 번성케하면 하나님이 복과 수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조금 알아 드렸다고 복과 수를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심정을 마리아가 알아 주었다고 예수님은 온 천하에 이 여자가 한 일이 알려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심정을 알아 주는 것이 하나님 사랑입니다.

남편의 마음을 알아 주는 것이 남편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아내의 마음을 알아 주는 것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을 알아 주는 것이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목사의 마음을 알아 주는 것이 목사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 분의 마음을 알아 주는 것이 그 분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비서계의 대모라는 이름이 붙은 전 성희 대성산업 이사가 쓴 글이 있습니다. 0

<성공하는 CEO뒤엔 명품 비서가 있다>라는 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사람이 석가모니를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저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네가 남에게 베풀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저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털터리입니다. 남에게 줄 것이 있어야 베풀지 않겠습니까?“

그 때 석가모니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그렇지 않느니라, 아무 재산이 없더라도 줄 수 있는 일곱 가지는 있는 것이다.

첫째는 화안시(和顔施), 얼굴에 화색을 띠고 부드럽고 정다운 얼굴로 남을 대하는것이요,

둘째는 언시(言施) , 말로써 얼마든지 베풀수 있으니 사랑의 말, 칭찬의 말, 위로의 말, 격려의 말, 부드러운 말을 하는것이요.

셋째는 심시(心施), 마음의 문을 열고 따뜻한 마음을 주는 것이다.

넷째는 안시(眼施), 호의를 담은 눈으로 사람을 보는 것처럼 눈으로 베푸는 것이요,

다섯째는 신시(身施), 몸으로 때우는 것으로 남의 짐을 들어준다거나 일을 돕는 것이요,

여섯째는 좌시(座施), 자리를 내주어 양보하는 것이요,

일곱째는 찰시(察施), 굳이 묻지 않고 상대의 속을 헤아려서 도와 주는것이다.

네가 이 일곱 가지를 행하여 습관이 붙으면 너에게 행운이 따르리라.“

이것이 석가모니의 "무재칠시(無財七施)"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재물이 없어도 상대방의 마음을 알아 주면 복이 있다는 말로 끝나고 있습니다.

 

감독 선거 운동을 전국적으로 할 때였습니다. 상대방 후보들의 돈 공세에 나는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세 후보는 유권자를 불러 모으고 돈 봉투를 돌렸습니다. 나는 밥은 샀지만 돈봉투는 주지 않았습니다. 소문이 났습니다. 나를 위하여 선거운동하여 주는 목사님들이 말했습니다.

“사람을 모으기가 힘들어요. 돈을 주지 않으니까 모이지 않아요. 돈없으면 나오지 말지 왜 나왔느냐고 그래요.” 나는 고민에 빠졌었습니다. 선거운동을 계속 할 것인가 중단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두 목사님이 전화를 주었습니다.

“목사님! 얼마나 어려우세요. 나는 내 돈으로 선거운동하여 드릴 것입니다. 목사님으로부터 한푼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 심정을 알아주며 선거운동을 하여 준 분이 두 분입니다. 나는 평생 잊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그럴 것입니다. 자기 어려운 심정을 알아주는 사람을 잊지 못 할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알아주면서 향유를 몸에 부어주는 마리아를 온 천하에 알릴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심정을 알아 주는 것이 참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거짓 사랑은 혀끌으로 나가고 참 사랑은 손끝으로 들어 옵니다. 가롯 유다는 혀끝으로 사랑이 나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손끝으로 사랑이 들어 왔습니다.

낭비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진실이 사랑입니다.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심정을 알아 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귀중한 진리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짊어지고 나대신 죽으셨기에 내가 구원받았다.”

이것입니다.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어느 대형 건물에 불이 났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타죽었습니다. 소방수들이 불을 끄고 건물을 뒤지고 있었습니다. 화장실에서 놀라운 발견을 하였습니다. 처절한 모습이기도 하였습니다. 감동스러운 모습이기도 하였습니다.

변기 물속에 어린 아이가 들어가 앉아 있고 그 위에 어머니가 타죽은 채 덮어져 있었습니다. 불이 나자 밖으로 도저히 나갈 수 없음을 직감한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화장실로 들어가 아들이 타죽지 않게 그렇게 한 것이었습니다. 물속에 있기에 타죽지 않았습니다. 위로 오는 불은 어머니 시신이 막고 있었습니다.

사랑은 낭비입니다.

자기 생명까지 낭비하는 사랑이 참 사랑입니다. 이것이 예수님 사랑입니다. 이보다 진실한 사랑이 없습니다. 마지막 사랑입니다. 최선의 사랑입니다.

그렇습니다.

 

거짓 사랑은 혀끌으로 나가고 참 사랑은 손끝으로 들어 옵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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