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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충성스러운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4. 9. 04:24

충성스러운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

 

여호수아와 갈렙, 이 두 사람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중요한 원리들을 배우기 원합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의 겉옷을 취한 것을, 우리가 다 잘 알고 있습니다. 지도자에게 충성을 다하여 섬긴 영적인 아들들에게 그 지도자의 옷이 입혀지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존중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다면, 여러분도 그 사람의 겉옷을 입고 싶을 것입니다. 그분의 뒤를 이어 하나님 나라를 위한 부르심을 받아서 그것을 성취시키는 삶을 살기 원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대가 지불이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말씀을 통해 여호수아의 삶을 잘 알고 있지만, 피상적으로만 알 게 아니라 깊이 파고 들어가 본다면 여러분의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저는 여호수아가 모세를 섬기면서 모세의 삶을 통해 자기의 인생을 완전히 변화시킬 수 있는 중요한 한 가지를 보았다고 생각합니다.

  

출 33: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과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 모세는 진으로 돌아오나 눈의 아들 젊은 수종자 여호수아는 회막을 떠나지 아니하니라.”

 

하나님을 대면하고 나온 모세의 얼굴에서 뿜어 나오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그 얼굴을 수건으로 가려야만 했습니다. 자기가 섬기는 지도자 모세가 진으로 돌아갔으나, 하나님의 영광의 그 빛에 완전히 사로잡힌 젊은 여호수아의 마음은 회막을 떠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언젠가는 모세처럼 자기도 그 영광을 대면할 날이 오기를 꿈꾸며-여호와와 모세가 대면했던 회막에 남아- 계속 하나님을 갈망하고 찾고 찾는 그런 시간을 보냈으리라 생각합니다.

 

충성스러운 사람들의 삶의 모습-영적인 삶이든 육적인 삶이든-들을 보면, 한결같은 진실함, 신실함, 변함없는 충성심이 있습니다. 그 신실함 진실함 충성스러움이 우리의 인격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세상에서도 이런 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가 얻고자 하는 것을 반드시 얻습니다.

하물며 영원하고 진실하고 참되신 하나님을 얻기 위해 이런 충성스러움과 신실함이 우리 안에 없다면 (이것은 정직성과 다른 모든 것들과도 연결됩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을 얻을 수 있으며, 그 놀라운 영광을 우리 안에 이룰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을 보면, 어느 날은 갈망이 증폭되었다가 또 어느 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집니다. 갈망과 열심이 한결같지 않은 것을 보면서 참 안타까움을 느낍니다.

여러분 안에서 어제의 그 열심 갈망 불타는 소원이 사그라질 때마다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제가 훈련받을 때, 아침에 제일 먼저 도착하고 떠날 때는 제일 늦게 떠났습니다. 세상 것은 아무것도 갖고 싶거나 먹고 싶은 것이 없고, 오직 예수님 그분을 얻고 싶은 맘뿐이었습니다. ‘내일 아침에 총알처럼 일어나 내 할 일 해놓고 하나님 만나러 은혜 받으러 기도하러 가야 된다.’는 생각으로 잠을 깊이 못 자는 그런 삶을 하루 이틀이나 한두 달 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이 한결같은 성품을 발전시켜야 합니다.

 

저도 몸이 너무 힘들거나 아픈 날이 있습니다. 때로는 마음의 짐 때문에 낙심이 되어 ‘오늘은 만사가 귀찮다. 하루 종일 이렇게 그냥 누워 있으면 좋겠다.’는 그런 마음도 듭니다. 그럴 때 자리에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싸우고 일어나는 겁니다. ‘죽더라도 그 자리 가서 죽자.’ 기를 쓰고 일어나는 겁니다.

그런데 결국은 그런 싸움들이-무슨 일을 맡든지 한결같이 충성스럽게 할 수 있는 능력들로- 하나님 안에 있는 충성의 기름부음들로 우리에게 부어질 것입니다. 처음에는 힘들게 어렵게 싸우면서 나아가지만, 나중에는 우리에게 가장 쉬운 일이 됩니다. 기도하고 예배하는 장소로 나아가는 것, 주님을 얻기 위해 대면하기 위해 나아가는 것이, 가장 쉽고 기쁘고 즐거운 일이 됩니다. 충성의 열매가 내 인격에 내 성품에 풍성하게 맺어지기 때문에 쉽게 그렇게 됩니다.

 

여호수아의 그 한결같은 전심전력으로 주님을 향한 사모함 갈망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원합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든 한결같이 주님만을 하나님의 영광만을 좇아 나아가는, 이것이 내가 살아 있는 이유 이다.’ 그것을 내 삶의 목표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단 한 가지로 목표가 뚜렷해지면 시간 활용이 단순해집니다. 그래서 자기 삶의 목표를 예수님으로 하나님으로 세워놓으면, 하루를 오직 주님을 만나 교통하고 교제하기 위해 살게 됩니다.(여러 개의 목표를 세우면 그것을 다 성취하기 위해 시간과 마음과 물질도 다 나누어 쪼개야 되기 때문에 고생스럽고 힘듭니다.)

  

제 목표는 오직 하나이기 때문에, 제 삶은 쉽고 단순합니다. 온전한 충성스러움을 원한다면 반드시 목표가 하나라야 됩니다. 두세 가지 목표를 세우고 절대로 한 가지 목표에 충성할 수 없습니다. 내 유일한 소원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일 때, 예수님이 하나님께 하신 그 충성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역이나 은사를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는 그 사역을 위해 충성하고 은사를 위해 충성하는 것이지, 절대로 예수님께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봉사에, 구제에, 복음 전도에.

초점이 정확하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아니라면, 절대로 온전한 충성으로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이 될 수 없습니다. 나의 유일한 소원과 목표가 하나님, 예수님인 것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삽니다. 특히 우리 큰믿음교회 성도님들 정말 열심히 삽니다. 열심히 교회 오고, 열심히 집회 참석하고, 열심히 사역 학교에서 훈련받습니다. 하루하루 너무나 바쁘게 삽니다. 그래서 자기는 충성스럽게 산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목표가 빗나가게 되면 그것은 절대로 하나님 앞에 충성스러운 삶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로 일어나기 원한다면, 밥 존스 목사님이 그토록 보기를 갈망하는 성결의 영을 가진 그런 자들로 일어나기를 원한다면, 이것이 반드시 우리 안에서 점검되어, 잘못된 초점이 바른 초점으로 세워져야 합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제가 만난 사람들의 숫자가 수만 명은 족히 될 것입니다. 그분들이 다 금식하고 철야하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심방하고 가르치고 열심히 삽니다. 그런 그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얻은 사람을 충격적이지만-지금까지- 한 사람도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그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유일한 목표, 유일한 소원이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붙잡고 갈망하고 있는 것이 오직 예수님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서 발견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루었습니다.

  

빌 3:12-14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은 바로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광을 얻게 하시려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신 것입니다. 바울이 계속해서 ‘붙잡고 달려간 것’은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 아버지의 영광’ 즉 아버지 자신입니다.

(우리의 기업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주기 원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자녀 삼으셨습니다.)

이 목표가 분명했기 때문에 바울의 삶을 통해서 엄청난 기사와 표적들이 일어나고, 수많은 교회들이 세워졌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구원을 받는 그런 엄청난 일 가운데서도, 바울의 서신들에는 오직 한 가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신부의 영성을 가지고 신랑 되신 예수를 위해 죽도록 충성하면서 계속 그가 추구하는 것은 예수님, 그 안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삶이 그토록 신실하고 충성스러운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핍박과 환란과 고난이 있었습니까? 바울의 삶은 인간적으로 보면 참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한결같이 충성스럽게 그리스도만을 사랑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왜냐면 목표가 예수 그리스도 그분뿐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여러분의 심령 속에 깊이 새겨져서, 예수 그리스도 오직 그분을 목표 삼으시기 바랍니다.

  

빌립보서 3 :7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여러분의 마음이 순간순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비껴갑니다. 그리고 다른 것을 붙잡고 열심을 내면서 자신은 주님 앞에서 충성스럽게 주님을 섬기고 경외하고 있다고 착각합니다. 이미 마음이 정로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서는 겸손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은혜 안에서 바울처럼 매일 그리스도 안에서 죽어져 그리스도의 향기를 진동하며 세상 가운데 흘려보내는 그런 자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에 문제를 일으키고 인간의 죄성 안에 있는 오만함 교만함 탐심들을 흘려보내서 아버지의 영광을 가리우는 그런 삶을 살게 됩니다.

 

 이 말씀을 안다고 해서 여러분 삶의 유일한 목표 갈망이 예수님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 외에 다른 것이 다 여러분 안에서 없어져야만 됩니다. 인정받고 싶은 것, 알아주기 바라는 것, 지위가 보장되고 내 삶이 계속 안정되는 그것을 위해서 봉사하고 수고하고 열심을 내는 것, 그것은 충성된 삶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열심히 살고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인정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사용하시지 못합니다. 같은 맥락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구원받았지만 하나님의 자녀이지만, 목표가 빗나갔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면 마땅히 살아야 하고 그리스도의 신부라면 마땅히 살아야 하는 그런 충성된 삶을 살지 못해서, 하나님이 매일 그들과 함께하실 수밖에 없는-모세와 함께하셨고, 나중에는 여호수아와 함께하셨던 것처럼- 그런 삶을 이루는 그리스도인들이 극소수입니다.

 

우리가 이제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지금까지 받은 은혜가 얼마인데, 내가 계속 좋아지고 있지 않은가? 내 환경은 계속 편안하고 더 발전되고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언제까지 머뭇거릴 것입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에 주목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충성스러움을 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모아 그 나라로 들어오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진짜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모세 안에 있는 영광, 기름부음이 자기 안에 임해지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는 모세가 자기에게 명한 모든 것에 대해 온전히 충성하고 온전히 행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모세의 겉옷을 취하고 그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자신의 부르심을 성취시켰습니다.

저는 큰믿음교회 안에서 이런 사람들이 많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겉옷을 취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들, 믿음의 거장들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정말 어떤 지도자의 기름부음을 받기 원한다면 진심으로 정성을 다해 섬겨야 합니다. 사소한 것에서부터 다 훈련입니다. 한 시기마다 어떤 사람의 지도를 받으며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것입니다. 구역장이나 주일학교 교사들이나 어떤 교회의 목회자들, 수많은 지도자들을 거쳐 옵니다.

저 같은 경우, 처음에는 저희 언니가 저의 멘토였고, 한 개척 교회 사모님, 서울로 올라와서는 오 권사님.. 이렇게 계속 다른 지도자들을 만났습니다. 항상 그 시기마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그분들을 지극 정성으로 섬겼습니다. 그분들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그분의 사역, 부르심이 성취되도록 나의 목표가 없고 그분의 사역이 성공하여 아름다운 열매가 맺도록 하는 것, 그것이 저의 목표였습니다. 그래서 거기에 저의 전부를 쏟아 부었습니다.

제가 계속 훈련받으며 성숙해갈 수 있었던 중보자들의 모임에서, 그 지도자에게 내 시간, 몸과 마음, 물질, 내 삶 전체, 우리 가정 전체를 다 헌신했습니다. 그분 안에 아름다운 영성이 있다면 나도 그것을 얻게 되기를, 달리 말하면 그분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형상이 있다면 나도 그것을 얻기를 바라는 그것 외에는, 다른 목적은 전혀 없습니다. 나는 그분이 가진 명예 명성 사역 그런 것을 원해서 간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얻기 위해 가서 훈련받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하고 기도하는 그런 삶을 산 것입니다.

만약 내가 그분을 좇았다면 그분의 한계 안에 갇혀 있었을 테지만, 저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좇았기 때문에, 저를 지도하고 있는 그분의 영성을 뛰어넘어 더 높은 곳으로 하나님이 나를 끌어올리셔서 제가 성장한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겉옷을 취한다는 것은 그 지도자의 부르심을 내가 이어서 성취하는 것을 말합니다. 모세로부터 시작된 부르심을 여호수아가 성취시켰습니다. 엘리야가 했던 일을 엘리사에게로, 그 부르심이 이어져 결국엔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것이 겉옷을 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정말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 그곳에서 정말 수많은 사람들이 제자로서 지도받고 훈련받았는데, 하나님이 저를 그 그룹에서 다른 곳으로 옮기셔서 빠져나오게 되었습니다. 담임 목사님의 사역을 도와서 큰믿음교회를 섬겼는데, 정말 놀라운 것은 그분의 겉옷이 저에게 입혀진 것입니다.

그때 제가 알았습니다. 우리가 충성스러움으로 뭔가를 누군가를 섬기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고 기억하고 계셨다가 사람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그들에게 그 겉옷들이 기름부음이 부르심이 이쪽으로 옮겨가서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저에게는 정말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그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장성한 사역들을 하고 있는 사람들 틈에서 저는 어린 자에 속했었습니다. 후계자로 물망에 오르는 사람들이 정말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 꿈으로 하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꿈에서 그분이 마지막에 돌아가시는데 다른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저를 찾으시더니, 자신이 돌아가시는 순간에 저보고 자기를 안으라고 하시는 겁니다. “내가 하나님 나라로 가는데 네가 나에게 마지막으로 작별인사를 해 달라.”고, 그렇게 제 품에서 그분이 돌아가셨습니다. 제가 그분이 돌아가시는 것을 보고 나오는데, 다른 사람들이 모두 2인자라고 생각했던 분이 굉장히 분노하면서 저의 뺨을 때리는 겁니다. 그렇게 뺨을 맞고 꿈에서 깨어났습니다.

이 꿈이 대체 무슨 뜻인지 처음에는 전혀 몰랐는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잠자고 있는 저를 깨우시고 그 꿈에 대한 해석을 주셔서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겉옷이 저에게 입혀졌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 뒤를 이어 중보자들을 이 나라에서 세우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 열방에 세우는 그 일을 하고 계십니다.

 

 왜 그 사람이 내 뺨을 때렸는지 여쭈었을 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너는 진심으로 그분을 섬겨라.’고 하시며 그 사람은 자신에게 그 기름부음, 그분의 겉옷이 입혀질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선택하셨고 내가 그것을 취하는 것을 보고 인간적으로 분노해서 나의 뺨을 때린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분을 섬기는 많은 사람들이 인정받으면서 그 사역을 했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저에게 알게 하신 것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기름부음을 취해 명성, 즉 궁극적으로는 자기 나라, 자기 뜻, 자기의 목표를 성취시키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다들 충성하고 열심 냈지만, 그들의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 자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겉옷을 저에게 주신 것입니다. 영적인 영역에서 그분이 가지고 있었던 권위, 영권이 저에게 이양된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드리는 까닭은, 여러분이 분명하고 올바른 초점을 반드시 가지고, 지금 큰믿음교회 안에 있든지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부르심 안에서 어떤 지도자의 권위 아래 있다면 충성하셔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진심으로 그 사역을 도와야 합니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전부’로 말입니다. 마음과 몸과 물질과 시간, 전부입니다. 결국은 그 사람의 겉옷, 그 영권이 이양되고 그 부르심들이 성취됩니다. 여호수아가 모세에게, 엘리사가 엘리야에게, 마음과 자신의 삶 전부를 다하는 그런 충성으로 지도자를 섬겼기 때문에 그 겉옷을 취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원칙, 원리대로 우리가 나아가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축복과 은총을 결국은 받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리는 다 알지만 실제 삶은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그런데 제가 안타깝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때에 대부흥과 대추수를 위해 세계 열방과 한국을 깨우기 위한, 그 부르심 안에 우리가 들어와 있습니다. 나를 내어드리고 내 가정 내 모든 것을 다 거기에 초점을 맞춰 전심으로 헌신하고 수고하면서 하나님께 드리고 나아가야 되는데, 사탄이 우리 앞에 놓는 어떤 장애물이건 다 파쇄하면서 나아가야 되는데, 우리에게 이것이 없는 겁니다.

지금 큰믿음교회의 사역이 세상이 깜짝 놀라도록 돌풍을 일으키면서 세계 열방으로 뻗어나가야 정상입니다. 재적 성도가 거의 만 명이고 출석 성도가 6천 명을 넘는 우리가 이 정도 밖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건, 우리 안에 진정한 헌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순전한 충성심이 우리에게 없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갈렙, 모세, 아브라함, 다윗, 그들에게 있었던 하나님을 향한 그 충성심이 우리 안에 있다면, 큰믿음교회는 벌써 전 세계로 뻗어나갔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의 충성심을 보면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믿고,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 왕이요 구주로 우리에게 영생이 되는 실제가 된다는 것과 우리가 말하고 전하는 그 복음이 진짜라고 인정하고 저들도 구원을 얻기 위해 영생을 얻기 위해 교회로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됩니다. 우리의 삶을 보고 저들이 그게 사실이다 진짜다 라고 그렇게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얼마 전부터 하나님께서 저에게 우리 큰믿음 성도들이 ‘종교적인 명목상의 교인들에 비해서’ 너무나 귀하고 아름답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이 수준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열방을 취하는 각 나라 족속들 그 백성들을 취하는 그 크고 놀라운 부르심 안에 있기 때문에 이 수준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 부르심이 성취되기 위해 실제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 삶에서 어떤 변화와 개혁이 일어나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굉장히 안타까워하시면서 그것을 가르쳐야 한다는 부담감을 저에게 많이 주셨습니다.

  

충성된 많은 사람들 -70인의 장로, 천부장, 백부장들, 아론과 훌 그리고 여호수아와 갈렙-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모세가 자신의 부르심을 성취할 수 있었습니다. 인구 250만 정도의 한 민족을 이끄는 모세의 부르심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인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그런 충성된 자들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열방을 위한 부르심입니다. 마지막 대부흥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충성된 증인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수님의 신부들이 일어나야겠습니까? 우리 모두가 내가 그것을 이루겠다고 결단하지 않고 ‘누군가 그것을 이루면 덕을 보겠다.’거나 ‘나는 그 대열에서 덕을 보면서 이탈하지만 않고 쫓아가면 되겠지.’ 이런 마음으로 있다면, 언제 열방을 취하고 대부흥을 이 땅에 임하도록 하겠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계속적으로 많은 사건들을 통해서 그 원리를 깊이 깨닫고 이해하게 되어서, 자원하여 헌신과 충성스러운 삶으로 꼭 들어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수아 14:12-14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충성하였음이라.”

  

갈렙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해 언약한 축복을 성취시켰고 다 받았습니다. 그 이유로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충성하였음이라”가 결론입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약속이 누구를 통해 성취되겠습니까? 결국은 충성된 하나님의 종들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충성된 그들만이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들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당연히 우리가 충성된 하나님의 사람들로 준비되어 일어나야 합니다. 세워져야 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목적과 뜻을, 부르심을, 성취시키지 못하고,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기로 예비한 축복을 받지 못하고 그 삶이 끝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때에는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과 뜻과 부르심을 성취되는 때입니다. 열매를 맺고 결실을 맺는 이 마지막 때에 누구를 통해 하나님의 그 언약을 성취시키시겠습니까?

여호수아 세대가 일어나야 한다는, 그 뜻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야 제가 아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세대라면 그냥 젊은 사람이 일어나면 됩니까? 우리가 본질을, 그 깊은 하나님의 뜻을 조금은 잘못 봤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는 여호수아 세대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심입니다. 결국은 그 일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누구와 함께하시는가? 충성된 자들, 아브라함, 모세, 갈렙, 여호수아, 다윗 등 모두 한결같이 하나님을 따랐던 자들입니다.

충성스러움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가 ‘한결같음’입니다. 충성의 뜻이 ‘진정어린 정성’인데, 한결같음이 진심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줍니다. 갈렙과 여호수아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민수기 14: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그들과 달라서’ 라는 말이 너무나 실감이 납니다. 여러분이 다수의 사람들과 달라서 온전히 하나님을 따르는 한결같이 하나님을 따르는 그 무리들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다른 마음’이 들어와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다른 마음 즉,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민수기 32:12 “그러나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여호와를 온전히 따랐느니라.”

  

여호수아 14:8-9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그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다윗이 여호와를 섬기고 사랑하면서, 한결같이 하나님을 따르고 순종하고 충성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모세도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위해서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서 그 백성들을 지도하면서 나아갔습니다.

 

이 ‘한결같음’이 지금 우리에게서 나타나야 합니다. 여러분이 ‘나는 하나님만을 구하고 하나님만을 좇고 하나님만을 따르겠습니다.’ 그렇게 굳게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실제적으로 방문하실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 영광의 본체를 대면했던 것처럼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대면하고 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충격적인 하나님 본체의 형상을 대면하여 아는 자들로 세워지는 그날이 반드시 올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부르심을 성취시키는 전략-그 실제적인 하나님 나라의 원리-이 이번 집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풀어주시는 것이 너무나 감격스럽습니다. 마지막 때 대부흥과 대추수를 위해 우리를 큰믿음교회의 부르심 안으로 부르셨는데, 어떻게 해야 그 부르심이 성취되는지 구체적인 방법들을 우리가 몰랐기 때문에 실제로 준비되지 못하는 그런 많은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것을 실제로 준비시켜 주시는 그 중요한 원리들을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기 때문에 너무나 좋습니다.

  

다윗은 충성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용사였습니다. 그 충성스러운 다윗이 충성스러운 용사들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충성스러운 증인이 되어 우리를 통해서 수많은 충성스러운 증인들을 일으키게 되는 것이고 또 그들을 통해서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고 사탄의 나라 어둠의 세력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아까 말씀을 나누면서, 사탄의 나라가 사탄의 모든 도모들이 무너지는 것을 봤습니다. 대부흥과 대추수를 막기 위해 사탄이 얼마나 방해를 하는지.. 뭔가 덮여 있고 가렸던 베일이 벗겨지는 것처럼 우리의 눈이 열리고 사탄의 진영이 무너져 내리는 그것을 제가 보게 되었습니다.

이번 집회 말씀을 준비하면서 보배로운 것들을 많이 얻었는데 특별히 다윗에 관해서도 그랬습니다.

  

사무엘하 22:24-29 “내가 또 그의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 대로, 그의 눈앞에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이다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자를 살피사 낮추시리이다 여호와여 주는 나의 등불이시니 여호와께서 나의 어둠을 밝히시리이다.”

  

다윗의 영성을 알고는 있었지만, 다윗이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의 좇고 하나님을 구하였던가를 실제적으로 제가 그동안 못 봤던 것을 보게 되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사무엘하 22:24-25절에 보면

“내가 또 그의 앞에 완전하여 스스로 지켜 죄악을 피하였나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 대로, 그의 눈앞에서 내 깨끗한 대로 내게 갚으셨도다”

 

결국 다윗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형상을 자기 안에 이루었고, 그 형상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하심, 완전하심, 깨끗하심을 봤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참된 충성으로 그 삶이 저절로 바뀝니다. 우리가 어린아이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사랑이 성숙되지 못하기 때문에 충성의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다음에 충성스러운 삶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의 뜻을 성취시키기 위해 자기를 헌신하며 충성하는 삶으로 계속 나아가야 하는데, 이것이 안 됐기 때문에 사랑도 성숙하지 못하고 충성에도 성숙한 자로 나아가지 못하면서 계속 맞물리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악순환의 고리입니다. 사랑이 성숙되지 못하면 삶이 충성된 삶으로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이루고, 고치고, 바꿔주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 형상을 닮는 것이 목표이고 소원인 그것을 이제 어떻게 이룰 것인가.... 바로 ‘충성을 훈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빨리 성장하고 성숙해서 여러분 안에 하나님 형상을 이루고, 놀라운 그리스도의 신부 용사 용맹스러운 과격한 전사로 세워지게 될 것입니다.

  

그냥 여러분이 이렇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나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이 성취되기 위해서 오늘 나의 모든 것을 드린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하는 일이 있다면 다 그곳에 쏟습니다. 나의 모든 에너지, 시간을 거기에 우선적으로 드리고 그 일을 해놓고 나서야 나의 개인적인 일에 시간을 사용하고 물질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몸으로, 마음으로는 하는데, 물질로는 안 합니다. 여러분, 물질과 마음은 같습니다. 착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입술로만 하는 것을 마음으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일을 맡게 되면 내 전부를 거기에 내어 드려야 됩니다. 누군가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싶으면,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해서 그가 말씀을 듣고 구원을 얻기를 바라면, 그 사람을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됩니다. 그 시간이 그 순간이 최후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올인 해야 됩니다.아주 사소한 일에부터 그런 훈련을 통해서 진짜 충성된 자들이 됩니다. 그것 없이는 큰일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절대로 못합니다.

  

다윗이 그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다 보니, 목자에서 한 나라의 왕으로까지 하나님이 그를 존귀하게 올려주셨습니다.

역대상 17:7-8 “또한 내 종 다윗에게 이처럼 말하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를 목장 곧 양떼를 따라다니던 데에서 데려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고 네가 어디로 가든지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 모든 대적을 네 앞에서 멸하였은즉 세상에서 존귀한 자들의 이름 같은 이름을 네게 만들어 주리라.”

  

다윗이 대충 적당히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진 것이 아닙니다.

사무엘상 17:34-35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나이다.”

  

다윗이 목동으로 있을 때 대충 양을 친 것이 아니라 목숨을 걸고 그 일을 했다는 말입니다. 양을 지키기 위해 사자나 곰을 막아서다가 자기가 끝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맡긴 양을 하나라도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걸고 뛰어든 것입니다. 사자나 곰의 입에서 양들을 지켜낸 것입니다. 충성이 무엇인가를 모세를 통해 본 것처럼 다윗을 통해 봅니다.

‘와 다윗이 그렇게 용맹스럽구나!’ 그게 아닙니다. 바로 다윗의 성실함과 진실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충성스러움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충성스러운 자들의 특성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자기 계산, 자기 이익이 없습니다. 모세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가 안중에 없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그 일을 맡겼는데 다윗이 신실함으로 양들을 지켰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오늘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한다. 거기에 자기의 전부를 내어 던지시기 바랍니다. 그냥 하는 시늉만 해서 겨우 내 책임이나 감당하고 끝나고 내 의무만 감당하고 끝내는 그런 삶이 아니라, 그 시간의 그 일이 내 삶 전체를 내어 드리는 그 충성스러운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결국은 큰일을 감당할 수 있는 자격 요건이 됩니다. 충성된 자들의 밑에는 반드시 충성된 자들이 일어납니다. 만약 여러분이 충성된 자가 아니라면, 여러분 밑에서 추성된 자들이 절대로 안 일어납니다. 그러면 그 무리는 오합지졸이 됩니다. 하나님이 큰일을 맡기실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의 정예부대가 되지 못합니다. 정예부대로 최선선에 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계 열방으로 나아갈 정예부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이것이 세워져야만 대부흥 대추수를 하나님이 이루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제가 세계 곳곳의 여러 나라로 가고 있는데, 결론은 이 민족밖에 소망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번 유럽에 가서도 미국, 캐나다에 가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민족성, 국민성을 봤을 때 우리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대할 수 있는 근성, 기질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 우리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위해 훈련되어 왔습니다. 많은 시련과 많은 역경을 통해서 생긴 은근과 끈기, 집념이 있습니다.

미국 캐나다 유럽, 아프리카 사람들은 집념이 없습니다. 동남아시아도 그렇고. 캐나다도 유럽도 사회보장이 잘되어 있어서 악착같이 돈 벌 필요도 없다 보니까 ‘대충, 적당히’가 기질적으로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철두철미하게 집념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나아올 수 있는 그런 기질을 가진 민족이 우리뿐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내린 결론이 그겁니다. 두루뭉술한 것은 인간적으로 혼적으로는 좋지만, 하나님이 찾는 그런 기질은 아닙니다.

담임 목사님이 해외에서 오시는 외국 강사들 말씀에 대해 불만이 많으신데, 철두철미하게 진리의 깊은 곳으로 파고들어가는 그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기독교 문화 안에서 성장해서 그런지 그렇게 악하지도 그렇게 잘 먹고 잘살겠다고 강한 애착을 가지고 그렇게 살아온 역사가 아니라서 그런지 기질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우리 민족은 폐허 속에서 어떻게 하든지 잘살아 보겠다고 몸부림치다가 기질적으로 자생력이 우리 민족성 안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죄성 깊은 곳으로 파고 들어가서 죄를 회개하고 회개하는 이 근성이 우리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목회자들의 메시지가 인자 쪽으로 치우쳐 있고 엄위로는 끌어당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죄성은 누구나 똑같습니다. 어느 민족이나 같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다 죄인들입니다. 다 부패하고 타락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죄성을 깊이 파고 들어가지 않습니다. 돌파해 들어가지 않습니다. 하지만 밥 존스 목사님은 인자와 엄위 그 사이에 있는 생명의 좁은 길을 분명히 아십니다. 그래서 인자 쪽으로도 엄위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으시고, 죄에 대해 심각하시고 애통해하십니다.

  

인내심을 가지고 철두철미하게 한결같이 자기와 싸우면서 자기의 욕심과 자아를 깨뜨리면서 끈질기게 나아가야 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그런데 어느 민족을 봐도 충성스러움의 열매를 아름답게 맺을 기질을 가진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민족에게, 우리에게 소망을 가지고 계십니다. 전 세계에서 끈질기게 기도하는 민족이 우리입니다. 초점이 잘못돼서 그동안은 헛된 기도 많이 했지만, 이제 우리가 바른 초점을 가지고 끈질긴 기도로 들어가고 끈질긴 자아와의 싸움으로 들어가고 끈질기게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갈망으로 들어간다면, 우리를 통해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성취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민족 가운데서 누가, 어느 교회가, 어떤 성도들이 이 부르심을 기쁨으로 받고 이 부르심 안으로 들어올 것인가.. 이것을 위한 대가를 지불할 것인가.. 지금으로선 우리밖에 없다는 것이 현실입니다. 물론 우리가 모르는 그런 교회들이 있겠지만, 그 숫자가 얼마나 많을까요? 그나마 상대적으로 다수가 모여 있는 곳이 큰믿음교회의 흐름 안에 들어와 있는 교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다윗이 충성된 자로 자기 혼자만 세워졌다면,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끝까지 이스라엘을 가장 부강하게 세우면서 자기 부르심을 다 성취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의 충성스러움이 그와 함께하던 많은 사람들을 충성스런 용사들로 세웠습니다.

  

삼상 23: 13-17 “또 삼십 두목 중 세 사람이 곡식 벨 때에 아둘람 굴에 내려가 다윗에게 나아갔는데 때에 블레셋 사람의 한 무리가 르바임 골짜기에 진 쳤더라 그때에 다윗은 산성에 있고 그때에 블레셋 사람의 요새는 베들레헴에 있는지라 다윗이 소원하여 이르되 베들레헴 성 문 곁 우물물을 누가 내게 마시게 할까 하매 세 용사가 블레셋 사람의 진영을 돌파하고 지나가서 베들레헴 성문 곁 우물물을 길어 가지고 다윗에게로 왔으나 다윗이 마시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그 물을 여호와께 부어드리며 이르되 여호와여 내가 나를 위하여 결단코 이런 일을 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는 목숨을 걸고 갔던 사람들의 피가 아니니이까 하고 마시기를 즐겨하지 아니하니라 세 용사가 이런 일을 행하였더라."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충성스런 삶을 살면서,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닐 때, 아둘람 굴에 숨어살면서도 400여 명의 무리들이 그를 따랐고 아기스 왕에게 나아갈 때도 600명의 사람들이 그를 좇습니다. 이렇게 사람들과 함께 사울을 피해 다니면서도 다윗은 계속 하나님 앞에서 살았습니다. 여호와께서 기름 부은 자를 해할 수 없다고,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그가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서 살면서 그 용사들에게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무엇인지, 또 사울왕의 신하로서 지도자 왕을 충성스럽게 계속 자기 위치에서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본을 보여 준 것입니다.

결국 그것이 다윗의 부하들 중에 정말 충성스러운 자들, 다윗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는 진정한 충성스러운 용사들을 거느리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나라가 세워졌을 때 그 무리들 속에서 나온 각료들과 군대장관들이 각 파트에서 포진해서 다윗을 섬겼기 때문에 이스라엘들이 강성하여지고-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심으로 이긴 것이 사실이지만- 그 충성스러운 용사들을 하나님이 사용하셔서, 가는 전투마다 다윗과 함께하셔서 이기게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만 잘하면 된다’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합지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그 권위 아래가 모두 하나 되는 것이, 실제적인 자아의 죽음입니다.

나만 두드러지려 하고 나만 칭찬받으려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어서 다른 사람이 세워지고 다른 사람의 일이 추진되는 것, 그 일을 위해 내가 손해 봐야 한다면 손해를 보고, 파산해야 한다면 파산되는 것, 내가 그 일을 위해 여호와의 산 정상에 있는 것이 최고로 좋지만 산 아래로 내려가야 한다고 하면 내려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나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위해 지도자를 부르셨고, 그 밑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나는 무너지고 가난케 되고 실패하고 내 사역은 실패해도 나는 인정받지 못할 수도 있고 내 명성은 추락할 수 있다 할지라도,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뜻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이 성취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역할을 위해 누가 중요합니까? 우리 교회로 따지면 담임 목사님, 우리의 지도자입니다. 그것이 우선순위입니다.

다윗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베들레헴 성문 곁의 우물물을 가져다 준 세 용사처럼, 나의 부르심이 아니라 내가 섬기는 지도자가 성취시키는 하나님 나라의 그 부르심에 대한 것이 진정한 충성입니다. 큰믿음교회 안에 이 충성이 이뤄지지 않으면 큰믿음교회를 향한 부르심은 성취될 수 없습니다. 열방을 위한 부르심을 성취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하나님 혼자 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우리를 신부들을 사용해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실패해서도 안 되고 포기해도 안 되고 반드시 우리는 승리해서 그 일을 이루어야 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회 안에서 이것이 안 되고 있습니다. 각자가 자기 사역입니다. 물론 다른 교회와 비교했을 때는 상대적으로는 너무나 좋은 교회입니다. 너무나 훌륭한 교회인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그 높은 부르심이 성취되기 위해서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 앞에 살고 있는 삶, 이 자세, 이 정도의 충성으로는 아닙니다. 하지만 내일부터 당장에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봤던 모세나 아브라함 다윗 여호수아 갈렙 그 용사들과 같은 헌신으로 우리가 헌신한다면 우리 교회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 될 것입니다. 폭발적으로 교세가 커지고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종횡무진일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모든 성도들 목회자들이 깜짝 놀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안 하고 있습니다. 내 보따리를 안 풀어놓는 겁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자기의 보화, 자기의 미래, 자기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서 보따리를 끌어안고, 헌신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저는 매일매일 보따리를 풀어놓는 훈련을 했던 것 같습니다. 30년의 세월을 주님이 내게 부어주신 것들을 주님의 나라, 영혼들을 위해 다 쏟아 부었습니다. 세상에 유익이 되는 것뿐 아니라 영적인 영역에 있어서 제게 유익이 되는 것도 다 내려놨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요, 대부흥과 대추수를 위한 그 부르심 안에 들어와 있는 교회와 성도들 담임 목사님 그래서 우리 성도들이 온전케 되는 그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에 유익이 되는 것에 욕심 부린다면, 저는 집회할 필요가 없습니다. 집회를 안 합니다. 주님과 골방에 들어가 그 영광을 대면하는 시간들로 보낼 것입니다.

  

여러분이 진정한 용사들로 충성스런 용사들로 반드시 일어나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충성의 아주 높은 수준에까지 여러분이 다 올라가게 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안에 ‘나는 무너져도 교회는 지도자는 세워져야 한다.’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정말 그리스도의 시야, 하나님의 시야를 가져야 합니다.

저는 큰믿음교회가 세워지면 바로 폭발적으로 사람들이 헌신하고 희생하고 전부를 내놓아서 금방 세계의 주목을 받게 될 줄 알았습니다. 정직하게 고백하면 너무나 이기적입니다. 그렇게 은혜 받고 변화되었다고 너무나 고맙다고 감사하다고 여기저기서 몰려왔지만, 정말 충격적일 정도로 자기들 보따리를 풀어놓지 않는 것을 보고 제가 굉장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무에게나 책망하지 않으십니다. 아무에게나 문제점, 그 안의 탐심, 교만, 오만들을 지적하지 않으십니다. 다 아시면서 기다리십니다. 하나님이 잠잠히 계시니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홀히 여깁니다. 하나님이 못 보시나 보다 모르시나보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지적하실 때는, 그만큼 우리를 신뢰하고 믿으시고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인정하시면, 그때서야 실상을 말해주십니다. 이제 하나님이 우리를 인정하셔서 ‘내가 너희를 설령 회초리로 때린다 할지라도 너희가 도망가는 것이 아니라 내 품으로 달려들 줄을 알기 때문에, 잘못했어요, 용서해주세요, 고쳐주세요, 그렇게 품으로 달려올, 믿을 수 있는 자녀’로 성장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훈계하시고 책망하시는 것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이 일을 사람을 통해서 하시는데, 이 세상에서의 일은 물질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도 안 드리고 몸도 안 드리고 물질도 안 드리면 무엇으로 하시겠습니까? 오병이어입니다. 우리가 드리면 하나님이 받으시고 그것으로부터 기적이 일어납니다. 초자연적인 부어짐이 거기서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잘 받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충성스러운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맡길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혼들을 맡기실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을 책임지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작은 것을 맡기시고 그것을 우리가 충성스럽게 감당하면 우리에게 큰 것들을 계속 맡기시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딤전 1: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바울은 자기가 충성스러움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하나님이 그것을 얼마나 기뻐하시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나를 충성되게 여겨 직분을 맡기셨다’고 말합니다.

즉 충성은 자신이 아는 것입니다. 충성은 진심에서 나오는 것이고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기에, 자신이 이미 자기 마음 안에서 압니다. 그것을 위해 그 대상을 위해 그 일을 위해 내 전부를 드리는 것은 사랑 때문에 나오는 것이기에, 자신이 그 일을 하는데 대충하고 있는지 정말 충성스럽게 진심으로 하고 있는지를 자신이 압니다.

  

하나님이 일으켜 세워 직분을 주셔서 사도면 사도, 선지자면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목사와 교사로 일으켜 쓰는 사람, 그들은 충성된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충성된 자들에게만 직분을 주고 그들을 일으켜 사용하십니다.

달리 말하면 충성되지 못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직분이 부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직분을 주셔서 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어떤 조건이나 자격을 갖추니까 사람들로부터 그 직분이 온 것이거나, 또 자기 스스로 일어나 세워져서 일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자신 안에서 ‘나는 정말 충성하고 있어’라고 정직하게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저를 의심하거나 불신하는 반응을 보였을 때, 그냥 제 안에서 올라오는 말이 ‘난 정말인데, 난 진짜 주님을 사랑하는데, 난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데, 난 정말 하나님만을 위해서 살고 싶은데..하나님이 기뻐하신다면 하나님 나라에 유익하다면 내 전부를 드리고 싶은 마음을 내가 알기 때문에 나는 진짜인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반드시 ‘그러나 내가 혹시 가짜일지 모르니까 하나님 저를 진짜로 만들어주세요. 내 스스로 속아서 내가 가짜이면서 진짜로 착각하고 있다면 진짜로 만들어 주세요. 나는 진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서 반드시 진짜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가짜가 되면 나는 이미 멸망이기 때문에 나는 진짜가 되어야 하기 때문에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의심하고 불신으로 말할 때 내 안에서 올라와야 됩니다. 여러분도 ‘나는 진짜인데. 나는 정말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싶어서 살고 있는데.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나는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라는 확신이 자기 안에 있어야 합니다. 자기 안에서 자신의 충성스러움이 발견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나는 가짜가 아니다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리스도의 사도로서 진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하나님을 위해 수고하고 헌신하고 있다. 내 삶을 살고 있다.’고 극구 주장하고 반박했습니다.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지 다른 것을 좇는 자가 아니라고, 나는 진짜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참된 제자요, 사도라고 주장했습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을 향한 충성심이 있기 때문에 그냥 자기가 아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그 흔적은 주님과 동행한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나는 누가 뭐라 해도 주님과 함께 살면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졌고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조각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내 안에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에 대해서 더 이상 말하지 말라 더 이상 의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사람들이, 사탄이,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물을 때, ‘나는 하나님 밖에 없어요. 하나님이 아시잖아요. 아버지가 아시잖아요. 내 안에 하나님밖에 없는 것을 아시잖아요. 주님이 아시잖아요.’라는 고백이 나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직 온전히 하나님을 충성되게 신실하게 섬기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여러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들이 나에 대해 의심을 갖고 내 신앙과 정체성에 대해 의혹을 가지고 말해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이것은 가짜입니다. 우리 안에 양심이 있고 우리 안에 예수님의 생명이 있고 내 영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담고 있는데 그 영이 가만히 있다면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진심으로 말하게 되어 있습니다. ‘너는 누구냐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사람들이 세례요한에게, 예수님에게, 질문했습니다. 예수님은 그 자체가 협박인 질문에 대해 여전히 나와 하나님은 하나이고 내 아버지는 하나님이시고 나는 하늘로부터 왔고 땅에서 난 자가 아니라 위에서 난 자라고 자기 정체성을 계속 주장하십니다. 그것이 사실이고 실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지 사랑하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야 됩니다. ‘난 잘 모르겠는데요.’ 이 말이 나오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은 절대로 용사가 될 수 없습니다. 사탄이 마음껏 공략하고 속이고 하나님 나라를 허무는, 십자가의 원수로 살 수 있는,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자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구하고 구하셔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는 자기 심령을, 충성스러움으로 살고 있는 자기 자신의 실체를 자기 안에서 발견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인정받을 수 있는 그런 단계로까지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고전 7: 25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스러운 자가 된 내가 의견을 말하노니.”

  

자기는 충성된 자가 되었다고 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저도 제가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겨오고 살아온 것에 대해서 여러분에게 계속 고백했습니다. 제 살아온 삶이 그것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고 30년의 삶, 오직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살아온 그 삶밖에 저에게는 없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한결같이 내 마음이 누구를 향해 달려가는가, 내 몸이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가, 내 마음과 내 시간과 내 물질과 정성이 어디로 부어지는가. 나는 정직하게 하나님께로 하나님께로 향하여 나아갔기 때문에 그것밖에 말할 수가 없습니다. 제가 교만해서가 아니라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그것 외에 달리 제 30년의 삶을 말할 게 없습니다.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제가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분 앞에서의 삶 외에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삶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그것을 말할 수 없다면 바울의 주장처럼 충성되게 살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부터 그렇게 산다면 여러분도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자랑하기 위함도 아니요 높아지기 위함도 아니요 인정받고 싶어서도 아니고, 그것이 사실이고 실제이기 때문에 그것을 말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삶을 목표로, 내일부터 살아간다면 자신도 모르게 충성된 자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자신이 날이면 날마다 시시때때로 순간순간 자기 마음에 무엇을 품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위해서 시간과 물질과 몸과 마음을 드리며 사는지 하나님이 아시고 자기가 압니다. 그래서 충성스러운 자는 자신을 말할 때 ‘나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해 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위해서만 나에게는 세월이 있었고 날들이 있었고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것 아닌 다른 것을 위한 날들은 시간들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에서 계속 붙잡고 있었던 것이 무엇인지 자기가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내 마음에 붙잡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마음속엔 예수 그리스도 외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이 마지막 때에 여러분에게서 보고자 하는 심령입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얻고자 하십니다. 우리 안에서 내가 네 안에 네가 내 안에, 그렇게 우리 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일치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는 데에 있어서 아낌없이 그 사랑과 긍휼, 자비, 인자, 진실하심을 부으셨습니다. 그분은 그것에 충성스러우셨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데에 있어서도 충성스러운 마음이 되어야 합니다. 나를 사랑하시는 데에 충성스러운 그분과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표적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죽은 자를 살렸지만 바울이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초점이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일관되게 예수 그리스도, 사람들의 마음을 예수님께로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것, 즉 자기 안에 그리스도 외에는 전혀 아무것도 허용하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럴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이 정도로도 거룩하게 살고 있고 이 정도라도 진실하게 살고 있고 이렇게 은사도 왔고 기름부음도 있고’ 이것으로 만족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마지막 때에는 초대 교회를 능가하는 교회가 일어나야 하고, 바울을 능가하는 자들이 일어나야 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리스도가 한 것보다 더 큰 것도 하는 그런 세대가 일어나야, 만유가 회복되고 열방이 구원받는 것입니다.

  

또 바울 안에 있었던 충성스러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한 마음이 우리 안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말씀을 배우고 알고 있다고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비전을 보고 있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비전이 실제가 될 수 있도록 내 안에서 이루어져야 되는데, 하나님은 그 일을 하기 원하십니다.

  

사도행전 20: 17-20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오매 그들에게 말하되 아시아에서 들어온 첫날부터 지금까지 내가 항상 여러분 가운데서 어떻게 행하였는지를 여러분도 아는 바니 곧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로 말미암아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어떤 고난과 아픔을 내 육체에 채우면서 살아왔는가, 내 삶을 기록하거나 말할 때 다른 사람 앞에서 증거할 때 오직 그것만이 내가 말할 수 있는 전부가 되는 삶, 바울은 그것밖에 말할 게 없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이 다 증인인 겁니다.

 

우리가 가족들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남편이 아내가 자녀가 알지 않느냐 밤낮으로 나를 본 내 삶의 증인들이 나와 가까이 사는 동역자 이웃들이 내 삶을 증거해 줄 수 있는 그것이, 충성스러운 자들이 삶 가운데서 자기를 변명하고 자기를 변호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이것이 거짓 없는 믿음으로 양심에 거리낌 없이 하나님을 충성되게 섬기는 자들의 변명입니다.

 

‘나는 밤낮으로 세상 때문에 울었고 육신의 것 때문에 울었고 나의 야망 때문에 수고했고 나의 명에를 위해 밤낮 수고했고’가 아니라, 우리의 양심에서 ‘주님을 위해 영혼들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들을 위해 나는 잠자지 않았습니다. 나는 헐벗었습니다. 굶주리고 참고 견디고 눈물로 살았습니다.’ 이 것이 충성스러운 그들의 입술을 통해서 나올 수 있는 고백입니다.

 

사도행전 20: 23-24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사도행전 20: 31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였던 것을 기억하라.”

 

자기의 사명 그 부르심을 위해 이미 생명을 내려놓았던 그의 삶은, 너무나 충성스러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의 삶의 모범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기준으로 자기가 충성하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는 충성된 자라고 주님이 나를 인정하고 칭찬하실 것이라고 무엇을 누구를 기준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바울 앞에 서서 여러분 속에 이루어진 충성이 어느 정도 어느 수준인지를, 아프겠지만 괴롭겠지만 측정해 보아야 합니다. 바울의 삶을 저울 삼아서 기준 삼아서 내 삶을 돌아보셔야 합니다. 밤낮으로 수고했는데 눈물 흘렸는데 그것이 누구를 위한 것입니까? 만약 착각하고 스스로 속았던 것이 있었다면 그 착각과 속임수에서 깨어 나오시기를 원합니다. 비로소 우리가 깨어나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 없이는 이런 깨어짐 없이는 절대로 충성스러운 그리스도의 신부들이 될 수 없습니다. 이 밤은 깨드려지는 밤이 되기를 원합니다.

 

딤후 2: 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그들이 또 다른 사람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하나님 나라의 일을 하나님이 누구에게 맡기기를 원하시는지, 바울을 통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충성되지 못한 자들이 자원하여 맡아서 얼마나 수많은 영혼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이 한국 교회의 실상이고 수많은 교회들의 실상이고 수많은 사역들의 실상입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함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충성된 자들이 영혼들을 가르치고 영혼들의 양육자가 되고 목자가 되어서, 자신의 피로 값 주고 산 우리의 진정한 임금이요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수많은 영혼들을 이끌어야 하는데 아무에게나 영혼들을 맡기는 이 실상이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여러분, 우리가 정말로 충성스러운 증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이 안심하고 수많은 영혼들을 맡기시고 우리 품으로 보내셔서 저들이 다 구원받게 하고 영생을 얻게 하는 그 일을 우리가 감당해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목숨 걸고 그 일에 도전하고 그 일이 성취되도록 대가 지불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자기 안에 주님이 원하시는 이 충성스러움,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도록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을 통해 도전받고 바울의 그 길을 내가 가기를 원해서, 지금 현재 내 안에 이루어진 하나님을 향한 충성스러움에 대해 만족하지 않고 부끄러워하면서 그것 때문에 번민하면서 싸우는 그 삶으로 들어간다면, 우리 안에 그 일이 실제로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시간을, 내 안에 있는 이기심과 게으름과 세상을 향한 세상의 것을 누리고자 하는 그 욕구와 싸웠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다 죄인 되었었기 때문에, 그 타락하고 부패한 마음속에 뿌려진 죄성이 없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기도는 바로 그것과의 싸움, 전투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주님의 은혜로 성령님의 능력으로 그것이 소멸되고 내려질 때까지 몸부림치며 싸우는 자가, 결국은 자기를 충성스런 사람으로 일으켜 세워지게 하는 그 아름다운 보배로운 삶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싸우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잘 싸워오셨지만 더 적극적으로 싸우게 되시기 바랍니다. 더 열심을 내셔야 합니다. 더 큰 부담감을 가지고 싸우셔야 합니다. 그러면 반드시 그 일이 여러분 안에서 성취될 것입니다.

 

예수님 얘기로 나아가겠습니다.

요한계시록 3: 14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이번에 충성에 대해서 제 마음이 붙잡히면서,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성품 가운데 들어 있는 그 충성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축복이며 은총인가, 또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알게 되었습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을 통해서 받은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이르시되” 이 메시지로, 하나님의 사랑이 완전한 사랑임을 확고하게 알게 되고 깨닫게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달리 말하면, 이 사랑이 절대로 변개치 않을 것이다 그가 충성이시기 때문에, 그 안에 충성의 아름다움이 그 헌신이 우리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시고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에, 영원토록 그 사랑으로 우리를 지키시고 보호하실 것이다. 이런 미쁘시고 신실하신 하나님이심을 더 구체적으로 실제적으로 알게 되어서 자신 있게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한 것입니다. 즉 사랑을 개념으로만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실제를 알게 되는,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저도 굉장히 충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아멘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라고 한 표현에서 충성이라는 단어 하나로-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제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온전히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앙망하는 그런 삶을 살아온 것이 사실이기는 하지만-그 사랑에 대한 신뢰가 더 견고해졌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장성하는 그 순간이 무엇인지를 경험하게 되면서, 예전의 믿음과는 그 밀도가 달라졌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나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그것이 손에 잡혀지는 것입니다. 이전의 충성보다 더 크고 높은 차원의 충성으로 들어갈 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내 안에서 더 증가되고 장성한 분량으로 자라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함이 자라는 데에 있어서 더 구체적인 세부적인 방법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 충성할 것입니다. 주님이 내게 맡기신 일에 대해 맡기신 영혼들에 대해 여러분에 대해 큰믿음교회와 우리 목사님들과 그 흐름 안에 있는 모든 영혼들에 대해 저는 더 충성할 것입니다. 그것이 주님께서 내게 요구하시는 것이고, 내게서 발견코자 하는-당신 안에 있는 아름다움, 우리 안에서 보고자 하시는- 그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영혼들을 위해 내가 얼마나 충성하는가?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충성스러운 사랑 때문에, 내 안에서도 그 충성스러운 사랑을 보기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이제 가족들과의 관계에서 성도들과의 관계에서 섬기는 목사님에 대해서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지금 마음속에서 깨달아지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가장 도전받은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1: 5에서 예수님을 이렇게 말합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예수님이 충성된 증인으로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또 히브리서3: 2-6 에 보면

 

“그는 자기를 세우신 이에게 신실하시기를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한 것과 같이 하셨으니 그는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마치 집 지은 자가 그 집보다 더욱 존귀함 같으니라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언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종으로서 신실하였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그와 같이 하셨으니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우리는 그의 집이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집을 맡은 아들로서,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서 충성되었다고, 하나님이 인정하신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도 자기를 세우신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의 집에 자기를 맏아들로서 그 집을 맡기신 것에 대해 충성됨으로 그 일을 감당하셨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온 집에 충성하셨던 것처럼 예수님도 그렇게 충성하셨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의 삶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들의 삶입니다. 신랑 되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집을 위해서 충성스러움으로 그 집을 돌보고 섬겼다면, 당연히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의 집을 우리도 충성스러움으로 섬겨야하는 것입니다.

 

그는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영광의 왕이십니다. 그런데도 그는 충성스러움으로 섬김의 자리에서 우리를 종으로 섬겨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로 그분이 은혜로 우리를 충성되게 섬기셨기 때문에, 우리가 그 영광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가 그것을 누리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예수 그리스도의 동역자가 되어서 벗이 되어서 신부가 되어서 충성됨으로 함께 발을 맞추며 나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 우리가 쓰임 받지 못합니까? 그리스도는 충성스럽게 하나님의 집을 돌보시는데, 우리 안에 그 충성이 없기 때문에 함께 동역이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충성이 어떤 충성입니까?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이 그토록 사랑하는 백성들을 위해 아낌없이 자기를 내어주고 깨뜨려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온전한 충성으로 모든 것을 행하십니다. 절대로 불완전한 상태에서 일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완벽하게 하나님의 집을 세우시고 하나님 나라를 세우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동역자가 되려면, 이 마지막 때에 온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통로,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려면,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그 충성이 우리 안에 이루어져서 그분과 일치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은혜로 내가 충성스러운 사람이 되고,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 몸부림치며 필사적으로 그 일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됩니다. 이것이 안 되면 대부흥을 위한 준비가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충성스럽게 행하셨기 때문에 그리스도는 자신의 부르심을 온전히 이루셨고 우리에게 구원이 왔습니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신부로서 자신이 쓰임 받는 것에 대해 왜 그렇게 충성을 들고 나왔는가? 예수 그리스도와 동역하는 삶은 충성 없이는 안 된다는 것을 바울은 알았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24: 45 과 누가복음 16:10 에서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충성되고 지혜 있는 종이 되어 주인에게 그 집 사람들을 맡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 자가 누구냐.”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잠언 25: 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

 

우리가 정말 주님으로부터 쓰임받기를 원하고, 마지막 때 주님의 부르심에 동참하는 통로가 되길 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었고 모세 안에 있었고 아브라함 다윗과 바울 안에 있었던 그 충성스러움을 우리 안에 이루지 못한다면, 절대로 우리가 통로가 될 수 없다는 그 진실을 저는 말하기 원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던지 이것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면 주님과의 동역이 가능합니다.

 

충성스러운 여호와의 군대가 마지막 때 예수 그리스도의 군대의 특징이 될 것입니다. 충성스러움이 뒷받침 되지 않는다면 마지막 때 교회의 부르심을 위한 하나님의 용사로 소집되지 못합니다.

여러분 중에, 충성된 자를 충성된 증인들을 모아서 열방을 취하고, 온 세상에 덮여 있는 어두움을 깨뜨려 하나님의 영광을 온 세상에 가득 채우는 그 일이 실제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그 고백으로 들어가게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의 삶을 바라보세요. 여러분의 양심이 하나님 안에서 내 삶을 바라보게 하세요. 거기에 답이 있을 것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삶을 사람들에게 뭐라고 고백했는가, 여러분은 주님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 앞에서 뭐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고백해 보세요. 자기의 양심에 비추어서 자신의 삶을 고백해 보세요. 그 고백이 여러분의 거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모세를 생각해 보세요. 그리고 바울을 생각해 보세요.

 

 

나는 주님밖에 없습니다. 나는 오직 주님을 위해 살았습니다. 아무리 내 삶을 돌아봐도 오직 그리스도 예수 그분과 함께 한 흔적밖에 없습니다. 내 기쁨도 그분을 위한 기쁨이었고 슬픔도 아픔도 그분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밤낮으로 주님 앞에 서 있었습니다. 세상 앞에 사람 앞에 서 있지 않았고 오직 그리스도 예수 그분 앞에 서 있었습니다. 내게는 세상이 보이지 않았고 사람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내게는 오직 주님만 보였습니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충성된 자들의 삶입니다.

 

 

주님 앞에 누가 덮을 것입니까? 그 불꽃같은 눈이 나의 심장을 살피고 나의 폐부 깊숙한 곳을 감찰하시는 그 주님 앞에서 나를 어떻게 속이고 덮을 수 있겠는가.

주님 내가 그렇게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내게는 주님밖에 없었다고 그렇게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주님만을 원했다고 그렇게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주님만을 원하지 않았고, 내가 그렇게 고백할 수 없어서 주님 앞에 내 마음이 너무나 아픕니다.

오직 주님밖에 없다고 주께서 그것을 아신다고 그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내가 주를 사랑함을 주님이 아시나이다 그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나는 나를 사랑했고, 나는 세상을 사랑했고, 내 자녀를 사랑하고 내 남편을 사랑하고 내 아내를 사랑한 것이 주님보다 우선이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출처 : 주님이 지금 오십니다
글쓴이 : 스티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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