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信仰)의 사람 노아.
창7:13-24절, 429.490.503장.*
히11:7절에 보면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창세기 6, 7, 8장에 나타난 노아에 대한 기사를 한 마디로 해설해준 귀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또 벧후 2:5절에는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식구를 보존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도 노아에 대한 바른 평가입니다. 또 마24:37절에는“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ꡓ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노아때의 사회상이 마지막 심판때의 상황과 같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신약성경의 말씀 곧 예수님과 바울, 베드로 모두가 노아 홍수에 관한 창세기의 메시지를 역사적 사건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것을 단순히 이야기꺼리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께서 역사속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노아 홍수와 관련된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구속사 전체의 맥락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노아홍수에서도 그 흔적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돌들이 소리 지른다는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고고학이 발전될수록 성경의 말씀은 언제나 역사적 사실이며 진실이란 것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더욱 흥미 있는 것은 전세계 오래된 나라의 문헌에는 창세기의 노아 홍수와 비슷한 기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노아 홍수는 전 세계적 사건이었으며 모든 민족들이 다 알고 있는 내용이란 뜻입니다. 또 노아 홍수에 관한 기사가 다른 민족에게 전달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 노아 홍수사건은 하나님을 알지못하고 철저히 하나님을 배신하고 타락한 인간들을 심판하신 유일무이한 전 지구적인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노아 홍수는 단순히 비가 온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거대한 물근원으로부터 물이 솟고 그리하여 지각이 변동되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오늘날 지상 수백 수천미터의 산에서 조개의 화석이나 물고기의 화석이 발견되는 것도 노아 홍수의 역사적 사건과 그 규모를 짐작케 합니다. 그러면 이 본문으로부터 몇가지 진리의 메시지를 발견해 보겠습니다. 우선 왜 하나님께서는 홍수심판을 내리셨는가 함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철저한 타락과 배신으로 말미암은 심판입니다. 창 6:11-12절에서 “때에 온 땅이 하나님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송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남용해서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인간이 하나님이 된 듯이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노아 시대의 형편을 말씀하시면서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고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결혼을 정죄하고 먹는 것을 정죄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을 상실하면 필경 도달하는 곳은 성적 도덕적 타락과 스스로 파멸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극에 달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지구는 하나님의 것이요 이 우주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가 만든 것이므로 그가 주인이십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지은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귀히 여기며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이는 마땅히 심판 받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못 쓰는 물건은 폐기처분하듯이 본래 만든 창조의 목적에서 어긋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세의 징조와 노아의 때를 연결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노아의 시대를 뺨치는 타락한 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하나님의 심판은 없다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유토피아가 올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사상은 타락한 향락문화를 조장합니다. 오늘날의 세상을 철저히 무신론적인 유물주의 사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모든 현상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의 문제도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해결도,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개인의 문제도 가정의 문제도 국가의 문제도 교회의 문제도 결국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결국은 믿음을 회복할 때만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생각할 것은 회개치 않으면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배를 지으라고 명령하시고 120년동안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했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이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만 아니라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십니다.
로마서 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박국은 기도하면서 “진노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소서”(합3:2절). 라고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고 구원이었습니다.
120년! 그것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습니다. 이 기간은 회개를 기다리는 시기였습니다. 사람들이 노아의 전도를 받고 회개하고 돌아왔다면 구원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회개도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회개를 미루는 것은 사실은 미련한 일입니다. 회개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회개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때는 바로 오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으면서 홍수심판이 있을 것을 외쳤을 때에 사람들은 노아를 비웃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청명한 날에 무슨 홍수가 나겠는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빈정댔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낙심하지 않고 120년 동안 그의 설교와 전도사역을 계속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그 시대의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했겠습니까? 그것은 노아는 의가 없던 당시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창 7:5절에서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느니라ꡓ고 했습니다. 사실 노아는 그가 선천적으로 의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도 우리와 꼭 같은 감정과 정서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히11장에서 노아는 믿음으로 살았기에 자기의 사명을 감당했다고 썼습니다. 사도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고 했습니다.
특별히 로마서 3:28절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곧 의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입니다.
히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결국 아무리 세상이 부패하고 타락하고, 소망이 없다해도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요구하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믿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단순한 마음의 의지나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신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걸음걸이입니다. 말하자면 노아의 신앙은 삶이 있는 신앙이요 행동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어느 시대이든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과 그 신앙대로 구체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노아가 그처럼 120년동안 설교사역과 목회사역을 했는데 어째서 자기 식구 여덟명 외에는 구원을 받지 못했는가 함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목회에 실패자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노아를 목회의 실패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대한 의의 설교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벧후2:5절).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노아가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설교하지 않고 방주를 지으면서 화려한 연회를 열고 대중들이 좋아하는 멋진 프로그램을 개발했다면 사람들은 방주로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의 열린 음악회처럼 유행가와 팝송과 클래식과 국악으로 대중들이 좋아하는 모두를 취급하는 종교 다원주의적인 발상을 가지고 했다면 방주가 미어터지도록 사람들이 몰려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고지식하고 외롭게 주의 말씀만을 증거했습니다.
사람들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 노아는 너무나 융통성이 없는 막힌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백화점 경영기법이나 기업경영이론을 도입해서 많은 사람을 동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선포했습니다. 믿음이 없던 시대에 믿음이 무엇인가를 증거한 것은 바로 목회의 성공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시대에 하나님의 의를 소리높여 외친 그 자체가 바로 성공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꼭 알아야 할 것은 주의 일을 하면서 당장 큰 성과가 없다고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늘 업적위주로 일하기 쉽습니다. 숫자가 늘지 않는다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오늘날은 사람을 판단할 때 항상 숫자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업적만 가지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급속한 결과를 얻으려고 눈에 보이는 결과를 보이려고 안절부절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결과가 당장 안 보여도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반응이 없다고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수백명의 사람을 기쁘게 했다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실패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위해 사는 사람은 고독을 각오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다보면 자연히 수단을 쓰게 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쪽으로 가기 쉽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 홍수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노아 방주를 설계하시고 노아 방주에 정결한 짐승 암수 일곱씩을, 공중의 새와 모든 짐승 암수 둘씩을 방주로 들어오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서라도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방주안에 들어오는 자는 구원에 이릅니다.
이 방주는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는자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고전5: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방주안에 있는 자는 심판을 피하듯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한 분이 계신 다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7:13-24절, 429.490.503장.*
히11:7절에 보면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한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바로 창세기 6, 7, 8장에 나타난 노아에 대한 기사를 한 마디로 해설해준 귀한 진리의 말씀입니다.
또 벧후 2:5절에는 “옛 세상을 용서치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식구를 보존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도 노아에 대한 바른 평가입니다. 또 마24:37절에는“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ꡓ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노아때의 사회상이 마지막 심판때의 상황과 같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신약성경의 말씀 곧 예수님과 바울, 베드로 모두가 노아 홍수에 관한 창세기의 메시지를 역사적 사건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그것을 단순히 이야기꺼리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께서 역사속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노아 홍수와 관련된 모든 사건들은 하나님의 구속사 전체의 맥락속에서 이해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노아홍수에서도 그 흔적이 속속 드러나고 있습니다. 돌들이 소리 지른다는 말씀을 연상케 합니다. 고고학이 발전될수록 성경의 말씀은 언제나 역사적 사실이며 진실이란 것이 증명되고 있습니다.
더욱 흥미 있는 것은 전세계 오래된 나라의 문헌에는 창세기의 노아 홍수와 비슷한 기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노아 홍수는 전 세계적 사건이었으며 모든 민족들이 다 알고 있는 내용이란 뜻입니다. 또 노아 홍수에 관한 기사가 다른 민족에게 전달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이 노아 홍수사건은 하나님을 알지못하고 철저히 하나님을 배신하고 타락한 인간들을 심판하신 유일무이한 전 지구적인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노아 홍수는 단순히 비가 온 것이 아니라 땅에서 거대한 물근원으로부터 물이 솟고 그리하여 지각이 변동되는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오늘날 지상 수백 수천미터의 산에서 조개의 화석이나 물고기의 화석이 발견되는 것도 노아 홍수의 역사적 사건과 그 규모를 짐작케 합니다. 그러면 이 본문으로부터 몇가지 진리의 메시지를 발견해 보겠습니다. 우선 왜 하나님께서는 홍수심판을 내리셨는가 함입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철저한 타락과 배신으로 말미암은 심판입니다. 창 6:11-12절에서 “때에 온 땅이 하나님앞에 패괴하여 강포가 땅에 충만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었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자기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은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송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의지를 남용해서 제멋대로 살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인간이 하나님이 된 듯이 살았습니다.
예수님은 노아 시대의 형편을 말씀하시면서 시집가고 장가가고 먹고 마시고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결혼을 정죄하고 먹는 것을 정죄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의 내용은 인간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을 상실하면 필경 도달하는 곳은 성적 도덕적 타락과 스스로 파멸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극에 달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지구는 하나님의 것이요 이 우주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가 만든 것이므로 그가 주인이십니다. 인생은 하나님이 지은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도록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귀히 여기며 부끄러움을 영광으로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하나님을 대적한다면, 이는 마땅히 심판 받을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못 쓰는 물건은 폐기처분하듯이 본래 만든 창조의 목적에서 어긋날 때 하나님은 그것을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세의 징조와 노아의 때를 연결한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오늘날의 세상은 노아의 시대를 뺨치는 타락한 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하나님의 심판은 없다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인간의 마음먹기에 따라서 유토피아가 올 것처럼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사상은 타락한 향락문화를 조장합니다. 오늘날의 세상을 철저히 무신론적인 유물주의 사상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 모든 현상은 하나님을 배제하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오늘의 문제도 신앙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문제의 해결도,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입니다. 개인의 문제도 가정의 문제도 국가의 문제도 교회의 문제도 결국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결국은 믿음을 회복할 때만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또 하나 생각할 것은 회개치 않으면 반드시 심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배를 지으라고 명령하시고 120년동안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을 경고했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자비이십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만 아니라 구원의 하나님이심을 보여주십니다.
로마서 6: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박국은 기도하면서 “진노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소서”(합3:2절). 라고 했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목적은 심판이 아니고 구원이었습니다.
120년! 그것은 결코 짧은 기간이 아니었습니다. 이 기간은 회개를 기다리는 시기였습니다. 사람들이 노아의 전도를 받고 회개하고 돌아왔다면 구원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회개도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회개를 미루는 것은 사실은 미련한 일입니다. 회개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회개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때는 바로 오늘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했습니다. 노아가 방주를 지으면서 홍수심판이 있을 것을 외쳤을 때에 사람들은 노아를 비웃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청명한 날에 무슨 홍수가 나겠는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빈정댔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는 낙심하지 않고 120년 동안 그의 설교와 전도사역을 계속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그 시대의 하나님의 사람으로 사용했겠습니까? 그것은 노아는 의가 없던 당시에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창 7:5절에서 “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느니라ꡓ고 했습니다. 사실 노아는 그가 선천적으로 의인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도 우리와 꼭 같은 감정과 정서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신앙의 사람이었습니다. 히11장에서 노아는 믿음으로 살았기에 자기의 사명을 감당했다고 썼습니다. 사도바울은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고 했습니다.
특별히 로마서 3:28절에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고 했습니다. 믿음의 사람이 곧 의로운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은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이 아니라 믿음의 사람입니다.
히11:6절에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결국 아무리 세상이 부패하고 타락하고, 소망이 없다해도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을 요구하십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믿음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단순한 마음의 의지나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신전의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걸음걸이입니다. 말하자면 노아의 신앙은 삶이 있는 신앙이요 행동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어느 시대이든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과 그 신앙대로 구체적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생각해 볼 것은 노아가 그처럼 120년동안 설교사역과 목회사역을 했는데 어째서 자기 식구 여덟명 외에는 구원을 받지 못했는가 함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목회에 실패자가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러나 성경은 노아를 목회의 실패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를 위대한 의의 설교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벧후2:5절).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약 노아가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을 설교하지 않고 방주를 지으면서 화려한 연회를 열고 대중들이 좋아하는 멋진 프로그램을 개발했다면 사람들은 방주로 모여들었을 것입니다.
마치 오늘날의 열린 음악회처럼 유행가와 팝송과 클래식과 국악으로 대중들이 좋아하는 모두를 취급하는 종교 다원주의적인 발상을 가지고 했다면 방주가 미어터지도록 사람들이 몰려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고지식하고 외롭게 주의 말씀만을 증거했습니다.
사람들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에서 볼 때 노아는 너무나 융통성이 없는 막힌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사람들이 그러한 것처럼 백화점 경영기법이나 기업경영이론을 도입해서 많은 사람을 동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선포했습니다. 믿음이 없던 시대에 믿음이 무엇인가를 증거한 것은 바로 목회의 성공입니다. 참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시대에 하나님의 의를 소리높여 외친 그 자체가 바로 성공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꼭 알아야 할 것은 주의 일을 하면서 당장 큰 성과가 없다고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사람들은 늘 업적위주로 일하기 쉽습니다. 숫자가 늘지 않는다고 낙심하기 쉽습니다. 오늘날은 사람을 판단할 때 항상 숫자로 판단합니다. 그리고 업적만 가지고 판단합니다. 그래서 모두가 급속한 결과를 얻으려고 눈에 보이는 결과를 보이려고 안절부절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러나 결과가 당장 안 보여도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최선을 다했는데도 반응이 없다고 낙심할 것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수백명의 사람을 기쁘게 했다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바로 실패입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위해 사는 사람은 고독을 각오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고 하다보면 자연히 수단을 쓰게 되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쪽으로 가기 쉽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노아 홍수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노아 방주를 설계하시고 노아 방주에 정결한 짐승 암수 일곱씩을, 공중의 새와 모든 짐승 암수 둘씩을 방주로 들어오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진노 중에서라도 긍휼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방주안에 들어오는 자는 구원에 이릅니다.
이 방주는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는자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고전5: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방주안에 있는 자는 심판을 피하듯이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한 분이 계신 다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 3927Bible 말씀연구소
글쓴이 : 박봉웅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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