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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도 크게 보시는 하나님! (눅 21:1-4)
세상을 살다 보면 눈에 뜨이는 특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언제나 눈에 들어오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느 유명한 교회에서 유명한 강사님이 집회를 할 때 수백 명이 모였습니다. 강사님이 설교를 마치고 통성으로 기도하는 시간이었는데 유독 한 사람이 일어나서 큰 소리로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면서 기도를 합니다. 정말 특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강사님이 그에게 '하나님이 귀머거리인 줄 아세요. 왜 그렇게 일어나서 혼자 소리를 버럭버럭 질러요?' 그러자 그 분 사람이 '목사님! 생각해보세요. 수백 명이 기도하는 데 주님이 누구 기도를 들어 주시겠어요? 하나님에 눈에 뜨이게 기도하여야지요. 그래서 일어나서 저들보다 더 큰 소리로 기도합니다.' 어느 곳에 가든지 그렇게 눈에 뜨이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새마을 운동하면 고 박정희 대통령이 생각이 납니다. 그 시절에 새마을 운동을 주도한 유 태영 박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박 대통령에게 보고서를 냈습니다. 올라 온 보고서를 보고 박 대통령은 놀랐습니다. 너무나 글씨가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청와대로 오라고 했습니다.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박 대통령이 말했습니다. '같이 일하자' 유 박사님이 말했습니다. '가문에 영광입니다.' 이유를 물으니 수많은 보고서 중에 가장 글씨가 눈에 띄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눈에 뜨인 사람들이 종종 발견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예수님을 그렇게 보고 싶어서 뽕나무에 올라간 삭개오가 예수님의 눈에 들었습니다. 수많은 군중이 길을 걸어가고 있을 때 병을 고치고 싶어서 예수님의 뒤로 살그머니 와서 옷자락을 붙잡은 여인이 예수님의 눈에 돋보였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헌금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가난한 과부는 자기의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예수님의 눈에 그 과부가 돋보였습니다. 예수님은 가장 많이 헌금을 드렸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오늘 이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제목 소개!▶
하나님과 인간은 보는 눈이 다릅니다. 우리 인간은 화려한 것을 봅니다. 큰 것에 관심을 갖습니다. 또 그 사람의 배움의 수준과 생활의 넉넉함을 보고 평가합니다. 우리 노희 모 목사님의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목사님이 소형차를 타고 모 호텔 실업인 기도모임에 초청을 받고 갔습니다. 그런데 안내위원부터 본체만체하며 냉대를 하더랍니다. 많은 유명한 목사님들이 줄지어 들어오시는데 고급 승용차를 몰고 오시는 목사님은 대접하는 것이 다르더랍니다. 같이 동행했던 교회 집사님이 우리 목사님 차를 바꿔야겠다고 말하고 고급승용차로 바꿔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외모를 봅니다. 소형차와 중형차를 구별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보시는 눈이 다릅니다. 사람들의 외모를 보시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그 마음을 보십니다. 신앙적으로 양을 보지 않으시고 그 질을 보십니다. 형식적인 것을 보지 않으시고 그 믿음의 정성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 시간 하나님 앞에 진실을 찾고 정성을 다하는 믿음을 가져야 될 줄 믿습니다. /아멘!/ 오늘 본문에 우리 주님은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 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셨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돋보기를 쓰시고 작은 것을 크게 보시는 눈이십니다. 예수님은 돋보기를 쓰시고 계십니다. /할/
①하나님은 돋보기를 쓰시고 작은 충성도 크게 보십니다. 눅19:11절 이하에는 열 무나의 비유가 나옵니다. 13절에 보면 왕위를 받으려고 떠나는 귀인이 자기 종들을 불러 각각 한 므나씩 주며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고 명령을 하십니다. 여기 귀인은 주님 자신을 지칭한 말씀입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이 이 땅에 있는 성도들에게 한 무나씩의 사명을 주고 떠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장사하라'고 한 말은 '이익을 남기라'는 말입니다. 그들의 보고를 한 번 보겠습니다. 16절에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이 때 주인이 말했습니다. '잘 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할/ 둘째가 와서 말했습니다.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또 주인이 말했습니다.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 다음 종이 와서 말했습니다.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그러자 주인이 말했습니다.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이렇게 주인이 말하면서 옆에 있는 종들에게 말했습니다.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어라' 그 말을 들은 이들이 말했습니다. '주여 저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그러나 주인은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26). 하나님은 작은 충성을 돋보기를 쓰시고 크게 보시는 분이십니다. 맡은 일에 충성하는 것을 하나님은 보고 계십니다. 한 므나에 한 고을입니다. 열 고을에 권세를 물려받았습니다. 숙명여자 대학을 세우신 분은 임숙제여사입니다. 그는 17살에 결혼하였는데 19살에 과부가 되었습니다. 겨우 2년 살고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골 동네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자꾸만 불쌍히 여기는 소리만 하니 부담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습니다. 살 곳에 없어서 어느 부잣집에 가정부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가 맡은 일은 다 하겠습니다. 돈 받지 않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아주 작은 두 가지 요청을 들어 주셨으면 합니다. 하나는 주일에 교회 가는 것을 허락해 주시고, 밤에는 야간학교에 가서 공부하고 싶습니다. 낮에 내가 맡은 일을 다 하겠습니다' 주인은 밥만 먹여주면 일을 공짜로 시키는 것이니까 좋아서 허락하자 임 여사는 낮에는 열심히 가정 일을 했고, 밤이면 열심히 공부를 하면서도 하나님을 잘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 했습니다. 야간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대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숙대를 창설하고 초대 총장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을 돋보기로 보시고 크게 보상해 주셨습니다. /할/
②하나님은 돋보기를 쓰시고 작은 죄도 크게 보십니다. 하나님 앞에는 큰 죄, 작은 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죄도 돋보기를 쓰고 크게 보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을 살다가 가나안 땅으로 돌아 왔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와서 보니 일곱 족속들이 이미 그 땅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 땅 거민 들과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제일 먼저 전쟁은 여리고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전리품은 하나도 갖지 말라고 명령하셨습니다(수6;18-19). 그러나 아간이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 금 50세겔을 전쟁을 하다 발견하고 땅속에 파묻어 두었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평안하면 땅을 다시 파고 찾으면 큰 부자가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전쟁인 아이성 싸움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패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전쟁에 패한 원인을 찾다가 드디어 아간의 죄를 찾아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돋보기를 쓰시고 작은 죄도 다 찾아내시는 분이십니다. 다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만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돋보기를 쓰시고 작은 죄도 다 찾아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베드로는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를 잡아 근근히 생활을 이어가는 어부였습니다. 한 마리도 고기를 못 잡아 처량하게 그물을 씻고 있을 때 예수님이 오셔서 '그물을 깊은 곳에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하자 그대로 순종했더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많이 잡았습니다. 그 때 베드는 '예수님! 고맙습니다. 이렇게 고기를 많이 잡게 하셨으니 제가 한 턱 쏘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서 말합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그 동안에 안 보이던 죄가 보였습니다. 죄인의 모습으로 베드로는 예수님을 따라 갔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정치가인 '다니엘 웹스터'는 워싱톤에 살고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도시 그 곳에는 세계적인 교회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에 다니지 않고 매주 주일이면 오랜 시간을 차를 타고 먼 시골 작은 교회를 찾아가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왜 당신은 워싱톤 큰 교회에 가서 대우받으며 신앙생활하지 않고 시골 작은 교회에 다닙니까?' 그 때 그는 대답하기를 '큰 교회에 가면 목사들이 정치가인 나를 보고 설교합니다. 그러나 이 교회에 가면 죄인인 나를 보고 설교합니다' /이해가 가십니까?/
③하나님은 돋보기를 쓰시고 작은 사랑도 크게 보십니다. 마25:40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나님은 작은 사랑도 크게 보십니다. 소자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 떠 준 것을 하나님은 기억하여 두셨다가 심판 날에 알려 주실 것입니다. '너 그 때 그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였지?' 기억하시고 축복하시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돋보기를 쓰시고 보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어떤 집에 한 부자 과부와 하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 부자 과부는 자신의 많은 돈 중에 일부를 자선사업에 바치면서 나름대로 인생을 즐기며 살았고, 이 하녀는 돈도 많이 없었고 시간도 없었지만 항상 어려운 이웃을 조용히 도우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하녀가 죽었고 얼마 뒤 부자 과부도 죽어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천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자기 집을 찾아가던 과부는 온갖 보석으로 꾸며진 멋진 집을 발견했습니다. '저 집이 내 집인가?' 과부는 큰 기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집이 아니라 뜻밖에도 자기 하녀의 집이었습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하녀의 집이 이 정도라면 많은 헌금을 한 내 집은 얼마나 더 훌륭할까?' 이렇게 흐뭇하게 생각하면서 천사를 따라가던 과부는 어느 작은 오두막집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집의 문패에는 놀랍게도 과부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자기의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그 집을 보면서 부자 과부는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틀림없습니다. 나보다도 훨씬 교회 일을 하지 않은 하녀의 집이 저 정도인데 난 이게 뭡니까?' 그러자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저희들은 지상에서 보낸 재료로 집을 지었을 뿐입니다. 집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을 얼마나 많이 했느냐?'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얼마나 충성을 다했느냐?'하는 것으로 결정이 됩니다.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것의 몇 분지 일도 하지 않았지만 저 하녀는 얼마 안 되는 것들이지만 그것들을 모두 하나님께 드렸지요.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고 충성이지요, 그래서 이렇게 멋진 집이 지어진 것입니다.' /할/
④하나님은 작은 헌금도 크게 보십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주님이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하루는 주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헌금하는 모습을 지켜보셨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하여 올라온 순례 객들이 하나 둘씩 나아와 헌금을 했습니다. 그 헌금 궤는 예루살렘 성전의 여인의 뜰에 있었던 것으로, 그 뜰 안에는 13개의 헌 금궤가 있었는데, 그 모양은 마치 나팔 모양처럼 생겼고, 각각의 헌금 궤마다 그 헌금이 쓰여질 용도가 적혀 있었다고 합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그 헌금 궤 맞은 편에 앉아 그리로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거기서 여러 부자들이 와서 많은 돈을 헌금하는 것을 보셨습니다. 많은 동전이 긴 나팔 모양의 헌금 궤를 통해 떨어질 때 요란한 소리를 내었고, 자연히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난한 과부 역시 와서 겨우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헌금하는 것도 보셨습니다. 여기서 렙돈이란 말은 헬라의 동전으로 당시 가장 작은 화폐 단위를 가리키며, 고드란트는 로마의 동전으로 로마 화폐 중 가장 작은 단위를 가리킵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작은 액수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 헌금 궤에 떨어졌는지도 모를 정도로, 아마 간에 채 기별이 가기도 전에 금세 떨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무리들이 헌금하는 것을 지켜보신 후에, 예수님은 조용히 제자들을 부르시고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얘들아,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겠다. 이 과부가 지금까지 이 헌금 궤에 헌금한 모든 사람들보다 더 많이 헌금하였단다. 왜 그런지 아느냐? 부자들은 자신들의 풍족한 것들 중에 얼마를 헌금한 것이지만, 이 과부는 가난하고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소유 전부를 헌금한 것이기 때문이란다.' 이 돈은 당시 헬라 동전 한 닢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그 날 헌금 궤에 넣어진 돈 중에 가장 적은 액수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과부를 칭찬하시며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헌금을 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⑴곤고한 중에 드린 것입니다. 과부란 곤고한 인생입니다. 짝 잃은 기러기처럼 멀고 험한 인생행로를 혼자서 걸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과부는 사회에 구제대상이 되었습니다. 이같이 곤고한 중에서 감사하며 드린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⑵궁핍한 중에 드린 것입니다. 쌀독에서 인심이 난다고 생활이 궁핍해지면 자연히 인심이 메말라 버리는 법인데 어떻게 감사의 봉헌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럼에도 이 과부는 구차한 가운데서 기꺼이 드렸습니다. ⑶생활비 전부를 드렸습니다. 물론 부자는 이 과부보다 훨씬 많은 것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드리는 헌금은 생활의 일부에 지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과부는 소유 전부를 드린 것입니다. 본문의 기사와 마리아의 옥합을 깨뜨린 일화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곳마다 두고두고 수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증언되고 있으며, 오늘날도 많은 성도들에게 가난한 과부의 정성을 본 받아 쏟아바치는 정성을 통하여 교회가 성장해 가며 주의 복음이 날마다 전파되고 있습니다. /믿/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고나 최대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천만 다행이죠. 만일 최고를 요구하시면 여기 모인 중에 오직 한 명만 해당됩니다. 나머지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최선을 요구하시니까 여기 우리 모두 해당될 수 있습니다. 물론 최선을 다하지 못하면 우리 모두 해당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아멘!/ ▶미국의 백만장자 'A. A. 하이디'의 간증입니다. 사업이 기울고 빚더미 위에 앉아 있을 때 기도원 들어가 기도하다가 은혜체험을 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너무 인색하게 신앙생활을 한 것이 후회되었고 특히 하나님의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십일조를 안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물질을 도둑질한 것이라고 말3장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십일조 도둑놈인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직원에게 그 동안에 못 바친 십일조를 계산하여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령하였습니다. 직원이 말했습니다. '사장님! 이는 경제원칙에 어긋납니다. 어떻게 빚지고 있는 데 빚을 더 얻어서 헌금을 드리라고 하십니까? 한 푼이라고 갚아서 이자 지출을 줄여야 할 때입니다' 이 때 하이디가 말했습니다. '빚 갚는 것보다 도둑질한 물건을 갚는 것이 우선이다' '사장님이 언제 도둑질하셨습니까?' '하나님의 물질을 도둑질한 것은 사람의 물질을 도둑질한 것보다 더 큰 도둑놈이다. 나는 그 동안에 하나님의 물질을 도둑질하였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다' 그리고 빚을 내어 그 동안 밀린 십일조를 다 드렸습니다. 그 후 하나님이 엄청나게 축복하셔서 하이디는 미국의 대 재벌이 되었습니다. /할/ 하나님은 돋보기를 쓰시고 작은 헌금을 크게 보시고 크게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⑤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과부에게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⑴예수님은 이 가난한 과부의 믿음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가진 것이 많고 무언가 있다고 해서 바치는 것도 아니요 가난하다고 적게 바치는 것도 아닙니다. 헌금은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바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의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를 중심으로 보십니다. '주여! 믿습니다.' 이런 고백을 보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바치는 마음을 보시고, 정성을 보시고, 믿음을 보십니다. 그렇습니다. 형식보다 마음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가 어떻게 다릅니까? 가인의 제사는 형식적인 제사였지만 아벨의 제사는 마음을 바치는 제사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는 물리치시고 아벨의 제사는 받으신 것입니다. /할/ 우리가 하나님께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예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음입니다. 어떠한 마음으로 예물을 드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같이 초대교회를 위하여 헌금을 했지만 바나바는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렸습니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그를 칭찬하고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름을 얻기 위하여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속이고 거짓으로 욕심을 채우려고 하다가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은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 줍니다. 고후9:7절에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께 즐겨 드리는 자세를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과, 둘째, 인색함으로 하지 않는 것과, 셋째, 억지로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기 '각각'이라는 말은 '각자가'라는 뜻입니다. 헌금은 각자가 개별적으로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입니다. 모두가 똑같은 금액을 정해서 일률적으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힘써 하나님에게 바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헌금은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해야 합니다. 이는 우리가 드릴 헌금을 '미리 마음에 정하며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야 헌금에 우리의 정성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성을 다해서 미리 마음에 준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인색함으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억지로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인색함이 내적 요인이라면, 여기서 말하는 억지로 함은 외적 요인입니다. 주변에서 쳐다보는 눈들이 있으니까, 어쩔 수 없이 마지못해 드리는 것은 억지로 함입니다. 이만하면 체면치레는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헌금을 드리는 것도 억지로 함입니다. 하나님은 '물질이 있는 곳에 네 마음이 있느니라'고 하셨으며, 잠23:26절에서는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아들의 마음을 원하시고 계십니다. 육신의 부모들도 자식을 낳아 기르면서 혼신을 다해 정성을 쏟습니다.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서 훌륭하게 키웁니다. 그런 부모가 자식에게 어떤 큰 것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 자식들의 마음(사랑)을 바라는 것뿐입니다. 고후8:12절에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여러분, 사랑만이 사랑을 요구합니다. 사랑 없이 사랑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마음만이 마음을 요구합니다. 마음 없이 마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만일 내가 다른 사람의 사랑 받기를 원한다면 이는 나 자신이 그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 사랑 받기를 원하는 것임이 틀림이 없습니다. 사랑 받기를 원하는 아내에게 사랑을 듬뿍 주십시오, 사랑 받기 원하는 남편에게 사랑을 듬뿍 주십시오, 왜? 당신을 사랑하기에 사랑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할/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외아들까지도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십니다. 여기서 마음은 사랑일수도 믿음일 수도 있습니다. /아멘!/ ▶왜 마음을 드리라고 할까요?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고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본래 신앙생활은 하나에서 백까지 다 마음으로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안 드리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회개도 마음으로 하는 것이요, 신앙도 마음으로 하는 것이요, 순종도, 헌신도,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드리지 않고 하는 신앙생활은 위선이요, 거짓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없이 종교적인 연극이나, 신앙 노름이나 경건의 쇼를 하는 자를 가리켜 바리새인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요술쟁이 시몬에게 '네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참예하지 못하고 얻을 것도 없느니라'고 책망하고 저주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려거든 우리 마음을 드려서 정성껏 해야 합니다. /아멘!/ ㈁우리의 마음을 드리지 않고는 우리의 신령한 사업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무슨 사업이나 크고 적든 간에 성공하려면 마음을 쏟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 크던 적던 사업에 성공한 사람을 보면 다 그 마음을 오직 한가지 일에만 쏟았습니다. 대 정복자들을 보십시다. 알렉산더, 나폴레옹, 시저, 그들은 전심으로 국토를 넓히는 일에 마음을 쏟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뉴톤이나, 에디슨, 아인슈타인 등은 전심으로 발명에 헌신했습니다. 또한 부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실업가도, 사업가도, 교육가도 그들은 다 자기들의 전심전력을 다하여 그 일에만 몰두했습니다. 또한 신앙의 인물들도, 모세, 다윗, 바울, 베드로, 칼빈, 무디, 주기철, 손양원 등은 전심으로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한 자들입니다.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자를 하나님이 만나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전심으로 하나님께 구하는 자에게 능력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역대 열왕 중에 마음을 온전히 하여 하나님을 섬긴 왕들은 다 형통하였으나 그 마음을 갈라 하나님께 절반, 바알에게 절반을 한 왕들은 다 실패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심으로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믿/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면 거룩해 집니다. 마음을 드린다는 것은 그 분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그 분을 내 마음에 모신다는 것입니다. 그 분의 속성은 거룩이십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모시면 자연히 우리도 거룩해 집니다. /믿/ 모든 것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잠4:23절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고 했습니다. 선한 마음을 품으면 선한 사람이 됩니다. 그러나 악한 일에 마음을 품으면 결단코 악인이 되고야 맙니다. 약을 담으면 약그릇이 됨같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품으십시오, 그리하면 분명히 거룩해 집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해 지기를 원하십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할/ ㈃우리가 마음을 드리면 뭐니뭐니해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믿음입니다. 마음과 믿음은 똑같은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몸을 드리는 헌신도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마음도 없이 몸만 드리면 하나님께 가증한 것이 됩니다. 또 우리가 오랫동안 청산유수로 기도를 드린다 해도 마음 없이 입으로만 중언부언하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가 됩니다. 또 우리가 마음 없이 찬미를 불러도 하나님은 받지 아니하십니다. 여러분, 마음을 드리지 못한 예배, 마음이 없는 기도, 마음을 드리지 않은 헌금, 마음을 드리지 아니한 봉사, 이것은 거짓이요, 위선이며 바리새인들의 종교놀이와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기뻐 받으십니다. /할/ 그렇다면 그 마음은 언제 드려야 할까요? 지금 즉시 드려야 합니다. 신앙은 지금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 하나님께 온 마음을 드리십시다. 어떻게 드려야 할까요? 기뻐하며 자원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얼마나 드려야 할까요? 전부를 다 감사함으로 드려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질문을 합니다. '목사님! 믿음이 속성과로 들어가게 하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묻습니다.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일입니다. 힘껏 바치십시오, 마음 바치고, 물질 바치고, 시간 바치고, 몸을 바치십시오, 하나님께 물질을 바치면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면 하나님은 곧 나의 하나님이 되십니다. 하나님이 물질을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이 가난하거나 돈이 필요하여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옮겨져서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으로 믿게 하는 수단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하나님은 물질 속에 담겨진 우리의 마음과 정성과 믿음을 보시기를 원하시며 그 물질을 통하여 신령한 하늘의 복과 이 땅에 기름진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믿/
⑵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에게서 정성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과부에게 많이 넣었다고 칭찬하셨습니다. 지극히 적은 동전 두닢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많이 넣었다고 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사람은 다 풍족한 중에서 넣었지만 이 과부는 구차한 중에서 바쳤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구차한 중에 바친 정선을 보신 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울 때 받쳐보십시오, 하나님은 그 정성을 그냥 지나가지 않으십니다. 이 말씀은 물질적인 것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환경이 어려운 처지라도 하나님께 충성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떤 분은 물질적으로 구차하게 사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전혀 시간적으로 주일 성수하기에 심히 어려운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몸이 불편해서 의욕을 상실하고 자포자기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분이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인간적으로 신앙생활이 어려운 핍박 속에 살면서도 이 구차한 환경에서 지극한 정성을 다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차한 환경에서 드리는 정성을 더욱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정성을 살피십니다. /아멘!/ 예수께서 이 사건을 통해 우리들에게 주시는 교훈은 바로 '전부'에 대한 우리의 헌신입니다. 하나님은 '부분'이 아닌 '전부'를 받으시고, '전체'로 드리는 우리들의 삶을 기뻐하신다는 말입니다. 결국 과부의 두 렙돈은 '우리들이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며, 자신을 어떻게 하나님께 바쳐야 하며, 하나님을 어느 정도로 신뢰해야 하며, 하나님을 어떻게 모든 소유의 주인으로 인정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할/ 따라서, 이것은 단지 헌금에 관한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의 전 삶을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부를 드리는 헌신을 온전한 헌신으로 기뻐 받으신다는 말입니다. ▶세계 백화점의 창시자인 '존 워너 메이커'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어려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그의 친구들은 모두 학교에 다니는데 그는 학교대신 벽돌공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교회만은 빠지지 않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하루는 목사님이 '우리 교회가 낡아서 새로 지어야 하겠으니 모두들 정성껏 헌금을 부탁합니다.'라고 광고를 했습니다. 메이커는 곰곰이 생각해 봤습니다. '나도 교회를 위해 무엇인가 바치고 싶은데 돈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지? 옳지 나는 벽돌 공장에 다니니 벽돌이라도 한 수레 바쳐야겠다' 그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수레에 벽돌을 가득 싣고 목사님 사택을 찾았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감격하여 그의 작은 어깨를 알아주면서 '하나님! 이 아들에게 복을 주소서' 축복 기도를 해 주시고 그 소년을 위해 목사님을 공부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하면서 하나님께 크게 복을 받아 세계 백화점의 창시자요 백화점의 왕이 되었으며 나중에는 미국의 체신부 장관까지 했습니다. /할/ ▶공명심이 강한 부자가 있었는데 그가 단독으로 화려한 성전을 짓되 다른 사람은 일절 헌금을 못하게 했습니다. 성전이 완성되고 기초 석에 '모년, 모월, 모시에 부자 아무개가 봉헌했다.'고 새겼습니다. 매우 기분이 좋은 부자는 그 날밤 성전 안에 마련된 자기 방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 날 밤 꿈속에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더니 기초 석에 새긴 자기 이름을 지우고 전혀 알지 못하는 이름을 새깁니다. 깨보니 꿈이었습니다. 다음날도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기 이름을 알아보았더니 성전 앞에 사는 가난한 농부의 이름이었습니다. 부자는 그 농부에게 찾아가서 '성전을 짓는데 무엇을 바쳤습니까?' 묻었습니다. 그러자 '아무 것도 바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라고 하자 농부는 한참 생각하더니 '다른 것은 없고 성전을 짓는데 돌을 실어 나르는 말들이 너무 피곤해 보여서 말 먹이와 물 밖에 준 일이 없다'고 했습니다. 부자는 생각했습니다. 자기는 공명심에서 이 성전을 지었지만 이 가난한 농부는 '정성어린 마음으로 짚 한 단을 바쳤구나' 크게 깨달았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작은 정성을 바친 이 농부를 귀하게 보신 것처럼 우리의 정성을 원하고 계십니다. /할/ 여러분, 2000년의 교회사를 돌이켜 보면 예수님의 뒤를 따랐던 아름다운 발자취들은 다 구차한 중에서 받쳐진 헌신의 산물입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네가 많이 벌어서 봉사하겠다고 합니다. 지금 바쁘니 조금 지나서 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때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지금 오늘 이때를 원하십니다. 내가 어려울 때 내가 힘들 때 하나님께 최대의 정성을 보이십시오, 갈6:7절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아멘!/
⑶예수님은 이 가난한 과부에게서 절대 진실을 보셨습니다. 신앙은 절대 진실입니다.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절대적일 수 없습니다. 모두 상대적입니다. 직장이 싫으면 다른 직장으로 옮기면 됩니다. 사는 집이 불편하면 옮기면 됩니다. 옷이 마음에 안 들면 바꿔 입으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신앙은 절대적입니다. 믿어도 되고, 안 믿어도 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가난한 과부의 엽전 두 푼 속에서 예수님이 무엇을 보았을까요? 정성이 지극한 것, 그 이상을 보셨습니다. 자기의 모든 소유, 생활의 전부를 넣었습니다. 이 과부는 전부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많고 적은 것 가리지 않고 전부를 어느 때라도 내 놓을 수 있는 절대적인 신앙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목사님, 예수님을 믿으려면 얼마만한 비용이 듭니까?' '비용이 어느 정도 들면 믿겠습니까?' '담배 값 정도만 들면 믿겠습니다.' 똑같은 예수님을 믿고 있지만 믿는 비용은 각각 다릅니다. 귀하고 좋은 것일수록 값이 비싼 것은 기정사실입니다. 그런데 가장 비싸도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우리들의 자녀, 부부, 나의 생명입니다. 이런 것들은 값으로 계산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신앙은 이런 것들보다 한 차원 위에 있습니다. /믿/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너는 나를 따르는데 어느 정도 비용이 들고 있으며 어느 정도 값으로 나를 환산하고 있느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는데 드는 비용이 어느 정도인가 성경에서 들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독자 이삭을 드렸습니다. 모세는 청춘을 불살라 출애굽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지움을 당했고, 그의 세 친구는 일곱 배나 뜨겁게 꿇는 용광로 속에 던지움을 받았습니다. 신약의 스데반은 돌로 맞아 죽어야 했고, 마리아는 삼백 데나리온의 옥합을 깨뜨렸습니다. 오늘 본문의 가난한 과부는 자기 모든 소유, 생활비 전부를 바쳤습니다. 여러분, 이 사람들이 다 망했습니까? 아닙니다. 성경 눅6:38절에서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⑷마지막으로 하늘나라에 가장 많이 넣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후히 축복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구차한 중에 정성껏 바친 사람에게 아낌없이 축복하십니다. ▶오래 전에 아주 오래 전의 이야기입니다. 군산 비행장 옆 옥봉이라는 동네에 가면 비행장 쓰레기를 줍는 거지들이 사는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 동네에 가난한 과부가 땅굴 속에 살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하며 정성껏 십일조를 바치고 새벽예배도 꼭 참석해서 기도를 하고 비행장으로 행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렇게 애써 모으고 모은 돈을 교회에 바쳤습니다. 그 돈은 쓰레기를 뒤져 작은 방 한 칸이라도 마련하기 위해 번 한 돈입니다. 그 자매님은 '내 집을 갖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집을 지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이고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옥봉교회에 바쳤습니다. 목사님이 그 정성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면서 축복기도를 해 주셨습니다. 그날밤 비행장에서 근무하는 미국 군목이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에 광채가 비치는 산골 마을에 예수님이 걸어가시더니 어느 기름종이가 덮인 움막집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참 신기하고 생생한 꿈이었습니다. 다음날 군복은 통역관을 데리고 꿈에 본 동네로 찾아가 보았더니 진짜 꿈에 본 움막집이 보이는데 그 눈물겨운 가난한 과부 집에서 흘러나오는 감사의 기도와 찬양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군목은 너무 감격하고 그 가난한 과부를 만나 기도해 주었고, 꿈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 후 군목은 그 과부를 미군부대 식당에 취직을 시켰고, 그의 아들을 비행장경비로 채용해 주었습니다. 그 후 군목이 본국으로 돌아가 그 사실을 설교했더니 큰 농장을 경영하는 미국인이 아들이 없었는데 그 모자를 데려다가 훌륭하게 가르쳐서 미국학계에서도 손꼽히는 학자가 되게 했습니다. /할/ 그 아들은 자기가 그렇게 크게 성공한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하고, 그 당시 군산에 가난한 고아 50명에게 장학금을 보내 사랑의 손길을 피고 그들은 잘 돌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구차한 중에 바친 정성을 귀중히 받으십니다. 그리고 아낌없는 축복을 부어주십니다. 아낌없이 바친 사람에게는 아낌없이 복을 주시고 분수 없이 바친 자에게는 분수 없이 축복해 주십니다. 그러나 쩨쩨하게 바친 자에게는 하나님은 짜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십니다. 이것이 성경의 진리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밖에 없는 외아들 이삭을 바쳤더니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믿음의 후손을 기업으로 받는 축복의 조상이 되었고, 시돈 땅의 사르밧 과부는 흉년에 마지막 양식으로 엘리야를 대접했더니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죽어 갔으나 이들의 기름통에서는 기름이 마르지 않았으며 밀가루 통에서는 하얀 밀가루가 언제나 소복이 쌓였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풍부한 중에 바치는 정성도 기뻐하시지만 구차한 중에 바치는 정성을 더욱 기뻐하십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인정받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할/ (2010년 11월 28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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