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축복(祝福)을 받는 비결! (시 91:14-16)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4. 16.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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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祝福)을 받는 비결! (시 91:14-16)

 

  여러분, 신앙생활이 즐겁습니까? 신앙생활은 즐겁게 해야 합니다. 어떤 연탄장수는 매일같이 연탄마차를 끌고 다니면서도 늘 웃는 즐거운 표정이었습니다. 매일같이 검은 얼굴에 흰 이를 내 놓고 웃고 다니는 그에게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아저씨는 무엇이 그렇게 즐거워서 웃고 다닙니까' 그러자 그 연탄장수 아저씨는 웃으며 대답하기를 '설명해도 모를 것입니다' 그 마음속에 있는 평안과 감사의 마음을 설명한들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행복한 사람처럼 행동하라'는 말씀입니다. /할/
  오늘 설교를 들을 때도 즐겁게 들으시기를 소원합니다. 그런데 원래 설교는 재미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누가 잔소리를 하면 '또 설교하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설교가 '재미없다'고 행각하면 재미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설교가 시작되면 잠이 오는 것입니다. '은혜 안 된다'고 생각하면 곧 바로 잡념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오늘은 듣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에게 주시는 생명의 말씀'으로 들으십시오! 그러면 설교가 은혜롭고 재미가 있어집니다.
  부흥회 때나 산으로 기도회를 갔을 때 듣는 설교가 주일날 듣는 설교보다 훨씬 은혜가 되고 재미가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듣겠다 하고 작정하고 찾아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주일날 억지로 끌려 나와서 설교를 들으면 설교가 재미있을 리가 없습니다. 설교가 재미없다고 생각하면 그 설교는 지루합니다. 또 길게 느껴집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너무 길게 했습니다. 그래서 설교가 시작되면 모두 졸기 시작합니다. 어느 집사님이 더 참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 목사님 설교가 15분만에 끝났습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이 말하기를 '밤새 준비한 설교원고를 주일날 아침에 강아지가 물어 가는 바람에 오늘 설교가 짧게 끝났다'고 말을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이 집사님이 목사님에게 가서 그 강아지를 한 달만 빌려달라고 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 담임 목사님에게 갖다주겠다는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수요일 저녁에 그 날이 남편의 생일이라 손님 접대를 하다 중간에 잠깐 나와서 예배드리려고 교회에 갔습니다. 그 날 예배가 빨리 끝났으면 좋았는데 그날따라 길어졌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마지막으로'라고 말했습니다. '야 이젠 끝나나 보다'고 했는데 조금 있다가 '끝으로' 그럽니다. 그리고 한참을 설교하다가 이번에는 '결론으로' 그럽니다. 마침내 설교가 끝나고 주 기도를 했습니다. 주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려고 하는데 오늘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셨다고 찬송 한 장을 더 부르자고 그럽니다. 그것도 가장 긴 241장 하나님 아버지 주신 책은 그 찬송은 5절까지 있습니다.
  이렇게 시험을 들지 마시기를 소원합니다. '길어도 듣겠습니다' 이런 자세로 들으면 은혜가 되고 말씀이 귀에 들어옵니다. 듣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행복은 마음으로 그렇게 결정하면 주어지는 것입니다. /할/ ◀제목 소개!▶
 
  150편의 주옥같은 신앙고백으로 구성된 시편은 그 저자에 있어서도 실로 다양합니다. '다윗, 솔로몬, 고라의 자손들, 아삽, 헤만, 에단, 모세, 그리고 밝혀지지 않은 무명의 기자들'이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삶의 다양한 정황들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귀중한 신앙고백이 시편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들의 한결같은 고백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나를 인도하시고 지키시고 함께 하신다'라는 것입니다. 즉 오직 인간문제의 해결 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의 신분이 왕이든지, 문지기든지, 궁정의 악사든지 간에 결국 하나님의 지키심 밖에서는 참 평안히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이같이 인간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어떤 자를 어떻게 지키시고 보호하시는가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좀더 능력 있는 신앙 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를 이해하고 내가 해야 할 것은 해야 합니다. /아멘!/
  본문을 차례대로 상고해 보면서 주님의 음성을 같이 듣기를 소원합니다.
 
  ▶14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본문 14절 첫머리를 주목해 보세요! '하나님이 가라사대' 여기서 가라사대는 말씀하신다는 말로 하나님이 지금 말씀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의 대답을 듣느냐? 누구의 말을 듣느냐?'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일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대통령의 담화와 구청장의 담화는 같을 수가 없습니다. 격이 다르고 위상이 다룹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대통령보다 더 귀한 분이 지금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 말씀은 모세의 말이 아니고, 다윗의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언해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힘을 얻고, 소망을 두는 것입니다. 만약 사람의 말이라면 소망을 둘 수가 없습니다.


  ①'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세상에서 가장 흔한 단어가 사랑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람마다 사랑을 말하고, 저마다 사랑 받기를 원하고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가장 부족한 것이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⑴사랑에는 대상이 있습니다. 대상 없는 사랑이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은 내가 상대를 사랑하는 만큼, 상대방으로부터 사랑 받기를 또한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기 아들을 내어 주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원하십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이나 다짐하시며 물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사랑하셔서 중요한 자리에는 언제나 그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변화산에 올라가실 때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지막 통곡의 기도를 드릴 때도 베드로를 데리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주님이 잡히시던 밤에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도 사명을 잃어버리고 갈릴리 바닷가로 내려가서 고기를 잡고 있을 때 주님이 그곳까지 가셔서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세 번이나 물으신 것입니다. 그만큼 주님은 베드로에게 기대를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 기대는 오늘 우리들에게도 가지고 계십니다. /믿으십니까?/
  마22:37-39절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삶의 역경과 절망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시고 지키고 보호하신다는 내용의 찬양 시'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다보면 여러 가지 고난과 어려운 문제에 봉착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병들어 아플 때도 있고, 사업이 무너질 때도 있고, 어떤 문제로 인하여 밤잠을 못 이루고 절망과 두려움과 불안감에 떨 때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은 언제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런 믿음만 있으면 결과는 달라집니다. 본문을 보세요!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할/
  ⑵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려면 세 단계가 필요합니다.
  ㈀'관심의 단계'입니다. 하나님께 관심, 교회에 관심, 주의 종에게 관심, 성도들에게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에릭 프롬'은 사랑의 진실의 그 다섯 가지 중에 첫째가 관심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은 서로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헌신의 단계'입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과 시간을 바쳐 사랑하는 것입니다.

  ㈂'희생의 단계'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는 자세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의 단계에 따라서 결과도 달라지게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단계까지 왔습니까? 그저 막연한 '관심의 단계'입니까? 아니면 '헌신의 단계, 희생의 단계'까지 와 있습니까? 이런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리까지 온 것입니다. /할/
  그렇다면 성경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라고 했을까요? 요1서5:3절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하나님의 계명을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하라'고 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하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교회를 사랑하라! 전도하라! 기도하라! 감사하라! 봉사하라! 겸손하라! 온전한 십일조를 드려라! 주일을 성수 하라!' 많습니다. 여러분! 복 받기를 원하십니까? '하라'고 하신 계명을 다 지키십시오! 그리고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생명 걸고 하지 마시기를 축원합니다.
  ⑶신7:7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와 선택받은 민족이 해야 될 일, 그리고 하나님이 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선택하신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보다 강하거나 수가 많기 때문이 아니라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당시 애굽이나 바벨론이나 앗수로는 강대국이었습니다. 그런 나라 다 제쳐두시고 가장 약한 이스라엘을 선택해 주셨습니다. 우리들의 선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할/
  ㈁선택받은 이스라엘 해야 할 일은? 선택해 주신 그분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신7:9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사랑해야 될 의무나 주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계명, 그 말씀을 지켜야 될 의무도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천대까지 약속을 지키시고 사랑을 베푸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거나 괴롭히는 자들 당장에 보응해 주신다고 9-10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즉,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 우리를 건져 주신다고 약속하고 게십니다.
  ⑷어디서 건져 주십니까?
  ㈀죄에서 우리를 건져내 주십니다.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복중에 제일 으뜸 되는 복입니다. /믿/
  나일강에 버려진 모세가 떠내려가고 있습니다. 그 당시 애굽의 바로가 이스라엘을 박해하는 방법으로 남자아이를 낳게 되면 죽이든지 나일강에 버리라고 했기 때문에 모세를 버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출2장을 보면 나일강에 목욕하려 나왔던 바로 왕의 딸이 모세를 발견하고 건져냅니다. 공주의 손에 건져 낸 것으로 기록됩니다. 그러나 여러분, 공주의 손보다 더 큰 손, 보이지 않는 사랑의 손, 섭리에 손이 있었습니다. 그 손이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손입니다. /할/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출해 내기 위해 먼저 지도자 모세를 지목해 놓고 하나님은 모세를 위기에서, 또 죽음에서 건져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이 모세를 건져낸 것은 이스라엘을 건져내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모형입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건져내신 것은 온 인류를 죄로부터 건져내시려는 하나님의 구원의 모형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7:24-25절에서 말하기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리고 선언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라고 선언했습니다.
  여러분 죄는 무섭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절망과 죽음이 있습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죄가 크면 죽음이 된다'고 했습니다. 약1:15절에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죄에서 건져냄을 받습니다. /할/
  우리가 누구를 사랑하면 그 사람을 믿게 됩니다. 그러나 미워하는 사람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고전13:7절에서 바울은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왜 사랑을 못하는지 아십니까?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믿지 못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두터웠던 사랑도 일단 의심이 싹트기 시작하면 식어지고 사이가 멀어지게 되는 법입니다. /할/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할 때 우리의 죄에서 건져냄을 받습니다. /아멘!/
  ㈁고난으로부터 건져냄을 받습니다. 시34:19-20절에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그 모든 뼈를 보호하심이여 그 중에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도다'
  여러분, 의롭게 살려는 사람, 믿음으로 바르게 살려고 하는 사람 속에도 고난이 옵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고난 속에서 건져내 주실 분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뼈를 보호하신다는 사실과 뼈가 꺾이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망하지 않으며 무너지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할/
  시34:6절에서 시인은 고백하기를 '이 곤고한 자가 부르짖으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그 모든 환난에서 구원하셨도다' 그리고 그 앞 절인 4절에서 '내가 여호와께 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할/ 사업을 일으켜 세워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시오, 우리의 질병에서는 건져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면 파도가 밀려와 뱃전을 두들겨 댑니다. 배가 앞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파도가 밀려옵니다. 빨리 달리면 파도도 빨리 달려옵니다. 깊은 바다로 나가면 큰 파도가 밀려옵니다. 그러나 배가 앞으로 나가지 않으면 파도도 뱃전을 강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진하지 않으면 목적지에 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파도, 고난의 파도가 두려워서 신앙생활을 포기하거나 신앙의 길을 출발하지 아니하면 목적지에 갈 수가 없습니다. 고난이 뒤덮인 바다라도 주님을 의지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아멘!/
  어느 날 밤 예수님의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바다나 다 그렇습니다만 갈릴리 바다는 밤이면 안개가 덮이고, 독특한 고요가 깔리는 곳입니다. 그러다가 파도라도 일어나기 시작하면 공포의 바다로 변합니다.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갈릴리 바다를 건너가고 있을 때 큰 풍랑이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공포에 떨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이라며 더 무서워 떨었습니다.
  그때 인자하신 우리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다 안심하다, 두려워 말라' /할/ 주님의 음성을 듣고 베드로가 '만일 주시거든 저를 물 위로 걸어서 주님 곁으로 가게 해 주십시오' 주님이 '오라'고 하자 이 한마디에 베드로가 물 위로 뛰어 내렸습니다. 그리고 걸었습니다. 놀라운 예수님의 기적이 베드로에게 일어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풍랑을 보고 무서워했을 때 일어났습니다. 그만 물 속에 빠지게 됐습니다. 허우적거리는 베드로를 건져 주시던 주님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고 꾸짖으신 이야기가 마14:22절 이하에 나옵니다.
  여러분 우리가 불안과 공포와 절망의 바다로 빠져 들어갈 때 거기서 건져내시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불안과 절망과 공포의 바람을 바라보지 마십시오, 그러면 더 불안해지고 무서워집니다.
  높은 옥상에서 아래층을 내려다보십시오, 얼마나 무섭고 현기증이 납니까? 오늘 많은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고 문제를 바라보다가 실패하고 좌절과 낙심에 빠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주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히12: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고 했습니다. 주님 바라보세요, 그리하면 우리 주님이 우리의 모든 고난으로부터 지켜주시고 그 고난을 막아주십니다. /믿/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대신 이미 고난을 당하셨고, 이미 매를 맞으신 분이십니다. 내가 받아야 할 형벌을 이미 받으신 분이십니다. 사53: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형벌과 고난, 채찍과 아픔, 이 모든 것을 우리대신 주님께서 겪으셨습니다. /믿/여러분, 아픔 가운데 가장 큰 아픔이 무엇입니까? 귀가 아파서 고생한 분은 뭐니뭐니해도 귀 아픈 것이 가장 힘들다고 말합니다. 눈이 아파서 고생하는 분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눈 아픈 것이 가장 힘들다고 말합니다.
  제가 이빨이 아프고 나니까 정말 이빨 아픈 것이 제일 힘이 듭디다. 음식을 먹을 때도 고통스러웠지만 설교하는데 제일 힘이 들었습니다. 사실 이런 아픔들도 큰 아픔입니다. 그러나 더 큰 아픔은 마음의 아픔이며 영혼의 아픔입니다. /할/
  돈 때문에 시련 받고, 사업 때문에 시달림 받고, 가정문제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난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 영혼이 죄에 눌려, 불 신앙에 눌려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죄가 이끄는 대로 따라다닐 때 그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아십니까?
  죄를 못 끊고 그 몇 시간의 달콤한 육체의 향연을 못 끊고 끌려가다가 가정이 파괴되고 인생이 망가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여러분,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그분은 우리를 일곱 번 넘어진 곳에서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욥5:17-19절에 '볼지어다 하나님께 징계 받는 자에게는 복이 있나니 그런즉 너는 전능자의 경책을 업신여기지 말지니라 하나님은 아프게 하시다가 싸매시며 상하게 하시다가 그 손으로 고치시나니 여섯 가지 환난에서 너를 구원하시며 일곱 가지 환난이라도 그 재앙이 네게 미치지 않게 하시며' 또 시34:7절에 '여호와의 사자가 주를 경외하는 자를 둘러 진치고 저희를 건지시는도다' /할/  

  ▶미국의 유명한 실업 인인 '스탠리 탐'의 간증입니다. 이 사람은 네 차례나 주인이 바뀌고 망해버린 플라스틱 회사를 주위나 친구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인수하여 5번째의 경영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염려처럼 깨끗이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그때 들이는 음성은 '주님을 사장으로 모시고 다시 해봐라'는 것입니다.
  그는 즉시 변호사를 찾아가 법적으로 주식의 50%을 주께 드리기로 하고 다시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아침과 저녁 틈만 있다면 주께 엎드려 자문해 보고 마음에 소원을 주시는 은혜로 일을 처리했습니다. 지금 스탠리 탐 사장은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플라스틱 계의 큰 업주가 되었으며 매년 순이익이 2,000만 불이 넘는다고 간증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고, 내가나를 건져내고 내가 내 인생을 조정하려고 하면 피곤해지고 억만이 됩니다. 그러나 '주님, 저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의지합니다. 주님만 바라봅니다.'라고 주님은 향해 깊은 심령의 소리로 사랑을 고백하면 '걱정하지 말라, 내가 너를 건져 주리라, 죄에서 고난에서 절망에서 죽음에서 실패에서 파멸에서 너의 모든 어려움에서 건져주리라'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부귀(富貴)는 재천(在天)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자가 되고 귀하게 되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이 뭡니까? 구름입니까? 아니면 태양입니까? 별입니까? 달입니까? 아닙니다. 부귀가 하늘에게 달려 있다고 했습니다. /아멘!/
  부자가 되는 것, 귀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고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부자가 되고 귀하게 되고 존귀한 삶을 살게 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우리가 주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면 우리가 그 분의 사랑 속에 삽니다. 잠8:17절에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아멘!/
  ㈂질병에서, 실패에서 우리의 모든 삶의 문제에서 건짐을 받습니다. /믿/


  ②'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14)
  왜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자를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고 합니까? 성경에서 그 해답을 보겠습니다. 시9:10절에 '여호와여 주의 이름을 아는 자는 주를 의지하오리니 이는 주를 찾는 자들을 버리지 아니하심이나이다' /할/
  '하나님이 누구인가?'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하게 됩니다. 여러분, 이름이란 그 사람의 인격과 본성을 나타냅니다. 본문에서 이름을 안다는 것은 단순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알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능력이 많으신 하나님' 등 얼마든지 주님에 대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3년 반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서 기적도 목격했고, 초월적인 능력을 베푼 주님을 지켜보았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앉은뱅이 중풍병자, 각양각색의 병든 자,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지 못하고 십자가를 지는 날 다 도망해 버렸습니다. 가롯유다는 돈 맡은 회계 일까지 하면서 단 한번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늘 랍비 선생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라고 하는데 주님은 아는 것으로만 힘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힘입니까? 믿는 것이 힘입니다. 하나님은 아는 존재가 아닙니다. 믿는 존재입니다. /할/
  여러분, 성경에 보면 귀신들도 예수님을 잘 알고 하나님도 잘 알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거라사인 지방에 귀신들린 자에게 '나가라'고 명하자 '예수여,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왜 우리를 괴롭힙니까?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능력이 많으신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제발 우리를 괴롭히지 마십시오'라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귀신들도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풍부합니다. 흔히 생각하기를 기독교에 대해서 약간 알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나는 교인입니다. 신자입니다.'라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유대인들을 가스실에 넣고 학살했던 히틀러도 기독교를 알았고, 마르크스나 레닌도 기독교를 알고 있었답니다. 고르바초프도 세례교인이랍니다. 이제 소련은 모든 종교 행동을 자유케 한다는 법령을 통과되었답니다.
  여러분, 심지어 저 이북에 일당 독재자인 김정일이도 기독교를 압니다. 다만 믿지 않을 뿐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살펴봐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으로 구원을 받았다든지 죄 사함을 받는다든지 하는 말은 없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때로 지식의 교만 때문에 내가 뭘 알고 있다는 그 사실 때문에 하나님은 우스운 존재로 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또 우리는 그분이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믿/
  그러면서도 독생자 외아들까지 보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믿음으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성립되어 그 아버지께서 우리를 높은 자리에 올려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할/
  중요한 것은 본문에서 '안다'는 말은 그냥 막연하게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말합니다. 느끼고 맛보아 체험적으로 아는 신앙과 믿음을 말합니다. 그냥 친구 정도로 아는 것이 아닙니다.
  부부가 함께 살면서 서로 느끼고 서로 성격과 모든 것을 아는 것처럼 아는 것을 여기서 '안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방법도 여러 가지입니다만은 대부분이 환난을 통해서 바로 알게 됩니다. 욥42:5절의 욥의 고백을 들어 보세요!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할/
  ⑴건져놓고 높인다는 것은 더 적극적인 축복입니다. ㈀신분상으로 높아집니다. 죄의 종이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땅에 속한 사람이 하늘나라 백성이 됩니다. 시민권이 달라집니다.
  ㈁전혀 새로운 존재가 됩니다. 죽을죄인, 버림을 받고 멸망을 받아야 할 의인이 새로운 존재, 거듭난 존재가 됩니다. 고후5: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할/
  ⑵여기서 '높인다'는 말은 '쓰임 받다'라는 말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여러분! 뭐니뭐니해도 머니(돈)가 최고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쓰임 받는 것이 최고인줄 믿습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가치입니다.
  ⑶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높여 주십니까?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을(마5:19), ㈁섬기는 사람을(마23:11), ㈂선을 행하는 사람(롬13:3), ㈃전도하는 사람(고후8:18), ㈄순종하는 사람(히5:8-10), ㈅하나님 앞에 겸손한 사람(벧전5:6)을 높여 주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패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늘 겸손하게 낮아지고 낮아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높여 주시고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풀어주십니다. /할/

 

  ▶15절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①'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롬8:15절에 보면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린 무슨 큰 사건이나 터지고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기도하는 것으로 오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란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버지 하나님과 교제하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는 대화요, 교재입니다.
  어떤 부부가 오랜만에 여행을 갔습니다. 보래 남편은 좀 퉁명스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랜만에 해방감에 들뜬 부인이 약간 흥분상태를 느낍니다. 차창 밖을 대나 보는 부인은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에 연방 감탄사를 보내는 것입니다. '여보, 저 산 좀 보세요, 저 강 좀 보세요, 저 무슨 꽃이 저렇게 예쁠까?'
  그런데 그 남편의 대답을 정말 멋이 없습니다. '아니 산이 어쩌기에, 아니 강이 어쩌기에 시끄럽게 떠드나' 한참 시큰둥하게 툭명을 떨다가 녹아 떨어져 코를 골고 잡니다. 그 모습을 본 부인이 속으로 '정말 무드 없는 남자'라고 서운해합니다.
  여러분, 이 여행이 즐거운 여행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주님과 동행하면서 나그네길을 갑니다. 한마디로 여행길에 주님이 우리의 다정한 벗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아름다운 신앙생활은 내가 믿는 주님과 깊이 교재하고 이 교재를 통하여 더욱더 가까워지고 그래서 기분 좋은 동행자가 됩니다. 그래서 주님과의 교재는 인격적인 교재입니다. 또 나의 사랑과 믿음과 헌신과 충성을 바쳐나가는 성숙된 과정을 의미합니다.
  또 이왕에 기도하는 사람이라면 의당 응답을 받아야 합니다. 응답이란 하나님께서 나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의 그 음성, 그 대답을 듣는 것입니다. 내 사정, 내 소리만 따발총처럼 쏟아 놓고는 '이젠 다 해결됐겠지' 하고 생각하는 것은 약간 잘못된 신앙입니다.
  무당이나 우상에게 기도하는 것은 일방적인 기도로 끝내고 맙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세상에 모든 우상의 종교는 죽은 종교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죽은 신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방통행으로 끝나고 맙니다. 죽은 신은 인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기도는 그것이 아닙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과 인격적인 대화 속에 그분이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를 듣고 깨닫는 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아멘!/
  여기 '간구'란 간절히 기도한다는 뜻입니다. '내게 간절히 기도해라, 그리하면 내가 응답하리라' 놀라운 약속이 아닙니까? 시138:3절에 '내가 간구하는 날에 주께서 응답하시고 내 영혼을 장려하여 강하게 하셨나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에게 주신 특권입니다. 특히 아버지가 아들에게 부여한 특권입니다. 요즘 은행 카드가 일반화되고 있습니다. 신용카드인 그 카드만 있으면 현금이 없더라도 상품을 구입할 수가 있습니다. 그 카드는 상인과 고객간에 이루어진 하나의 사회적 신분관계입니다. 카드를 믿고 물건을 사기도 하고 팔기도 합니다.
  여러분,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란 하나님과 나 사이에 신용관계입니다. 마음놓고 믿고, 기도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도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화려한 수식어가 장식 안 된다 할지라도 주님 앞에 아버지하고 부르면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심령을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할/
  죄짓고 '아버지'하고 부르면 그 소리는 '용서해 주세요'라는 의미입니다. 병들고 괴롭고 가난하고 실패했을 때 '아버지'하고 부르면 그것은 '나를 도와주십시오, 고쳐주십시오'라는 의미입니다.
  우린 그것을 눅15장에서 집을 떠나 허랑 방탕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근심시켜 드렸던 탕자가 돌아왔을 때 사건을 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 탕자는 염치도 없고 면목도 없고 몸둘 바를 모릅니다. 그래서 탕자는 '아들이라고 생각하지도 마시고 품꾼의 하나로 써 달라'고 합니다.
  그 때 아버지는 '그래 다 안다, 더 말하지 말라, 너는 내 아들이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내 아들이다'하시고 아버지는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무조건 용서해 주시고 영접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아들은 우리들은 가르치고 아버지는 우리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괴로울 때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시기를 바랍니다. 병들고 환난 당할 때도 하나님 아버지를 부르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②'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사람들은 어렵고 힘들 때면 다 떠나갑니다. 친구도, 형제도, 부모도 멀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환난 때에 더욱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창39장에 보면, 요셉이 형제들에게 버림받아 노예로 팔려 갈 때도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은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애굽 사람에게 팔려 보디발의 집에 갔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범사에 그를 형통케 하셨고(창39:2), 또한 요셉은 모함을 받아 감옥에도 갔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하나님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케 하셨습니다(창39:23). 결국 그는 옥중에서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해 애굽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롬8:28의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인생을 살면서 크고 작은 환난을 당합니다. 환난 때 하나님이 안 계신 것이 아니라 환난 때 하나님이 더 같이 계셔서 우리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믿/
  환난을 당해봐야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파 봐야 병 고치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원수가 공격을 해와야 원수와 싸워서 이기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내가 어려움을 당해봐야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멘!/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요, 수학자였던 '파스칼'은 '행복은 우리 밖에 있는 것도 아니고, 우리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오직 하나님과 함께 있을 때만 있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여러분! 어디에 행복이 있습니까? 누가 행복한 사람입니까? 돈 많은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대통령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권력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돈이 있든 없든, 권력이 있든 없든, 하나님만 함께 하시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다니엘서에 보면 신앙의 위대한 사람들이 나옵니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입니다. 그들이 느부갓네살이 세운 금신상에 절하지 않은 죄로 7배나 더 뜨거운 풀무 불 속에 들어가게 되었는데, 하나님은 그들을 지켜 주심으로 머리칼하나 상하지 않게 보호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아무나 건져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시145:19절에 '저가 자기를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저희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또 시145:20절에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는 다 보호하시고 악인은 다 멸하시리로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경외란, 하나님을 인정한다는 말로서 그를 두려워하고, 높이고, 받드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그 다음에 부르짖으면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렘33:3절에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할/ 행여나 여러분 중에 환란 중에 있습니까? 기도하라는 신호입니다.
  시50: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또 시121:7절에 '여호와께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케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아멘!/
 
  ▶16절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하시도다"
  여러분, 생명의 주관자가 누구입니까? 누가 사람을 만들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기 때문에 건강과 장수는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살고 죽는 것도,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주관자, 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생명도 주십니다. 건강도 주십니다. 장수도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자를 장수함으로 만족케 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잠10:2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연세는 짧아지느니라' 오래 산다고 축복이 아닙니다. 건강하게 살아야 하고, 삶에 만족을 누려야 그게 진짜 행복입니다. 자식들보고도 만족하고, 사업을 하면서도 만족하고, 무엇을 해도 만족해야 복 받은 사람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만족하게 살다가 지옥가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고 섬기면 만족의 복뿐만 아니라 '구원의 복'이 있습니다. '나의 구원을 보이리라' 여기 구원은 영생구원, 천국 가는 축복입니다. 이 구원의 최고의 복입니다. 우리는 이 복을 받은 최고의 축복 자들입니다. /믿/아멘!/할/ (2010년 10월 31일 대예배 설교)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송수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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