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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비우고 하늘을 본 사람! (창 13:5-18)
여러분, 종교란 무엇입니까? 종교는 마음 공부입니다. 신앙의 힘은 우리의 마음을 개간하여 값진 생애 행복한 열매를 맺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우리들에게 마음의 중요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마5:8절에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또한 '마음이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우리가 '지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잠4:23절에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여기서 '지킨다.'고 했으니 우리가 좋은 마음을 가질 수도 있고, 나쁜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푸른색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온통 모든 것이 푸르게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마음에 부정적이면 모든 것이 부정적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이 긍정적이면 모든 것이 소망으로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행복도, 불행도 마음에 자세에 따라서 이루어집니다. 신앙생활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마음을 먹고 하나님을 섬기느냐에 따라 축복을 받을 수도 있고, 못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은 행동의 원천이 됩니다. 백두산 꼭대기에 천지란 연못이 있습니다. 여기서 동쪽으로 흐르는 강을 두만강, 서쪽으로 흐르는 강을 압록강, 북쪽으로 흐르는 강을 송화 강이라고 합니다. 이 강들의 근원이 백두산 천지인 것처럼, 우리들의 삶의 근원이 마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은 그 사람의 삶을 결정하는 열쇠입니다. /할/ 마음이 곧은 사람은 곧은 인물로 살고, 삐뚤어진 사람은 비뚤어진 인생을 살게 됩니다. 마음이 닫힌 사람은 닫힌 인생을 살고, 열린 사람은 열린 인생을 삽니다. 마음이 즐거운 사람은 즐거운 인생을 살게 되고 슬픈 사람은 슬픈 인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마음이 부지런하면 부지런한 인생을 살게되고, 그러나 마음이 게으르면 게으른 인생을 살게 됩니다. 또 불평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불평하는 인생을 살 것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감사하는 인생을 살게됩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인생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묘한 것입니다. 마음이 좁아지면 바늘 하나 들어갈 틈도 없을 정도로 좁지만, 마음이 넓어지면 온 우주라도 수용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은 마음공부입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지키는 것입니다. 옛말에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이란 지, 정, 의를 움직이는 근원을 마음이라 합니다. 마음을 성경에서는 중심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 즉 마음을 보시는 분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 속에 무엇을 지켜야 하는가? ⑴근심으로부터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염려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잡한 세상을 살면서 안 해도 될 걱정을 하지말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모든 병의 근원은 마음에서 나오고 건강도 마음에서 나옵니다. 기쁘게 마음을 조정하기 바랍니다. 요14:1절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딤후1:7절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할/ ⑵죄로부터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죄보다 무서운 것은 없습니다. 죄를 마음에서 척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⑶마귀로부터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벧전5:8-9절에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성령 충만해야만 마음을 마귀로부터 지킬 수 있습니다. /할/ ⑷적극적으로는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고후6:13절에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넓은 마음이란 '포용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용서하는 마음이고, 치우치지 않은 마음입니다. 치우치거나 편견을 가지면 남을 포용할 수가 없습니다. 넓은 마음이란 섬기는 마음입니다. 신앙생활은 섬김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주의 종들을 섬기고, 지도자들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할/ 섬김에 본을 우리 예수님이 보여주셨습니다. 막10: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 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할/ 이제 우리는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십니다. /할/ 이제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애통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의 죄에 애통해야 하고, 이웃의 영혼에 대한 애통이 있어야 합니다. /아멘!/ 그리고 '자비와 긍휼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바울은 고전2:16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는 것은 '신령한 마음 즉 성령께서 주시는 마음'을 뜻합니다. 우리 넓은 마음, 큰마음을 가집시다. 큰마음은 옹졸한 마음이 아닌 너그러운 마음입니다. 큰마음이란 닫혀진 마음이 아닌 열린 마음입니다. ▶옛날 중국에 '이광'이라는 사람이 어느 날 밤중에 산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큰 호랑이가 자기 앞으로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는 깜짝 놀라 재빨리 있는 힘을 다해 활을 쏘았습니다. 그런데 화살이 박혔는데도 그 호랑이는 넘어지지 않고 여전히 서 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가보았더니 그것은 호랑이처럼 생긴 바위였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쏜 화살이 그 바위를 뚫고 들어가 박혔습니다. 너무 신통해서 다시 한번 그 바위를 향하여 활을 쏘았지만 이제는 화살이 들어가지를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마음에 상태에 따라서 놀라운 힘이 생겨나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마음 속에 참된 믿음을 소유하면 우리는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레미아는 '너희의 마음의 밭을 기경하라'고 했습니다. /할/ ◀제목 소개!▶ 가끔 정치하는 사람들이 중대한 결심을 할 때 '마음을 비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무리를 일으키는 경우를 봅니다. 마음을 비웠다는 말은 욕심을 버렸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진짜 욕심을 버리고 마음을 비운 사람이 나오는데 누구입니까?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가난이 원인이 되어 형제나 동기간에 불화하고 싸우는 경우보다는 재산이 많아 재산의 분배 때문에 불화하고 싸우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생각해보면 돈보다는 의리가 더 중요하고 재물보다는 핏줄이 더 소중한 것입니다. 그러나 돈 때문에 형제가 적이 되고 친구가 원수가 되고 동지가 등을 돌리는 경우들을 볼 때 서글픈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서 아주 신선하고도 아름다운 인정을 아브라함에게서 볼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나홀과 하란이라는 동생을 둔 큰 형입니다. 그런데 막냇동생이었던 하란이 아들 롯을 남긴 후 먼저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롯은 큰아버지인 아브라함이 키우고 돌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 가나안 땅을 향하여 갈 때 조카 롯도 데리고 갔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나선 아브라함은 빈 손들고 나왔지만 하루가 다르게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습니다. 복 받은 목적으로 나선 것이 아니었지만 하나님을 따라가면 복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할/ 착해지려고 예수님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을 믿다 보면 착해집니다. 우리가 의로와 지려고 예수님을 믿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믿다보면 의로워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얻게 되었지만 일단 믿고 구원받으면 우리 삶의 모든 부분이 다 좋아집니다. 아름답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십니다. /믿/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따랐을 때 하나님은 하루가 다르게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만 복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따라 나섰던 조카 롯도 덩달아 복을 받았습니다. 당시 사회는 낙농사회입니다. 그들은 목축업자들입니다. 재산증식은 소 떼 양떼가 늘어나는 것입니다. 재산이 증식되자 그 집 종들도 늘어났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가난할 때는 화목하게 살았는데 재산이 늘어나니까 두 집안간에 싸움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밑에 있는 종들이 분쟁하고 다투게 되었습니다. 다툼의 주원인은 소떼, 양떼 먹이는 물과 목초 때문이었습니다. 서로 좋은 곳을 차지하려고 하는 기득권 싸움입니다. 자연히 종들의 시비나 충돌은 주인들의 감정을 자극하게 되었고, 피차 속상한 경우가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 결심하고 조카 롯을 불러 말을 합니다. 8절에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한마디로 집안끼리 싸우지 말자는 말입니다. 얼마나 동네 사람보기가 창피하냐는 뜻입니다. 9절을 보면, 이 분쟁에 대하여 아브라함은 겸손과 온유한 마음을 가지고 해결방안은 내 놓았습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완전히 기득권의 포기입니다. 삼촌의 권위로 조카를 얼마든지 쫓아낼 수가 있습니다. 얼마든지 자기가 좋은 것을 차지할 수도 있고, 조카를 더 나쁜 곳으로 보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에게 우선권을 주었습니다. 멋있는 사람입니다. 요사이 이런 사람 보기 드뭅니다. 하나님은 이런 멋쟁이를 더 크게 축복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들판이나, 사막이나, 다 좋다'는 것입니다. 어디서라도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낼 수 있다면 사막도 좋고, 오아시스도 좋다는 것입니다. 애굽에 가보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니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은 화평의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면 화평케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의 높은 신앙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릴 수가 있었습니다. '네가 오른쪽을 택하면 내가 왼쪽으로 가고 네가 왼쪽을 택하면 내가 오른쪽으로 가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쉽게 생각해 보면 네가 좋은 땅을 차지하면 나는 나쁜 땅이라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생각은 어디서든지 '네가 우리 주님을 기쁘게 하면 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면 살아 계신 나의 하나님이 애굽에서도 내 아내를 지켜주시고 나에게 돌려주신 하나님이 내 삶을 책임지고 도와주시지 않겠느냐?' 이런 신앙을 바탕으로 귀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내 이웃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내 삶을 책임져 주시리라는 귀한 신앙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할/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여유입니다. 성령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배짱입니다. 손해를 보면서도 짓밟히면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아가는 이 당당한 사람, 아브라함을 닮아갑시다. /아멘!/ 이런 결단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결단입니다. 마음을 비운 자만이 할 수 있는 결단입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습니다. ①그 땅은 아브라함의 소유이기 때문입니다. 창12: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이지 조카 롯에게 주신 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소유권, 기득권, 우선권이 아브라함에게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먼저 좋은 땅을 선택할 수가 있습니다. ②아브라함이 롯을 키웠기 때문입니다. 롯의 아버지 하란이 죽고, 그의 어머니는 떠나 버렸고, 그때부터 아브라함은 롯을 책임지고 키웠습니다. 나은 부모보다 키운 부모가 더 큽니다. 그리고 그를 버리지 않고 가나안까지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니까 롯은 아브라함에게 신세를 지며 장성한 손아랫사람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롯이 양보하는 것이 일의 순서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조카 롯에게 '우리 서로 싸우지 말자, 네가 이쪽을 택하면 나는 저쪽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득권과 선택권을 고스란히 조카 롯에게 양보하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돈 때문에 부부가 헤어지고 부모와 자식간에 서로 미워하고 형제가 원수가 되기도 하고 친구간에 의리가 상하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의좋은 형제가 살았답니다. 어느 날 형제가 길을 가다가 길거리에 떨어진 값비싼 황금 덩어리를 하나 주었습니다. 그때 황금을 쥔, 형의 마음속에 '동생이 없었으면 나 혼자 갖는 것인데' 하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 때 형은 '이 황금이 내 마음을 약하게 하는구나'하면서 길거리에 던져 버렸습니다. 그랬더니 두 조각이 나면서 두 마리 뱀이 되어 물으려고 하기에 형제가 있는 힘을 다해 잡아 죽였더니 처음 주웠던 황금덩이와 똑같은 두 개의 황금 덩어리가 되어 두 형제가 서로 사이좋게 나누어 가졌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는 엉망진창이 되어도 돈만 손에 쥐면 최고로 알고 삶을 낭비하고 잠 못 이루고 있는 인생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본문의 아브라함은 재산보다는 혈육의 소중함을 깨달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화평을 이루는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재산 싸움으로 거부가 되기보다는 오히려 양보하면서 화평을 도모함으로 재산상으로는 손해가 되더라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러니까 믿음을 지키는 그 길을 택했습니다. 정말 멋있는 사람입니다. 요사이 이런 사람 보기 드뭅니다. 하나님은 이런 멋쟁이를 더 크게 축복해 주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들판이고, 사막이고, 다 좋다는 것입니다. 어디서나 하나님의 영광만 드러낼 수 있다면 사막도 좋고 오아시스도 좋다는 것입니다. /할/
▶본문에서 우리는 선택의 중요함을 다시 한 번 발견합니다. 롯의 선택과 아브라함의 선택을 알아보겠습니다.
①롯의 선택을 봅시다.
롯은 야심만만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이 '너 먼저 선택하라'는 말이 떨어지지가 무섭게 물이 넉넉하고 비옥한 요단 들판을 선택했습니다. ⑴'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보니'(10) 눈으로 보이는 곳을 선택했습니다. 눈의 기능은 다양하고 놀랍습니다. 그러나 제한적입니다. 전체를 다 보지 못합니다. 눈으로는 색깔, 생김, 크기를 볼 수 있지만 그 사람의 인격이나 사상, 신앙을 볼 수 있습니다. 창6:2절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신앙도, 인격도 제쳐놓고 눈에 드는 여자, 눈으로 보아서 예쁜 여자들을 아내로 삼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결국 그것이 타락과 범죄의 원인이 되었고, 홍수 심판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요단 들을 바라본즉' 여기 '바라본즉'이란 이 단어와 같은 의미로 쓰여진 곳이 성경 한군데서 더 나옵니다. 창3:6절을 보면 하와가 뱀의 꼬임에 빠져 선악과를 따먹는 장면이 기록되었습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하와의 눈길은 선한 눈길이 아니고 뭔가 따먹고 싶어하는 욕망의 눈길입니다. 여기서 눈이 문제가 됩니다. 눈으로 보고 결단했습니다. 눈이라고 해서 다 눈이 아닙니다. 진리를 보고, 주님을 바라보고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이 좋은 눈입니다. 하와가 욕망의 눈길로 선악과를 바라본 것같이 롯이 욕망의 눈길로 요단 들을 바라보았다고 했습니다. 탐심으로 바라보는 눈길을 말합니다. 또 눈에 보이는 것이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고후4:18절에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우리의 육신은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은 보이지 않습니다. 여러분! 보이는 육신이 보이는 내세가 영원합니까?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영혼이 보이지 않는 내세가 영원하다는 진실을 알아야 합니다. /믿/아멘!/ 이 땅에 오래 살아야 백년입니다. 롯은 보이는 데로 좋은 땅을 선택했습니다. 보이는 것에 의한 결정, 그것은 계산에 의한 결정입니다. 세상 적인 수치로 보면 이것이 현명한 것 같고 수지 맞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수학 법은 여기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믿음 안에서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아멘!/ ⑵놋은 조건을 선택했습니다(10).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물이 온 땅에 넉넉했고, 여호와의 동산처럼, 에덴동산처럼 아름답고 애굽 땅처럼 비옥한 곳을 선택했습니다. 사실 중동지방에서 물이 넉넉하고 땅이 비옥하고 아름답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최고의 조건입니다. 물이 많다는 것은 농사가 잘 되고 모든 것이 풍족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생활조건이 최고라는 것입니다. 롯은 바로 그 조건을 선택한 것입니다. '애굽 땅과 같았다'고 했습니다. 롯은 그곳에서 나일강을 중심으로 찬란한 도시문화가 꽃피었던 애굽문명의 편리함과 화려함을 보았습니다. 바로 그렇게 '물댄 동산 같고,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은 그곳은 행복이 보장된 곳'처럼 보여 그곳에 매료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너무 화려한 것에 속지 마세요! 그럴듯한 곳에는 언제나 함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바로 그 땅이 가장 무서운 심판을 받았던 땅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한 도시요 매력 있는 도시지만 하나님의 약속과 축복이 없는 도시입니다. 사실 롯의 비극은 아브라함을 떠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왜 아브라함을 떠나는 것이 비극입니까? 아브라함은 축복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여러분! 축복의 사람을 따라 다니시기를 바랍니다. 또 축복의 사람들을 만나십시오. 기도의 사람, 믿음의 사람들을 만나면 평생 후회가 없습니다. /할/ 롯은 육신의 눈을 가진 사람입니다. 육신의 눈은 언제나 겉만 봅니다. 겉만 그럴듯하면 마음이 동합니다. 신앙의 사람들도 기도하지 않고 말씀에 깨어있지 않으면 겉만 보고 당장 혹해 버립니다. 세상 적인 계산으로 볼 때는 아주 좋습니다. 여러분! 세상 적인 쾌락이 얼마나 달콤합니까? 그러나 그곳에 멸망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음을 말아야 합니다. 롯은 조건이나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래 전에 삼성의 고 이병철 총수는 건강과 장수를 위해 물은 제주도 한라산의 생수를 공급하다 마시고 쌀이나 채소는 직접 무공해 재배로 먹고 생선은 남태평양 앞에서 잡은 것을 먹는 등 몸보신을 위해 가장 좋은 것들을 먹고 마셨습니다. 그러나 그도 100년도 못살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롯이 선택했던 소돔과 고모라의 경우 물이 넉넉한 만큼 죄도 넉넉했습니다. 먹거리 볼거리가 많은 것처럼 타락도 범죄도 많았습니다. 하나님보다 조건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보다 조건을 더 찾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본문 13절을 보면 롯이 선택한 그곳을 가리켜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는 말이 나옵니다. 물이 넉넉하고 아름답고 비옥한 그곳이었지만 거기 사는 사람들이 악했기 때문에 불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흔적도 없는 곳이 되고 만 것입니다. 롯은 잘못된 선택 때문에 패가망신한 사람입니다.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었고, 재산은 불타버렸습니다.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롯의 신앙을 점검해 보고 우리도 점검해 봐야 합니다. 롯은 갈대아 우르를 떠났으나 가나안에 대한 목표가 없는 사람입니다. 쉽게 표현하면 롯은 세상을 떠나 예수님을 믿었으나 천국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세상보다는 저 영원한 천국을 사모하는 자들입니다. 롯은 안목의 정욕을 따라가는 세속적인 성도의 그림자입니다. 여러분, 세속적인 쾌락, 얼마나 멋있습니까? 그러나 그곳엔 멸망의 그림자가 도사리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할/ 우리는 롯이 선택한 요단을 알아보아야 합니다. 요단이 어디입니까? 가나안을 벗어나는 변경입니다. 약속의 땅, 언약의 땅, 하나님의 땅을 벗어나는 경계선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세상을 바라보고 쾌락을 쫓은 자는 천국 변방에서 서성거리는 사람입니다. 한 손에는 하나님을 붙잡고, 한 손에는 세상을 붙잡은 자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축복하지 않습니다. 롯은 결국 천국 변방에서 서성거리다가 패가망신 당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⑶다시 그가 선택한 소돔 땅은 어떤 곳인가?(13) '소돔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무슨 말입니까? 심판 받을 날이 곧 가까웠다는 말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에덴동산처럼 아름답고, 애굽 땅처럼 기름지고, 풍성해 보였지만 속을 들어다 볼 때는 유황불이 떨어질 곳이더라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은 세계, 겉보다는 속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긴 안목으로 판단하는 성도들이 되십시다. 여러분 지금 돈을 잘 버는 것보다 믿음생활 잘할 수 있는 곳, 순종생활 잘할 수 있는 곳, 여기가 축복의 땅입니다. 환경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소망입니다. 환경이야 사막 같지만 하나님이 언약하신 약속의 소망이 있으니까 아브라함은 그곳을 택했습니다. 그러나 롯은 지금 보이는 제물만 바라보고 은혜를 잊어버리고, 예의를 잃어버리고 자기만 잘 살면 된다는 그런 욕심으로 가다보니 결국은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의 자리까지 가게 된 것입니다. 성경에는 재물에 눈이 어두워서 돌이킬 수 없는 자리로 나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아간은 돈 좋아하다가 돌무더기에 파묻혀 죽었고, 게하시도 돈 좋아하다가 문둥이가 되었으며, 발람도 돈 좋아하다가 거짓 선지가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명예를 얻고 싶었지만 돈 좋아하다가 성령 모독 죄로 사함을 받지 못하고 차례로 줄초상을 당했습니다. 가롯유다도 돈을 좋아하다가 예수 팔아먹고, 천추에 나쁜 이름을 남겼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빌딩을 자랑하고 부동산 자랑합니다. 그것이 내 집이요, 내 땅이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기업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이것들이 다 내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 세상사는 동안 잠깐 빌려 쓰는 것'입니다. /믿/ 여러분들 세상 것을 내 것이라고 하는 착각을 하지 마십시다. 건강도 내 것이 아닙니다. 지식도, 명예도, 재물도,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임시로 우리에게 맡겨두신 것입니다.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언제든지 내 놓아야 합니다. '아하! 하나님이 이런 때에 필요하셔서 이것을 나에게 맡기셨구나!' 이런 믿음이 우리 안에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②아브라함의 선택은 어떤 선택인가? ⑴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한 선택입니다. 그는 선택을 자신의 의지나 판단으로 하지 않고 하나님의 계시에 의존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떠나라면 떠나고 머물라면 머물고 바치라면 바쳤습니다. 창12장을 보면 정든 고향 하란을 떠나라는 말씀 한마디에 즉시 고향을 떠났습니다. 창14:20절에 보면 즉석에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창22장을 보면 외아들 이삭까지도 하나님이 번제로 드리라고 하니 두말없이 외아들을 번제로 드렸습니다. 자식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쉬운 일입니까? 아닙니다. 굉장히 어려운 결단입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은 눈으로 보고 머리로 생각하고 이해득실을 따져가며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멋대로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순종했고, 그 뜻을 따라 모든 것을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이 무엇이며 순종이 무엇인가를 배우게 됩니다. 롯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결정에 순종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의 뜻에 자신을 순종했습니다. 신앙은 내 자신에 맞추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을 이루게 됩니다. /믿/아멘!/ ⑵아브라함은 한마디로 하나님을 선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눈에 보이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조건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선택했습니다. 이 신앙이 바로 성숙한 신앙입니다. 환경이 나빠지고 조건이 악화되고 난관이 앞을 가로막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생명의 주인으로 선택한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최고의 신앙은 조건이나 환경을 다 빼앗겨도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신앙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고 축복을 주십니다. /할/
③아브라함이 받은 축복이 무엇입니까(14)? ⑴아브라함이 마음을 비우고 롯을 떠나 보내자 하나님이 그에게 오셨습니다.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친히 찾아 오셨습니다. 하나님 쪽에서 먼저 교제를 시작하신 것입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축복의 역사는 인간 쪽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쪽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믿/ 하나님이 오셔서 우리의 사정, 환경, 조건을 보시고 좋은 것으로 허락해 주십니다. /아멘!/ ⑵'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그렇습니다. 신앙은 바라보는 것입니다(히11:1). 영어로 see와 look가 있습니다. 둘 다 본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릅니다. see는 눈에 들어오는 것을 그냥 보는 것입니다. 생각 없이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look는 목적을 가지고 보는 것입니다. 의미를 생각하며 보는 것입니다. 찾으면서 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사람의 눈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그냥 보면 안됩니다. 목적을 가지고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무엇인가? 무슨 뜻인가를 보고 탐구하고 추구해야 합니다. ▶바라보라는 말씀에는 몇 가지 깊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잃어버린 것을 바라보지 말고, 새롭게 주어질 것을 기대하라!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할/ ㈁지나간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라! 과거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과거는 지나간 날이요, 날아가 버린 화살입니다. 그것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새로운 미래는 우리가 새롭게 창조하는 일이 더 급한 일입니다. 사43:18-19절에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과거는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미래는 성공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잃었습니다. 그러나 미래는 얻을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과거를 생각하지 마시고 창조하는 미래를 생각하십시오. 없어진 과거를 붙들지 말고 형통할 미래를 설계하십시오. 지나간 과거를 탓하지 말고 내일을 위해서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으십시오. /아멘!/ ㈂땅을 바라보지 말고, 위를 바라보라!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께로 난자들입니다(요1:12-13).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골3:2절에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지 말라'고 했습니다. 원래 인간은 '안드로포스' 위를 보는 자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로 왔기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드리며, 찬양하며, 기도하며 사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할/ 히12:2절에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렇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를 바라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마음이 평안합니다. 요14: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구원에 기쁨이 충만합니다. 합3:17절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우리의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할/ 영적인 부요, 마음의 기쁨입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됩니다. 벧후1:5-7절에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무지개는 7가지 색깔이 합하여 무지개가 되고, 도래미파솔라시 7음이 합하여 음악이 됩니다. 그러나 신의 성품은 8가지 요소가 합해질 때 나타나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도 예수를 바라보는 자에게 오는 축복입니다. 그렇습니다. 눈을 들어야 넓게 바라 볼 수 있습니다. 또 동서남북이라고 했으니 그 범위가 제한이 없습니다. 롯은 한 면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제한이 없는 무한정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지금 보이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믿음을 순종하면 보이지 않은 하나님의 손길이 동서남북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들의 가정의 동서남북, 사업과 기업 위에 동서남북을 여시고 눈을 들어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한마디도 아브라함은 우주적인 축복을 받았습니다.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시고 끝난 것이 아닙니다. ⑶15절에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아브라함대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자손 만대까지 복을 받았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 아브라함이 본토 아비 집을 떠날 때, 이미 다 약속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뜻대로 걸어갈 때 재확인시켜 주십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다 아는 말씀인대도 우리가 말씀을 순종하여 걸어갈 때 문득, 문득 그 본뜻을 바르게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깨달으려면 깨닫게 해 준 만큼 순종해 가야 더 깊이 있게 깨닫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축복이 제한이 없습니다. 또 우리가 받았다가 잠깐 후에 없어지면 받지 않은 것 보다 더 섭섭합니다. '옛날에는 우리가 잘 살았는데',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가슴 아픈 사람입니다. 옛날이 아니라 지금 현재 잘 살아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아멘!/ 여러분!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감당할 능력까지도 주십니다. 그 땅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을 장구히 누릴 수 있는 은혜까지도 주십니다. 축복은 받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축복을 지키는 것은 더 더욱 중요합니다. 사람들은 물질도, 건강도, 자기 자신이 관리를 잘해야 된다고 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 기본을 그렇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물질을 지켜주지 않으시면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축복은 지키고, 누리고, 간직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할/ ⑷16절에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무슨 말입니까? 아브라함에게 현재 아들도, 딸도 없습니다. 또 나이도 많이 먹었습니다. 아직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을 땅에 티끌같이 주겠다'는 것은 엄청난 축복입니다. 땅만 받으면 무슨 소용입니까? 지배할 후손이 있어야지, 그것을 아시는 하나님이시므로 자손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예언대로 아브라함이 자손, 영적인 자손과 육적인 자손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루어 졌습니다. 오늘날 60억이 넘는 인구 3분의 1이 예수를 믿습니다. /할/ 또 육신 적으로는 왕상3:8절에 보면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이 정도로 많아졌습니다. /할/ ⑸17절입니다.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동서남북은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신 축복의 영역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이 복은 물질적인 축복이요, 기업의 축복이요, 삶의 원천의 축복이요, 잔손만대가 누리는 복입니다. /할/ ⑹가장 큰복인 예배자의 복을 받았습니다. 18절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아브라함은 옮겨가는 곳마다 가서는 먼저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생활의 특징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예배는 가장 중요한 것이요, 가장 긴급한 것이고,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역사적으로 가장 축복을 받고 선한 일을 많이 하여 존경받는 사람은 미국의 '존 데이비슨 록펠러'입니다. 그는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세 가지 기적을 이루었는데, ⑴역사상 가장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지만 가장 부자가 되었고, ⑵역사상 가장 많은 돈을 다른 사람에게 기부하였고, ⑶98세까지 장수하고도 치아가 하나도 썩지 않을 정도로 건강하게 살다가 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록펠러가 존경받고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부자가 되고 역사적인 인물이 된 데는 세 가지 원인이 있다고 합니다. ⑴그는 교회에 나가서 예배드리는 일을 한번도 빠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⑵매일 성경을 읽었다고 합니다. ⑶하나님 앞에 반드시 온전한 십일조를 드렸을 뿐 아니라 십의 구조까지 드리기도 했답니다. 여러분! 무엇보다도 우리가 이 예배 생활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생명 걸고 예배드리라고 저는 시간마다 광고합니다. 이것이 만복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축복의 사람이 된 것은 바로 이 예배 생활 때문입니다. 이것이 축복의 원천이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던 비결입니다. /할/ ⑺아브라함이 이런 큰복을 받았다면 반드시 그렇게 된 원인이 있습니다. 여러분, 안 되었다면 안 된 이유가 있고, 잘 되었다면 잘 된 이유가 있습니다. /아멘!/ ▶아브라함은 기본이 좋았습니다. 마음 바탕이 좋았습니다. 이웃을 섬기는 기본이 좋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기본이 좋았습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에도 기본이 좋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일에, 찬송하는 일에, 봉사하는 일에, 헌금하는 일에 기본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기본이 좋아야 합니다. /할/ 두 토끼 사냥꾼의 이야기입니다. 한 사냥꾼은 사냥하러 나가기만 하면 토끼를 잡아옵니다. 그러나 다른 사냥꾼은 수없이 나가도 그 때마다 한 마리도 잡아오지 못 합니다. 이유를 물었습니다. 기본이 달랐습니다. 못 잡은 사람은 토끼를 잡을 수 없는 이유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부정적이었습니다. '토끼는 귀가 밝아요. 시력이 좋아요. 걸음이 빨라요. 몸집이 작아서 총을 쏘아도 맞추기가 힘들어요.' 안 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갈 때마다 토끼를 잡아오는 사냥꾼은 말했습니다. '토끼 잡기는 쉬워요. 풀을 먹을 때 가면 정신이 없어요. 살금살금 다가가도 도망치지 않아요. 사정거리까지만 가서 조준하면 영락없이 잡아요.' 자세가 문제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세가 좋았습니다. 기본이 좋았습니다. /할/ (2010년 7월 25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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