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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믿음을 보시는 하나님! (마 9:1-8)
목사님 두 분이 오토바이를 타고 신나게 달렸답니다. 그런데 너무 달리면서 스피드를 너무 많이 내었습니다. 경찰이 세우고 보니 목사님들입니다. '아실만한 분들이 왜 그러세요? 그렇게 달리다 사고가 나면 어떻게 해요? 오늘은 봐 드릴 테니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그러자 한 목사님이 말하기를 '우리는 괜찮아요. 주님께서 같이 타고 계시니까요.' 그 때 경찰이 '주님께서 타셨다고요? 세 분이 타면 위법입니다.'하고 스티커를 발부했답니다. /믿거나 말거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주님의 능력이 흐릅니다. 그 능력을 귀한 일에 쓰시기를 바랍니다. /할/ ◀제목 소개!▶
인간은 혼자 고독 속에서는 살지 못합니다. 이웃과 더불어 살게 하나님이 지어주셨습니다. 더불어 사는 세상에 만남이 중요합니다. 인간의 만남에는 형태와 의미가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의 만남은 질투와 살인의 만남입니다. 예수와 가롯유다의 만남은 배신과 가책의 만남입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공자와 같은 만남은 깊은 교육적 만남입니다. 산다는 것은 네가 너를 만나고 네가 나를 만나는 것입니다. 민족과 민족이 만나고 문화와, 문화가 서로 조우하는 것이 인류의 역사입니다. 자연도 만남입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고 산과 바다가 만나고 초목과 풀이 만나고 꽃과 벌이 만납니다. 종교도 만남입니다. 네가 하나님을 만나고 진리와 절대자를 만나려고 하는 것이 종교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만남을 통하여 영향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웃는 사람과 만나면 웃게 되고, 슬퍼하는 사람과 만나면 슬퍼집니다. 추운 곳에 가면 춥고, 더운 곳에 가면 덥습니다. 지성인을 만나면 지성인이 되고 무식한 사람을 만나면 그의 언행심사가 무식해 집니다.
또한 악한 사람 만나면 악해지고, 선한 사람 만나면 선해집니다. 믿는 사람을 만나면 함께 믿게 되고 의심하는 사람 만나면 함께 의심하게 되고 비판하는 사람을 만나면 함께 비판하게 됩니다. 이렇게 만남이 귀합니다. 하나님을 거역했던 요나를 만났던 사람들 다 망했습니다. 선택이 중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만남에는 영향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TV 사극에 장희빈에서 왕도 신하도 국가도 모두 그 여자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 여인이 온 국가를 흔들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기록에 의하면 장희빈의 남편이었던 숙종은 조선의 여러 왕들 가운데 제일 어진 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부인이 악하니까 별수 없었습니다. 영향을 받게 된 것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에 아합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악한 왕의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아합은 본래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아합이 그렇게 악하게 된 것은 시돈 사람 이세벨이란 여자를 아내로 맞이한 다음부터입니다. 부인이 우상을 숭배하고 탐욕 속에 자꾸 충격을 주니까 점점 의식화되어 영향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역대 왕 중에 가장 악한 왕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보면 좋은 친구들을 만났던 한 중풍병자가 그들의 도움을 입어 예수님을 만나 그 중풍 병을 깨끗이 치료받고 구원받은 사건을 우리에게 소개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그들 덕분에 그 중풍병자는 주님을 만나게 되어 죄 사함을 받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상을 들고 나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이웃을 만나는 것은 축복입니다. 우리도 믿음 있는 좋은 이웃을 만나야합니다. 은혜로운 사람, 기도의 사람,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효도하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비판하는 사람을 만나면 불효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은혜의 생활과, 믿음의 생활을 하려면 나만 잘해서도 안 됩니다. 주변에 계시는 귀한 분들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 분들을 찾아야 합니다. 비판하는 사람, 불평하는 사람, 의심하는 사람을 만나면 함께 죽습니다. 그러나 격려해 주고 소망을 주며 함께 기도해 주는 사람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중풍병자는 믿음이 좋은 친구들을 만나서 그도 믿음의 사람이 되었고, 저주의 질병에서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할/ 본문을 자세히 상고해 보고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깊이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1절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본문과 똑같은 배경은 막2장, 눅5장에서 더 자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당시 배경을 마8:34절을 보면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거라사 지방에 가셔서 군대 귀신들린 청년을 치료해 주실 때 돼지 떼들이 몰살했습니다. 그때 그 지방 사람들은 예수님의 능력 앞에 두려움이 왔음으로 그곳을 떠나가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환영하지 않은 곳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접하고 환영하는 곳에서는 기적의 역사들이 나타납니다. 여러분, 주님을 모시기 바랍니다.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배척했던 가라사 지방에서 다시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오셨습니다. '본 동네'란 가버나움을 말하는데 예수님이 그곳에서 선교활동의 주 무대였습니다. 가버나움은 당시 갈릴리 지역에서는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그곳에는 세관이 있었습니다. 세관이 있었다는 것은 수도 예루살렘의 관문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리고에는 세관이 있었는데 여리고는 예루살렘의 관문에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수도서울의 관문인 인천에 세관이 있습니다. 그만큼 가버나움은 지역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바치시면서 복음을 전했던 곳입니다. 예수님이 배를 타시고 건너서 가버나움에 갔다는 것은 단순한 여행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상당히 오시기 어려운 걸음을 하신 것입니다. 예사로 가버나움에 오신 게 아니고 배를 타서 건너야 하고 제자들도 타야 되며 또 배를 타고 건너는 것은 특별한 목적이 있어야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어렵게 가버나움에 가셨는데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이렇게 오신 것은 가버나움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기회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아멘!/
▶2절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사람들이 데리고 오거늘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가버나움에 중풍병자가 한 사람 있었습니다. 이 사람 때문에 가버나움에 지난밤에 배를 타시고 바다를 건너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문제가 있는 곳에 찾아오십니다. 사실 이 중풍병자는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일어나지도 못합니다. 침상에 누워있는 이 병자는 희망이 없습니다. 친척도 이웃도 동네사람도 그 사람이 다시 일어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또한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전혀 없는 사람인데 그 동네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갔지만 그 이웃 사람들이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온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중풍병자에게 왔던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입니다. /믿/ 우리는 이 기회라는 의미를 잘 새겨야 합니다. 인생은 한 평생을 살면서 많은 기회를 만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 가운데 하나입니다. 저는 정상적으로 공부하면서 자라는 학생들은 정말 큰복을 받았다고 생각을 합니다. 사춘기 시절에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하는 청소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상적으로 배우면서 자라는 그 자체만 해도 대단한 기회입니다. 우리는 청소년 시절에 기회라고 하는 이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기회를 잃어버리거나 기회를 남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청소년기에 바로 배우고 바로 자란다는 자체가 기회입니다. 그 기회 안에 의미가 있는데도 의미를 전혀 살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이 중풍병자는 어떻게 보면 기회를 잃은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인생은 기회가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지금 기회가 왔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왔습니다. 절망의 사람, 도저히 기회가 있다고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 이 사람에게 이제 인생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날 기회가 온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회가 동네 사람들의 열심에 의해서 살아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할/ 동네 사람들이 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예수님께로 갔습니다. 본문의 배경은 막2:1-5절에서 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조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수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가다라 지방에서는 예수님이 배척은 받았지만 가버나움에는 대단한 인기였습니다. 예수님이 소문을 듣고 또 다시 구름 떼처럼 모였습니다. 막2장에서는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서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 사람들은 또 다시 신선한 충격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회중들은 주님의 말씀에 도취되어 은혜 충만, 말씀 충만, 성령 충만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는 그 현장에 갑자기 이상한 사건이 터졌습니다. 갑자기 천장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더니 천장에 구멍이 뚫리고 그곳을 통하여 줄에 매단 침상하나가 예수님 앞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깜짝 놀라 어리둥절합니다. 사건은 한 중풍병자를 둔 네 사람이 그를 데리고 예수님 계신 집회 장소에 갔지만 너무 사람들이 많아 도저히 문으로는 들어갈 수가 없이 지붕으로 올라가 구멍을 내고 침상에 줄을 달아 예수님 설교 단 앞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보통 이스라엘 집은 2층 스라브 집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옥상은 항상 귀하게 사용합니다. 그곳에 올라가 기도도 합니다. 네 친구들은 비상수단으로 옥상으로 올라가 지붕을 뚫고 줄을 매달아 중풍병자의 침상을 예수님 앞에 내려놓은 것입니다. 이때 사람들은 놀라 소리를 질렀을 것입니다. 누가 이런 무례한 짓을 하느냐고 따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할/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사람이 보는 관점과 주님이 보시는 관점은 다릅니다. 사람은 환경을 보고, 조건을 보고, 외형을 보지만 우리 주님은 그 마음 중심에 믿음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같이 한 번 분석해 보겠습니다.
①주님이 그들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여기서 '저희가' 누구입니까? 네 사람의 친구들만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 사람들의 믿음 만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물론 이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그 사람들의 믿음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중풍병자가 가고 싶지 않다고 막무가내였다면 그들이 데리고 올 리 만무합니다. 오히려 중풍병자 마음속에 간절하게 주님 앞에 와서 고침 받기를 원하고 있을 때 네 친구들이 도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저희 믿음이란 환자 자신을 포함한 네 친구들의 일치 합심한 믿음인줄 믿습니다. 저들은 지붕을 뜯고 구멍을 내어 중풍병자를 침상 채 달아 내렸습니다. 어찌 보면 저들의 행동이 무례한 행동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님을 만나는데 있어서 어떤 장애물도 헤치고 나올 정도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풍병자와 네 명의 친구들은 예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지붕을 뚫을 정도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앙은 이렇게 적극적인 생각을 하게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일을 만나든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기적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장애물이 있을 때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저들은 문제가 있을 때마다 자기의 이성으로 돌아가고, 경험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 앞에서 똑똑한 체 하며 합리적인 방법을 추구합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하면 안 되는 것 같지만 반드시 되고 맙니다. 믿음으로 하면 죽는 것 같지만 살아납니다. 믿음으로 하면 망하는 것 같지만 흥하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으로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14:23)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할/
▶그렇다면 그들의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⑴연합을 이루는 믿음입니다. 한사람의 힘도 큽니다. 그러나 두세 사람의 힘이 합해지면 더 큽니다. '한 사람이 천을 쫓고 두 사람이 만을 쫓는다'고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신앙을 존중히 여깁니다. 개인의 신앙에 따라서 그 사람의 구원과 축복이 결정됩니다. 그러나 혼자 믿는 것보다 온 가족이 일치 합심할 때 그 신앙은 역사를 이루며 축복을 받게 됩니다. 교회 안에 믿음도 그렇습니다. 내 믿음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협력하고 합심해야 하나님의 일이 감당됩니다. 교회 생활은 독불장군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 십시일반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다. /아멘!/ 구역장을 비롯한 구역식구가 하나 될 때 은혜가 됩니다. 선교회 회장을 비롯한 온 회원들이 하나가 될 때, 큰일을 할 수 있습니다. 목사와 성도간의 하나가 될 때, 하나님의 교회는 은혜롭습니다. 여러분, 합심협력하면 큰 힘이 생깁니다. 무거운 것도 가벼워지고 어려운 것도 쉬어집니다. 하나님의 일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입니다. 전4:12절에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능히 당하나니 삼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우리 주님은 '두 세 사람이 모인 곳이면 나도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할/ ⑵역경도 헤치고 나가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계신 곳에 가서 너무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많다고 거기서 포기하고 돌아간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어떠한 일을 만나든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은 기적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절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려고 뽕나무에 올라간 것처럼 이들도 지붕 위 옥상으로 올라가 남의 집 옥상을 부서뜨립니다. 그들은 욕을 얻어먹는 것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하다가 보면 신앙생활의 장애물이 많습니다. 그렇다고 그 장애물에 넘어져서는 안 됩니다. 신앙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다 포기해도 신앙은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역경과 어려움이 왔더라도 뚫고 나가십시오, 이 친구들은 그 역경을 뚫고 나갔습니다. 이런 믿음이 기적을 일으킵니다. /믿/아멘!/ ⑶저들은 확신 있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우리는 고칠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고칠 수 있다.'라는 강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글쎄 고칠 수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다.'는 의심 있는 믿음을 가졌다면 그렇게 무거운 환자를 데리고 거기까지 올라갈리 만무합니다. 여러분, 확신을 가지십시다. 구원의 확신, 응답의 확신, 축복의 확신을 가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우리 주님은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은혜를 받으려는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반드시 은혜를 받습니다. 축복을 받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으면 반드시 축복을 받습니다. 구원은 받아야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믿음으로 나가면 주께서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신 것처럼 반드시 구원을 주십니다. /아멘입니까?/할/ 막9: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의 각오가 중요합니다. 결단이 중요합니다. 확신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각오하는 자에게 믿는 자에게 소망을 가진 자에게 그 길을 열어 주십니다. 도와주십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습니다. 우리 모두는 모든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을 가진 잡니다. 예수가 나의 힘입니다. /믿/ ⑷그들은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가졌습니다. 약고보 장로님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저들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이었습니다. 저들은 수고도 불사했습니다. 주님은 말세에 믿음을 보시겠다고 했습니다. 지금 현대인들의 믿음이 거의 형식과 의식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강하게 역사가 나타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찾기가 힘이 듭니다. 복의 근원된 아브라함이 신앙의 행함을 보이다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습니다.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하자, 그는 두말없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 바치는 행함의 사람이 아브라함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산 믿음,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시고 축복하십니다. /할/
②믿음을 보신 예수님은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중풍병자는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입니다. 한마디로 치유의 가망이 전혀 없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주님은 '소자야! 안심하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할/ 예수님께서 세 마디의 축복의 말씀을 하십니다. 병 고치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은 죄의 용서입니다. 그래서 '네 병이 나았느니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세 가지의 축복을 하나하나 생각해 보겠습니다. ⑴'소자야!' 영어로는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남자나 여자나 다 포함하여 어린아이를 가리킬 때 자식을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아들이라고 불러주셨다면 모든 것은 끝났습니다. 하나님이 중풍병자에게 그러니까 아무쓸모 없는 인간에게 '소자야! 너는 네 아들이다!'라고 불러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불러주셨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들 삼아 주셨습니다. /할/ 아들이라고 말할 때 이것은 물론 이해관계를 초월한 조건 없는 사랑의 관계를 의미한 것입니다. 중풍병자와 그의 친구들의 믿음을 보신 예수께서 그들에게 아버지의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아들의 특권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인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기업을 물려받은 자입니다. /할/ ⑵'안심하라!' 너무나 감격스러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겉은 멀쩡해도 속은 기막힌 심정으로 사는 자가 많습니다. 겉은 웃지만 속으로 우는 자가 많습니다. 돈으로 우는 자, 부부관계로 우는 자, 자식문제로 우는 자, 세상 여러 가지의 문제로 인해 어찌할 수 없는 마음으로 우는 자가 많습니다. 이런 우리에게 지금 하시는 말씀은 '안심하라!'입니다. 본문의 거동도 할 수 없는 이 중풍병자에게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안심하라!'입니다. 사실 중풍병자의 문제는 자신의 병을 자신이 고칠 수 없다는 한계에 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예수님이 해결해야지 내가 해결하려고 하면 더더욱 깊은 늪에 빠집니다. 자신의 병은 해결할 수 없는 이 중풍병자에게 '안심하라'는 말씀은 병자에게 꼭 필요한 말씀인줄 믿습니다.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안심하라'고 하십니다. 오늘 이 말씀을 믿음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할/ 그런데 이 말씀은 인생의 벼랑 끝에 선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부도로 인한 절망 속에 사는 사람들에게, 사람들에게 실망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사정, 환경, 처지, 조건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주실지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안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안심하는 마음이 곧 믿음입니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도 하지만 안심하는 마음을 줍니다. 안심된 마음이 평안한 마음입니다. 요14:27절에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할/ ⑶'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 당시에는 문둥병이나 중풍 병, 소경된 것 등 죄의 결과라고 합니다. 요9:1절 이하에 보면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가리켜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 인함이오니까?'라고 묻습니다. 성경은 병보다 더 무서운 것은 죄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죄는 사망의 길로 가게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32:1절에서 '사함을 얻고 그 죄의 가리움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할/ 여러분, 지금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죄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세례요한도, 예수님의 복음의 일성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죄의 문제만 해결이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믿/ 아담의 죄로 인한 저주, 가난, 질병의 문제도 죄의 문제를 해결하면 자동적으로 그 문제를 해결됩니다. /믿/ 그래서 주님은 병보다 더 무서운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아멘!/ 이 말씀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의 죄는 주님의 보혈로만 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주의 보혈로 죄 씻음 받은 자 된 줄 믿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하면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고 축복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할/ ▶본문에서 신학적으로 한 가지 조심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친구의 믿음으로 친구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즉 다른 사람의 믿음으로 다른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전도하여 육신의 병은 친구의 믿음으로 고칠 수 있지만 영혼 구원은 본인의 신앙 고백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중풍병자는 네 친구의 우정과 믿음으로 병을 고쳤고,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영혼이 구원함을 얻었다. 눅17:11-19절에서 10명의 문등병자를 예수님께서 고쳐주셨을 때에 아홉은 가버리고 하나만 예수께 나아와 사례하고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아홉은 육신의 병은 고쳤지만 영혼이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 중풍병자는 친구의 믿음으로 병 고침을 받았고 자신의 믿음으로 영혼 구원을 받았습니다. ▶여기서 영원한 의사가 되시는 예수님의 고치시는 순서가 있습니다. ⑴죄부터 고치셨습니다. 중풍병자가 왔을 때 '네 병이 나아라'고 하지 않으시고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하시며 죄부터 고치셨습니다. 진단이 다르고 순서가 다릅니다. 그 말은 그의 병의 원인이 죄로 말미암았다는 말입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병을 고치되 근본이 되는 죄부터 해결하십니다. /아멘!/ ⑵영혼을 고치십니다. 중풍병자를 보시고 '소자야 안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소자야 이제는 두려워하지 말고 불안해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병자에게 가장 시급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영혼의 안심'이고 '영혼의 위로'입니다. 우리가 병자들을 심방하는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병자들을 그 자리에서 고칠 수는 없지만 병든 사람들에게서 이런 불안감을 덜어주고 영적으로 위로하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병자들뿐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면서 느끼는 가장 피곤한 것은 바로 이 불안감과 절망감입니다. 이 중풍병자는 몸은 전신이 마비되었는데 정신은 온전했습니다. 그러니 몸은 말을 듣지 않고 살아갈 희망은 없고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고통일 뿐만 아니라 내일이라고 소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막막하기만 하니 얼마나 불안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소망이 없고, 꿈과 비전이 없는 곳이 바로 지옥입니다. 그런데 그 병자에게 예수께서 만나자마자 하신 말씀이 바로 '소자야 안심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영적 위로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영적 치유입니다. /할/ ⑶육신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와 영혼을 고치시고 나서 그의 육신을 고치셨습니다. 세상방법으로는 육신부터 고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를 해결하시고 영혼부터 고치셨습니다. 이 중풍병자는 죄 사함을 받고 영혼이 고침 받으니 몸은 저절로 고침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중풍병자에게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순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먼저 내 영혼이 복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나머지 문제는 저절로 풀어집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내 영혼이 복을 받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해진다'고 했습니다. ⑷생활을 고치십니다. 주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기를 6절에서 '네 침상을 들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 동안 병 때문에 열심히 하지 못한 일들을 하면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참 소망 적인 말씀입니다. '이제 집으로 가라' 얼마나 소망 넘치는 말씀입니까? 가정은 우리의 온전한 피난처요 안식처입니다. 그렇습니다. '생활의 회복' 이것이 곧 축복의 삶입니다. 이렇게 예수께서는 병을 고치되 완전하게 고치십니다. 죄도, 몸도, 영혼도, 생활도 함께 고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영원한 의사이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이제 오늘 본문 속에 보면 예수님이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겉 다르고 속달은 사람입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이중인격자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가장 싫어하십니다.
▶3-4절 "어떤 서기관들이 속으로 이르되 이 사람이 참람하도다.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 여기에 서기관이 나옵니다. 눅5:21절에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나옵니다. 우리 주님은 그들의 악한마음을 아셨습니다. 이들은 속과 겉이 다른 종교인들입니다. 마23:25절에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예수님은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라고 책망을 하셨습니다. 그들은 축복의 자리에 그 축복을 나누지 못하고 판단하고 불평하고 정죄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늘 위선으로 가득 찬 그런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하시는 일은 늘 부정적으로 보고 비판하는 무리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 이런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같은 신앙을 가진 자가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은총을 거부한 자들입니다. 우리 주님은 사람의 생각을 다 아시는 분입니다. 4절에서 '예수께서 그 생각을 아시고 가라사대 너희가 어찌하여 마음에 악한 생각을 하느냐?'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의 생각이 먼저 하나님께 바로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중심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고 한나가 고백을 했습니다. /할/
▶5-6절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그러나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오직 우리 주님께만이 죄 사함의 권세가 있습니다. 구약의 엘리사나 신약의 바울과 베드로는 기적을 베풀 사람들입니다. 행3장을 보면 특별히 베드로와 요한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를 걷게 했습니다. 죽은 자도 살렸습니다. 그런데 죄 사함을 선언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기적을 일으킬 수는 있었으나 죄 사함을 선언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죄 사함의 선언은 오직 심판 주이신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 주님은 6절에서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일어나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할/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할 수 없는 것은 우리 주님을 말씀으로 다 하셨습니다. '일어나 침상을 들고 가라' 이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이 중풍병자는 벌떡 일어나 친구들과 함께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나간 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죄 사함의 권세는 오직 주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6:10절에서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할/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사탄의 세력의 세력을 멸하고 죄의 권세를 깨뜨리며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주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오셨습니다. /믿/아멘!/ 이 중풍병자는 인간적으로 불행하지만 자기를 예수님께로 메고 갈 수 있는 믿음의 이웃들이 주변에 있었다는 것이 큰복입니다. /할/ 자신에게 죄 사함 받고 구원받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베푸시는 기회는 나 스스로 부딪히는 기회도 있지만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절망의 자리에서는 저희의 믿음을 통하여 내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진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약의 교회운동입니다. 교회의 믿음과 기도는 절망에 처한 한 성도에게 하나님의 기회를 부여하는 능력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믿/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에 나와 기도에 참여해야 하고, 믿음으로 기도할 때 놀라운 역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는 미사일 발사대'와 같다고 했습니다. 미사일은 발사대가 없이는 아무 일도 못합니다. 미사일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이 미사일은 발사대가 있어야 정확하게 발포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미사일은 무기가 됩니다. 교회는 발사대입니다. 저희의 믿음은(친구들) 발사대입니다. 우리 모두는 저희의 믿음이라는 이 발사대의 지원을 받으면서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 은혜 받고 충성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교회라고 하는 이 발사대의 후원을 받아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은 교회를 통해서 함께 후원을 받고 교회 안에서 나도 다른 사람을 후원하는 발사대의 역할을 하는 것이 곧 저희 믿음의 비밀입니다. /아멘!/ 사도 바울이 교회를 이야기하면서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너희라는 말은 교회를 말합니다. 예수님 당시는 지금처럼 교회가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당시에도 보이지 않는 교회가 있었는데 바로 중풍병자를 합심하여 예수님께로 메고 왔던 그 사람들이 그때 하나님이 쓰신 교회였습니다. /아멘!/ 오늘도 교회 안에서는 죄 사함의 능력이 주의 보혈로 이루어집니다. 죄의 문제만 해결되면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됩니다. 중풍병자가 죄 사함을 받자 벌떡 일어나 하나님은 찬양하고 나갈 때, 7-8절을 보니까 '무리가 두려워하여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7-8절 "그가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거늘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세를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그렇습니다. 주님이 명하시면 중풍병자뿐만 아니라 죽은 자도 벌떡 일어납니다. '그가 일어나' 어디로 갔습니까? 집으로 갔습니다. 성경에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난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나인이라는 동네로 들어가는 중에 그 때 나인 성으로부터 나오는 장례 행렬이 나오다가 예수님의 행렬과 마주쳤습니다. 과부로 사는 것도 불쌍한데 그 외동아들마저 죽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듣기만 하여도 슬픈 데 예수님은 직접 보셨으니 얼마나 가슴이 아프셨겠습니까? 예수님은 울고 오고 있는 여인을 보고 말했습니다. '울지 말라' 그리고 관으로 가서 관 위에 손을 댔습니다. 관을 멘 사람들은 순간적으로 발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가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렇게 명하자 장례 행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하나같이 쑤군거립니다. 요즈음 말로 하면 '놀고 있네, 미쳤네, 웃기네' 그렇게 수군거립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정말 '놀고 있는 말이었을까요? 정말 미친 사람의 말이었을까요?' 아닙니다. 그 청년은 일어났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가 말하노니 일어나라' /할/ 이 말은 한 마디로 말하면 '말 같지 않은 말'입니다. 왜 그럴까요? '믿음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말은 모두 하나같이 말 같지 않은 말인데도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이런 권세를 가진 하나님께 우리는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아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하나님은 죄 사함의 권세가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중풍병자와 그 네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깨끗케 치료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불치의 병을 해결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어떤 사정도 환경도 하나님을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하나님께 보여야 합니까? 우리의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오늘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역사해 주셨습니다. /할/ (2010년 6월 6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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