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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름의 상을 위하여! (빌 3:7-16)
먼저 두 개의 이야기로 설교를 시작하겠습니다. ▶미국의 한 사업가가 장미화원을 가꾸는 한 가정을 방문했습니다. 이 주인은 정원으로 사업가를 데리고 가서 백장미, 흑장미, 노랑 장미 등 각종 장미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더니 몇 송이만 남겨놓고 모조리 잘라 버렸습니다. 깜짝 놀란 사업가가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대답하기를 '많이 잘라야 좋은 장미가 핀답니다.' 이 말을 들은 사업가는 번 돈을 아낌없이 그에게 투자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대재벌 '워너 메이커'의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잘라야 할 것은 잘라야 합니다. 욕심도, 교만도 잘라야 합니다. 그리고 떠나야 할 곳은 떠나야 합니다. 죄의 자리에서 떠나야 역사가 일어납니다. /할/ ▶일본의 한 기업체에서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았습니다. 전화를 개설해놓고 '욕을 들어준다'는 광고를 했습니다. 사람들의 화풀이를 받아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전화가 빗발치듯이 걸려 왔습니다. 미국에도 이와 같은 전화가 있는데, 돈을 받고 하는 것인데도 주문이 아주 쇄도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중에도 '누가 내 얘기 좀 들어주었으면 좋겠다, 내 원한과 불평을 좀 들어주었으면 좋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구태여 돈을 주고 사람을 사지말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의 원통한 문제, 나의 억울한 문제를 주님께서 들어 주시옵소서'하고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통곡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마음이 가라앉습니다. 고통, 분노, 절망, 아픔, 실망, 마음속의 모든 찌꺼기를 다 토하면 하나님께서 평안을 허락하여 주십니다. 스트레스에서 벗어나는 방법 중의 하나는 마음에 쌓인 것을 밖으로 토하는 것입니다. 시62:8절에서 시인은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하나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 앞에 도움을 청하는 것이요, 하나님 앞에 통곡하는 것이요, 내 마음을 토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응답을 전재로 우리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마7:7-8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할/ ◀제목 소개!▶
오늘 본문은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입니다. 빌립보는 군사와 무역의 중심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금광이 있는 부유한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풍족함으로 인해 방탕함과 타락에 빠졌으며 우상을 섬겼습니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전도하다가 바로 이 빌립보 지역에서 주의 복음을 전파하게 되었습니다. 자주장수 루디아의 집에 거하며 점치는 소녀로부터 귀신을 쫓아내기도 하고, 또 감옥의 간수와 그의 가족을 전도하여 함께 예배를 드리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적은 수로 시작해서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런 빌립보 교회가 잘 성장하고 부흥하다가 그만 교회 안에 교인들간에 분열이 생기고 이단 사설이 들어오자 혼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이 소식을 듣고 빌립보 교회에게 권면의 편지를 쓰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읽은 빌립보서(옥중서신)입니다. 2-3절에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 할례당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빌립보 교회에 침투한 거짓된 사상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하기 전에 바울은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하면서 빌립보교회 성도들을 깨우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유대주의자들은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저들은 자신들의 전통을 생명처럼 여기는 자들이었습니다. 종교적 전통을 앞세우면서 신앙을 위장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갈라디아교회에도 이런 사상이 들어와서 바울은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으라고 강경하게 대응을 했습니다. 예수 믿는 것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고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사람들을 꼬드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저들을 개라고 공격했습니다. 여기 '개'는 애완동물이 아니라 길거리를 배회하며 사람에게 덤벼드는 사납고 악독한 개를 말합니다. 개라는 의미는 불결, 비천, 비 양심, 탐욕스러운 것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저들은 또한 행악하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므로 자신들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영혼까지도 피해를 주는 자들이기에 행악하는 자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손 할례 당이라고 했습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은혜는 무시하고 의식적인 행위만을 중요시하는 형식주의자요, 외식주의자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의 고질병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이 자기 신상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4절에서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5-6절에서 일곱 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⑴난지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곧 그가 이스라엘의 혈통을 가진 자라는 말입니다. 출신성분상으로 볼 때 정통 유대인이라는 말입니다. ⑵그는 이스라엘의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곧 야곱의 혈통을 가지고 하나님과의 언약을 맺은 족속이라는 것입니다. ⑶베냐민 지파라고 했습니다. 베냐민은 야곱이 가장 사랑했던 아내 라헬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초대왕 사울이 베냐민 지파였는데 어떤 면에서 왕족의 혈통을 가졌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⑷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히브리말과 히브리 관습을 보존한 순수한 히브리인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⑸그는 또한 바리새인이라고 했습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면에서 가장 엄격한 종파였습니다. 사실 그는 바리새인의 아들로 태어났고(행23:6), 가말리엘 문하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행22:3). ⑹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던 자였습니다. 이것은 그가 율법에 대한 열정,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는 행동이라고 생각했습니다. ⑺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고 자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예수님을 알고 난 뒤에는 달라졌습니다. 7절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할/ 바울은 과거에 자기에게 유익한 줄로 여기며 자랑하던 것들을 이제는 다 해로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를 위하여'입니다. 과거 바울이 자랑했던 것들은 이제 바울이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아가는 일에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라는 고백입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과거의 그 모든 자랑거리들을 기꺼이 떨쳐버렸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것들을 많이 얻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롭게 얻게 된 것들을 8절 이하에서 다섯 가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⑴그리스도의 지식을 얻었습니다. ⑵그리스도의 의를 얻었습니다. ⑶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얻었습니다. ⑷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얻었습니다. ⑸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을 얻게 되었습니다. /할/ 바울은 그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이 얻은 것들을 너무나도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 이후로 철저하게 그리스도 예수 중심의 삶을 살았습니다. /아멘!/ 지금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하노라고 했는데 그는 이미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으며 지식적으로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알기를 원했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에 대해서 무엇이든지 알고 싶어하는 것처럼 바울도 예수님을 사랑하기에 그분에 대하여 더욱 알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도 주님을 더욱 알기에 노력하십시다. 또한 그는 부활의 권능을 알고 싶어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섭고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것이 죽음의 힘입니다. 모든 사람이 죽음을 당했습니다. 저는 TV겨울안개에서 대학교수 부인이 암으로 죽어 가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죽음은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를 삼켜버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죽음보다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부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다시 살게 한 엄청난 능력의 힘입니다. 이 부활의 힘은 우리의 삶 가운데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께 엎드려 간구하면 이 위대한 부활의 능력의 힘을 주십니다. 우리는 육체의 부활을 믿습니다. 생명의 부활도 이루어집니다. 고전15:42절 '부활이란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사는 것'입니다.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고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이 부활입니다. /할/ 사도바울의 말을 기억합시다. 그는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고,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산 자'라고 했습니다. 롬6:4절에서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할/ 여러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삼고 그분을 날마다 영접하며 죄악의 어두움을 십자가에 못박고 예수님 안에서 다시 사는 체험을 맛보십시다. 그리하여 미움이 사랑으로, 슬픔이 기쁨으로, 절망이 희망으로, 거짓이 진리로, 억압이 자유로, 불안과 공포와 어두움이 변하여 평화의 빛으로 나아가서 죽음의 어두움이 변하여 생명의 빛으로 부활돼는 귀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바울은 또 고난에 참여하고 싶은 소원이 있습니다. 바울은 빌1:29절에서 고난을 은혜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고난은 하나님이 주시는 놀라운 선물입니다. 뭐가 고난이 좋으냐고 말할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알고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 매를 드십니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아라고 했습니다. 고난 당하는 여러분 큰 용기를 가지십시다. 그 고난은 큰 믿음의 힘을 줄 것이며, 그 믿음은 드디어 산을 옮기어 모든 것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멘!/ 나아가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본받고 싶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죽음은 어떠한 죽음입니까? 그분의 죽음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한 죽음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날마다 자신의 뜻을 향해서는 죽어버리며 하나님의 온전하신 그 뜻만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삶을 갈망했습니다. 인간의 온전하신 그 뜻만을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삶을 갈망했습니다. 인간의 고집과 아집 자만심과 자아, 불순종과 불 신앙 인간의 경험, 수단, 방법 등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주의 뜻을 이루소서' 기도하고 간구할 때 하늘에서 이루어주심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있음을 알게 하십니다. /할/ ▶이제 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는 성도들이 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12-16).
①바울의 겸손함을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겸손해지며,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우리의 신앙이 더욱 성숙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신앙 성숙의 첫걸음은 우리의 부족을 깨닫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더욱 겸손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받아, 그만큼 영적으로 더욱 성숙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②최선을 다하는 바울 사도의 신앙을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12). ⑴그는 최선을 다 했습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이 말씀은 현실에 대한 체념이 아닙니다. 원망도 아닙니다. 단순한 후회도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올바른 판단이요, 결정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불만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겠으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기의 생활에 대해서는 불만을 가졌습니다. 주님이 요구하는 신앙의 표준이 되려하면 아직도 멀었다는 것입니다. 늘 신앙 안에 살기를 바랬지만 주님이 보시기에 합당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함을 원망했습니다. 바울은 자기 보다 못한 신앙 인들을 바라보고 '나는 이만하면 되겠지'라고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신앙의 목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의 신앙 관은 '그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는 말씀에 따르기를 원했습니다. 그가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요'라고 고백할 때, '온전히'란 완전함이 아닙니다. 다른 말로 하면 성숙이란 말입니다. 자기 신앙은 성숙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는 겸손입니다. 이 말씀을 음미해 볼 때 바울사도의 신앙의 성숙함을 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성숙하였다는 증거는 자신이 아직도 성숙하지 못함을 자각할 때입니다. 주님은 '선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머리를 숙입니다. '이제 이만하면 되겠지'하는 마음은 교만이요, 성숙하지 못함을 나타내는 증거입니다. 삿16:20절에 보면 삼손의 슬픈 착각이 있습니다. '내가 전과 같이 나가서 몸을 떨치리라 하여도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삼손은 여전히 자기가 과거처럼 힘을 쓸 수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자기의 불 신앙적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이처럼 슬픈 신앙의 상태가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 있을 수 있습니다. 자기의 있는 그 이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자만과 우월의식에 착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자기의 있는 이하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밤낮 자기 자신을 학대하며 심각한 열등의식에 빠집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학대해서도 아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자기 외아들 독생자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그를 십자가에 죽으시고 대신 우리를 그의 피 값으로 대속한 사랑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권세를 가진 사람들 절대로 좌절하거나 낙심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나는 믿음의 사람이다.'라고 자신을 잘 평가해서 믿음 안에 잃어버렸던 것을 다시 찾는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할/ ⑵신앙생활은 '좇아가노라'입니다. 바울사도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운동 경기에다 종종 비유했습니다(고전9:24-27). 달리기에 비유했고 달리기 중에서도 마라톤 경기에다 비유했습니다. 여러분, 토끼와 거북이의 달리기 경주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모두 토끼가 이긴다고 장담했지만 결국은 거북이가 이기었습니다. 여기서 보면, 빨리 잘 달린다는 것만으로 우승하지 못합니다. 무엇보다 끝까지 달리는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막연히 공부하는 것과, 자신의 목표를 세우고 공부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런 의식 없이 직장을 다니는 것과, 나름대로 목표를 세우고 다니는 것과는 비교할 바 못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람은 자신이 세운 목표만큼 된다.'고 했습니다. 바로 우리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달음질이 향방 없는 것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고전9:26). 왜냐하면 신앙생활의 경주에서 실격 당하는 경우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운동 경기장에서 보면 잘 달리는 선수들 중에 실격 판정을 받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⑶그렇습니다. 목표가 분명해야 합니다. 바울은 푯대라고 말씀했습니다. 그런데 라틴어로 목표라는 말은 '피니스(finis)' 인데 이것은 종말이라고 하는 말과 같은 의미를 갖습니다. 목표가 무엇입니까? 종말입니다. 목표가 무엇입니까? 끝입니다. 인생의 진짜 목표는 인생 종말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 것입니다. 끝에 가서 후회하지 아니하는 목표라야 진짜 목표라는 말입니다. /할/ 모든 경기의 이상은 세 가지입니다. '더 빨리, 더 높이, 더 멀리'입니다. 거기다 요즘에는 한 가지 더 추가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누가 더 정확하냐?'입니다. 이 같은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 선수들이 쉬지 않고 땀을 흘리며 연습을 합니다. 그래서 연습을 잘한 선수들은 금메달을 따냅니다. 어느 태권도 선수는 금메달을 따고 소감을 말하기를 '남들이 놀 때 나는 땀을 흘리며 연습을 했고 남들이 잠을 잘 때 나는 고된 훈련을 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 결실을 얻은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⑷오늘 본문에서 사도바울께서 '좇아가노라'고 했는데, 이 말씀속에는 '신앙의 길을 갈 때 도중에서 쉬지 말고 계속 뛰라'는 권고입니다. /믿/ 달리기하는 사람의 법 제1조가 쉬지 말고 뛰어야 합니다. 달리다가 쉬면 말이 안 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인이 신앙의 길을 가다가 쉬면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소명 때문입니다(12).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것'은 소명을 말합니다. 소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았다는 말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의 그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은총을 입고 선택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은혜입니까? 이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바로 알면 참 떨리고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사도바울은 다메섹을 지날 때 예수께로부터 부름을 받았고 소명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마침내 사도가 됩니다. 그 후 바울은 주께로부터 부름 받고 소명 받은 것에 대해서 그토록 감격해 했고 행복해 했습니다. 그렇게 예수를 만난 후로 바울은 한시도 쉬지 않고 전도자가 가야할 길을 충실하게 걸었습니다. 오늘은 갈라디아로, 내일은 고린도로, 모레는 에베소로, 또 다음날은 골로새로, 안디옥으로, 빌립보로, 마지막에는 로마로 다니다가 끝내는 순교해서 일생을 마치게 됩니다. 그렇게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다가 죽기 얼마 전에는 '내가 달려갈 길을 다 마쳤다.'고 아주 만족한 고백을 했습니다. 이 힘이 바로 소명의 힘입니다. 이 소명이 참 무서운 힘을 발휘합니다. '나는 하나님께로부터 부름 받은 사람이다.' 이 소명의식이 분명한 사람은 언제나 위대한 승리자의 삶을 살수가 있습니다. /믿/
③부름의 상을 향해 가는 자들에게 '뒤에 있는 것은 잊어 버리라'고 합니다(13). 인간에게 큰 축복 중의 하나가 '잊어버릴 수 있다.'는 망각입니다. 만일 우리들이 지난날의 모든 슬픔과, 원한, 그리고 실망과 좌절감 등을 다 기억하고 산다면 살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망각이란 놀라운 손길에 의해서 모든 부정적인 체험들을 다 잊어버릴 수 있음으로 정신 건강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우리들에게 중대한 교훈을 줍니다. 그러면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하여야 할까요? 과거를 잊어야 합니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걸어온 과거를 뒤돌아보면서 고백한 것입니다. 우리는 창19장의 소돔을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뒤에 있는 것을 잊지 못하여 순종하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다가 하나님의 징계와 심판을 받았던 롯의 부인을 기억합니다. 눅17장에서는 예수님께서는 이 롯의 부인을 상기시키면서 마지막 시대에 사는 성도들에게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특징중의 하나가 바로 과거에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왕년에 회장이었어! 사장이었어! 빌딩이 몇 채였어! 엄청난 부자였어!'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여기서 잃어버린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쓴다는 말보다 더 깊은 뜻이 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잃어버린다'의 헬라어의 원어적인 뜻은 대단히 의미심장합니다. 그것은 과거에 의하여 지배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과거를 문제삼지 않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기 잊어버린다는 단어 속에는 과거를 문제삼지 아니하며 과거로부터 오늘 어떤 사실이나 사건을 통해서 오늘의 삶에 어떤 영향이나 지배를 받지 않겠다는 결의가 들어있는 것을 말합니다. 히10:17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또 저희 죄와 저희 불법을 내가 다시 기억지 아니하리라 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이 기억력이 나쁘다고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 앞에 나와서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나의 주님으로 받아드릴 때, 하나님이 우리의 과거를 문제삼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불꽃같으신 눈길로 우리의 현재의 삶에 주시하겠다는 것입니다. /아멘!/ 여러분 소망을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서는 과거의 생활태도를 잊어버리고 새로운 시간의 미래를 향하여 전진해야만 합니다. 과거의 실패에 묶이지 마십시오, 과거의 그늘에 주저앉지 마십시오, 과거의 죄에 고민하지 마십시오, 과거의 슬픔 때문에 자신을 매몰시키지 마십시오, 바울은 딤전1:15절에서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다음 16절에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그는 고백합니다. 만약 바울이 과거의 생각에만 매여 있었다면 그는 하나님의 큰 종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과거에 숱한 기독교인을 살해한 자입니다. 스데반집사를 죽였습니다. 그가 끔직한 과거의 악몽 같은 일에 매달린다면 미래를 향해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죄인 중의 괴수였던 자기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을 통해서 바울은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길을 향하여 나아가겠다고 고백했습니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⑴지난날의 실수를 잊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합니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수하는 것이 사람이고 용서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옛날에 연필을 만들 때에는 항상 위에 지우개를 달았습니다. 이 연필을 사용하는 동안에 실수가 있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과거에 실수한 것을 자꾸만 회상하고 기억하고 끄집어내어 아파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우리의 죄와 허물을 짊어지신 것입니다. 허물이 실수입니다. 엡2:1절에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할/ 농부가 지난 해 농사를 실수하여 잘 못 지었다고 금년은 포기할까요? 아닙니다. 다시 일어나 농사를 지어야 합니다. 그럴 수록 더 잘 하여야 합니다. 위대한 사람들의 생애를 보면 실수를 안 한 것이 아니라 실수하였을 때 더 잘 한 사람입니다. ⑵억울한 일을 당한 것도 잊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다 보면 억울하고 분한 일을 당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럴 수 없는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도 잊어야 합니다. 요셉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끔찍이 사랑하였습니다. 야곱은 아내가 네 명이었습니다. 당시는 다 그랬습니다. 그 중에 라헬을 제일 사랑했습니다. 라헬이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 하다가 늘그막에 아들을 낳았습니다. 야곱에게는 11번째 아들입니다. 그래서 더 사랑했습니다. 손자같이 예뻤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미워하고 질투했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죽이려고 구덩이에 던졌습니다. 마침 물이 없어서 살았습니다. 형들은 요셉을 종으로 팔아 버렸습니다. 인신매매입니다.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가 죽도록 고생했습니다. 그 때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동침하자고 유혹을 합니다. 어느 날 아무도 없을 때 요셉의 옷을 잡아 당겼습니다. 아무도 없으니 동침하자는 것입니다. 그 때 요셉은 하나님이 보고 계시니 동침할 수 없다면서 잡은 옷을 벗어버리고 도망을 쳤습니다. 보디발 아내는 화가 나서 남편에서 요셉이 자기를 겁탈하려고 했다고 죄를 뒤집어 씌웠습니다. 그래서 감옥 가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종살이 감옥살이 밑바닥 인생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한이 맺혔을까요? 그러나 후에 국무총리가 되었습니다. 나 같으면 제일 먼저 한을 풀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요셉은 전혀 복수하지 않았습니다. 아예 기억도 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자기를 팔아 넘긴 형들에게도 용서했습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자 형제들이 무서워 떨고 있을 때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당신들은 두려워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50;19-21) 요셉은 억울함과 분함을 전혀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잊었습니다. 과거의 억울하게 하였던 사람, 분하게 하였던 사람, 이가 갈리도록 미웠던 사람을 잊어야 합니다. 과거는 과거입니다. 미래가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원숭이가 싸우다가 엉덩이를 들면 항복의 표시랍니다. 그러면 상대방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습니다. 개가 싸우다가 꼬리를 내리면 항복입니다. 그러면 싸우던 개는 공격하지 않습니다. 짐승도 항복하면 싸우던 것을 잊어버립니다. 사람도 용서를 빌면 끝내고 잊어야 합니다. /아멘!/ ⑶선행도 잊어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잘 한 일이 있습니다. 우쭐대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나쁜 뒤에 것만 잊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무조건입니다. 뒤를 잊으라고 하였습니다. 골라서 잊으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잊어야 합니다. 어제 잘 했던 일도 잊고 내일을 향하여 나가야 합니다. 어느 시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고상한 행동을 하고 나서 그것을 하루종일 꿈꾸지 말라' 모세가 일으킨 기적 중에 가장 큰 기적은 홍해를 가른 기적일 것입니다. 모세는 '내가 이런 사람이다. 홍해를 가른 사람이다.'라고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40년 간 광야 생활을 하면서 한번도 자랑스럽게 말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홍해를 갈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높였습니다.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40년 된 앉은뱅이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사실을 자랑하거나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곳에 가나 복음만 전하였지만 과거에 일으킨 기적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뒤에 것은 잘 한 것도 다 잊었습니다. 이것이 성경입니다. /할/ 슬픈 일을 잊지 않으면 슬퍼집니다. 아픈 일을 잊지 않으면 아파집니다. 억울한 일을 잊지 않으면 억울하여 집니다. 쓰라린 일을 잊지 않으면 쓰라려집니다. 서운하였던 것을 잊지 않으면 서운하여 집니다. 그래서 다 잊어야 합니다. 사람은 세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과거를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늘 과거에 매여서 살아갑니다. 과거에 좋지 않았던 일이 있으면 그 일을 잊지 못하고 가슴에 안고 살아갑니다. 또 과거의 좋았던 일을 가슴에 안고 지금도 그렇게 착각하며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지극히 오늘 중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이 오늘뿐입니다. 내일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세상에 집착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 '미래를 중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오늘보다 내일을 중시합니다. 그래서 뭔가 이루고 성취해 보려고 애를 많이 씁니다. 내일을 위해서 오늘 인내하고 땀을 흘리고 저축을 하고 꿈을 꾸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아주 건강한 사람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인생관이고 신앙관입니다. 과거는 아무리 좋아도 현재만 못합니다. 그리고 현재가 아무리 좋아도 미래만 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희망을 먹고살고 미래 때문에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그 미래가 있으니까 오늘 열심히 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천국의 소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쫓아가노라'고 한 것은 천국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천국을 참 중요시했습니다. 그래서 말하기를 '우리에게 만일 천국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천국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쉬지 말고 뛰어야 합니다. /할/아멘!/
④쫓아가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상이 있기 때문입니다(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할/ 상은 다 귀합니다. 세상에서 부지런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이 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하는 학생에게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에게도, 열심히 운동하는 사람에게도 이 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고 했습니다. 신앙에도 상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인들이 수고하고 고난 받고 순교까지 합니다. 사도바울은 평생 달려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하루도 쉴 날 없이 살았습니다. 왜 달려갔습니까? 그것은 바울이 말했듯이 하늘에서 얻을 상 때문입니다. /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 땅의 상급이나 축복이 중요하지만 진정한 상급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너무 이 세상의 상급에 붙잡히면 하늘의 상급을 놓치고 맙니다. ▶어떤 사장 부인이 꿈을 꾸었습니다. 천사가 그녀를 데리고 커다란 궁전으로 갔습니다. 그곳에 천사가 '이곳은 너의 마부의 집'이라고 그럽니다. 그 때 여인이 생각하기를 마부의 집이 이렇게 으리으리하면 내가 살집은 얼마나 아름답고 화려할까 기대를 했습니다. 그런데 천사는 다 찌그러진 작은 집으로 인도하더니 이곳이 네가 살집이라고 했습니다. 여인이 깜짝 놀라 화를 내며 말하기를 '왜 이렇게 초라합니까?'라고 하자 천사는 '마부는 이 땅에서 이 궁전을 짓기에 충분한 재료를 보내왔다. 그러나 네가 보내온 것으로는 이 작고 초라한 집을 짓기에도 벅찼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늘 하늘의 상급에 붙잡혀 살아야 합니다. /할/ ⑴바울의 목표가 무엇인가? '나는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쫓아가노라' /할/ '부름의 상!' 우리에게도 이 목표가 있어야 합니다. /아멘!/ 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상을 위하여 달려간다.'고 했고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13절에서 '내가 아직 잡은 줄로 여기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14절에서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생 길에 달려가는 목표와 푯대가 분명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삶에, 그 신앙에 흔들림이 없습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달려가는 이유는 복음의 씨를 심기 위함 때문입니다. 장차 주어질 천국에서 주어질 상을 위해서 오늘 심었습니다. 그리고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는 뛰어다녔고 부지런히 심고 다녔습니다. 그는 예수를 만난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성숙한 영적 성장을 위해서 그는 매일같이 쉬지 않고 뛰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부르신 그 부름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그는 열심히 뛰고 달려갔습니다. 우리가 이 신앙을 본받아야 합니다. /아멘!/ ⑵바울은 늘 기대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바울은 늘 상을 기대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최선을 다 하고 달려갔습니다. /아멘!/ 노만 필 박사가 '꿈을 가지라'는 말을 했습니다. 꿈을 가지려면 먼저 세 가지 이미지가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는 '마음에 그림을 그리는 일'입니다. 즉 계획을 가지라는 말입니다. 막연한 계획이 아니고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기도하는 일입니다. 계획이나 꿈은 내가 그리고 가지는 것입니다. 그 꿈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각자의 꿈을 감독하시고 조정하시고 이루십니다. 어떤 분이 출근하니 책상 위에 해직 통지서가 놓여 있었습니다. 순간 원망과 분노가 일어났습니다. 마침내 가출해서 방황하다가 돌아와 아내에게 '나 죽고 싶소, 내가 지금까지 최선을 다했는데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소'하고 원망을 했습니다. 그 모습을 아내가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마디했습니다. '내가 옆에서 지켜보니까 당신은 이 상황을 놓고 진지하게 기도하는 것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 말에 남편이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원망을 떨쳐내고 건축업을 시작했는데 잘 되었습니다. 여기저기 출장을 다니며 호텔에 묵었는데 값이 너무 비쌌습니다. 모텔에 묵으니 시설이 너무 낡았습니다. 그래서 중간급 숙박시설을 하면 어떨까 생각하다가 만든 것이 오늘 '홀리데인 인'이라는 호텔 체인점을 개발한 '캐몬스 윌슨'입니다. 기도가 능력입니다. 왜? 하나님을 움직이게 하는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믿/ 세 번째는 '실천하는 일'입니다. 즉 행동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적극적인 자세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전진하고 발전하는 사람은 언제나 그 생각이 전향적이고 긍정적입니다. 그러니까 발전하고 향상하고 전진하게 됩니다. 그런데 패자는 언제나 부정하는 생각만 합니다. 뒤를 돌아다봅니다. 불평을 하고 탓과 원망을 많이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자신의 발목을 잡게 되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생각이나 마음이나 처신은 자꾸만 자신도 모르게 생각이 뒤를 돌아보게 합니다. 긍정의 말과 생각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긍정의 생각이 나 자신에게 상당한 암시를 주게 됩니다. 그 암시는 자신감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자신감은 희망이고 약속입니다. 미국인들은 별 것도 아닌 것을 보고도 '베리 굿' 또 '원더풀'이라고 합니다. 비 오는 날도 '굿 모닝' 합니다. 말이 좋고 생각이 참 좋습니다. 그 말을 듣는 너도 좋지만 사실은 나 자신에게 더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긍정의 말과 생각은 아름다운 말입니다. /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부름의 상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대영제국의 유명한 수상이던 벤자민은 성공의 비결을 묻는 어떤 청년에게 '당신의 목적에 대해 집념을 가지고 그 목적 앞에 자신을 드리라'고 충고했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목적에 대한 집념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우리는 부름의 상에 대한 집념이 있어야 합니다. 20절 에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할/ (2010년 6월 20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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