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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을 사는 성도의 자세! (벧전 4:7-11)
베드로전후서는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박해를 많이 받을 때 쓰인 책입니다. 주후 60년을 전후해서 네로 황제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많은 박해를 받을 때에 그 당시 교회의 최고의 지도자인 베드로가 '핍박과 고난 속에 있는 성도들에게 천국의 소망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하는 내용'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이 로마로부터 박해와 핍박을 받게 된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⑴반국가 단체로 오인을 받았습니다. 당시 로마 시민이나 이방인들 모두 로마 황제를 신으로 섬겼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도 항거하거나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독 그리스도인들만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인간을 숭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반대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들이 반국가 단체로 오해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가 로마로부터 극심한 핍박과 박해를 받았습니다. ⑵비도덕적인 단체로 오해를 받았습니다.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고 핍박을 받게 되니까 그리스도인들이 피신을 했는데 어디로 갔는가 하면 동굴 속으로 밀실로 들어가 숨었습니다. 이 동굴이 오늘 우리들이 알고 있는 카타콤이라고 하는 지하 무덤입니다. 그들은 동굴 속에서 매일같이 성찬식을 가졌습니다. 그들은 매일같이 예수님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떡을 나누고 포도주를 나눔으로써 신앙을 고백하고 형제애를 다졌습니다. 그런데 그때 밖에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동굴과 밀실 속에서 사람을 잡아서 살을 먹고 피를 마신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로마 정부에 고분고분하지 않는다고 미운 털이 박혔는데 그런 소문이 나돌게 되니까 정부가 얼마나 합법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히고 핍박했겠습니까? 소문은 꼬리를 물고 퍼져서 그리스도인들은 속수무책으로 오해를 받고 박해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⑶인사하는 법 때문에 오해를 받았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인사법으로 입을 맞추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벧전5:14절에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는 말이 나옵니다. 오늘날 서구인들이 서로 만나면 포옹하고 입을 맞추며 인사를 나눕니다. 이것이 원래 그리스도인들의 인사법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박해를 피해서 지하 밀실서 언제 죽을지 알 수 없는 모두 같은 운명입니다. 그러니 살아가는 사람들끼리 얼마나 형제애가 두렵고 돈독한 관계를 이루며 살았겠습니까? 그래서 만나면 서로 얼싸안고 포옹하고 입 맞추며 서로를 격려하고 반가움을 나누었습니다. 그래서 입 맞추는 인사법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랬더니 밖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동굴 속에서 음란한 짓을 하고 난륜 행위를 한다고 소문이 났습니다. 그러니 로마 정부가 기독교를 박해하기에 얼마나 좋은 구실로 삼았겠습니까? 그래서 마음놓고 잡아다가 죽이고 맹수들에게 밥으로 던져주고 그랬습니다. 이처럼 로마 시대의 신앙생활은 참 처절했습니다. 그때 사도였던 베드로가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은 박해를 받고 죽음을 당하고 수난을 당하고 있었고, 앞으로 언제까지 이런 박해가 계속될지 알 수도 없고, 또 핍박 때문에 낙오되고 떨어져 나가는 사람도 있고 해서 그냥 모른 체하고 앉아만 있을 수가 없어 붓을 들어 글을 쓰게 된 쓴 책이 바로 베드로전서입니다. 이 서신에서 베드로는 핍박받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격려하고 잘 인내하며 견디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때는 누군가 격려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위로가 되고 흩어지지 않고 구심점이 강하게 이루어질 수가 있습니다. /할/ 오늘 본문도 그런 상황에서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을 당하는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베드로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하면서 그리고 어떻게 고난을 극복하고, 어려운 역경과 싸워서 승리하는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교훈하고 있습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고, 정신을 차리고 항상 기도하며 신앙으로 무장하고,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대접하고 봉사함을 통해서 선한 청지기로서의 삶을 살아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 ◀제목 소개!▶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이 마지막이라는 말이 참 의미가 깊습니다. 이 마지막이라는 말은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을 번쩍 나게 하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이 시간이 진짜 내 인생의 마지막시간이다'라고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떨리는 시간입니까? 이 말씀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일하라는 명령입니다. /할/ 여기서 마지막이란 종말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영원히 존재하는 도성이 아닙니다. 사실 '마지막이다, 종말이다, 끝장이다, 죽음이다' 이런 말은 그렇게 반갑게 들리는 말은 아닙니다. '영원하다'고 하면 참 좋아합니다. 사랑도 영원한 사랑, 기쁨도 영원한 기쁨, 소망도 영원하면 이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런데 언젠가는 인생은 만물과 함께 종말이 있습니다. 요즘 세상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말세라고 말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만물의 마지막은 세상 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종말을 보는 태도가 여러 가지입니다. ⑴종말이 없다는 태도입니다. 종말, 심판, 예수가 다시 와! 웃기지 말라! ⑵종말에 관심이 없는 태도입니다. 자기와는 아무 관계가 없는 것처럼, 종말이 오든지 말든지, 또는 종말이 아직 멀었다고 믿는 그런 사람들도 있습니다. ⑶종말이 92년 10월 28일 24시로 보는 태도입니다. 세대주의라고 합니다. ⑷종말이 가까웠다고 믿고 준비하는 태도입니다. 가장 옳은 태도입니다. 우리 주님은 분명히 오십니다. 오늘밤에 오실 지, 언제 오실 지는 미지수입니다 만은 우리 신앙 인은 오시는 날짜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는 신앙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들처럼 기름을 준비하고 깨어 있는 신앙 인들이 다 되어야 합니다. /믿/ 화란의 철학자 스피노자는 '오늘 지구의 종말이 온다해도 내일을 위하여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자세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다'고 했습니다. 종말이요, 말세요, 세상 끝을 말함인데, ▶크게 세 가지의 종말이 있습니다. ⑴개인의 종말이 있습니다. 히9:27절에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죽음 뒤에 심판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만합니다. 우리 인간은 언제 어떻게 될 지 아무도 모릅니다. '만물의 마지막'이라는 말속에는 내 개인적인 종말도 들어갑니다. 주님 앞에 가기 전에 우리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위하여 작품을 남겨야 합니다. 성경은 죽음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성경 구절이 바로 왕상 2:1-2절입니다.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다윗이 누구인가? 이스라엘의 막강한 권세를 쥔 왕입니다. 그도 죽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라고, 죽음을 직설적이고 노골적으로 표현했습니다. 벧전1:24절에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베드로는 죽음을 웅변적이요 시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왜 인간이 죽어야 합니까?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가? 자연주의자나 현대주의자들이 말하는 자연법칙의 결과로 죽음이 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사람이 죄 때문에 죽는다고 했습니다. 롬6:23절을 보세요!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할/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인류의 머리로 정하신 아담을 모든 인류의 대표자격으로 세웠는데, 그가 죄를 범하므로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후손들에게까지 죄를 미치게 하였습니다. 롬5:19절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그렇다면 이 죽음에서 우리 인간이 살아 날수는 없을까요? 있습니다. 분명히 비결이 있어요! 죽음은 죄 값으로 오는 것이기에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 계십니다.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기에 죄의 문제를 청산할 수 없고, 오직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죄인의 모습인 사람의 형상을 입으시고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왜 죽으셨습니까?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기에 그 삯을 치르시기 위하여 그 분 예수께서 죽으셨습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끝나버렸다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게 됩니다. 예수님은 죽음 3일 만에 사망권세를 깨뜨리시고 찬란히 부활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 /할/ 개인의 종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은 죽어도 사는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항상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아멘!/ ⑵국가, 민족의 종말이 있습니다. 인류 역사를 상고해 보면 이 땅위에 많은 국가 민족들이 일어났다가 망해버린 나라들이 있습니다. 로마도 월남도 망했습니다. ⑶우주와 인류의 종말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만물의 마지막'을 의미합니다. 이 종말은 우리가 대망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종교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을 학수고대하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주님은 계22:20절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의할 것은 언제 오신다고 못 박아 놓치는 아니했습니다. 마24:36절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마25:13절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감추어 놓은 세 가지 비밀이 있습니다. ⑴인간 환란의 때가 비밀입니다. 인간이 대단한 것 같지만, 사실 한치의 앞길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⑵인간의 죽음이 비밀입니다. 그리고 ⑶말세에 예수님의 재림이 비밀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서 비밀로 부치신 것입니다. 알아보십시오! 난리가 납니다. 모르니까 편안하게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말세의 성도의 삶을 몇 가지로 조명해 놓고 있습니다. 차례대로 알아보겠습니다.
▶7절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기도가 우선입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어떤 일도 기도보다 앞서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참으로 많은 일들을 행하셨습니다. 기적을 행하시고, 사람들을 고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시고, 제자들을 교육하셨습니다. 매일매일 동분서주하시면서 사역하셨습니다. 예수님 사역의 성공의 비결은 한마디로 기도입니다. 그분은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에 가셔서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셨고, 기도로 새 힘을 얻었습니다. 기도를 뒤로 미루는 것은 하나님을 뒤로 미루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의 모든 이야기는 기도의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토리' 목사는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과 축복이 가득 쌓여 있는 창고 문을 여는 열쇠이다'고 말했고, '맥콘키'는 '기도하는 골방은 은혜의 보급소이다'라고 했고, 예수님은 '기도 이외는 이런 류가 나가지 않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기도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분명히 응답해 주십니다. 문제도 해결해 주시고, 사업도 축복해 주십니다. /아멘!/
▶오늘 본문 7절은 기도에 대하여 몇 가지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⑴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웠으니' 먼저 '때를 의식하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한번 보십시오! 그 다음, 이 말은 '주님의 일 할 기회가 이제는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을 두고도 이렇게 생각해야 되지만 우리 한 사람 한사람의 생애도 생각해야 할 것을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말세의 특징 중 하나가 기도하지 않는 것입니다. 눅18:8절에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여기 말세에 우리 주님이 기도하는 믿음을 보겠다고 하십니다. 기도는 하나님과 대화입니다. 대화는 중요합니다. 부부간에 대화가 끊어지면 파탄이 옵니다. 형제간에 대화가 끊어지면 사이가 멀어집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대화가 끊어지면 하나님과는 멀어지고 세상과 가까워지고 우상과 가까워집니다.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까? 세상 마지막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 기도에 방법입니다. ⑵정신 차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정신이 중요합니다. 정신은 생명과 같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고는 아무리 책을 오래 붙들고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공부는 하는 것 같은데 성적이 올라가지 않는 이유는 대개 정신을 차리지 않고 공부하기 때문입니다. 정신이 죽으면 공부도 죽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설교를 들어야 은혜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생명 있는 기도가 됩니다. 십자가를 눈앞에 둔 예수님은 사랑하는 수제자 셋을 대리고 마지막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셔서 그들에게 깨어 기도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곳에서 졸면서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기도의 능력을 전혀 얻지 못했습니다. 결국 그는 예수님이 붙잡혀간 그 현장에서 어린 계집종에게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했으며, 그 밤에 그는 예수를 부인하고 저주하고 배신하는 실패자가 되었습니다. 이런 실제적인 체험을 가진 베드로이기 때문에 그는 특히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고 기도하면 능력을 얻지 못합니다. 그래서 조그마한 시험에도 넘어집니다. 실패자 배신자가 됩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면 권능을 얻습니다. 시험을 이깁니다.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면 영적인 능력을 얻어 승리하게 됩니다. 다니엘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소년입니다. 그는 바벨론의 궁전에서 배우고 자라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예루살렘 쪽의 창문을 열고 그쪽으로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몸은 비록 바벨론 포로에 있었지만 그의 정신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 있었습니다. 정신이 살아있는 기도였습니다. 그가 바벨론에 있으면서도 끝까지 애국심과 신앙심과 민족애를 잃지 않았던 것은 정신이 살아 있는 기도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기도가 있었기에 사자 굴에 던짐을 당하여도 사자 밥이 되지 않았습니다. 기도하되 정신을 차리고 기도해야 합니다. /아멘!/ 여기 정신차리라는 말은 '경건한 마음, 자신을 통제하는 마음, 여기 저기 정신 두지 말라'는 뜻입니다. ▶고속도로에서 운전 중 졸다가 사고를 당한 사람들의 경우, '얼마동안 졸았는가?' 물으면 '깜빡 졸았다'는 말이 87프로랍니다. 깜빡 졸았다는 말은 깜빡 정신을 잃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깜빡이란 순간이 중요합니다. 깜빡하는 순간에 일이 터지고 사고가 벌어집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⑶근신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근신한다는 말은 '자기를 살핀다, 자기를 이긴다.'는 뜻입니다. 사실 누구든지 자기를 살피면 자신의 부족한 것을 많이 발견하게 됩니다. 자기의 부족을 발견한 사람은 기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근신하며 자기를 살피는 사람은 기도하기 마련입니다. 또 자기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어디서 옵니까? 기도하는데서 옵니다. 기도는 하늘의 능력을 붙잡는 통로입니다. ▶왜 우리가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까?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하시기 때문입니다(살전5:2). 그뿐 아니라 우리가 깨어있지 아니하면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는데(벧전5:8), 그 마귀에게 삼키움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믿/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마 26:41)고 하셨습니다. ⒞쾌락주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기도해야 합니다. 쾌락주의자는 마음이 마비되어 하나님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눅21:36절에서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고 하셨습니다./할/ ⑷기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중요한 봉사가 됩니다.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기도해야할 뿐만 아니라 이웃과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은 마6:33절에서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교회를 위하여, 주의 종을 위하여, 성도들을 위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아멘!/ 모세를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범죄 했을 때, 그들을 대신해서 모세가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용서해 주셨습니다. 광야에서 목말라 애통하는 백성들을 위해 모세가 기도했더니 쓴 물이 단물 되고, 르비딤 반석에서 생수가 터졌습니다. 사무엘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불레셋 군대를 무찔러 주셨습니다. 그것이 '에벤에설', 즉 '하나님이 우리를 여기까지 도우셨다'는 고백이 나왔습니다. 베드로가 병든 자를 위하여 기도할 때 병든 자가 일어났으며 죽은 다비다를 위해 기도 할 때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헤롯왕의 핍박으로 베드로가 옥에 갇힌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자 옥문이 열리고 쇠사슬이 벗겨졌습니다. 베드로가 다시 자유의 몸이 된 것은 그를 위해 기도한 성도들의 기도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서로를 위해 기도합시다.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이야말로 서로 돕고 봉사하는 일이 됩니다. 기도의 봉사는 참으로 능력 있는 봉사이며 열매있는 봉사입니다. /할/
▶8절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사랑하라! 고전13:13절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런데 말세가 오면 사람들의 사랑이 식어진다고 주님이 말세의 증조를 예언했습니다. 마24:12절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베드로는 본문 8절에서 세 가지의 교훈을 말하고 있습니다. ⑴열심으로 사랑하라! 열심은 인생살이나 신앙생활도 성공적으로 이끄는 힘이 됩니다. 게을러서 좋을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공부도, 장사도, 직장 생활도, 사업도 열심을 내야 성공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생활도, 전도생활도, 봉사생활도, 모든 신앙생활도 열심히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열심히 있어야 책임과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열심히 있는 곳에 성공이 있습니다. 사랑도 열심히 있어야 성공자가 됩니다. 부부애, 형제애, 효성, 애국자가 되려면 열심히 사랑해야 됩니다. 열심히 없으면 자기 일도 하기 어렵습니다. 게으르면 자기 기도도 못합니다. 열심히 있는 사람만이 자기를 위하여, 또 남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습니다. 열심이란 자신의 모든 능력과 가능성을 총동원하여 최선을 다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보면, 100미터를 10초에 달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정도면 세계적인 선수입니다. 10초 이내에 100미터를 달린다면 그건 신기록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나이 먹은 사람이나 심장병에 걸린 사람은 10분이 걸릴 수도 있고 더 걸릴 수도 있습니다. 열심히 달린다는 것은 10초의 기록 보유자가 10초의 벽을 깨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기울 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10초의 기록 보유자가 15초나 20초에 100미터를 달렸다면 그는 열심을 다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분량대로의 믿음과 재능을 주셨습니다. 주어진 재능과 믿음 안에서 열심을 내야 합니다. 본문이 말하는 '열심히 사랑하라'는 말은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행동과 언어를 총동원하여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며, 원어의 뜻은 '경주자가 전력을 다해 달리는 것처럼 지칠 줄 모르는 정열적인 사랑'을 의미합니다. 또 열심히 사랑한다는 것은 말만으로 행하는 사랑이 아닌 구체적인 사랑이요, 희생적인 사랑이요, 이타적인 사랑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봉사의 근본정신이 됩니다. 또 열심은 정열적인 표현입니다. 열심으로 사랑하라고 한 것은 '불이 붙어있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우리 영혼에 성령의 불, 은사의 불, 사랑의 불, 믿음의 불, 열심의 불이 붙어 있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아멘!/ ▶우리가 이렇게 사랑을 할 때 어떻게 됩니까? ⒜주님의 계명을 완수하는 일이 됩니다. 요13:34절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기쁨과 위로를 함께 나누게 됩니다. 몬1:7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 사람이 위로 받을 곳이 없을 때 고독해 집니다. 그러나 위로가 있는 곳엔 새로운 힘이 솟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할/ ⒞두려움을 내어쫓습니다. 요일4: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쫓나니' 우리 마음에 모든 두려움이 사랑으로 인해서 내어 쫓기기를 바랍니다. /할/ 그래서 오늘 베드로는 '열심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칩니다. 하나님을 열심히 사랑합시다. 네 이웃을 열심히 사랑합시다. 잠8:17-18절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⑵서로 사랑하라! 본문을 자세히 보면 '서로' 라고 하는 말이 세 번 있습니다. 서로! 서로 서로라는 말입니다. 요13:34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엄청난 사랑을 받았습니다. 그런고로 서로 사랑해야 됩니다. 그렇습니다. '서로'라는 한마디 속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의 태도는 여러 가지입니다. 주는 사랑, 받는 사랑, 또 주고받는 사랑도 있습니다. 사랑은 주기만 하거나 받기만 한다면 일방적이어서 그 의미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는 데는 서로라는 관계를 떠나서는 진정한 사랑이 성립될 수가 없습니다. 사랑은 서로 해야 합니다. 자기는 미워하면서 상대방에게 사랑을 요구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나는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만 받으려고 한다면 잘못입니다. 사랑은 줄줄도 알고, 받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사랑은 주고받는 쌍곡선입니다. 그것이 본문이 말하는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야구 경기의 묘기는 네 가지입니다. 던지는 것, 받는 것, 때리는 것, 그리고 달리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공을 잘 던지는 선수라도 공을 받는데 서툴면 팀윅이 금이 갑니다. 제 아무리 공을 잘 던지고 잘 받는 선수라도 달리는 것이 느리면 끝장입니다. 또 제아무리 공을 잘 던지고 잘 받고, 잘 달려도 공을 때릴 줄 모르면 그 시합은 별 볼일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팀윅입니다. 다시 말하면 서로 잘해야 유명한 팀이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부부간에도 서로 사랑해야 되고, 부모 자식간에도 이웃 간에도, 친구간에도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아멘!/ 경제 용어에 수요와 공급이 있답니다. 사랑학 역시 주고받는 것이 있습니다. 이 사랑이 아름다운 사랑입니다. 에릭 프롬은 '건강한 사회'라는 그의 저서에서 '건강한 사회란 건강한 정신에서 오는데, 건강한 정신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왜 나를 사랑하지 않느냐? 왜 네 사랑이 식었느냐? 왜 옛날과 달라졌느냐? 하는 것은 이미 내 사랑 쪽에도 문제가 발생했다는 적신호입니다. 서로 사랑할 때 그곳에 웃음이 있고 기쁨이 있고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 서로 사랑합시다. /할/ 그런데 사랑하되 열심히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라.' 그 '열심히'라는 말을 헬라 원문대로 '엑테네'라고 하는 말로, '잡아늘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랑의 능력을 극대화시키라는 것입니다. /할/ ⑶다른 사람의 허물과 단점을 덮어주는 사랑을 하라! 어떤 사랑이 허물을 덮을 수 있습니까? 열심히 그 능력을 극대화시킨 사랑의 영역 속에 있을 때 허다한 죄를 덮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허물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사랑해야 됩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했습니다.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허물과 죄를 덮어 줄줄 알아야 됩니다. 어떤 사람은 남의 허물을 덮어주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남의 허물만 들추어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쪽의 사람입니까? 요8장에 보면,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여인을 붙잡아서 예수께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합니다.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그들의 손에는 이미 돌이 들려져 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처라!' 그때서야 그들은 양심에 가책을 받고 모두 물러갔습니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인간의 죄를 심판할 자는 하나님 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인간은 죄를 들추어내고 돌을 던질 자격이 없습니다. 거기에 바리새인들만 있었다면 그 여인은 죽었을 것입니다. 그 여인이 살 수 있었던 것은 죄를 덮어 주고 용서해주신 예수님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구를 용서하지 못합니까? 용서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요일4:7절에서 사랑의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할/
▶9절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하고" 이 구절을 보면 사랑은 단순히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원망 없이 대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원망 없이 대접하려면 무엇보다 겸손하고 사심이 없어야 합니다. 교만한 마음으로 사심을 가지고 대접하면 나중에 꼭 원망과 불평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은 교만을 제일 싫어하십니다. 성공도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성공하고 교만해지면 실패한 것입니다. 반면에 실패를 통해 겸손함을 얻으면 사실 성공한 것입니다. 기적을 체험하고 자신이 남보다 영성이 높고 자기만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는 것으로 착각하면 실패한 것이고, 기적의 체험이 없어도 겸손함을 잃지 않고 범사에 감사하면 성공한 것입니다. 성도는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배우고, 더 많이 은혜를 받을수록 더 겸손해야 합니다. /할/
▶10절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여기서 보면 봉사의 세 가지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⑴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봉사하라!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여러 가지입니다. 봉사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은사를 주셨습니다(고전12:4-11). 가르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가르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위로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위로하는 일을 해야 하고, 노래 잘 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찬양대로 봉사하고, 전도 잘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전도하는 일로, 섬기는 은사를 받은 사람은 섬기는 일을 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는 아무 은사도 없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각각 재능을 주시고 은사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더 좋은 은사를 사모해야 합니다. 고전12:31절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엡4:1절에 보면, ⑴성도를 온전케 하며, ⑵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며, ⑶봉사의 일을 하게 하려함이라고 했습니다. 직분을 주신 이유, 은사를 주신 목적은, 바로 봉사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직분을 받은 자는 누구든지 그 직분대로 봉사를 해야 합니다. 직분을 받고도 봉사하지 않으면 그것은 직무유기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받은 은사를 잘 개발해서 주를 섬기고 형제를 섬기고 이웃과 하나님의 교회를 잘 섬기면 천국의 상급은 따놓은 추첨권입니다. /할/ ⑵선한 청지기 같이 봉사하라! 선한 청지기가 누구인가? 충성으로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충성이란 무엇인가?
⒜내가 할 일을 미루지 않고 내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않고 오늘 하는 것입니다. ⒞억지로 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청지기란 '관리자'란 의미입니다. 즉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인데, 그것을 잠시 관리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절대로 교만하지 않습니다. 이 사실을 모르니까 하나님께 봉사하고도 내 것을 낸 것처럼 의시 댑니다. ▶충성된 청지기는, ⑴주인을 압니다. 우리의 생명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생명을 주신 하나님이 진정한 주인입니다. /믿/ ⑵충성된 청지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압니다. 그래서 감사하면서 충성합니다. ⑶충성된 청지기는 작은 것에도 소중히 여깁니다. 여러분! 큰 것에 실패하고 큰 것을 잃었습니까? 작은 것부터 시작하십시오! 작은 것부터 시작해야 큰 것을 주십니다. ⑷충성된 청지기는 시작이 민첩합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본토 아비 집을 떠날 때도, 독자 이삭을 바칠 때도 그 행동이 민첩했습니다. ⑸충성된 청지기는 끝까지 최선을 다합니다. 계2:10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그렇습니다. 청지기 의식이 없이는 바른 헌신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선한 청지기로서 헌신할 할 때에 그 헌신은 참으로 아름다운 헌신이 되고, 보람 있는 헌신이 되고, 자랑스러운 헌신이 됩니다. /할/ ▶다시 한 번 명심합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청지기'로 불러주셨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한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청지기이고, 나라의 청지기'임을 알아야 합니다. /할/ ⑶서로 봉사하라! 사랑의 원리가 그러하듯, 봉사의 경우도 서로 봉사해야 합니다. 대접만 받기만 원한다든지, 섬김을 받기만 원하는 것은 봉사의 질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요13:14절에서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서로 사랑하고, 서로 용서하고, 서로 봉사하고, 서로 돕고, 서로 섬기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의 바른 자세입니다. /할/
▶11절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⑴봉사는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하라! 내 의지, 내 능력이나 내 주관으로 봉사하려면 얼마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봉사해야 변함 없이 꾸준히 봉사할 수 있습니다. 내 힘으로 일하면 조금만 해도 피곤해 집니다. 짜증납니다. 일하다 짜증나면 내 힘으로 한 줄 아십시오! 주님께 받아서 하면 짜증내지 않고 잘 할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⑵우리가 힘써 봉사하면, 11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교회가 빛나고 발전하게 되며, 개인적으로도 큰 축복의 열매가 맺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봉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더 할 수 있는 재력과 능력과 건강을 주실 뿐만 아니라 하늘나라의 상급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20세기의 성자 슈바이처 박사는 자기의 좋은 것을 다 가지고 아프리카 콩고에 가서 오고웨이 강가에 병원을 짓고 많은 사람의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서 후원금을 받아 굶주리는 콩고 사람들에게 베풀어주었습니다. 그런데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아서 병만 고쳐 주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또 다시 본국에 돌아와서 이곳저곳 다니면서 모금을 했습니다. 한번은 자기 고향 알자스에 가서 모금을 하기 위해 갔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자기 고향에서 세계적인 성자가 났으니 얼마나 반갑겠습니까? 슈바이처 박사가 기차를 타고 온다는 소식을 듣고 전부 기차역으로 나갔습니다. 슈바이처 박사쯤이면 1등간을 타고 오겠지 생각하고 기차가 멈춘 다음에 1등간을 찾아보았더니 없었습니다. 그러면 2등간을 탔는가 싶어 2등간을 찾아보았더니 역시 없었습니다. 마지막 3등간을 찾아보니 그 곳에서 내렸습니다. 그래서 동네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박사님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 그렇게 이곳저곳 다니고 일하시려면 피곤하실 텐데 1등간을 타고 오셔야지 왜 3등간을 타고 오셨습니까?' 그 때 슈바이처 박사가 '4등간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4등간이 있었으면 4등간을 탔을 텐데 4등간이 없어서 3등간을 탔다는 말입니다. 슈바이처 박사 자신은 그렇게 아끼고 검소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쥐어짰습니다. 아프리카 인들을 위해서 모금한 돈을 자기를 위해서는 쓰지 않았습니다. 후원금이 거두어 지는 대로 가져다가 먹여주고 병을 고쳐 주었습니다. 이런 봉사 까닭에 슈바이처를 통하여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을 받으셨는지 모릅니다. 말세를 당한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이렇게 봉사의 생활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아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말세에 사는 성도 여러분! 정신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합시다! 서로 열심히 사랑하며 삽시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어 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이루기 위해 힘써 애써 봉사합시다.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축복하신 것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쓰라고, 충성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 죽도록 충성해서 큰 축복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2010년 5월 16일 대예배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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