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사신 예수! (고전15:1-8)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4. 17. 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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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사신 예수! (고전15:1-8)

 

  오늘 본문은 부활 장이라고 하여 부활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주고 있습니다. 부활 장은 부활에 대하여 의심하거나 오해하고 있는 자들 때문에 쓰인 성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4절까지는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고 의심하는데 대한 답을 주고 있으며, 35-49절은 '죽은 자들이 산다면 어떻게 살며 어떠한 몸으로 사느냐?'에 대한 답을 주고, 50절 이하에 말씀은 부활 신앙의 '결론으로 죽음을 정복하고 승리한 자의 승리의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할/ ◀제목 소개!▶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은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사건입니다. 다른 종교에는 부활절이 없습니다. 오직 기독교에만 부활절이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보면 오히려 성탄절보다 부활절이 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스위스의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부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선언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인간으로서 살다가 인간으로 죽지만, 예수님은 인간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죽음으로 속죄하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하나님 자신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다릅니다.
  요11:25-26절에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부활'이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기독교가 자랑하는 최대의 진리입니다. 이 진리가 너무 존귀하기 때문에 가짜 부활도 생겨났습니다. 이 땅위의 진품은 언제나 가짜가 있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도 이단들이 가짜 부활론을 주장하면서 우리를 미혹하고 있습니다.
  '존 스미스' 라는 사람은 미국에서 악명 높은 사기꾼이고 건달입니다. 한번은 보스턴에서 워싱톤디시로 가는 기차를 탔는데 무임승차를 했습니다. 그러다 검표 원에게 발각이 됐습니다. 그 때 스미스는 '나는 뉴욕 타임즈의 기자'라고 거짓으로 자기 신분을 둘러댔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열차에는 뉴욕 타임즈의 편집국장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검표원이 '아, 그래요. 그러면 이리 와 보시오'하고 그 사람을 편집국장께 데려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 자네가 웬일인가? 출장 가는 길인가?'하고 반갑게 맞이합니다. 검표 원이 할 말이 없어져버렸습니다. 검표 원이 가고 난 다음 스미스가 말했습니다. '선생님, 어째서 저에게 이렇게 호의를 베푸십니까?' 그 때 그 사람이 빙그레 웃으면서 '나도 가짜요'라고 했답니다.
  세상에는 가짜가 많지만 기독교의 부활도 가짜를 만들어 사람을 미혹하는 세상입니다. 세일교회 교주 이뢰자는 '죽어도 살아난다.'고 유언을 하고 죽었습니다. 그를 추종하던 교인들이 부활할 것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살아나지 않았습니다.
  교인들이 패가 갈렸습니다. '살아나지 않으니까 장례를 치르자, 아니다 기어코 살아날 것이다.'라는 의견이 서로 일치하지 않고 분쟁하다 결국은 세일교가 깨어졌습니다. 아직도 그루터기는 있지만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뢰자의 부활론은 아주 유명한 이단교파의 부활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의 부활 사건에도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첫째는 기절 설입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 매를 맞고 기절을 하였다가 깨어나서 도망을 하였지 실제로 죽었다가 살아난 것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도적 설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홈쳐다가 감추어 놓고 보라 빈 무덤이다 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환상 설입니다. 제자들과 여인들이 예수님을 사모하다가 부활하신 주님의 환상을 본 것이다 라고 주장을 합니다.
  네 번째는 첨가 설입니다. 이 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내용을 첨가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부활하지 않았는데 부활하신 것처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 나셨다는 말을 첨가해서 부활하신 것처럼 꾸몄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분명히 부활하셨습니다. 구약에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강력하게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시16:10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섞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했고, 본문에서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3일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했습니다. '성경대로'란 말은 구약의 예언을 말합니다. /할/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성경의 약속대로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성경을 보면 약속이 참 많이 나와 있습니다. 신약과 구약이라는 말도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옛날에 있었던 약속이 구약이고 새로 주어진 약속이 신약입니다. 성경을 보면 그 안에 모두 약속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약속과 그 격이 다릅니다. 사람의 약속은 우선 믿을 수가 없습니다. 환경에 따라, 입장에 따라서, 사람에 따라서 약속이 늘 변화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한 약속은 영구성이 없습니다.
  결혼할 때 얼마나 철석같이 약속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많은 증인들 앞에서 자신과 상대에게 얼마나 진지하게 약속을 합니까? 그런데도 살다보면 이것이 깨집니다. 없던 것으로 하고 간단히 헤어집니다. 돈을 빌려갈 때 얼마나 철석같이 약속을 합니까? 그런데 그 약속이 잘 지켜지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처음 직분을 받을 때 얼마나 뜨겁게 다짐하고 눈물을 흘리며 서약을 합니까? 그런데 그 서약마저도 세월이 흐른 후에는 잊어버립니다.
  목사안수를 받을 때 모두 눈물을 흘리며 서약하고 다짐하고 그때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겠다고 찬송을 부르며 서원 했습니다. 그런데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오늘은 그 다짐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습니다.
  권사도 집사도 얼마나 눈물을 흘리며 충성을 다 하겠다고 맹세했습니까? 그런데 오늘 저와 여러분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모두 약속은 온데간데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약속입니다. 인간의 약속에는 그런 하자가 있고,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다릅니다. 우선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고,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이십니다. '여호와'란 성호는 '약속을 주시고 그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아멘!/

   ⑴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도 약속대로 오셨습니다. 창3:15절에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사7:14절에서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라'고 했습니다. 예언한 그 내용 그대로 예수님은 처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십니다. 예수님은 성경이 약속하신 그대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⑵예수님은 성경이 약속한 그대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눅24:7절에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워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대
  ⑶그리고 약속된 그대로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눅24:7절 하반 절에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또 본문 4절 이하에서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지낸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만에 다시 살아 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왜 이런 고백을 합니까? 예수님의 부활의 확실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멘!/ 
  롬4:25절에 '예수는 우리의 범죄 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전부 뒤집어쓰시고 우리가 죽을 것을 대신해서 죽고, 우리가 받을 저주를 대신 받으셨다는 말입니다. 그것으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부활하사 우리를 의롭다 하셨습니다. 그래서 구원의 길을 완전히 열어 놓으셨습니다. 부활은 그래서 귀한 것입니다.
  ⑷중요한 것은 이제 성경이 약속한 그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부활한다는 사실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를 보면, 청년 파우스트는 문학가, 의학자, 법학자, 신학자입니다. 그가 인생에 번민을 느끼며 회의에 빠집니다. 그러다 마침내 그는 자살을 기도합니다. 독배를 마시려고 잔을 들었을 때, 멀리서 부활절의 새벽종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리고 예수 다시 사셨다는 합창소리가 장엄하게 울려옵니다.
  그때 이 파우스트는 '그가 살아나셨다면 나도 부활할 수 있다.'고 외치면서 독배를 집어던지고 일어서 새 인생을 시작한다는 메시지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준 예수의 부활의 힘입니다. /할/
  바울사도는 고전15:14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며' 또 19절에서는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0절에서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할/아멘!/ 행2:26절 이하에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여기에서 '마음의 부활, 육체의 부활, 영의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벧전1:3-4절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고 했습니다.
  죄인으로 죽으나 의인으로 삽니다. 추하게 죽으나 영화롭게 삽니다. 미움으로 죽으나 사랑으로 삽니다. 썩어지는 죽음이나 영구한 기업으로 삽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부활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늘 불안합니다. 죽음이 불안하고 죽음 후가 불안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원의 확신과 부활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아멘!/

 

  ▶눅24;1-12절에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아침에 먼저 활동한 사람은 여자들이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부활의 아침입니다. 그런데 그 아침 그 무덤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 무거운 돌이 무덤에서 옮겨져 있습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군병들이 그 돌문에서 무덤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옮겨져 있습니다. 천사가 그 돌을 굴려 내었다고 했습니다.
  신기한 무덤을 볼 수 있습니다. 시체가 없습니다. 놀랍고도 놀라운 일입니다. 빈 무덤입니다. 빈 무덤은 기독교의 최대 신비입니다.
  눅24:13절 이하에 보면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나서 발걸음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거기 모여있던 제자들에게 외친 말씀이 있습니다. 그것은 34절에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습니다.'라는 말씀입니다. 흥분을 감출 수 없어서 외치는 엄청난 선포였습니다.
  그런데 오늘까지 이 말은 동방 정교회의 인사말이 되어 내려오고 있습니다. 한 쪽에서 '주께서 다시 사셨습니다.'라고 하면 다른 쪽에서는 '정말로 다시 사셨습니다.'라고 화답한다고 합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개혁사역이 장애에 부딪혀 어렵게 되자 크게 낙심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누워서 끙끙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터의 아내가 상복을 입고 엉엉 우는 것이었습니다. 낙심하여 누워있던 루터였지만 깜짝 놀라서 아내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여보, 누가 죽었오?' 그랬더니 그의 아내가 '예, 하나님께서 돌아 가셨습니다.'라고 대답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루터는 버럭 성을 내면서 '아니 하나님이 돌아가시다니 그런 망령된 말이 어디 있단 말이오?'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루터의 아내가 정색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 계신다면 어떻게 당신이 그렇게 좌절하고 절망할 수가 있단 말이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루터는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렇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 그러면서 다시 일어나 종교 개혁의 사역을 진행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죽음을 이기시고 무덤을 열고 부활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절을 지킵니다. 우리 주님을 부활시키신 하나님을 믿고 또 부활의 주님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도 어떤 현실, 그것이 비록 죽음과 같고 무덤과 같은 현실이라고 할지라도 루터처럼 담대하게 일어나서 극복하고 승리할 수 있을 줄 믿습니다.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 주님은 왜 갈릴리로 가셨습니까?
  갈릴리는 우리 주님께서 맨 처음 그 사역을 시작하신 곳입니다. 우리 주님은 왕의 도성이 있는 예루살렘에서가 아니라 멸시받던 지역 갈릴리에서 그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이 곧바로 찾아가신 곳이 또한 갈릴리였습니다.
  예수께서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시는 이적을 행하신 후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 했습니다. 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열렬히 환영하면서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번도 이런 저들의 환영 때문에 그 목표가 흔들린 일이 없었습니다.
  또한 갈릴리는 당시로서는 멸시받고 천대받는 땅이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고 하는 말이 바로 그것을 잘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갈릴리 사람들은 자신들이 갈릴리 출신이라는 것을 창피하게 생각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그 멸시의 땅 갈릴리를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바로 그 갈릴리가 삶의 터전이었고 사역의 현장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가신 땅이 바로 그 갈릴리였습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주님을 따르는 오늘 우리들도 갈릴리로 가야 합니다. 갈릴리를 사랑해야 합니다. 갈릴리에서 우리에게 맡겨 주신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 갈릴리가 어디입니까? 어둠이 있고, 버려짐이 있고, 소외된 것이고, 예수 밖에 있는 사림들이 다 갈릴리입니다. /믿/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뵈오리라' 마28:16절에 '열 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였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명하신 그곳에 가서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올 수 있었습니다.

 

  ▶빈 무덤이 주는 진리는 무엇인가?
  천사가 '어찌하여 산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기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여자들은 평소에 예수님께서 늘 이렇게 하시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그리고 달려가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증거 했습니다. 빈 무덤은 우리에게 몇 가지 확신을 주고 있습니다.


  ①빈 무덤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만일 제자들이 숨겨 놓고 부활하였다고 거짓말하였다면 그 거짓말을 위하여 제자들이 순교하였겠습니까? 진리를 위하여 죽을 수는 있어도 거짓을 위하여 죽은 이는 없습니다. 잠시동안은 속일 수 있어도 2,000년 동안 속일 수는 없습니다. 몇 명을 속일 수는 있어도 전체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남은 속일 수가 있어도 자기는 속일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빈 무덤은 예수님의 부활이 확실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는 인도 능수 해안에 묻혀 있습니다. 마호멧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에 묻혀 있습니다. 공자는 중국의 장평양에 묻혀 있습니다. 그들은 무덤에서 나오지 못했습니다. 거기에서 썩었고 흙이 되었습니다.
  중국 북경에 가면 천안문 광장 한 쪽에 모택동 미이라는 보려고 길게 줄 서 있는 장면을 볼 수 있고, 구 쏘련 모스크바 붉은 광장 한 쪽에는 레닌의 미이라 시신을 보려고 장사진을 이루고 있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부활을 선물로 주신 우리의 생명의 구세주가 되셨습니다.
  한 때 석가모니의 뼈가 발견되었다고 인도를 위시한 불교 국에서는 한동안 떠들썩했었습니다. 그 때 석가모니의 뼈들은 잘 진열되어 수백 만 인도사람들의 경의 속에 시가행진을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 뼈가 지나갈 때 땅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이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한 선교사가 그의 친구에게 말했습니다.
  '만약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뼈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었다면 기독교는 산산 조작이 나고 말 것이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님 무덤은 빈 무덤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빈 무덤을 자랑합니다. 예수의 빈 무덤이 최고의 자랑이요 당당한 자랑입니다.


  ②빈 무덤(부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확인한 사건입니다.
  롬1:4절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여기서 인정되셨다는 의미는 예수께서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본래 하나님의 아들이신데 부활하심으로 재확인되었다는 의미입니다.


  ③빈 무덤(부활)은 하나님의 최후 승리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군중들이 이기는 것 같았고, 로마가 승리하는 것 같았고, 가룟 유다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 같았고, 마귀가 세상을 지배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모든 질서를 뒤집어 놓았습니다. 군중은 놀랐습니다. 하루에 5천명씩 예수님을 믿으며 예수님에게로 돌아 왔습니다. 가룟유다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마귀는 사망 권세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예수 이름 앞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세상 싸움은 한 편이 다른 한 편을 죽이면 죽인 편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죽은 편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십자가에 죽은 예수가 3일만에 부활하여 사망권세를 깨뜨리고 이기고 승리했습니다.
  사단의 권세 중 가장 큰 권세는 사망의 권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어떤 인간도 사단의 이 권세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길로, 죽음의 권세 앞에서 다 무릎꿇고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같은 사망의 권세를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깨뜨리시고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승리는 이미 창3:15절에서 예언되어졌습니다.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할/
  바울 사도는 고전15:55-57절에서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아멘!/ 우리 모두는 승리잡니다. 어디에서! 죽음에서 사망권세에서 이기고 승리한 자들입니다.
  ▶어떤 공원묘지에 한 아기의 묘비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아이야, 조금만 기다려라. 주님께서 곧 오신다.'
  비록 이 땅에서 몇 년 밖에 못 살다 죽은 어린 생명이지만 조그만 기다리면 예수님이 오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라는 소망의 묘비였습니다. 일시적으로는 힘이 강한 사람이 이기는 것 같고, 돈 많은 사람이 부러운 것 같고, 권세 쥔 사람이 최고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예수 밖에 있다면 다 헛것입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질 것입니다.
  바울은 고전15:20-24절에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사망이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그에게 붙은 자요 그 후에는 나중이니 저가 모든 정사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할/


  ④빈 무덤은 보상을 의미합니다.
  빈 무덤이 없다면 예수님은 부활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지 않으셨으면 우리도 부활하지 못 합니다. 부활이 없으면 믿음도 헛것이고, 우리가 바랄 것은 이 세상뿐입니다. 부활이 없으니 이 세상만 잘 살면 끝입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기에 우리는 저 세상에서 살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저 세상에 가서 보상받을 준비를 하여야 합니다.
  바울은 고전15:16-20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아멘!/

 

  ▶부활하신 주님은 40일 동안 지상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11번이나 나타나셨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에게 오셔서 축복하셨습니다. 그 축복하신 말씀이 여러 곳에 나옵니다. 
  ⑴눅24:25절 '평강이 있을 지어다'라는 축복기도입니다.
  '주안에서 샬롬, 주안에서 평강이 있을 지어다'. 이 인사가 유대의 전통적인 인사입니다. 우리나라의 '안녕하십니까?' 라는 말과 샬롬의 의미는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제일 먼저 하신 축복의 말씀이 '샬롬'입니다. 인생살이 뭐니뭐니해도 평안이 제일 축복입니다. /믿/
  요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같이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⑵책망도 하셨습니다.
  막16:14절에서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꾸짖으셨습니다. 부활절 이 아침에 이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가 부활절 예배를 드리면서 믿음이 있는 자처럼 혹시 가식을 하지는 않는가? 부활하신 주님 앞에 책망을 받는 그런 모습이 아닌가?'를 상상해 보십시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그 자리는 얼마나 큰 감동의 자리이겠습니까? 얼마나 큰 환희의 자리이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 중에 '제자들이 믿지 못하고 있는 것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⑶눅24:20절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해주셨다.'고 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알지 못하고 있는 제자들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등지고 있는 제자들을 돌이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깨닫는 것이 은혜이고 복입니다. 
  ⑷임마누엘 약속을 주셨습니다.
  마28:20절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 약속이 소망의 근거입니다. 용기의 근거입니다. 이 약속을 붙잡고 성도들은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절은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는 절기입니다. 
  ⑸부탁의 말씀도 있습니다. '가서 제자 삼어라!' 전도입니다!
  마28:19절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하늘로 승천하시면서 마지막 부탁으로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행1:8절에 '성령이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을 것이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내 증인이 되리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고 가서 제자를 삼아 내 증인이 되라는 것'이 주님의 부탁이었습니다. /할/

  ▶유대인들의 자녀교육은 정평이 나있습니다. 남다른 교육열, 독특한 교육방법, 그리고 탁월한 교육효과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사용하는 독특한 교육방법 가운데 '역사적 기억'이란 것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13살이 되면 '바 미쯔바'라는 성인 식을 치릅니다.
  이 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묻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3500년 전에 있었던 우리 민족의 구원 이야기를 듣고 싶으냐?' 아들이 무릎을 꿇고 대답합니다. '예, 아버지! 3500년 전에 있었던 우리 민족의 구원 이야기를 오늘 제게 들려주십시오.' 아버지도 함께 무릎을 꿇고 3500년 전 출애굽의 구원 이야기를 자세하게 들려줍니다.
  이 때 아이는 눈을 감고 그 이야기를 암기하고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버지! 3500년 전 출애굽 사건이 있었기에 우리 민족이 태동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출애굽 사건이 있었기에 오늘 내가 자랑스러운 이스라엘의 젊은이가 되었습니다.'
  이 아이는 단순히 3500년 전 일어났던 저 출애굽 사건을 있는 사실 그대로 암기하는데 머물지 않습니다. 이 출애굽이라는 존재론적 사건과 오늘의 자신의 삶을 연결시킵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오늘 자신의 존재를 재해석하고,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발견합니다. 이것을 '역사적 기억'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들도 오늘 이 아침에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히 믿고 그 부활의 능력에 붙잡혀 살아야 합니다. /아멘!/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도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제자들을 찾으셨을 때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제자들이 그 사실을 도마에게 말했습니다. 그 때 도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시 나타나셨습니다. 이 번에는 일부러 도마에게 다가 가시고 말씀하시기를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그때 도마가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도마와 같은 사람들이 이 땅에 너무도 많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것만 믿으려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 확인할 수 있는 것만 믿으려 합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 이해할 수 없는 영적 사건들을 믿지 못합니다. 현대판 도마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부활절을 지키는 이유가 있습니다. 잃어버린 믿음을 되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흔들리는 믿음을 더욱 굳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멘입니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믿지 못하고 의심하던 도마를 찾아오셨습니다. 흔들리는 믿음을 굳게 세워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 그리고 또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부활의 능력은 우리에게 임합니다.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죽음, 내 죽음, 예수 부활, 내 부활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⑴아무렇게나 살지 않습니다. 계20장에 생명록에 기록된 사람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며 주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⑵예수님의 재림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⑶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부활의 세 가지 축복이 있습니다(벧전1:3-5)
  ①거듭나게 하시고, 산 소망이 있게 하십니다(벧전1: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을 통해서 우리가 거듭나게 되고, 그 거듭남을 통해 살아 있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소망은 소망 중의 소망이요 산 소망이 됩니다. 산 소망은 이 땅에서 승리하도록 도우시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인줄 믿습니다. 우리는 이 소망 때문에 활동을 하고 능력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도 성취됩니다. 고난 중에도 흔들리지 않고, 항상 마음이 기쁘고 감사가 넘쳐나게 됩니다.
  시146:5절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렘29:11절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 하는 생각이라'


  ②하늘의 기업을 잇게 하십니다(벧전1: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기업'이란 법률적으로는 부모나 조상으로부터 상속받은 재산을 말합니다. 신학적으로는 하나님께서 그의 약속을 따라 순종하는 백성에게 주시는 선물이나 재산을 말합니다.
  구약에서의 '기업'은 이스라엘 백성이 받았던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에서는 하늘나라가 곧 기업입니다. 즉 구원과 영생과 약속, 축복이 기업입니다.
  세상의 기업은 시간이 지나면 썩습니다. 더럽혀집니다. 쇠합니다. 무너집니다. 우리는 고대 문명의 발상지인 옛 페르시아 대국 이락크가 힘없이 무너지는 것을 안방에서 TV로 보았습니다. 우리 한국에도 한때 흥왕 했던 많은 재벌들, 기업들이 있었지만, 지금은 망해서 건물도 없어지고 회사 이름마저도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불과 10년, 20년, 30년이면 이렇게 사라지고 없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업은 이 세상의 기업과 다릅니다. 이 땅에서 시작되고 저 하늘나라까지 계속되는 영원한 기업이요, 하나님께서 보장하시는 기업입니다. 그래서 완전하고 온전한 기업, 영생하는 기업입니다. /믿/
  역대상28:8절 '이제 너희는 온 이스라엘 곧 여호와의 회중의 보는 데와 우리 하나님의 들으시는 데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구하여 지키기로 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이 아름다운 땅을 누리고 너희 후손에게 끼쳐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이 땅에서 누리는 기업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약2:5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을 택하십니다. 가난한 사람일지라도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부요의 축복을 주시고 더 나아가서 하늘나라까지도 상속하여 주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기업이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애쓰고 수고하여 돈을 벌어서 아름답고 큰집을 장만합니다.
  그러나 돈을 벌어서 이렇게 훌륭한 저택을 만들었다고 해도, 그 집은 진정한 자기 집이 아닙니다. 그렇게 애써 지은 집도 세월이 지나고 나면 두고 가야 합니다. 이 세상 집은 영원한 내 집이 아닙니다. 나이를 먹고 언젠가 세상을 떠나게 되면 다 두고 가야 합니다. 돈도, 재물도, 보석도, 집도, 땅도, 문서도 다 놓고 가야 합니다. 소유는 한순간이고, 오래 가지 못합니다.
  그러나 재물을 이 땅에 쌓지 말고 하늘나라에 쌓으면, 하늘에서 보화가 넘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천국 가는 티켓을 받은 잡니다. 더 열심히 하나님께 충성하시기를 소원합니다.


  ③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는다(벧전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신32:10절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하나님이 지켜주셔야 합니다. 건강도, 재물도, 가정도, 사업장도, 명예도, 자식들도, 믿음까지도 지켜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눈동자처럼 지키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바로 알고, 믿고, 행해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바울은 고전15장 결론부분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    (2010년 4월 4일 부활주일 설교)

 

출처 : 창골산 봉서방
글쓴이 : 송수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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