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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걸고 믿음을 지킨 사람들! (단 3:13-30)
종교개혁자인 마딘 루터는 '오직 믿음'이란 구호 아래 종교개혁을 단행한 사람입니다. 믿음은 반듯이 상대가 있습니다. 믿음의 상대가 사람일 수도 있고, 권력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우상일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믿음을 가지고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안는 사람은 세상을 믿고 자기를 믿고 친구를 믿고 지식과 자기 실력을 믿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늘 신앙을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믿음을 기뻐하십니다. 그런데 그 믿음은 싸우며 지켜 나가는 것입니다. 세상에 모든 경기는 '타이틀을 얻기 위한 타이틀 매치가 있고, 또 다른 하나는 타이틀을 계속 지키기 위한 방어전'이 있습니다. 타이틀을 빼앗는 것도 어렵고 지키는 것도 어렵습니다. 우리 성도는 믿음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경주자입니다. 성경은 '모든 것에서 승리를 해도 믿음의 싸움에서 지면 모든 것에 지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싸움에서 지더라도 믿음의 싸움에서 이기면 모든 것에서 이긴 자'로 말하고 있습니다. /할/ ▶여의도의 63빌딩을 지을 때 최순영장로님의 간증입니다. 장로님이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63층 빌딩을 짓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답니다. 그런데 그 건물의 허가가 63층으로 난 것이 아니라 처음에는 15층으로 났다고 합니다. 그런데 장로님은 믿음이 왔습니다. 하나님이 63층 건물을 주실 줄 믿고 허가를 15층으로 받았지만, 63층의 기초공사를 닦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다고 믿기 때문에 1년 내내 지하공사만 했습니다. 그 당시 돈으로 지하공사에만 백 억이 들어갔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63층으로 허가를 내는 것에 정부가 강력히 반대를 했으나 끝까지 밀고 나가 드디어 두 달만에 15층 공사에서 63층으로 허가가 바뀌었다고 합니다. 믿음이 없이 공사를 했더라면 63층의 허가가 나와도 이미 기초공사는 15층으로 했으므로 짓지 못했을 텐데 63층 기초공사를 했기 때문에 지을 수가 있었다고 간증을 한 것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불을 보고도 불이라고 말하지 않고 물을 보고도 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불 속에서도 살아나는 기적이 있고, 물을 육지같이 걷는 역사가 얼마든지 있기 때문입니다. /믿/할/ 그래서 믿음은 찬송하기를 '금보다 귀한 믿음은 참 보배 되도다, 이 진리 믿는 사람들 다 복을 받겠네.'라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귀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은 성도의 믿음을 시기하고 탐내고 있습니다. 믿음은 세상을 이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음으로 살기가 힘이 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닙니다. 요일5:3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믿음이 힘듭니까? 무겁습니까? 아닙니다. 내가 아직까지 믿음 생활을 바로 못해서 그렇지 믿음이 무거운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무거운 것도, 힘든 것이 아닙니다. 또 4절에 보니 '대저 하나님께서 난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할/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무기가 무엇입니까? 세상이 얼마나 많고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까? 분명한 것은 믿음으로 세상을 이긴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어떤 어려움이라도 믿음으로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막9:23절에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할/ 그런데 믿음의 원어적인 뜻을 보면 '보증'으로 나와 있습니다. 보증이라는 말은 '책임을 진다'는 의미입니다. 은행에 돈을 맡겨도 보증이 필요합니다. 보증자의 신용이나 재산의 가치에 따라 차용액수가 정해집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보증을 서주셨습니다. 그의 독생자 외아들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우리의 생명의 보증을 서 주셨습니다. 이것보다 더 큰 보증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보증해 주신 그분이 이 땅에 그 어떠한 것을 마다하시겠습니까? 쉽게 표현하면 1억의 보증을 서준 사람은 백만 원, 천만 원을 우습게 해 줍니다. 이 말씀에 이해가 가면 아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다음 요일5:5절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뇨' 그렇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아멘!/ 오늘 주제가 믿음입니다. ◀제목 소개!▶
챔피언 벨트를 빼앗는 것도 어렵지만 지키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을 갖는 것도 어렵지만 믿음을 지키는 것은 더 어렵습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충신이 나옵니다. 뱃사공의 진가는 바다가 고요하고 잠잠할 때가 아니라 노도 풍랑이 일어나서 바다가 흉용 해질 때 알 수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참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모든 사정이 평안하고 안정되었을 때는 알 수가 없고, 어떤 큰 사건이나 어려움이 오고 환난과 핍박이 와봐야 그 믿음의 진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오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보면서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가를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①오늘의 배경의 배경을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주전 605년경 유대나라 여호야 김 왕 때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함락이 되어 이스라엘의 왕족과 귀족과 학문이 있고, 재주가 좋은 젊은 남자와 여자를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그들 중 흠이 없고, 아름다우며 재주가 좋은 젊은이들을 뽑아 왕궁으로 데려다가 그 나라의 학문과 말을 익히게 하였는데 다니엘과 그의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노도 이들 중에 국비생으로 뽑히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느부갓네살 왕이 아주 계시적인 아주 중요한 꿈을 꾸었는데 기억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다가 그 나라 술객들과 박수들에게 명하기를 '내가 꾼 계시적인 꿈을 알아내고 해석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꿈을 꾼 본인도 기억하지 못하는 그런 꿈을 알아서 해석하라니 그야말로 기가 막힌 명령입니다. 결국 그들이 꿈을 알아내지 못하자 왕의 분노가 폭발하여 그 나라 모든 박수와 술객들을 죽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이때 다니엘이 왕의 비서실장인 아리옥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죽이지 말고 자신을 왕에게 데려가 달라'고 했습니다. 왕 앞에 선 다니엘은 '인간의 힘으로는 알 수 없는 은밀한 것이라도 네가 섬기는 하나님은 모든 것을 통달하실 수 있는 지혜가 있으신 분'이라고 말하고 시간을 주면 그 꿈을 자기가 해석하겠다고 했습니다. 왕의 재가를 받은 다니엘은 왕궁에서 나오자마자 그의 세 친구들과 함께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약속의 날 왕 앞에 선 다니엘은 기도 중에 왕이 꾼 꿈의 환상을 계시 받아 그 꿈의 해몽을 왕에게 자세하게 풀어서 말했습니다. 그 꿈은 바벨론의 미래뿐만 아니라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미리 보여준 계시적인 꿈이었습니다. 느부갓네살 왕도 다니엘의 해몽을 듣고 감탄하여 다니엘에게 절을 하고 그가 섬기는 하나님을 참된 신으로 인정하며 다니엘의 신분을 높여 바벨론의 온 나라를 다스리는 수석 총리로 세우고 그의 친구들 '오늘 본문의 주인공들'은 한 도를 다스리는 도백(지사)으로 임명했습니다. /할/ 여기까지가 1-2장까지의 내용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3장으로 넘어가겠습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정권을 잡고 다니엘이 포로로 잡혀 온지 20년 되던 해에 느부갓네살 왕이 자기의 세력이 점점 강하여지자 자기의 지위의 높음을 자랑하고 자기를 바로 신격화하기 위한 운동이 벌어졌는데 바로 두라 평지에 큰 신상을 세우게 섬기게 했습니다. 이 신상의 크기가 사람 크기의 15배나 되는 것으로 온통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이 신상이 완성된 다음 자기의 왕권을 나타내는 뜻으로 낙성식을 베풀고 바벨론 전국의 모든 인사들을 초청했습니다. 2-3절에 보면 낙성식에 모든 신하들이 참석했습니다. 이것은 정치적인 위상을 높이려는 행사입니다. 당시 방백은 왕의 최고의 대변인이고 수령은 군사 지도자이고 도백은 행정관리였고, 재판관은 법을 운용하는 사람이고, 법률 사는 판결을 내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입법, 사법, 행정부가 다 모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백성들을 동원시켰습니다. 두라 평지란 '벽 둘레'를 뜻하는 말로 '광장'이라는 의미입니다. 김일성도 광장에 느부갓네살을 흉내내어 60규빗의 동상을 세웠습니다. 중국의 모택동도 구 소련의 레닌도 광장에 그들의 동상을 세워 놓았습니다. 오늘 낙성식 사회자가 외치기를 5절에 '너희는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에 엎드리어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금신상에게 절하라' 쉽게 표현하면 팡파르가 울려 퍼질 때, 모두 엎드리라는 것입니다. 여기 '엎드려 절하라'는 말은 '왕을 예배의 대상으로 신격화시키고, 왕만을 숭배하고, 그에게 항복하고, 그에게 복을 빌고 교제하며 그만을 기뻐하고, 그를 위해 살라고 하는 의미'가 바로 '절하라'는 의미입니다. 더 무서운 소리는 6절에 '누구든지 엎드리어 절하지 아니하는 자는 즉시 극렬히 타는 풀무에 던져 넣으리라'는 협박입니다. 참 예배는 자원적이고 자발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제로 예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7절을 보면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각 방언하는 자들이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자 곧 느부갓네살 왕의 세운 금신상에게 엎드리어 절하니라' 그런데 유독 다니엘 세 친구만이 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정적들이 왕에게 참소를 했습니다. 12절 중간에 '왕이여 이 사람들이 왕을 높이지 아니하며 왕의 신들을 섬기지 아니하며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나이다'라고 참소를 합니다. 왜 그들이 절하지 않았을까요? 하나님의 계명인 '우상에 절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그러잖아도 바벨로 방백들 눈에 가시로 보였던 그들인지라 '옳다 기회가 이때다' 하고 왕에게 고해 바치기를 '왕이여, 누구든지 신상에 절하지 않는 자는 극렬히 타는 풀무 불 가운데 던져 넣으라고 하셨지요? 저 유다에서 포로로 잡혀 온 사드락과 메삭과 아밧느고가 절하지 않았소? 풀무불 속에 집어넣으시지요' 이 소리를 듣고 왕은 순간 실망을 했습니다. 왕은 그들의 충성심을 알고 지혜도 알고 나라를 잘 보살핌을 알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기회를 줄 테니 경배하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절하지 아니하면 풀무 불을 칠 배나 더 뜨겁게 해서 그곳에 집어 던져 버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들의 신앙을 보십시오, 16절 이하를 의역해서 생각해 보면 '아무리 우리를 다그친다 해도 절대로 우상에 절하지 않겠소! 풀무 불 속에 집어넣는다 해도 겁나지 않소!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이 그 풀무 불 속에서도 우리를 건져주실 것이요, 만약에 '그리 아니하실 지라도' 즉 하나님이 건져 주시지 아니하실 지라도 우리는 절대로 우상에 절하는 죄를 범하지 않겠소' 죽음 앞에서도 굽힐 줄 모르는 이 신앙의 절개를 보십시오, 이에 화가 난 왕이 명령을 합니다. '풀무 불을 칠 배나 뜨겁게 높여라, 그리고 저 놈들을 집어넣어라'고 대노합니다.
여기서 풀무 불은 ⑴불과 불씨를 담아두는 곳인 '화로'로 보는 것과, ⑵빵, 그릇, 벽돌 굽는 곳인 '화덕'으로 보는 것과, ⑶쇠를 녹이는 '용광로'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많은 학자들이 여기서 용광로로 보고 있습니다. 그 때 이미 금 신상을 만들었기 때문에 당시에도 용광로가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자 보십시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그것 때문에 풀무불 속에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이들이 믿음은 안 지키고 적당히 타협을 했더라면 이런 고난을 면했을 것입니다. 다니엘도 이런 위기를 맞이했습니다. 단6장을 보면 바벨론도 그 당시 신생국가인 페르시아에게 멸망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자연히 유대 포로들도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왕이 다리오 왕인데 다니엘의 인격과 능력을 인정해서 다시 그를 페르시아의 최고의 총리로 임명한 것입니다. 여기에 시기심이 발동한 두 사람의 국무총리와 방백들이 그를 모함하기 위해 '황제만 숭배하고 다른 신에 절하거나 경배하면' 사자 굴에 집어넣는다는 법령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간신들은 왕의 기분을 맞추고 아부하기에 알맞은 것이었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다니엘을 올가미를 걸기에 충분한 음모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그런 음모에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묵묵히 신앙의 길로 나아갑니다. 단6:10절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기도의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⑴사자 굴에 던져짐을 당했습니다. 기도하지 않았더라면 사자 굴에 들어가지를 않았을 것이고 그런 고난은 당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기도하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위기 앞에 신앙을 포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진짜 믿음을 시험해 보십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시고 욥을 시험하신 것처럼 오늘날도 우리를 시험해 보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시험에 합격하는 것입니다. 일단 그 시험에 합격만 하면 하나님은 모든 것을 축복해 주십니다. /할/ ⑵다니엘의 두 번째 기도의 결과는 사자 굴에서 머리칼 하나 상하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할/ 오히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감으로 얻은 소득이 더 큽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과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증거 했습니다. ㉡다니엘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나타냈습니다. 중요합니다. 우리들도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임을 들어내 주고 살아야 합니다. /아멘!/ ⑶그를 사자 굴에 집어넣었던 원수들은 일망타진했습니다. ⑷그 사건 이후에 더욱 왕의 신앙이 두터웠을 뿐만 아니라 모든 범사에 형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어지십니까?/아멘!/
②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이름은 본명이 아닙니다. 바벨론 왕국에서 개명한 이교적인 이름인데(단1:7), 다니엘은 그들이 개명해준 이름을 단 한번도 쓰지 않았습니다.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뜻인데 바벨론에서 고쳐진 이름은 '벨드사살'입니다. 그 뜻은 '벨신이여 생명을 보존하소서' 그런 뜻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벨드사살이란 이름을 부여받기는 했지만 한 번도 그 이름을 인정한 적이 없습니다. 다니엘은 항상 자신을 지칭할 때 '나 다니엘'이라고 했는데, 이는 여호와에 대한 신앙을 고수하려는 마음에서 온 결심입니다. 사람이 자기 신앙의 칼라가 분명해야 합니다. /아멘!/ 하나냐는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다'라는 뜻인데 그들이 '사드락'으로 개명했는데 '태양의 영감'이란 뜻입니다. 그리고 마사엘은 '하나님 같으신 분이 누구랴?'라는 뜻인데 그 이름을 '메삭'으로 개명했습니다. 그 뜻은 '월신' 또는 '샤크 같은 분이 누구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또 아사랴는 '하나님께서 도우신다.'는 뜻인데 '아벳느고'라고 개명했습니다. '느고의 종'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개명을 시켰을까요? 느부갓네살 왕이 강요하여 개명을 시켰는데, 이는 민족성의 말살과 여호와를 믿는 신앙을 변절시키기 위해서입니다(우리나라가 일제치하에 그랬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닉네임이 있습니다. 많이 있지만 그 중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이요,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 이름이 다른 이름으로 바꿔지지 않기를 바라며, 그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성도가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③본문의 상황을 다시 보겠습니다.
이들도 믿음을 지키다가 그 뜨거운 풀무불 속에 던짐을 당했습니다. 22절을 보면 그 불이 얼마나 뜨거웠던지 그들을 결박하고 끌고 간 사람들이 타죽어 버렸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그런데 믿음의 세 사람은 머리칼하나 상하지 아니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죽었다면 기독교의 위대한 능력은 사라지고 맙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지켜 보호해 주셨습니다. 25절을 보면 세 사람을 던졌는데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상하지도 아니하였고 그 넷째의 모양이 신들의 아들과 같다고 했습니다. 27절에 '방백과 수령과 도백과 왕의 모사들이 모여 이 사람들을 본즉 불이 능히 그 몸을 해하지 못하였고 머리털도 그슬리지 아니하였고 고의 빛도 변하지 아니하였고 불 탄 냄새도 없었더라' 여러분, 기적이 무엇입니까? 죽음 직전에 예수님을 만난 것입니다. 신의 아들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들이 믿음을 지켰습니다. 처음에는 그 믿음 때문에 망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당신의 자녀들을 절대로 망하게 내버려두지 않으십니다. 불꽃 가운데 지켜 주시고 날카로운 사자의 입에서도 지켜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멘!/
▶신앙은 몇 가지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⑴의심의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이들은 절대 그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의심을 품고 기도하면 응답이 오지 않습니다. 약1:6-7절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막11:23-24절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할/ ⑵낙심과 절망의 고비를 넘겨야 합니다. 눅18:1절 이하에 예수님을 항상 기도하고 낙심치 말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주인공들은 환경 앞에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낙심은 불평과 원망을 낳게 되고 원망은 불순종을 낳게 해서 결과적으로 마귀의 밥이 되고 맙니다. ⑶타협의 유혹을 물리쳐야 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들도 풀무 불 가운데 넣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우상 앞에 절하면 살려주겠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쉽게 포기하고 쉽게 타협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절대로 지키는 것입니다. 이들을 보십시오, '절대로 절하지 않겠나이다.' 이런 신앙이 귀한 신앙입니다. /할/아멘!/ ▶링컨이 기차로 여행을 하는데 옆에 타고 있는 한 군인이 담배 한 대를 권했습니다. 대통령이 되기 전입니다. '한대 피우시지요?' '저는 못 피웁니다.' '그렇습니까?' 하면서 혼자 옆에서 피웠습니다. 그런데 조금 가다가 가방에서 술을 한 병 꺼내더니 '한잔 만 하시지요? 혈액순환에도 좋고 기분도 좋아집니다. 여행할 때 한 진술을 그만입니다.' 그러나 링컨은 '그것도 못합니다.' '어떻게 남자가 다 못합니까? 무슨 재미로 사십니까?' 링컨이 '나는 9살 때 어머니의 임종 앞에서 어머니의 유언을 받았습니다. 너는 예수님을 잘 믿고 일생동안 술 담배를 먹지 않고 하나님만 기쁘게 해 드리라' 그래서 '오늘까지 제가 지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회생활 하는데 술과 담배는 기본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야 사람을 사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링컨은 술 담배 안 해도 수없이 많은 사람과 친분을 나누었으며 그가 대통령이 되는 것을 방해한 사람이 없었답니다. 여러분, 신앙은 타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번에 딱 한번 만'이 두 번이 되고 열 번이 되고 버릇이 되고 습관이 됩니다. /믿/
④이제 이들의 신앙을 알아보고 우리가 배워야 합니다. ⑴그들은 한 마디로 용기 있는 신앙인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은 용기가 있습니다. 용기와 신앙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은 항상 언제나 담대함이 주어지게 됩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은 용기가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승리하려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용기는 몇 가지가 있습니다. 용기를 내지 않아도 될 용기가 있습니다. 쓸데없는 용기가 있습니다. 이런 용기는 혈기에서 나오고, 정욕에서 나오고, 교만에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헛된 용기입니다. 죄를 짓는 것도 용기가 있어야 죄를 짓는다고 합니다. 그런 용기는 불행을 가져다주는 것이기에 마귀가 주는 용기입니다. 이런 용기는 절대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에 도덕적인 용기, 애국의 용기, 의의 용기, 진실의 용기가 있습니다. 이것은 순간, 순간 양심이 판단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성과 지성으로 도덕성으로 결정을 내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애국이 나오고 훌륭한 일을 했다고 청룡 봉사 상을 받기도 합니다. 이런 용기도 귀하지만 저는 지금 이런 용기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중요한 믿음의 용기인데 하나님의 자녀들이 갖는 용기입니다. 이 용기는 어떤 인간의 정욕에서 나오는 것도 도덕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가 내 안에 거하고 성령이 함께 하는 사람에게서 나오는 영적인 용기입니다. 오늘 다니엘의 세 친구가 바로 영적인 믿음의 용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도 이런 용기가 필요하고 믿음이 절대 필요합니다. /아멘!/ ㈀어려울 때 더 좋은 믿음을 소유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살다 보면 너무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일이 너무 안 될 때, 실패했을 때, 고난 당할 때 그때 믿음을 지키기가 참 힘듭니다. 그때 잃어버린 믿음을 되찾는 분도 있기는 합니다. 그런 분은 축복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조금 어려움이 오면 떨어져 나가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믿음은 어려울 때 더 좋아지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의 세 친구들처럼 신앙은 어려울 때 더 빛나고 확실해져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일이 잘될 때 더 좋아지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일이 잘될 때 좋은 믿음은 당연한 것 아니냐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닙니다. 신앙의 삶이 이렇게 묘한 것입니다. 일이 잘되고 사업이 확장되고 건강이 좋아지고 살기가 편해지면 믿음이 더 좋아질 것 같지만 아닙니다. 월급 200만 원 받을 때 11조 헌금 드리기는 쉽습니다. 그런데 일이 참 잘되어서 월급이 2천만 원이 되었습니다. 더 감사해서 잘해야 하는데 그것이 잘 안됩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의 분량입니다. 일이 너무 잘되어 바빠지게 되면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하던 것들도 다 내려놓는 분들이 있습니다. 마침내 주일도 지키지 못하고 일하는 분이 있습니다. 일이 너무 잘되니까 기도도 헌신도 주일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일이 너무 안 될 때에도 조심해야 하지만 너무 잘될 때도 조심해야 합니다. 그 때에 좋은 믿음이 진정 좋은 믿음입니다. /할/
⑵권력자 앞에 대한 충성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 양심과 충성을 보였습니다. 어느 시대, 어느 지역을 막론하고 인간생활 전반을 완전히 장악할 수 있을 권능을 가진 구조는 뭐니, 뭐니 해도 국가 권력입니다. 당시 왕의 권세는 말로 표현 못합니다. 요즘 대통령 앞에 감히 누가 까붑니까? 재벌들도 쩔쩔맵니다. 6-7선 국회의원들도 손을 비빕니다. 법을 다스리는 법관들도 눈치를 봅니다. 얼마나 무서운 권력입니까? 그런데 이들은 그런 세상 권력자 앞에서 당시 바벨론의 대왕의 명령을 거절해 버리고 신앙 양심을 찾았습니다. 그뿐입니까? 하나님의 계명에 절대로 순종했습니다. 제1, 제2 계명에 해당하는 사항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 위해 우상 앞에 절하지 않았습니다. 극렬히 타오르는 풀무 가운데 던져짐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고도 신앙의 양심을 지켰습니다. 이것은 생명과 맞바꾼 신앙입니다. 하나님을 제일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도 그를 제일로 알고 축복하십니다. 잠8:17-18절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부귀가 내게 있고 장구한 재물과 의도 그러하니라'
⑶말씀에 기초한 신앙이었습니다. 16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여기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라는 말은 매우 강력한 표현입니다. 이 말은 곧 생각할 여지나, 가치가 전혀 필요치 않는 문제라는 말입니다. 계명에 나와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할/ 지금 그들은 '죽음이냐? 삶이냐?'를 판가름하는 최후의 시기에 저들은 전 세계를 한 손에 쥐고 천하를 호령하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힘 앞에 담대하게 하나님의 힘으로 한판 승부를 벌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힘으로 도전을 했습니다. 계1:3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시1편에서는 복 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라고 하셨습니다. 세 청년은 눈에 보이는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야말로 그의 신앙의 인격을 걸고 복종해야 할 분임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보이는 권위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권위를 더 두려워했습니다. 저들은 타협을 거부했습니다. 죄와 타협하며 삶을 지탱하기보다는 하나님 앞에 순교의 재물로 드리려는 바른 선택을 했습니다. /할/ 우리가 그들의 이런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아멘!/
⑷하나님의 구원에 능력을 온전히 믿는 신앙이었습니다. 17절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여기에 보면 그들은 '하나님은 나를 건지신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신다'라는 신앙으로 꽉 차있습니다. 정말 보기 좋은 신앙입니다. 이런 신앙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할/ 이 말씀은 느부갓네살이 15절에서 '그리고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에 대한 도전입니다. 느부갓네살은 자기 손에서 구원해 낼 신이 없다는 극에 달한 교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건지신다는 확실한 믿음이 그들의 마음속에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신앙이 귀합니다. /아멘!/ 여러분, 구원에 확신을 가지십니다. 구원은 죽어서만 천당 가는 것만 의미하지 않습니다. 세 친구들의 풀무불 속에서도 건져주신 것이 구원이요, 다니엘의 사자 입에서 건져 주신 것이 구원입니다. 이 확신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고후1:10절에서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할/
⑸하나님의 뜻에 맞춘 신앙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입니다. 18절의 고백을 보겠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 고백이 17절의 고백보다 더 위대한 고백입니다. 여러분, 이 신앙이 귀합니다. 죽을지라도 하나님만 믿는 신앙이 귀합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축복만 받겠다는 신앙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신앙입니다. 이것이 바로 순교자적 신앙입니다. 정말 멋쟁이 예수쟁이입니다. 이런 신앙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이 신앙이 귀합니다. 하박국이 이 신앙의 고백을 했습니다. 합3:17-18절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이 말은 '결과는 나하고는 상관이 없습니다. 결과는 하나님께 달린 것입니다'라는 고백입니다. 결과는 나하고 상관이 없고 우리는 오늘 하나님 한 분만을 온전히 섬기면 됩니다. 그러면 결과는 누가 책임져 주십니까?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우리는 2010년도에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 한 분만을 믿고 섬기면 될 줄로 믿습니다. 나머지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할/ ▶어떤 상이군인이 간증을 하기 위해서 단상에 섰습니다. 사회자가 그를 소개하면서 나라를 위해서 한쪽 다리를 다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상이군인이 단상에 서서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우리 조국을 위해 이미 몸과 마음을 다 바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내 조국은 내 몸과 마음 가운데 다리 한쪽만 받고 그 나머지는 내게 다 돌려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어야 하고 우리의 믿음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을 그때에 우리는 이미 우리의 몸과 마음을 다 주님을 위해서 바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주시고, 우리에게 건강 주시고, 우리의 모든 것을 다시금 다 되돌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덤으로 사는 인생입니다. 우리는 언제라도 우리 주님이 원하시면 주님을 위해서 기꺼이 내 시간, 내 목숨, 내 건강, 내 물질이라도 아낌없이 드릴 수 있는 마음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할/
⑹이들은 연합을 이룬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16-18절에 보면 '우리가, 우리를'이란 말이 무려 4번이나 나옵니다. 저들은 지금 세 사람이지만 '한 하나님, 한 소망, 한 믿음으로 연합'을 이루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공동전선이요, 연합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형제가 연합함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하고 감동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은 '함께 살고, 함께 죽고, 함께 행동하는 한 몸 한 마음이 진정한 신앙의 공동체'입니다. /믿/
⑺그들의 신앙의 결과는 무엇인가? ㈀풀무불 속에 기적을 산출해낸 주인공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을 증거했고, 또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진노의 불꽃 중에서 우리의 구원자가 되심을 나타냈습니다. 여러분, 이들의 하나님이 누구의 하나님이십니까?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믿/ 이 믿음을 가진 사람은 오늘도 풀무불 속에서 기적을 일으킵니다. /할/ 25절 '왕이 또 말하여 가로되 내가 보니 결박되지 아니한 네 사람이 불 가운데로 다니는데' 다니엘의 세 친구는 틀림없이 용사들이 묶었습니다. 그런데 불 속에서 세 친구를 결박시킨 끈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불에 타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극렬히 타는 풀무불은 다니엘의 세 친구들에게 오히려 도움을 주었습니다. 묶고 있던 끈을 다 태워 버린 것입니다. 그 외에는 다니엘의 세 친구를 조금도 해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실 때 우리가 당한 시련이 오히려 우리에게 도움이 됩니다. 우리를 해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어디서 구하셨습니까? 불 밖에서 구한 것이 아니라, 불 가운데서 구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들의 믿음을 통해 느부갓네살이 하나님을 인정하는 신관이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28절에 '느부갓네살이 말하여 가로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할/ ▶하나님을 인정합니다. '그가 그 사자를 보내사' 하나님이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극심한 시련을 맞도록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저 높은 보좌에 앉아서 '큰일 났네, 어떻게 하지? 불쌍하구나!' 이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그 시련 가운데 다니엘의 세 친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함께 하셨습니다. 경우에 따라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극심한 시련을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홀로 내버려두지 아니하시고 그 시련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손을 붙잡고 우리로 하여금 그 시련을 이기도록 보살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할/ '자기를 의뢰하고 그 몸을 버려서 왕의 명을 거역하고 그 하나님밖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그에게 절하지 아니한 종들을 구원하셨도다' 극심한 환난 가운데서 세 사람을 구해주셨다는 것입니다. 누구의 고백인가? 느부갓네살 왕의 고백입니다. 그러면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하고 있습니다. ▶조서를 내립니다(29). 여기 '그러므로'는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극심한 환난 가운데 있을 때 구원한 역사를 분명히 보았으므로'라는 말로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니'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말로 명령을 내리는 것보다 조서를 내리는 것이 권위가 있습니다. 더 분명하고 확실하게 명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조서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무릇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거든' 지금까지는 느부갓네살 임금 자신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 앞에 설만히 말했습니다. 여기 '설만히 말했다'는 말은 '하나님을 대항했다'는 말입니다. '누가 능히 내 손에서 너희를 건져내겠느냐?' 그랬던 느부갓네살이 이제는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하나님께 설만히 말하면 어떻게 한다고 했습니까? '그 몸을 쪼개고 그 집으로 거름터를 삼을지니'라고 했습니다. ▶오직 예수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는 이같이 사람을 구원할 다른 신이 없음이니라' /할/ ▶믿음의 세 영웅들은 어떤 축복을 받았습니까? 30절 '왕이 드디어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바벨론 도에서 더욱 높이니라'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주를 위해서 자기들의 높은 지위를 다 버렸습니다. 몸을 드렸습니다. 생명까지도 주를 위해서 아낌없이 바친 사람들입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오히려 저들을 더욱 높여주셨습니다. 반대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참소했던 갈대아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들은 쫄딱 망했습니다. /할/ 그렇습니다. 주를 위하여 헌신하고 충성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 주십니다. 우리 모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신앙을 본받는 참 행복한 교회의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2010년 1월 24일 대예배 설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