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알의 밀 알 신앙! (요 12:24-26)
한 다정한 아버지가 어린 아들과 씨름판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자기 힘으로는 아버지를 이길 수가 없음을 감지한 아들이 다섯 살짜리 여동생에게 좀 도와 달라고 소리를 치는데, 그 조그마한 애가 턱에다 손을 괴고 하는 말이 '오빠! 내가 무슨 힘이 있나?'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어린아이의 소리에서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줍니다. 여러분, 우리는 늘 힘이 없어 문제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이 함께 하면 작은 자도 힘이 있고, 낮은 지위도 힘이 있습니다. 어린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작은 사람도 없고, 낮은 지위도 없습니다. 누구나 하나님 안에 있기만 하면 작은 자는 작은 자대로 아름답고, 낮은 지위는 낮은 지위대로 아름답습니다. /할/ 여러분, 오늘 이 자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는 자리입니다. 그분이 능력주시면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능력으로 올 새해에는 여러분들의 삶의 현장에서 대박 인생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 ◀제목소개!▶
사람은 높은 자리에 앉아서 호령을 하고 다른 사람으로부터 대접을 받으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이러한 욕구가 인간의 본능입니다. 결코 악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도 으뜸이 되고자 하거나 크고자 하는 욕망을 부인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씀하자면 으뜸이 되려는 마음을 긍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으뜸이 되고 첫째가 되고자 하는 것은 좋지만 으뜸이 되려는 목적이 무엇이며 첫째가 되는 것이 무엇을 하려는 것이냐?' 그 의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남을 섬기기 위해 으뜸이 되고, 첫째가 되는 것은 선한 것이지만 자신이 섬김을 받고 영광을 받으려고 첫째가 되려는 것은 악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류역사상 섬김을 받으려고 첫째가 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괴롭히고 결국 역사에 악을 남기고 갔습니다. 예수님은 인류역사의 큰 변화를 가져온 혁명가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새로운 세계의 삶과 가치관의 변화를 체험하게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유명한 산상수훈의 말씀을 잘 압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가 천국을 소유하고,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고, 온유한 자는 승리하고, 의에 주린 자들이 배부름을 얻고,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확실히 주님의 진리는 이 세상의 것들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세상의 가치를 버릴 때 하나님이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매일같이 깊은 관심의 대상을 누가 크냐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가정에서 거리에서 직장에서 나누는 대화를 가만히 들어보면 '누가 크냐? 누가 최고냐? 학급에서는 누가 일등을 하고 반장을 할 것인가?' 이것 때문에 치맛바람이 일어납니다. '직장에서는 누가 빨리 높아질 것이냐?' 이것 때문에 로비 활동이 일어납니다. 기업들은 기업대로 '누가 랭킹 일 위냐?' 하는 논쟁이요 싸움입니다. 우리 인간의 반만년 역사는 '화살에서 핵무기까지 한마디로 누가 크냐?'는 싸움입니다. 이 경쟁으로 발전도하고 또 전쟁의 비극도 가져옵니다. 이러한 욕망을 예수님 당시 제자들에게도 나타납니다. 오늘 본문은 막10:32-45절에도 나옵니다. 예수님은 지금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입니다. 이 길은 죽으러 가는 길입니다. 지금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인류를 섬기기 위해 최후의 길을 가시면서 말씀하신 대화입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들이 나를 죽이기로 결의하고 이방인들은 나를 능욕하고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다. 그러나 3일 만에 살아난 것이다.' 지금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예고하면서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명절을 맞이하려 가십니다. 이때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께 나아와 말을 합니다. '주여! 우리의 구하는 바를 들어 주소서' 주님이 '그게 무엇이냐?'고 하자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이 말씀을 마태복음에서 그의 어머니 살로메가 말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마가복음에서는 야고보와 요한이 말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살로메는 예수님의 이모가 되므로 정치적 교섭을 한 셈입니다. 한마디로 이들의 부탁은 키워달라는 청탁입니다. 우의정과 좌의정에 앉혀 달라는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들으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불 신앙과 어리석음을 한탄하십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지금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하여 가시는 착잡한 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음을 영광으로 봅니다. 예루살렘에 가서 십자가에 죽게 될 때에 좌우 편에 강도가 죽게 됩니다. 지금 야고보와 요한은 이 사실을 모르고 헛된 영광을 구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예수님이 답답하셨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 앞에 나와 기도하면서 주님과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구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당시 예수님의 생각과 제자들의 생각이 전혀 달랐습니다. 드디어 예수님의 대답은 그 요구를 들어 주마 하지 않으시고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을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고 하십니다. 쉽게 말하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조용히 말씀하시기를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여러분, 이 말씀 속에는 가치관의 일대 혁명입니다. '첫째가 되려면 뭇사람의 끝이 되고,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이 말씀은 세상을 뒤집어 놓은 가치관입니다. 확실히 성경은 역설적인 면이 많습니다. 주님은 또 '한 알의 밀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십니다. 죽음으로 살고, 버림으로 얻고, 섬김으로 보람을 삼는 정신으로 예수님을 사셨습니다. ▶1347년 도우버 해협 양쪽에 두 나라가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이 치열한 그 유명한 백년전쟁 이야기입니다. 1년 가까이 영국은 프랑스의 북부도시 '칼레'를 맹공격했습니다. 그러자 그 마을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 결국 백기를 들고 항복 사절을 영국에 보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은 그 동안 끝없이 맹렬하게 저항하던 칼레 마을과 주민들 전체를 몰살시키려고 했습니다. 항복 사절은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로 갔습니다. 그리고 자비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영국 왕은 그 동안 수많은 영국 군사가 희생된 것의 보상으로 전멸시키려고 하자 항복 사절들은 결사적으로 매달려 애원을 하니 왕의 마음이 차츰 누그러지면서 이렇게 명하였습니다. '좋다. 칼레 시민들의 생명은 보장하겠다. 그러나 누군가는 그 동안의 어리석은 반항에 대해 책임을 져야만 한다. 칼레의 시민을 대표하는 6명은 교수형에 사용할 밧줄을 목에 걸고 맨 발로 걸어 내 앞에 나와야 한다.'는 조건부 수락입니다. 시민들은 기뻐할 수도 슬퍼할 수도 없었습니다. 누군가 6명이 그들을 대신해 죽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 때 용감하게 나선 6명이 있었습니다. 모두 그 도시의 핵심인물이며 축복을 누리던 부유한 귀족이었습니다. 칼레에서 가장 부자인 '위스타슈 생 피에르'가 가장 먼저 희생을 자원하자 뒤이어 '장 데르, 자크 드 위상, 장 드 피에네, 피에르 드 위상, 앙드레 당드리에'가 목에 밧줄을 매고 앞으로 나왔습니다. 죽기를 각오한 맨 발이었습니다. 그런데 처형하려던 마지막 순간 에드워드 3세는 임신한 왕비의 간청을 듣고 그 용감한 시민 6명을 살렸습니다. 550년이 지난 1895년 칼레시는 조각가 '로댕'에게 그 용감한 여섯 명의 동상을 세우라고 했습니다. 이 작품이 오늘까지 남아 있는 로댕의 '칼레의 시민'이라는 동상입니다. 비장한 슬픔으로 얼룩진 이 조각상은 한 알의 밀 알이 떨어져 썩으면 많은 열매를 맺게 해 준다는 교훈을 강하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밀 알을 기억합니다. 영원히 기억합니다. 썩어지는 밀 알은 희생하는 밀 알입니다. 썩어지면서 그 속에서 새 생명이 나와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달팽이 중에 어떤 달팽이는 속에 알을 깝니다. 그 속에서 새끼 달팽이가 나와서 어미를 파먹으며 자라납니다. 다 자라면 어미 달팽이를 다 파먹은 것입니다. 어미를 잡아먹고 생존합니다. 썩어지는 밀 알은 희생하는 밀 알입니다. ▶노벨상은 1901년 시작되었습니다. 첫 번째 노벨 평화상을 수상 받은 사람은 스위스의 '헨리 듀넌트'입니다. 그는 그 유명한 적십자사의 창립자입니다. 그는 은행장이었습니다. 그는 나폴레옹 황제를 만나 사업을 크게 확장시키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나폴레옹을 만나기로 약속한 시간에 공교롭게도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그는 전쟁터로 나간 나폴레옹을 찾아갔습니다. 그 곳에서 전쟁의 죽고 죽이는 피 비릿내 나는 죽음의 지옥 같은 현장을 보았습니다. 그는 수많은 시체들과 수많은 피투성이 환자를 보았습니다. 그는 생명의 허무함을 느꼈습니다. 그는 현장에서 부상자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황제를 만나 큰 사업을 하겠다는 꿈을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꿈을 꾸기 시작했습니다. '이 땅에 폭력과 전쟁이 없어져야 한다. 그리고 부상당한 사람은 어떤 일이 있어도 도와야 한다.' 그는 뜻 있는 친구들과 함께 부상자 돕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그 유명한 적십자사를 창설하고 적십자사의 한 알의 밀 알이 되었습니다. /할/
▶오늘 주님은 한 알 신앙의 절정을 섬김에서 결론을 짓고 계십니다. 26절 하 반절에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섬김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①섬기는 생활은 영광스러운 주님의 제자의 삶입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의 제자입니다.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생각으로 살려고 하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으뜸이 된다든지 제일이 되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으뜸이 될 때 분명한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남을 섬기려는 철학입니다. /믿/ ▶하루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을 찾아서 그 손에 하늘나라의 영광스러운 팔찌를 걸어주고 오라고 천사를 세상에 보내었습니다. 천사는 아름다운 손을 찾기 위해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나 좀처럼 마음에 드는 아름다운 손을 발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천사는 숲 속에 있는 한 외딴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그 집안에는 세 딸이 있었습니다. 천사는 자기가 찾아온 목적을 밝혔습니다. '저는 하늘나라 천사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을 찾아서 그 손에 이 하늘나라의 팔찌를 걸어주기 위해서 찾아왔습니다.' 그 말을 듣고서 첫째 딸이 얼른 나서면서 말하기를 '천사님, 제 손을 좀 보세요. 얼마나 예쁜 손입니까? 제 손은 예쁠 뿐만 아니라 이 손으로 늘 화원의 꽃을 만지기 때문에 제 손에는 아름다운 꽃향기도 난답니다.' 그러자 둘째 딸이 질세라 '천사님, 제 손도 좀 봐주세요. 얼마나 깨끗한 손입니까? 저는 제 손에 먼지만 묻어도 곧 흘러가는 맑은 시냇물로 제 손을 깨끗하게 씻는답니다.' 이번에는 셋째 딸이 말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셋째 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다소곳이 한 자리에 서 있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의아스럽게 생각하면서 셋째 딸에게 다가가서 물었습니다. '자매님, 자매님은 왜 아무 말이 없습니까? 자매님에게는 손이 없습니까?' 그러자 셋째 딸은 얼굴을 붉히면서 말하기를 '천사님, 제 손은 보잘 것 없기 때문에 천사님에게 보여드리기가 민망스럽습니다. 저는 날마다 이런 저런 허드렛일을 하기 때문에 손이 너무 거칠어졌습니다. 찬물에 빨래를 하다 보니 손이 얼어서 터진 곳도 있습니다.' 그 말을 듣던 천사의 얼굴이 갑자기 환해졌습니다. 그러더니 그 천사는 얼른 자기가 가지고 온 하늘나라의 팔찌를 꺼내서 그 셋째 딸의 손목에 걸어주면서 말하기를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며 섬기는 손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입니다.' 그렇습니다. 섬기는 손이 아름다운 손입니다. /할/ ②섬김의 정의가 무엇인가?
섬김은 '시중들다, 붕사 하다, 돌보다, 제물을 드리다, 예배하다, 엎드리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섬김인가? ⑴예배가 섬김입니다. 롬12:1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예배는 섬김, 봉사라는 단어입니다. ⑵직분대로 순종하는 것이 섬김입니다. 교회에서 받은 직분 따라 열심히 순종하는 것이 섬김입니다. 목사가 하는 일이 따로 있고, 권사, 집사, 평신도가 하는 일이 분명히 따로 있습니다. 집사란 '봉사하다.'의 '디아코니아'란 말을 씁니다. 그러므로 집사님들은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섬기는 섬김이 직분입니다. ⑶드리는 삶이 섬김입니다. 먼저 자신을 주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몸을 드리고, 재능을 드리고 물질도 드리는 것입니다. ⑷하나님의 일을 돌보는 봉사가 섬김입니다. '섬기다.'의 원어 속에는 '치유하다, 고치다.'라는 뜻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봉사는 '예수님을 통하여 병든 자를 고치며, 가난한자, 천한 자, 소외된 자, 고통 받는 자, 억눌린 자에게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성도는 버림받은 자들을 찾아 위로해 주는 것이 바로 오늘 섬김의 정의입니다. 우리 주님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을 준 것이 바로 주님께 대접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⑸겸손함으로 섬겨야 합니다. 여러분, 진실한 봉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서도 자신을 낮추는 것입니다. '섬기다.'의 히브리어의 '샤하'는 '자신을 굽히다. 숙이다. 잠기다'란 뜻입니다. 빌2:3절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예수님을 섬기는 자의 본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누가 크냐는 다툼이 있은 후 다락방에서 친히 겉옷을 벗고 수건으로 허리를 동인 후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유대인들의 신발이란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샌들모양으로 그 당시 신발문화가 발달하지 못했으므로 노끈으로 신바닥을 발에 맨 것이니 밖에서 들어오면 먼지투성입니다. 그리하여 집집마다 문 앞에 물통을 놓고 종들이 주인과 손님의 발을 씻기는 것입니다. 다락방에 모인 예수님의 일행은 하인이 없었습니다. 누가 크냐는 변론 때문에 아무도 발씻을 물에나 수건을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손수 준비하시고 친히 하인이 되셔서 섬김의 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섬김의 본을 받아야 합니다. 서로 섬기는 종의 자세로 모인 곳에는 진정한 평화가 있습니다. 우리 참 행복한 교회 온 성도들이 섬김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섬기는 자의 권위는 하늘이 준 것이며 남을 지배하는 권위는 인간 정욕의 산물이요, 교만입니다. 이것이 무너지는 날이 옵니다. 수치를 당하는 날이 옵니다. 그러나 섬기는 종의 권위는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제자의 영광이랍니다. /믿으십니까?/아멘!/ ⑹한 알의 신앙, 섬김의 극치는 충성입니다. ▶6,25때 있었던 숨은 이야기입니다. 맥아더 장군이 일본에서 6,25전쟁 소식을 들고, 동경에서 비행기로 한국에 날아왔습니다. 와 보니까 이미 한강인도교는 파괴되어 끊어졌습니다. 인민군이 이미 서울에까지 밀려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피난 가느라 혼란 중이었습니다. 그때 끊어진 인도교 끝에서 총을 들고 보초를 서고 있는 한 사병이 있었습니다. 그 병사에게 맥아더가 물었습니다. '왜 그렇게 서 있느냐?' 사병이 대답하기를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언제까지 그렇게 서 있을 작정이냐?'고 물으니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을 때까지'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미 지휘계통은 무너져 버렸습니다. 지금은 극심한 혼란중이고 모두가 살겠다고 피난을 떠나가고 있습니다. 그때 맥아더가 또 말하기를 '혼자 그렇게 서 있으면 반드시 죽는다, 그래도 그렇게 서 있겠느냐?'고 물으니 '그대로 서 있어야 한다.'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맥아더가 그 병사의 순수하고 우직한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맥아더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땅에 이런 병사가 있다니 이 나라는 희망이 있다. 이 나라는 반드시 회복시켜야 한다.'고 말하고 참전의지를 새롭게 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동적인 일화입니까? 단 한사람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감동도 받고 실망도 받게 됩니다. 한사람을 통해서 받게 되는 감동은 순간 감동으로 끝나지 않고 큰일을 이루게 하는 계기도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늘 한사람을 중요시합니다. 나 한사람이 중요합니다. 내가 바로 서면 전체가 바로 서게 됩니다. 내가 변하면 전체가 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을 살면서 감동 주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 즉 한 알의 밀 알 정신이요, 섬김의 생활입니다. /아멘!/ 주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얻느니라' 그렇습니다. 한 알의 밀 알이 되었던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 이 땅에는 평화가 있고 안정이 있고 부강이 주어졌고 이런 잠재력을 가진 나라를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할/
③섬김은 오히려 인생은 행복하게 해 줍니다. 섬기는 생활은 이타적 행동을 말합니다. 섬기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자는 섬김을 받으려 하고 겸손한 자는 남을 섬기게 됩니다. 그런데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을 보면 섬김의 범위가 넓고 깊었습니다. 섬김의 범위가 넓은 것은 섬김의 대상이 제한되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 가까운 사람을 잘 섬깁니다. 자기보다 잘난 사람, 지위가 높은 사람을 잘 섬깁니다. 그러나 자기 보다 더 가난하고 신분이 낫은 사람은 섬기지 않습니다. 슈바이처에게 '아프리카에서 행복하였느냐?'고 물을 때 '나는 봉사할 것을 찾았노라'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남을 위해 봉사하고 그 속에서 슈바이처는 삶의 만족을 얻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섬기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행복하시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 모두 섬기며 삽니다. /할/ 남편을 섬기고, 아내를 섬기고 부모형제를 섬기고 내 이웃을 섬기며 삽시다. 진정한 행복은 섬김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러나 여러분, 섬김을 받으려고 하는 순간 마음은 빈곤해지고 불평과 불만에 싸이게 됩니다. 가장 비참한 모임은 섬김의 정신이 없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오늘날 이 땅에 아름다운 역사의 유산을 남기고 간 사람들을 모두 다 섬기고 간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자기의 이익을 생각지 않고 남을 위해 살기로 하면 이 사회는 낙원이 될 것이며, 자기 명성을 생각지 않고, 국가에 봉사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지금 저 세종시 문제도 쉽게 될 것이며 정치나 사회가 안정될 것입니다. /할/ ▶성 프란시스는 부유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가난한 자를 섬겼습니다. 어느 날 말을 타고 지나가던 중 보기에도 참혹한 문둥이를 만났습니다. 그는 마음에 뜨거움을 받아 말에서 내려 그 문둥이를 껴안았습니다. 그런데 그 품에 안긴 얼굴을 보니 그 얼굴이 예수님의 얼굴이었답니다. 그때부터 성 프란시스는 성자의 길을 걸어갔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섬김의 원리를 한 알의 밀 알로 비유하셨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동기는 20절의 말씀대로 유월절을 당하여, 예루살렘에 예배하려 올라갔던 헬라사람 두어 명이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교훈을 듣고자 했습니다. 여기 헬라 사람이란 헬라인으로 개종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헬라에 사는 헬라 파 유대인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분의 교훈을 듣기를 원했는데 직접 예수님께 청원하는 것은 체면상 예의가 아님을 알고 빌립에게 부탁했는데 빌립도 안드레에게 물어본 후에 예수님께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들에게 한 알 신앙을 심어주고 계십니다. ▶24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십니다. ⑴여기서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은 누구를 의미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지금 자연법칙을 강의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땅에 떨어져 죽으셔야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어야 많은 열매를 맺듯이 예수 그리스도가 택한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죽으셔야 죄로 죽었던 수많은 자들이 예수님의 피 값으로 죄를 사함 받고, 구원을 얻게 되는 진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멘!/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참 밀 알이시며 가장 많은 열매를 거두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수많은 영혼들이 죽음에서 살아날 것을 이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2,000년 전에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셨습니다. 창2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물을 드린 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16-17절에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제게 큰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여기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란 말씀은 아브라함의 가문에서 오시는 메시아(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수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고 영적으로 아브라함의 자녀가 된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어지는 한 알의 밀 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십자가의 죽음이 가까이 옴을 아시고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면서도 이 세상에 오셔서 철저히 자기를 부정하고 종으로 사신 예수님을 깊이 이해한 사람입니다. 빌2:6-11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여러분,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그냥 한 알 그대로 있는 것을 우리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일 년 후에도 아니 십 년 후에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나 땅에 묻혀 썩어져 싹을 피우고, 입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은 자연의 섭리입니다. 많은 결실의 비결은 땅에 묻히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한 생명을 밀 알로 섬겼습니다. 그랬더니 그때부터 새 생명이 시작되었습니다. 부활, 승천,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감림 사건과 수천 명의 그리스도인의 제자가 유다와 사마리아 수리아, 안디옥, 고린도, 에베소, 아시아 로마 세계 어느 곳에나 복음이 전파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⑵한 알이 썩어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내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자존심을 포기하고, 지식을 포기하고, 나의 경험과 연륜을 포기하고, 교만을 포기하며, 혈기를 포기하란 말씀입니다. 그러면 부딪칠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이 섬김의 원리입니다. /할/ 섬김의 원리는 이토록 위대합니다. 이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음으로 예수님을 믿은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의 길로 인도함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할/아멘!/ ⑶죽어야 사는 진리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 사람과 일하시는 원리입니다. 또한 죄의 노예로 사는 죄인이 구원받아 사는 원리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쓰임 받을 때는 옛 자아가 죽은 뒤인 80이 넘어서입니다. 약은 꽤와 술수로 세상을 살던 야곱이 하나님께 용납될 때는 얍복강에서 다리가 부러져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모든 능력과 술수를 포기할 때입니다. 베드로도 그렇습니다. 바울도 그렇습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죄가 죽는 경험을 하고 나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날마다 죽는다고 했습니다(고전15:31). 이제 우리도 바울처럼 살아야 합니다. 갈2: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또 갈6:14절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아멘!/
④섬김의 삶은 하나님 앞에 귀히 여김을 받습니다. 26절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섬김 신앙은 주님을 따르는 것으로 출발합니다. 요12-16장까지를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날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가르치실 때 계속 나오는 강조 점은 '나를 따르라'입니다. '너희들은 염려하지 말고 나를 따르라, 너희들이 나를 섬기고자 하느냐 나를 따르라, 나를 사랑하느냐 나를 따르라, 너희들이 천국에 이르기를 원하느냐 나를 따르라 내가 곧 길이니라'고 하십니다. ▶26절에 '따르라, 섬기다, 귀히 여기시리라'는 단어를 주목해 봐야 합니다. ⑴따르라! 이 말은 나를 따르며 배우라는 말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주님은 훌륭한 스승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많은 가르침을 베푸셨습니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이 주님의 가르침을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권세가 있음을 놀랐습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주님의 가르침에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그의 인격과 행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온전한 인격자였으며 그 행위를 가르침과 일치했습니다. 여기 따르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모범을 배우라는 말씀입니다. 만일 우리의 신앙생활이 예수님의 삶, 또 예수님의 인격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될 수가 없습니다. /믿/ '주여! 우리를 당신의 형상대로 살게 하소서' 우리의 기도의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또한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나는 죽음의 십자가를 질 테니 너희는 희생의 씨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마16:2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쫓을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주님을 따르는 길일까요? 먼저 '자기 부인'이 있어야 합니다. 진정한 자기부인이 무엇일까? 바클레이는 '자기를 부정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내 뜻보다는 주님의 뜻을, 내 유익보다는 주님의 유익을 따르는 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자기중심의 생활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생활의 지배원리와 그 이상으로 삼는 삶을 자기 부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사람은 십자가의 길을 온전히 갈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겸손하고 낮아져야 합니다. 교만하면 절대로 십자가 질 수 없습니다. 그 다음 '자기 십자가를 지고'입니다. 세상의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부모, 남편, 아내, 자식, 형제, 가난, 질병, 핍박 모든 것이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형태가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주신 것이라면 져야하고 그 잔을 마셔야합니다. 가정, 교회, 민족의 십자가도 기쁨과 감사로 져야합니다. 십자가는 사형 틀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죽으라.'는 말입니다. 기독교는 죽어야 사는 종교입니다. /아멘!/ 예수 믿는 자는 핍박도 달게 받아야 합니다. 딤후3: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고, 행14:22절에서도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는 이상하게도 예수 믿는 사람들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별히 이런 사람들이 가족일 경우 그 가족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게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 영생복락을 누리게 되는 것을 가장 방해하는 사람이 바로 사랑하는 가족일 경우가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런 가족들의 핍박을 아시고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10:36). 그런데 우리는 그들을 용서해야 하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마5:44절에 예수께서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어느 여 집사님이 너무나 힘들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늘 기도할 때마다 '주님! 너무 힘듭니다. 너무 힘듭니다.'라고 부르짖었습니다. 한 번은 꿈을 꾸었는데 자신이 커다란 십자가를 질질 끌고 힘겹게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마침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집사님은 예수께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주님! 주님은 목수 시잖아요. 이 십자가가 너무 무거워요. 그러니 조금만 잘라주세요.' 주님께서 빙그레 웃으시면서 잘라주셨습니다. 그래도 무거웠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주님께 더 잘라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집사님이 잘라달라는 대로 말없이 다 잘라주셨습니다. 어느덧 천국에 다다랐습니다. 이 집사님이 천국에 와서 보니 각 사람이 모두 십자가를 가지고 있었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십자가 크기에 따라 상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집사님의 십자가는 손안에 들어올 정도로 매우 작은 십자가였습니다. 그 순간 이 집사님은 깜짝 놀라 잠을 깼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는 중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좇을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이 생각이 나서 그 자리에서 회개했다고 합니다. /할/ ⑵섬기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섬기라는 말씀은 곧 예수님을 위해 봉사하라는 말씀입니다. 삶의 모든 동기와 목적이 예수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기 전 모든 사람들은 삶의 동기와 목적이 모두 자기에게 있었습니다. 사람은 자기를 위해 살고 자기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봉사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이러한 삶의 중심을 자신에게서 예수님에게 옮기는 것입니다. /아멘!/ ㈁섬기라는 말씀은 명령에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섬김의 첫째 원리는 순종이요, 축복의 첫째 비결은 순종입니다. 순종을 잘해서 크게 축복 받은 아브라함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압니다. 여기서 말하는 순종은 이성적으로 납득이 가는 그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에 순종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명령이기 때문에 순종하라는 것이지 종이 주인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따르는 것을 결코 주인의 명령이 합리적이어서가 아닙니다. 주인의 명령이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믿/ ⑶귀히 여기시리라! 한마디로 구원의 은총입니다. 모든 봉사와 고난의 대가를 하나님께서는 하늘나라에서 보상을 해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 살면서도 귀히 여김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돌봐주십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이 붙잡아 주십니다. 하나님이 이루어 주십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8:28절에서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아멘!/ 이제 우리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제자요, 주님의 후사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소유권이 중요합니다. 행여 힘이 없어 약한 자가 있습니까?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내 일생의 소유가 내게 있지 않고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하나님께 소속된 것을 즐겨 사용하십니다. 참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견해가 아닙니다. 지적 동의도 아니고, 좋은 교회라고 착각하는 대형교회에 출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사시니 나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할/ 자기의 소유권을 분명히 고백하는 것이 참 신앙이요, 이 고백 속에 역사가 나타납니다. /믿/ 여러분,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우리를 귀히 여겨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작은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것이 되면 OK입니다. 아무리 낮은 지위라도 하나님이 사용하시면 빛이 납니다. 우리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잘 압니다. 그때 어린아이는 작은 자였습니다. 물고기와 보리떡은 가난한 자들이 먹던 음식으로 제일 천하고 낮은 것들의 상징이었습니다. 사건은 그 다음에 일어났습니다. 그것들이 어린아이에게 속했을 때에는 아무 의미가 없었는데 그것이 주님의 것으로 소유권이 변하고 주님이 쓰시니까 기적이 나타납니다. 열두 광주리가 먹고도 남았습니다. 오늘 우리는 섬김의 자세로 주님의 소유권에 합한 자가 되십시오. 오늘도 기적은 일어나고 홍해는 갈라지고 여리고성은 오늘도 무너집니다. /믿/아멘!/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쓰시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업도 문제가 아니요, 출세도 문제가 아닙니다. 막10:43절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여기서 '섬기는 자'는 집사(디아코노스)입니다. 장관도 목사도 섬기는 직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지위는 섬기는 자가 얻을 것이요, 죽은 후에도 길이 존경하고 추앙 받는 인물도 섬기는 자들입니다. 임금을 잘 섬겼던 사육신들은 오늘도 인물로 남아있습니다. 테레사 수녀가 인도 빈민굴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자에게 양식과 옷을 주고 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녀는 가장 위대한 여성으로 노벨 평화상을 받고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섬기라는 사명을 받은 자들입니다. 먼저 주님을 섬기고, 주의 몸 된 교회를 섬기고, 주의 종을 섬기고, 네 이웃을 섬기고, 자신을 섬기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얻은 지위는 누릴 때는 당당하나 잃어버리고 빼앗겨 버리면 비참하게 됩니다. 그것 때문에 죽기도 합니다. 그러나 섬기는 자의 지위는 빼앗아 갈 자가 없답니다. 여자는 늙을수록 천해질 수 있으나 늘 섬김의 자세로 사신 어머니는 언제나 우리에게 고귀합니다. 요부는 늙을수록 천해지나 한 남편을 섬겨온 아내는 세월이 흐를수록 소중합니다. 할 일 없이 늙는 성도는 천합니다. 그러나 인생을 섬기는 종으로 봉사한 성도들은 땅에서나 하늘에서 더욱 소중하게 여김을 받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름만 성도가 있습니다. 우리 참 행복한 교회는 절대로 이런 교인이 하나도 없어야 합니다. 섬기는 성도! 이런 성도들을 하나님께서 소중히 여기시고 그들에게 예비하신 하늘의 복이 쏟아질 줄 믿습니다. /아멘!/할/ (2010년 1월 17일 대예배 설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