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제를 판단하지 말라! (롬 14:1-12)
어느 목수가 대문에 빗장을 다는데 잘못하여 문 바깥 반대쪽에다 달았습니다. 주인이 화가 나서 "너는 눈도 없느냐?"고 호통을 쳤더니, 그 말에 귀가 거슬린 목수가 대꾸하기를 "눈 없는 사람은 바로 당신이요" 하며 윽박질렀다고 합니다.
화가 난 주인이 "내가 왜 눈이 없어" 그러자 목수 왈 "눈이 있으면 나 같은 목수를 쓸 리가 없지 않소?" ◀제목 소개!▶
바울이 본문에서 다시 교회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증거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의 존재특성 가운데 하나는 교회를 중심으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느냐 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도는 교회생활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성도를 세우며,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기능을 수행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교회가 별로 중요하지 않는 문제들로 인하여 서로 다투어 하나가 되지 못한다면 어떻게 세상에서 교회의 사명을 다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당시 로마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를 지적하면서 교회가 하나 되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는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교회에 들어와 교회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다른 종교를 믿던 사람들이 개종하여 들어온 사람들도 있었고,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 가지 문화적인 배경에서 여러 풍습들과 습관들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복음을 받아들였지만 각기 다른 문화의 옷을 입고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로마 교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것은 해야 하며, 어떤 것은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에 계속 직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자로 살아갈 때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에 대한 문제에 직면하였다는 것입니다.
14-15장은 '성경에서 특별히 금지했지만 명령하지 않는 어떤 의식적인 내용에 대하여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소위 헬라어 말로 '아디아포라'라고 하는데 교리 외에 곧 구원과 관계되는 것이 아니고 교리 외에 생활 속에 특별한 문제들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성경에서 보면 '이것은 이렇게 하면 안 되고, 저것은 저렇게 하면 안 된다'고 확실하게 말할 것도 없는 그런 것들이 많습니다.
또 어떤 것은 구약에는 이렇게 되어있지만 주께서 십자가로 완성하셨기 때문에 이제 그것을 안 지켜도 되는데 그것이 어떻게 되는가? 이런 난제들이 우리 신앙 생활 속에는 많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는 '먹는 문제'요, 둘째는 '날을 지키는 문제'입니다.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어떤 사람들은 먹어도 된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안 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날(안식일, 월삭)을 꼭 지켜야 된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지킬 필요 없다고 합니다.
모든 날이 다 주의 날이기 때문에 이제는 어떤 한 날보다는 모든 날을 주의 날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그 당시 로마 교회 안에서 말이 많았습니다. 당시 성도들의 분포도를 보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모였는데 이들은 흰색과 검은 색이 다르듯이 완전히 대조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정통적으로 어릴 적부터 율법을 엄하게 지키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예수 믿는 다음에도 율법주의를 고수하는 옛날 버릇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음식을 가려먹는 습관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정한 음식, 부정한 음식을 어려서부터 가려먹었기 때문에 예수 믿은 다음에도 그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고집하는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고기를 먹는 것은 죄다. 경건하게 살려면 채식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고기 먹는 성도들을 노골적으로 비난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생각하면 아주 우스운 이야기입니다. 지금 성도 중에 고기 문제로 이렇게 심각하게 갈등을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까? 당시의 배경을 모르면 오늘 본문의 내용이 실감이 안 갑니다.
당시 푸줏간에서 파는 고기들이 어떤 고기냐 하면 우상에 갖다 놓고 제사를 드린 소들입니다. 그 당시 우상 앞에 큰제사를 드릴 때는 소를 수십 마리씩 잡아 제사 지내고 끝나고 나서는 조금 먹고는 부하를 시켜서 팝니다. 그러니까 우상에 제사 드린 고기가 판을 친 때입니다. 그래서 경건주의 유대인들은 그런 우상에 제물 된 고기는 먹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성도들, 이방인들은 그들을 가리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 왜 시시콜콜 율법을 따지느냐? 아직도 저들의 믿음은 멀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 문제를 신약에 와서 베드로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행10장에 보면 베드로가 점심시간이 다 된 12시가 되어 지붕 옥상에 올라가서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아마 "하나님! 하나님의 뜻대로 전도할 수 있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아래층에서는 음식 준비를 하고 배가 고플 때입니다. 그런데 기도하는데 비몽사몽간에 하늘에서 보자기 하나가 내려옵니다.
들여다보니 네발짐승, 날짐승, 곤충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먹을 수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고 마구 섞여있는데 하나님께서 "베드로야 일어나서 저것을 잡아먹어라."고 하십니다.
그러자 10절에서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경건치 못한 것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15절에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꺼림칙해서 못 먹었습니다. 세 번씩이나 이 말씀을 하시고는 보자기가 하늘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보고 '참 희한한 일이다. 이것이 무슨 일인고 도대체 하나님께서 그런 것을 잡아먹으라고 하실 리가 없는데 왜 그러실 까?' 하고 있을 때 바깥에서 "여기 시몬 베드로란 사람이 있습니까?"
그때 성령이 감동하시기를 "나가 보라. 이방 사람이 아마 너를 청하러 왔을 것이다. 너는 의심치 말고 따라가라"는 음성입니다. 그래서 나가보니 정말 고넬료라는 군대 장관이 보낸 사람들이 대문 앞에 서있었습니다.
이 고넬료는 로마사람이요 군인장교로서 유대인들이 제일 미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일정 때로 말하면 고등계 형사가 찾아 온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들이 온 것입니다.
그때 베드로는 성령의 깨달음이 왔습니다. "아하 조금 전에 구불구불거리는 것, 못 잡아먹는 그것이 딴 것이 아니라 바로 이방인이었구나."
유대인들은 그 당시 '이방인, 죄인(창녀), 세리'를 제일 싫어했습니다. 이방인들하고는 밥도 안 먹고 말도 안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구약에서부터 유대인들이 이방인들과 사귀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왜 기뻐하지 않습니까? 그들은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을 대적하는데 그것을 본받지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할/
그 날 베드로는 성령이 깨닫게 해 줌으로 "아! 그것이 아니구나!" 생각하고 이방인인 고넬료 집에서 부흥회를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여기 온 것은 유대인들이 알면 깜짝 놀랄 일이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셔서 내가 왔다"고 했습니다.
그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베드로도 깜짝 놀랐습니다. 44-45절에 보면, "베드로가 말씀을 전할 때에 성령이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부어주심으로 인하여 놀라니 이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을 들었음이라!"
베드로가 성령의 도우심으로 깨달았습니다. '아! 하나님께서는 이방인과 유대인들을 구별하시기 않으시는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자유 함을 얻었구나!' 그때로부터 베드로는 전도하는 데도 자유 함을 얻었고, 먹는 문제도 자유 함을 얻었습니다.
▶1절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본문은 헬라어를 따라 번역하면 '여러분은 논쟁이 되는 부분에 대하여 판단하지 말고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용납하십시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 번역에 특히 '의심하는 바'라는 말은 '논쟁되는 문제들'이라는 뜻입니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문제를 '아디아포라'라고 하여 이 뜻은 '중요하지 않는 문제' 또는 '어떻게 하든 상관이 없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복음의 본질과 관계없는 비본질적인 것이며, 교리문제가 아니고 양심의 자유에 속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로마교회에 있었던 문제는 '고기를 먹는 문제, 날짜를 지키는 문제' 등입니다. 당시 유대교에는 먹을 수 있는 고기와 먹을 수 없는 고기를 정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당시에는 이교도의 신전에 바쳤던 좋은 고기가 싼값으로 시장에 나왔을 때 어떤 사람은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먹었고, 또 어떤 사람은 먹지 않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그 고기가 신전에 바친 것인지 바치지 않은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기 때문에 아예 채식만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믿는 자들 끼로 서로 비판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믿음의 연약한 자'는 진리를 깊이 깨닫지 못한 어린 신앙(초 신자)을 가리킵니다. 신앙이 어린 사람들은 가끔 엉뚱한 소리를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도 하고 이것저것 부정적으로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라고 한 말은 '믿음이 앞선 사람이 용납하고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아직 그들의 신앙이 어리기 때문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 이것저것 호기심으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아직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로 함으로 비판하기보다는 가르쳐줘야 하고 바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너희가 받되'라는 말로, 이 말은 영어로 '받아드린다. 영접하다'는 의미로 '받아드리는 마음의 문이 언제든지 열려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현대인들에게 가장 부족한 것 중에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이웃끼리 서로 담을 높이 쌓고 외면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네 이웃에 대하여 마음에 문을 활짝 열고 받아드리는 자세가 절대 중요한 줄 믿습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세상 사람들과는 뭐가 달라도 달라야 합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을 용납하고 이해합시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안에서는 누구 나가 한 형제자매이기 때문입니다. /할/
또 용납한다 할지라도 '그의 의심하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좀 신앙이 앞섰다고, 하나님의 말씀을 좀 안다고, 기도 좀 한다고 초 신자들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권면입니다.
다는 아니지만 대형교회에는 장로님들과 권사님들이 양 무리를 돌보아야 하는 자리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 사명을 망각하고 목에 힘을 주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이래서는 안니 됩니다. 교회 직분은 군림하는 자리가 아니라 섬김의 자리요 봉사의 자리인줄 믿습니다.
⑴조롱하는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사람은 기분에 살고 기분에 죽습니다. 조롱받을 때 마음에 상처가 큽니다. 다른 사람을 조롱하는 것도 죄가 됩니다. 남을 존중하는 태도야말로 사랑에 덕목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⑵멸시하는 태도도 버려야 하고, ⑶이해하려는 자세가 절대 필요합니다. /할/
▶2절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당시 로마 교회는 이러한 문제로 인하여 교인들 사이에 갈등이 많이 생겼습니다. 어떤 신자들은 이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먹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성도들은 우상에게 바쳐졌을 것이라고 하는 이유에서 양심상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로 무엇을 먹어야 하고, 안 먹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로 커다란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려서는 약한 채소만 먹다가도 성년이 되면 무엇이든지 먹어도 소화를 잘 시키는 성년에 비유>한 말로, 믿음이 강한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 믿고 새 사람이 되어 변화 받은 성도입니다. 믿음의 확신이 있는 사람입니다. 말씀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입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제대로 아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에 외치긴 말씀이 "내가 다 이루었느니라."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율법을 다 완성하셨습니다.
갈4:5절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롬3:28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사도 바울은 롬14장 끝 부분에서 이 문제를 결론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했습니다. 또 갈5;1절 한 절만 더 보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의 '채소를 먹는 신앙인'은 누구인가? 아직도 율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자들입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다니- 우상숭배에 참예하는 것이 되지 않겠는가?" 염려하는 사람입니다. 안식일 교인들은 레11장에 금기된 음식을 지금도 먹지 않는 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죽으셨는가를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모든 것을 완성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주님의 십자가위에서 마지막 말씀을 한번 생각해 보자! <내가 다 이루었느니라.> /할/
우리는 이제 율법의 멍에에서 참 해방을 얻은 잡니다. 그래서 주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선언하셨습니다.
▶3절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본문에서 믿음이 강한 자와 약한 자가 서로 범하기 쉬운 두 가지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①먹는 자가 먹지 않는 자를 신앙이 약하다고 업신여겨 내어쫓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②먹지 못하는 자는 자신만이 완벽한 믿음을 가졌다고 하여 먹는 자는 불 경건하니 이단자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서로 업신여기거나 비판하지 말라고 권면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먹는 자나 먹지 않는 자,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용납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동생을 미워하는 형이 있습니다. 형의 생각에는 동생은 못된 놈입니다. 그러나 아버지께는 소중한 아들이므로 형이 동생을 업신여길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눈에 거슬린다고 하나님이 사랑하신 자를 미워하거나 정죄하거나 판단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제 4절에서 판단할 자가 누구인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4절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판단할 자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그 권한을 가지고 계십니다. "남의 하인" 하인은 종을 묘사한 말로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하인입니다.
여기 하인이란 사회적인 천한 종의 개념과는 달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따르는 하인을 말합니다. 철저한 청지기 적인 신앙을 말합니다. 가라고 하면 가고, 서라고 하면, 서는 신앙, 이러한 하나님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냐?'는 것입니다.
판단하는 권한은 주인이신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하인을 세우거나 버리는 것은 주인에게만 있는 것처럼 제 삼자가 먹고 마시는 음식으로 인하여 성도간을 서로 비판, 비평,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5절 "혹은 이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사도 바울은 먹는 문제에서 날, 즉 안식일 문제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날은 이레 중 첫날인 주일이요, 저 날은 이레 중 제 칠일 안식일(토)입니다.
당시 로마교회만이 아니라 초대교회가 공통적으로 안고 있었던 문제이기도 합니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주일에 예배드리는 것이 정착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에서 개종한 사람들은 안식일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이후에 사흘만에 부활하신 날, 즉 안식 후 첫날에 예배를 드렸고 이 날을 더 중요하고 거룩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이 다 하나님을 섬기는 날인데 왜 특정한 날을 다른 날보다 더 중요하고 거룩하게 생각해야 하느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당시 로마 교회가 안고 있었던 문제였습니다. 이 일로 인하여 교회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분열하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주일 지키는 문제와 안식일 지키는 문제가 대립됩니다. 유대교에서는 성도들은 계속해서 모세의 율법대로 지금의 안식일을 지켜야 구원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안식일 교회는 지금도 토요일 날 예배를 드립니다.
다른 성도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 주일을 지키자'고 합니다. 우리 개신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주일의 첫날인 주일을 지킵니다.
행20:7절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저희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안식일 주일날에 특별히 주님을 경배하고 나머지 날을 잃어버리고 생활하지 말고 일주일 내내 마음에 구주 예수를 모시고 신앙생활을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나의 전 생애는 주의 것이다. 내 모든 날은 주의 것이다.> 일주일 전체를 주님께 다 바치는 그런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6-7절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 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6-8절을 보면 강조한 말씀이 있습니다. '주를 위하여'라는 말이 다섯 번이나 나옵니다. 이것은 '주께 대하여, 주를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란 뜻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무엇을 하든지 그 동기가 주를 위하여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또 그 목적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10: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6-7절은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믿음이 강하여 모든 음식을 거리낌 없이 먹는 자도, 또 믿음이 약해서 고기를 먹지 않는 자도, 다같이 주를 위하여 결정하고, 주를 위하여 사는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 양심의 표준은 <날짜나, 먹고 마시는 의식이 아니라 곧 날마다 주님을 위하여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믿/
하나님께 감사하며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것 또한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님을 더욱 놀이기 위하여 먹지 아니하니 하나님께 감사할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인 들은 이 땅에서 오직 감사밖에 없습니다. 이 땅의 소망이 아니라 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 삼고 살아가니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뿐 아니라 이 땅에 살면서도 예수님 안에서 참 자유를 주셨고, 지금 환경이 어렵다 하더라도 종국에는 아름다운 선으로 이루어 주실 것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믿/
7절의 말씀은 우리 모든 신앙인은 한마디로 이 땅 위에 삶이 오직 주를 위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성도가 자기를 위하여 살려고 하는 자는 믿음이 떠난 자입니다. 사업을 해도 주를 위하여 하십시오, 우리의 삶과 죽음은 나의 생사화복은 주관하시는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맡기고 살아야 합니다.
▶8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사도 바울의 이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하고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할/ 우리가 예수 믿기 전에는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위하여 살았지만, 이제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어야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고전6:19-20절에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게 무슨 말씀인가? 우리 몸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피로 값을 주고 사신 몸이므로 이제 우리 것이 아니고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의 양심으로 살고, 이웃을 사랑하며 잘 살 때, 전도가 잘됩니다. 죽는 것도 잘 죽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한 시골교회에 신앙이 좋은 장로님이 그만 사적인 생활고로 참지 못하고 자살해 버리자 교회가 쑥대밭이 되어버렸습니다.
죽음도 잘 지켜야 합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는 말씀을 쉽게 표현하면 '주께 코가 꿴 사람, 벌써 주님께 위탁해버린 존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8절의 말씀을 선언하기 이전에 7절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든지 자신을 위하여 사는 자가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는 이유를 밝히는데 이것이 곧 '주를 위하여 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위하여!> 참 좋은 말입니다. 우리가 만찬석상이나 회식하는 자리에서 보면 서로 잔을 부딪치면서 외치는 소리가 있는데 <위하여!>라는 구호입니다.
어떤 목적을 향하여 함께 나아가기 위해 서로의 마음을 하나로 이끌어내기 위한 구호로 힘차고 의미가 함축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위하여!> 이 말은 한 개인을 위한 말일 수도 있고 집단이나 크게는 한 나라를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위하여 살아가는 존재들입니다. 사람을 위하든 돈을 위하든 권세를 위하든 쾌락을 위하든 아니면 주님을 위하든 무언가를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치게 마련입니다. 나름대로 삶의 목적과 방향을 정해놓고 그것을 향해서 열심히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은 변하고 사라지고 쇠하여 집니다. 변하지 않는 것 하나가 바로 주님을 위한 삶입니다. 보상이 있고 영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위해 살 것인가가 항상 분명해야 합니다. 더군다나 우리 믿는 사람들일수록 이 삶의 목적과 방향이 더 뚜렷하고 확실해야 합니다.
삶의 목적이 분명한 사람들에게 중요한 특징이 하나가 있는데 그 목적이 무엇이냐에 따라 삶의 우선순위가 달라집니다. 우선순위가 달라지면 그 인생의 방향도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치도 없는 일에 자신의 삶의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게 되면 그 인생 역시 별로 가치 없는 인생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래서 삶의 우선순위가 분명해야 합니다.
주님은 마6: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고 바울은 본문에서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한다"고 했습니다.
"주를 위하여 죽나니" 성도가 주를 위하여 죽는 죽음을 순교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12제자는 다 순교를 당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도 순교를, 주기철 목사님도 순교를 했습니다. 순교의 신앙은 귀한 것입니다. 천국에는 순교를 당한 성도들의 별실(특실)이 있다고 스펄전은 말했습니다.
본문 속에서 우리는 바울의 감격한 어조를 찾아봐야 합니다. 뭡니까? '우리'입니다. 우리 안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오늘 본문을 읽으면서 <아! 목사님, 아! 전도사님, 장로님, 권사님!> 그러는데 아닙니다. 우리 모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선택의 문제가 아닙니다. 또 내가 인정하고 안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결정된 운명입니다. /믿/
예수 믿는 사람 모두는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신을 위해 죽는 자가 없으며,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살아야 합니다.' /믿/ 이 일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입니다.
본문에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명백히 못 밖아 놓았습니다. 주의 것이라는 말은 주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세 가지 원리에서 우리가 주의 것입니다.
⑴창조의 원리입니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조하셨지만 인간은 친히 하나님께서 손으로 빚으셔서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⑵구속의 원리입니다. 고전6:19-20절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샀기 때문에 주님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⑶하나님의 주권으로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의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하나님이 자녀로, 하나님의 소유로 삼았다는 말씀입니다.
사43:1절에서도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이미 값으로 산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값을 지불하시고 너는 내 것이라고 소유권 이양을 하셨습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알고 계십니까?
▶나는 이제 주님의 것이 되었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내가 아니요 주님이라는 고백입니다. /할/
▶9절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목적은 우리를 그 피로 값 주고 사서 구원시켜주시고 주를 위하여 살고, 주를 위하여 죽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우리 죄 만을 씻어주기 위해서가 아니고 우리를 자신의 소유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는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믿습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습니다. 이 고백이 바로 <나는 이제 주님의 것입니다>라는 의미입니다.
고후5:15절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10-12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느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네 형제로 판단하지 말라." 숨어 있는 인간의 본성 가운데 하나가 남을 판단하는 성품입니다. 남을 판단하면 상대방에서 헤어나지 못할 상처를 입힐 수가 있습니다. 그 자신의 인격에 흠집을 낼 수도 있습니다. 심판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심판 주는 하나님이십니다.
시50:6절 "하늘이 그 공의를 선포하리니 하나님 그는 심판장이심이로다."
시7:8절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사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내게 있는 성실함을 따라 나를 판단하소서."
심판장은 오직 우리 주님뿐이십니다. 요5:22절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딤후4:1절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우리 모두가 서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또 심판은 개별적인 것입니다. 10절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얼마나 무섭고 떨리는 말씀인가요? 신앙생활을 바로 해야 합니다. 확실히 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 서는 날을 준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고후5:10절에서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믿/
11절은 사45:23절을 인용한 말씀입니다. 주님 앞에 무릎을 꿇고 혀가 자백하는 날이 올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2절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직고하는 날이 옵니다. 이 심판은 번 복이 없습니다. 세상 법정처럼 3심도 없고 뒤집어지는 것도 없습니다.
영벌의 선고를 받은 사람은 영원히 어둠 가운데 슬피 울며 이를 갈 수밖에 없습니다. 떨리지 않습니까? 이제 우리는 이 심판에 예민한 신앙으로 무장해야 합니다.
이 영생의 복된 생명을 빼앗아 가려고 지금도 악한 영혼은 우리를 찾고 있습니다.
벧전5:8-9절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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