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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오바댜(OBADIAH)

성령충만땅에천국 2015. 12. 27. 15:40

오바댜(OBADIAH) 

 

 

 

구약(舊約)성경(聖經) 중 가장 짧은 책이지만 그에 반해 구약(舊約) 중 가장 강도(强度)높은 심판(審判)의 메시지(Message)를 선포(宣布)하고 있다. 왜냐하면 본서(本書)는 에돔(Edom)의 죄과(罪過)에 대한 혹독(酷毒)한 책망(責望)과 이로 인한 하나님의 준엄(峻嚴)한 심판(審判)에 대해서만 언급(言及)하고 있을 뿐 여타(餘他) 선지서(先知書)에서 공통적(共通的)으로 찾아볼 수 있는 회개(悔改)에 대한 촉구(促求) 내용(內容)이 나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代身) 본서(本書)는 형제국(兄弟國)인 에돔(Edom)에게서조차 멸시(蔑視)와 수난(受難)을 당한 이스라엘(Israel)의 회복(回復)에 대해 예언(豫言)하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百姓)의 관계(關係)가 어떠한 것인지를 우리들에게 잘 보여 준다.


題 目

 오 바 댜

 (Obadiah)

․본서(本書) 저자(著者)의 이름[오바댜(Obadiah) - 주의 종, 주의 경배    자(敬拜者)]을 따름

著 者

 오 바 댜

 (Obadiah)

․본서(本書)의 내적(內的) 증거(證據)

記錄年代

 B.C.586

 년     경

․예루살렘(Jerusalem)이 바벨론(Babylon)의 침략(侵略)을 당한 직후     (直後)의 어느 한 시점(時點)

記錄場所

 유다(Judah)

記錄對象

 에돔(Edom) 족속(族屬)

記錄目的

 하 나님을 대적(對敵)하는 자들에게 반드시 그 행위(行爲)대로 보응(報應)하신다는    점과 비록 택한 백성(百姓)이라 할지라도 범죄(犯罪)할 때는 징계(懲戒)하시지만 결   코 완전(完全)히 버리시지는 아니하신다는 점을 분명(分明)히 하기 위함

特 徵

 예루살렘(Jerusalem) 침략(侵略)과 관련(關聯) 된 에돔(Edom)의 죄악(罪惡)을     지금(至今) 현재(現在) 저지르고 있는 죄악(罪惡)인 것처럼 이야기함으로써 저들의   죄과(罪過)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그에 따른 하나님의 심판(審判)의 당위성    (當爲性)을 보다 실감(實感)나게 전달(傳達)한다.



전체(全體) 분량(分量)이 비록 21절에 지나지 않지만 에돔(Edom)의 멸망(滅亡)을 예언(豫言)하고 있는 1:1-1:18과 이스라엘(Israel)의 회복(回復)을 예언(豫言)하고 있는 1:19-1:21 으로 나눌 수 있다.


① 에돔(Edom)의 멸망(滅亡) : 에돔(Edom)이 하나님의 심판(審判)을 받아 멸망(滅亡)하게 된 근본(根本) 원인(原因)은 그들이 이스라엘(Israel)과 인척(姻戚)관계(關係)에 있으면서도 환난(患難)당한 이스라엘(Israel)을 돌아보지 않았을 뿐 아니라 열국(列國)과 손을 잡고 오히려 이스라엘(Israel)을 침략(侵略)하였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선 이들에게 심판(審判)을 선포(宣布)하셨는데 여기서 에돔(Edom)은 하나님을 대적(對敵)하는 모든 세력(勢力)의 모형(模型)으로 그리고 그들의 멸망(滅亡)은 궁극적(窮極的)으로 사단의 세력(勢力)이 훼파(毁破)되는 것을 상징(象徵)하는 것으로도 이해(理解) 할 수 있다.


②  이스라엘(Israel)의 회복(回復) : 이는 첫째, 이스라엘(Israel)이 옛날 다윗(David) 왕 때 차지하였던 영토(領土)까지 되찾아 누리게 되리라는 약속(約束)과 둘째, 이방(異邦) 땅에 포로(捕虜)로 잡혀간 유다(Judah)인들이 다시금 팔레스틴(Palestine)으로 귀환(歸還)하게 되리라는 약속(約束)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같은 약속(約束)은 당시(當時) 절망(切望)가운데 있던 유다(Judah)인들에게 큰 소망(所望)을 안겨다 주었을 것이 분명(分明)한데 궁극적(窮極的)으로 이는 예수(Jesus)로 말미암아 성도(聖徒)들에게 주어질 영원(永遠)한 자유(自由)와 축복(祝福)을 의미(意味)하는 것이라 하겠다.


언약(言約) 관계(關係)에서 본 의(義)의 개념(槪念) :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Israel)이 당신(當身)과 맺은 언약(言約)을 파기(破棄)하고 악을 행하는 모습에 크게 분노(憤怒)하신다. 성경(聖經)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언약(言約)’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곧 ‘죄’요 ‘악’이다, 환언(換言)하면, 신성(神聖)하게 제정(制定)된 ‘언약(言約)’을 준수(遵守)하는 것이 바로 ‘의’인 것이다. ‘언약(言約)’과 ‘의’의 개념(槪念)은 구속사적(救贖史的)인 면에서도 중요(重要)한 의미(意味)를 갖기 때문에 구약(舊約) 전편(全篇)에 흐르는 언약(言約)과 의의 관계(關係)에 대한 고찰(考察)은 예수(Jesus) 그리스도(Christ)로 말미암아 제정(制定)된 ‘새 언약(言約)’과 복음(福音)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해(理解) 하는 데 도움이 된다.


① 일반적(一般的)인 ‘의’ 개념(槪念) : 히브리(Hbrew)어 ‘체데크’와 헬라어 ‘디카이쉬네’는 모두 ‘똑바름’, ‘옮음’을 뜻한다. 이는 어떤 기준(基準)에의 도달(到達) 혹은 일치(一致)를 의미(意味)하는데 상술(上述)한 대로 성경(聖經)에서는 그 기준(基準)이 하나님께서 인간(人間)과 세우신 언약(言約)이라고 말한다. 이밖에 일상적(日常的)이고 도의적(道義的)인 생활(生活) 속에서 자기(自己) 권리(權利)를 추구(追求)하는 행위(行爲)나 책임(責任)을 수행(遂行) 하는 행위(行爲)에 대해서도 ‘의’라는 말이 사용(使用)되기도 했다. 가령(假令) 창38:6-38:30에 언급(言及)되는 유다(Judah)와 그의 며느리 다말(Tamar) 사이의 불륜(不倫)관계(關係) 일화(逸話)에서는 윤리적(倫理的) 차원(次元)에서는 도저(到底)히 용납(容納)될 수 없는 행위(行爲)가 권리(權利) 추구(追求)와 책임(責任)수행(遂行)이라는 견지(見地)에서 정당(正當)한 행위(行爲)로 간주(看做)된다.[창38:26]. 여기서 책임(責任)수행(遂行)이 의롭다는 평판(評判)을 얻는 전제조건(前提條件)이 된다는 사실(事實)은 언약(言約)을 이행(履行)함으로써 얻게 되는 ‘의’에 대한 관념(觀念)과 조화(調和)를 이룬다.


② 구속사(救贖史)에 나타나는 ‘언약(言約)’의 계보(系譜)


언약(言約) 이행(履行) 여부(與否)가 의와 불의(不義)를 판가름하는 기준(基準)이라는 사상(思想)은 하나님께서 아담(Adam)과 맺으신 행위(行爲) 언약(言約)[창2:16-2:17]에 잘 나타난다. 언약(言約)을 어기고 자기(自己) 욕심(慾心)을 좇은 아담(Adam)은 하나님께 불순종(不順從)하는 모든 죄인(罪人)들의 표상(表象)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타락(墮落)한 인류(人類)를 회복(回復)하시기 위해 택한 백성(百姓)과 수차(數次) 언약(言約)을 맺으시며 구속(救贖)의 섭리(攝理)를 진행(進行)하셨는데 그 중 아브라함(Abraham)과 모세(Moses)를 통해 세우신 언약(言約)이 매우 중요(重要)하다,


③ ‘언약(言約)’과 ‘의’의 함수관계(函數關係) : 하나님께서 아브라함(Abraham)에게 주신 언약(言約)은 ‘의’에 관한 두 가지 교훈(敎訓)을 우리에게 준다. 첫째 아브라함(Abraham)은 하나님의 언약(言約)을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었다. 이는 신약(新約)에서 이신 득의 교리(敎理)를 세우는 기초(基礎)가 되었다. 둘째, 아브라함(Abraham)은 하나님의 언약(言約)을 믿고 행함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었다. 즉 아브라함(Abraham)이 ‘의’를 획득(獲得)할 수 있었던 것은 언약(言約)에 대한 믿음과 순종(順從)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모세(Moses)를 통해 세워진 언약(言約)은 그것이 이스라엘(Israel) 민족(民族)공동체(共同體)를 종교적(宗敎的)으로나 사회적(社會的)으로 결집(結集)시키는 구심점(求心點)이 된다는 점에서 특이(特異)하다. 이 언약(言約)은 강제성(强制性)을 띠고 하나님과 사람에게 행할 의무(義務)를 요구(要求)한다. 따라서 그것은 율법(律法)의 형식(形式)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Israel) 중 이 언약(言約)[율법(律法)]을 따라 흠 없이 지킬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즉 모세(Moses) 율법(律法)을 통해 ‘의’를 쟁취(爭取)할 수 있는 자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바로 여기서 ‘옛 언약(言約)’으로 불리 우는 율법(律法)이 제정(制定)된 목적(目的)이 드러난다. 그것은 첫째, 죄인(罪人)된 인간(人間)이 ‘하나님의 의’를 대망(待望)하도록 인도(引導)하는 것이다.


④ ‘새 언약(言約)’과 ‘복음(福音)’으로 말미암은 ‘의’ : 하나님께서는 모세(Moses)의 언약(言約)[율법(律法)]을 따라 ‘의’를 얻을 육체(肉體)가 한 명도 없음과 이스라엘(Israel)이 언약(言約)을 떠나 패역(敗疫)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새 언약(言約)’을 제정(制定)하였다. 선지자(先知者)들을 통해 선포(宣布)된 ‘새 언약(言約)’은 하나님과 택한 백성(百姓)사이의 ‘화평(和平)’을 주제(主題)로 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그 백성(百姓) 사이에 가로막힌 ‘죄’문제(問題)가 해결(解決)되지 않고는 화평(和平)이 불가능(不可能)하다. 예수(Jesus)께 서는 인간(人間)이 허물 수 없는 죄의 담을 허시고 하나님과 화평(和平)을 이루게 하시려고 오셨다. 그러므로 그를 ‘새 언약(言約)의 중보(仲保)’라고 부르며 ‘화목제(和睦祭)’라고도 일컫는 것이다. 이 화목(和睦) 사역(使役)을 위해 예수(Jesus)께서 흘리신 피를 ‘새 언약(言約)’이라고 칭하는 것 역시(亦是) 이와 같은 맥락(脈絡)에서 이해(理解)할 수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Christ)의 화목(和睦) 사역(使役)과 구속(救贖)의 피를 논하면서 예수(Jesus)를 믿음으로 얻게 되는 ‘의’를 강변(强辯)하였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새 언약(言約)’ 즉 ‘복음(福音)’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그리스도(Christ)의 구속(救贖) 사역(使役)]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인(義人)’으로 살수 있다.


이 책의 히브리(Hebrew)어 명칭(名稱)인 ‘오바댜(Obadiah)’는 ‘여호와(Jehovah)의 종’ 또는 ‘여호와(Jehovah)를 예배(禮拜)하는 자’라는 의미(意味)이다. 이 선지자(先知者)의 혈통(血統)․사회적(社會的) 신분(身分)․생업(生業)등에  관하여는 전혀 언급(言及)되어 있지 않다.


 ◀ 에돔에 대한 심판을 예언한 오바댜 선지자. 

 명칭

이 책의 히브리 어 명칭인 '오바댜'는 '여호와의 종' 또는 '여호와를 예배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 선지자의 혈통․사회적 신분․생업 등에 관하여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저자 및 기록연대

■ 저자

오 바댜는 남왕국의 유다에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친척 관계나 부친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왕족이나 제사장 계열의 신분은 아닌 듯하다. 오바댜에 관하여 '하나님의 암시를 받은 선지자'라는 사실 이외에 다른 것을 밝혀내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 저작 연대

여호람이 유다를 통치하던(B.C. 848-841)중, 블레셋과 아라비아가 예루살렘을 침공했던 시기에(대하 21:16-17) 기록되었다.

 배경 및 주제

■ 역사적 배경

오바댜에는 왕의 이름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11-14절에 언급된 예루살렘 함락 시기를 역사적 배경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사건의 시기를 확정하기는 어렵다.

구약 시대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침략에 관한 기사가 성경에 4회 기록되어 있다.


(1) B.C. 926년 여로보암 Ⅰ세의 치세 중, 애굽 시삭의 침공(왕상 14:25-26).

(2) 여호람의 통치 중(B.C. 848-841), 블레셋과 아라비아 인들의 침공(대하 21:16-17).

(3) 아마샤 치세 중(B.C. 790), 북왕조 이스라엘 여호아하스의 침공(왕하 14:13-14).

(4) B.C. 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침공(왕하24, 25장).


이 중 (2), (4)의 시기와 오바댜의 내용을 관련시킬 수 있는데, (4)의 시기를 택하는 것은 부적당하다. 왜냐하면 바벨론 침공 시에는 예루살렘을 얻기 위해 제비를 뽑지 않았기 때문이다(비교. 1:11). 그러므로 그 시기를 여호람의 통치 시기(B.C. 841)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견해를 19세기와 20세기 초의 많은 복음주의 학자들이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바댜는 엘리사와 동시대 사람으로 생각되며, 요엘보다 더 이른 시대에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중심 사상

오 바댜의 예언 내용은 매우 간결하고 짧은 에돔 족속에 대한 한정된 심판처럼 보이나, 담겨 있는 의미는 심오하다. 하나님의 백성 유다에게 행한 에돔의 교만하고 악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전 우주적인 심판으로 확대된다(15, 16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묘사하고 있다.

" 오바댜 예언의 핵심적인 내용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이다."(Hengstenberg)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에돔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하고 악한 이방인의 태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비교. 욜 3:19). 그러나 오바댜의 예언이 전적으로 미래의 예언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므로, 역사 가운데서 에돔의 행위와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은 하나님의 백성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다. 이 징계에 대한 이방인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심판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는 유다에 대해 방관하고 악한 행동을 가하는 그 자체 또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요소가 되는 것이다.

남은 자가 땅을 회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갱신이다.


 내용분해

1. 에돔에 대한 심판(1:1-9)

2. 에돔의 죄악(1:10-14)

3. 주의 날(1:15-21)

 서론 일람

1. 기록자 : 오바댜

2. 기록연대 : 오바댜는 예루살렘이 침공을 받았던 어느 시기에 기록된 것이다. 만약 예루살렘성이 블레셋과 아랍인들에 의해서 침공받았던 때에 이 책이 기록되었다면 그 시기는 대략 B.C. 848-840년 정도가 될 것이다.

3. 기록장소 : 유다

4. 기록대상 : 에돔 족속

5. 핵심어 및 내용 : 오바댜의 핵심어는 "교만"과 "형제"이다. 세일산 가운데 요새화된 성에서 안전하게 살았던 에도 족속은 교만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과 한 핏줄을 나눈 이스라엘 민족을 멸시했고 그들에게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그의 형제를 동정과 사랑으로 돌보게 해주는 참 자부심은 주님 안에 있을 때에만 갖게 된다.


1. 저자(著者)

오바댜(Obadiah)는 남왕국(南王國) 유다(Judah)에 살았던 것으로 추측(推測) 된다. 친척(親戚) 관계(關係)나 부친(父親)에 관한 언급(言及)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왕족(王族)이나 제사장(祭司長) 계열(系列)의 신분(身分)은 아닌 듯하다. 오바댜(Obadiah)에 관하여 ‘하나님의 암시(暗示)를 받은 선지자(先知者)’라는 사실(事實) 이외(以外)에 다른 것을 밝혀 내려는 시도(試圖)는 무의미(無意味)하다.


2. 저작(著作) 년대(年代)

여호람(Jehoram)이 유다(Judah)를 통치(統治)하던 중 블레셋(Philistine)과 아라비아(Arabia)가 예루살렘(Jerusalem)을 침공(侵攻)했던 시기(時期)에 기록(記錄)되었다.


 오바댜(Obadiah)에는 왕의 이름이 한번도 언급(言及)되지 않는다. 따라서 11-14절에 언급(言及)된  예루살렘(Jerusalem) 함락(陷落) 시기(時期)를 역사적(歷史的) 배경(背景)의 기준(基準)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사건(事件)의 시기(時期)를 확정(確定)하기는 어렵다. 구약시대(舊約時代)에 있었던 예루살렘(Jerusalem)의 침략(侵略)에 관한 기사(記事)가 성경(聖經)에 4회 기록(記錄)되어 있다. (1) B.C.926년 여로보암(Jeroboam) 1세의 치세(治世) 중, 애굽(Egypt) 시삭(Shishak)의 침공(侵攻) (2) 여호람(Jehoram)의 통치(統治) 중[B.C.848-841], 블레셋(Philistine)과 아라비아(Arabia) 인들의 침공(侵攻) (3) 아마샤(Amazaih) 치세(治世) 중[B.C.790]  북왕조(北王朝) 이스라엘(Israel) 여호아하스(Jehoahaz)의 침공(侵攻) (4) B.C.586년 바벨론(Babylon)의 느부갓네살(Nebuchadnezzar)의 침공(侵攻) 이 중 (2),(4)의 시기(時期)와 오바댜(Obadiah)의 내용(內容)을 관련(關聯)시킬 수 있는데 (4)의 시기(時期)를 택하는 것은 부적당(不適當)하다. 왜냐하면 바벨론(Babylon) 침공(侵攻)시에는 예루살렘(Jerusalem)을 얻기 위해 제비를 뽑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시기(時期)를 여호람(Jehoram)의 통치(統治) 시기(時期)[B.C.848-841]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견해(見解)를 19세기(世紀)와 20세기(世紀)초의 많은 복음주의(福音主義) 학자(學者)들이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바댜(Obadiah)는 엘리사(Elisha)와 동시대(同時代) 사람으로 생각되며, 요엘(Joel)보다 더 이른 시대(時代)에 활동(活動)했을 것으로 추정(推定)된다.


오바댜(Obadiah)의 예언(豫言) 내용(內容)은 매우 간결(簡潔)하고 짧은 에돔(Edom) 족속(族屬)에 대한 한정(限定)된 심판(審判)처럼 보이나, 담겨있는 의미(意味)는 심오(深奧) 하다. 하나님의 백성(百姓) 유다(Judah)에게 행한 에돔(Edom)의 교만(驕慢)하고 악한 행동(行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審判)은 전 우주적(宇宙的)인 심판(審判)으로 확대(擴大)된다. 그리고 이스라엘(Israel)의 회복(回復), 하나님의 통치(統治), 하나님 나라의 완성(完成)을 묘사(描寫)하고 있다. ‘오바댜(Obadiah) 예언(豫言)의 핵심적(核心的)인 내용(內容)은 이방인(異邦人)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公正)한 심판(審判)과 이스라엘(Israel)의 회복(回復)이다’ [Hengstenberg]라고 해도 과언(過言)이 아니다. 때문에 에돔(Edom)은 하나님을 대적(對敵)하는 교만(驕慢)하고 악한 이방인(異邦人)의 태도(態度)를 상징(象徵)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오바댜(Obadiah)의 예언(豫言)이 전적(全的)으로 미래(未來)의 예언(豫言)에 국한(局限)된 것만은 아니므로, 역사적(歷史的) 상황(狀況)에 에돔(Edom)의 행위(行爲)와 태도(態度)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審判)을 무시(無視)해서는 안 된다. 예루살렘(Jerusalem)이 함락(陷落)된 것은

하나님의 백성(百姓) 유다(Judah)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懲戒)이다. 이 징계(懲戒)에 대한 이방인(異邦人)의 행동(行動)은 정당화(正當化)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온 우주(宇宙)의 심판자(審判者)가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징계(懲戒)를 받고 있는 유다(Judah)에 대해 방관(傍觀)하고 악한 행동(行動)을 가하는 그 자세(姿勢) 또한 하나님 앞에 심판(審判)을 받을 요소(要素)가 되는 것이다. 남은 자가 땅을 회복(回復)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言約)에 대한 갱신(更新)이다.


교만(驕慢)과 형제(兄弟) : 세일(Seir) 산 가운데 요새화(要塞化)된 성에서 안전(安全)하게 살았던 에돔(Edom) 족속(族屬)은 교만(驕慢)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自己)들과 한 핏줄을 나눈 이스라엘(Israel) 민족(民族)을 멸시(蔑視)했고 그들에게 관심(關心) 조차 갖지 않았다. 그의 형제(兄弟)를 동정(同情)과 사랑으로 돌보게 해주는 참된 자부심(自負心)은 주님 안에 있을 때에만 갖게 된다.


심판(審判) : 본서(本書)는 심판(審判)을 다루되 예레미야(Jeremiah)나 요엘(Joel), 아모스(Amos)처럼 이스라엘(Israel) 또는 유다(Judah)에 대한 심판(審判)이 아니라 에돔(Edom)에 대한 심판(審判)을 다루고 있다. 에돔(Edom)이 하나님의 심판(審判)을 받게 된 까닭은 그들이 택한 백성(百姓)을 대적(對敵)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의 심판(審判)이 편파적(偏頗的)이고 보복적(報服的)인 성격(性格)을 지닌 것으로 오해(誤解)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 같은 심판(審判)은 하나님의 공의(公義)에 입각(立脚)한 것이다. 왜냐하면 ① 하나님의 택한 백성(百姓)을 대적(對敵)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對敵)하는 행위(行爲)이며 ② 열국(列國)을 사용(使用)하시어 범죄(犯罪)한 백성(百姓)을 징계(懲戒)하신 것이 공의(公義)이듯이 하나님을 대적(對敵)한 에돔(Edom)을 심판(審判)하는 것 역시(亦是) 공의(公義)이기 때문이다.


이는 일차적(一次的)으로 하나님께서 다시금 이스라엘(Israel)을 회복(回復)시켜 주시고 그 원수(怨讐)를 갚아 주시겠다는 약속(約束)이지만 궁극적(窮極的)으로는 이 세상(世上) 종말(終末)에 예수(Jesus) 그리스도(Christ)와 성도(聖徒)들이 의(義)로서 세상(世上)을 통치(統治)하게 될 것을 예언(豫言)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시(當時) 유다(Judah)인들 뿐 아니라 오늘날의 성도(聖徒)들도 이 구절(句節)을 대할 때마다 새로운 소망(所望)을 가지고 환난(患難)중에 인내(忍耐)할 수 있는 것이다.


15절에 나오는 ‘여호와(Jehovah)의 만국(萬國)을 벌할 날’은 예수(Jesus)께서 그의 대적(對敵)들을 심판(審判)하시는 재림(再臨)의 때를 기다린다. 그리고 구원자(救援者)들이 시온(Zion) 산에 올라온다는 구절(句節)[21절]은 메시야(Messiah)께서 그의 성산(聖山)에 강림(降臨)하시어 새로운 왕국(王國)을 건설(建設)하실 것이라는 사상(思想)을 반영(反映)하고 있다.


1. 에돔(Edom)에 대한 심판(審判)의 예고(豫告)


2. 에돔(Edom)이 심판(審判)을 받아야 할 이유(理由)


3. 에돔(Edom)이 심판(審判) 받은 결과(結果)


4. 이스라엘(Israel)이 얻을 에돔(Edom)의 재물(財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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