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수*이동원 목사+목사님들설교

[스크랩] 지나온 모든 것을 감사하십시오(롬8장26-30) / 이동원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1. 20. 16:18

 

지나온 모든 것을 감사하십시오(826-30)


출 처이동원목사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8)

 

오늘 우리는 12월의 끝, 한해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정유찬 시인의 시 가운데 ‘12월의 끝에서라는 시가 있습니다.

한해를 결산하는 의미 있는 시가 될 듯 합니다.

들어 보시지요.

사랑한 날이 미워하는 날보다 많았는지/

슬프고 힘들었던 날보다 행복했던 날이 많았는지/

 

12월의 끝에서 지난날들을 떠올려 보고 있어/

보석 같은 날들을 가슴으로 살았니 머리로 살았니/

 

얼마나 웃고 살았어 아니면 찡그렸어/

맑은 하늘아래 투명한 날들을 뿌연 눈으로 보낸건 아닐까/

 

별이 찬란하던 밤 내가 깨어 있었는지 잠들어 있었는지/

난 거울을 봐 거울속의 나를 봐/

 

아름다워 진거야 추해진 거야 무엇이 변한 것일까/

밤이 깊어만 가네 한해가 또 저무네

 

나는 그의 시를 읖조리면서 그리스도인답게 한해를 마무리하는 합당한 단어가 무엇인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내 결론이 났습니다.

그것은 감사라는 단어였습니다. 감사야 말로 시간의 한 페이지를 닫고 또 다른 시간의 페이지를 여는 하나님의 언어인 까닭입니다.

 

바울 사도는 역사의 종말에 대한 성경적 교훈을 곡해하여 일상적인 삶의 자리에서 도피하고 하늘만을 바라보고 있었던 신생 데살로니가 교회 일부 성도들에게 재림을 기다리는 깨어 있는 성도의 삶의 모습을 가르치고자 데살로니가전서를 쓰면서 결론으로 감사하는 삶을 권면합니다.

 

살전5:18을 읽겠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여기서 바울 사도는 모든 일에 즉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리스도인다운 삶의 모습이요 하나님의 기대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을 오늘 12월의 끝 날에 합당하게 적용할 수 있다면 지나온 모든 일, 이 한해에 우리가 경험한 범사에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가 지나온 한 해 동안 우리는 우리가 원하지 않았고 환영할 수 없었던 질병과 사고, 실패와 수치와의 그 치열한 싸움 그리고 그 뼈아픈 고통이 있었는데도 과연 감사가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질문에 답하게 위해 우리는 또 다시 바울사도의 유명한 인생 레슨의 보석으로 불리 우는 로마서 826-30절의 교훈으로 돌아가고자 합니다.

 

어떻게 우리는 우리가 겪은 모든 것에 감사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그 이유를 두 가지로 대답합니다.

1.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에 대해서 감사를 느끼지 못하는 대부분의 경우-왜 그렇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이 누구입니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아닙니까?

우리의 스승이요 주님이신 예수께서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모범을 보이신 분이 아닙니까?

그분은 또한 우리에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분이 아니십니까?

 

그렇다면 비록 인생이 내 뜻대로 되어지지 않았어도 그분의 뜻대로 된 것이라면 감사한 일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과연 우리의 삶의 현재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결과이냐 라는 것입니다.

다시 로마서 8장의 가르침으로 돌아오십시오.

8:26의 교훈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인생의 길에서 탄식을 경험하며 무엇을 위해 기도해 좋을지도 모를 상황에 처할 때 성령께서 또한 우리와 함께 탄식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함께 읽어 보시겠습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이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

 

그때 성령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슨 기도를 하실까요?

그 대답이 27절입니다.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성령은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삶의 장에 이루어지도록 간구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성령의 간구가 실패하시겠습니까?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 결과가 바로 유명한 롬8:28인 것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오랜 옛날부터 철학자들은 소위 인간의 최고선(最高善)’ ‘summum bonum’을 탐구하여 왔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최고선을 행복이라고 했고, 임마누엘 칸트는 그냥 행복이 아니라 도덕적 법칙과 결합된 행복이야말로 최고선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선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여기서 말한 모든 것에는 롬8:18에서 말한 고난과 영광, 슬픈 일과 기쁜 일, 좋은 일과 안 좋은 일 모든 일을 다 포함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 곧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직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되는 약속입니다.

다시 2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을 향한 약속이요 우리만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선포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지나온 한해 우리가 겪어온 모든 부정적인 경험들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물론 이 말은 우리가 겪어온 모든 악한 일들이 다 좋은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나쁜 일은 나쁜 일이고, 악한 일은 악한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의 인생의 장에서 경험되는 나쁜 일이 나쁜 일로 끝나도록 악한 일이 악한 일로 끝나도록 버려두시지 않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나쁘고 악한 일조차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간섭과 개입으로 궁극적으로는 선한 일이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시 롬8:35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어떤 나쁜 일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단절시킬 수는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경제적 시련, 사업의 실패)이나 적신(질병)이나 위험이나 칼(도난, 파산, 사고와 재앙들)이랴

 

그렇다면 사랑하는 사도 여러분,

이제 우리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대표적인 케이스가 요셉의 인생이 아닙니까?

요셉이야 말로 얼마나 나쁜 일들을 많이 경험한 사람이었습니까?

형제들의 질투와 핍박, 사막의 웅덩이인 사지에 던져진 죽음과의 대면, 억울한 감옥살이, 은혜를 잊어버린 관원--

 

그러나 우리는 좀처럼 요셉의 입술에서 불평이나 원망의 언어를 찾을 수 없습니다. 그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우리는 그 비밀을 그가 자기를 사지로 내몰고 죽음을 시도한 형제들을 만나서 그가 고백한 창45:5이하의 간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45:5을 읽어 보십시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다시 7-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어떻게 이 험한 세월을 이기고 요셉이 이런 간증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성도가 경험하는 모든 것에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던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나온 모든 것을 감사할 수 있는 이유가 또 하나 있습니다.

 

2. 모든 것이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도들이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가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있다고 해서 당장에 악한 일이 선한 일로, 악한 상황이 선한 상황으로, 실패의 환경이 성공의 환경으로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오래 동안 우리의 상황은 나쁘고 악하고 고단한 상황 그대로 머물러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가 롬 8장에서 가르치는 두 번째 교훈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얼마동안 우리를 나쁜 상황 한 복판에 그대로 두신채로 우리의 인격을 변화시키는 작업을 진행하고자 하십니다.

그때 우리를 둘러싼 고난의 상황은 우리의 인격을 연단하는 작업의 장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인격적 주조의 모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인 것입니다.

8:29의 말씀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이야 말로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인 것입니다.

 

바로 이 목적을 마음에 두시고 하나님은 우리가 경험할 모든 상황을 아시면서도 그런 상황을 통과하도록 작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런 과정을 영광의 작업이라고 부릅니다.

8:30에는 기독교 교리의 기둥이 되는 몇 가지 교리가 연속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소위 예정의 교리, 소명의 교리, 칭의의 교리, 영화의 교리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결코 분리될 수 없이 연결되어 있어서 이들을 가르쳐 황금 사슬의 교리들(doctrines of gold chains)이라고 부릅니다.

 

읽어 보실까요?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미리 당신의 사랑받는 자녀로 정하시고 때가 찬 어느 날 복음으로 부르시고 부르신 우리를 의롭다하셔서 당신의 자녀로 인치셨다가 우리를 인생의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를 인격적으로 연단하사 마침내 영화로운 존재가 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이 영광의 작업장에서 작업 중인 작품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영화로움의 초점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인 것입니다. ‘

보라 내 사랑하는 아들이로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 진실로 기뻐하신 유일한 존재이신 그리스도 바로 그분을 닮도록 인생의 모든 것으로 그 분은 우리를 연단하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사랑하기 힘든 사람들과 씨름하며 사랑을 배우게 하시고, 슬픔의 파도 속에서 슬픔을 넘어서는 기쁨을 배우게도 하시고, 때로는 불화의 딜레마 속에서 화평의 진리를 배우게 하시고, 때로는 견디기 힘든 환경에서 오래 참는 인격을 연단하게 하시고, 때로는 억지로 손해 보는 경험을 통해 관용을 배우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온 결과물로서 업적이 아닌 우리가 빚어 온 인격을 보고 싶어 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진지하게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우리가 얼마나 거창한 일을 하느냐가 아닙니다. 날마다 부딪치는 일상의 경험을 통해 우리가 어떤 존재, 인격으로 빚어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위doing이 아닌 우리의 존재being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일생을 통해 하나님의 합격을 받은 대표적인 케이스가 욥이 아니겠습니까?

 

욥이 무슨 거창한 업적을 남긴 것이 있습니까?

업적이라면 그는 계속해서 다가오는 인생의 시련들을 무던히도 잘 견디고 인내한 것 뿐 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내 종(사랑하는, 의로운) 이라고 계속해서 부르십니다.

 

야고보는 인내의 표상으로 그를 소개합니다.

5:11에 보면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다고 증거합니다.

 

욥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며 그 지독한 고통의 순간들을 이겨 낼 수 있었을 까요? 23:10이 그 대답입니다.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은 자신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습니다. 그가 나를 아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나를 순금과 같은 인격으로 연단하시고자 함을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잘 견딘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낸 어느 날 위로 자를 자청하고 와서 오히려 자신에게 상처만 주었던 친구들까지 용납하고 용서하는 기도를 시작하는 욥의 모습을 본 순간 이제 하나님이 감동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 순간 하나님은 욥의 고난을 끝내십니다.

작업의 목적이 훌륭하게 성취됨을 보신 까닭입니다.

42:10을 보십시오. “욥이 그 친구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여호와께서 욥의 곤경을 돌이키시고 여호와께서 욥에게 이전 모든 소유보다 갑절이나 주신지라

 

그렇습니다.

욥의 순금의 인격이 증명되는 그 순간 하나님은 욥에게 더 이상의 고난이 불필요한 것을 아시고 고난의 세월을 끝내십니다.

그리고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축복의 드라마 제2막을 올리십니다.

그는 진실로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도 우리를 떠나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를 찬양하십시오.

 

고난이 아직 안 끝나셨습니까?

그러면 아직 아직도 당신은 시험 중에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감사함으로 시험에 임하십시오.

 

그리고 감사함으로 기대하십시오.

시련을 이겨낸 순금 인생을 기대하십시오.

내 인생의 주인께서 내게 펼쳐 주실 인생의 제2막을 말입니다.

 

12월 송년에 대한 의미 있는 시를 찾다가 설교 첫 머리에 소개한 정유찬 시인의 시와 함께 박우복 이라는 이름의 시인의 시 얼마나 아름다운 12월인가를 찾았습니다.

이 시는 우리로 하여금 12월을 희망적으로 마무리하게 하는 힘찬 긍정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습니다.

 

이 시로 한해를 함께 마무리하고 싶었습니다.

한해의 끝에 서면 나이를 더하는 것이 아니고 새해를 맞는 것이다/

한해의 끝에 서서 아픈 기억을 지워 버리듯 얄팍한 우리의 나이도 지워버리자/

애당초 시작하면서 빈손 하나만 가지고 인생을 엮어갔듯이 다시 한번 어깨를 펴자/

우리에게 12월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침몰하는 시간이 아니고 희망찬 내일을 바라보는 가장 높은 전망대처럼.”

 

그렇습니다. 그 높은 전망대에서 감사함으로 새해를 맞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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