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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 선생과 인생삼락(人生三樂) / 김정남(언론인)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2. 16. 05:53
제 793 호
함석헌 선생과 인생삼락(人生三樂)
김 정 남 (언론인)

  “군자에게는 세 가지 즐거움이 있으니 부모가 살아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하늘을 우러르고 사람을 굽어보아 부끄러움이 없으니 이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라.” 이는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맹자의 인생삼락(人生三樂)이다. 이보다 더 유교적인 증자의 삼락이 있고, 무위자연의 철학을 담은 노장(老莊)의 그것도 인구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

  언젠가 우연히 함석헌 선생의 인생삼락을 읽은 적이 있다. 문명이 파산을 하고 세상 끝 날이 내다뵈어 하늘나라가 가깝다던 말씀이 분명해지니 이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늙은 아내 전신불수 7년에 시중을 내가 드는데, 만일이라도 처지가 바뀌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니 이야말로 두 번째 즐거움이요, 재판정에 서서 법정 뒤에 은은히 뵈는 십자가를 보고 암루(暗淚)를 삼키며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할 수 있으니 이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라.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그가 20세기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사상가요 종교인이었으니 그의 첫 번째 즐거움은 그렇다 치고, 그의 두 번째 즐거움은 그의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그의 면모를 새삼 돌이켜 보게 하거니와 법대에 앉아있는 판사들을 보고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할 수 있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라니 다소 의외다. 「사상계」 필화사건에서부터 3.1 민주구국선언사건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시국사건의 법정에 섰던 그가 그때의 느낌이 오죽이나 절실했으면 그것을 인생삼락 중의 하나로 꼽았을까. 자신의 안위보다 시험에 든 판사들을 연민하는 그 깊고 짙은 마음씀이 놀랍다.

  얼마 전 한 일간지가 함석헌 선생이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한 그 ‘저들’에 대한 얘기를 집중 취재해 보도한 일이 있었다. 과거사 정리위원회에서 재심을 권고한 확정판결 중 재심에서 최종적으로 무죄가 난 224건의 형사사건을 담당했던 판·검사들의 행적을 추적한 내용이다. 당초 이 사건을 담당했던 378명의 판사 가운데서 고법부장판사가 21명, 법원장이 45명, 대법원장이 8명, 대법관이 25명, 헌법재판소 재판관이 11명 나왔고, 검사 127명 가운데서는 지검장 등 검사장이 22명, 검찰총장이 3명, 법무부 장관이 3명, 대법관 2명, 헌법재판관이 2명 나왔다고 한다.

  30여 년에 걸친 군사독재 시절, 이 나라 법정에 단 한 번이라도 가서 방청해 봤던 사람이라면, 그때의 재판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이들 판사와 검사들이 진실로 인간의 존엄과 인권, 그리고 그들이 즐겨 말하는 법의 정의를 지키려는 의지를 눈곱만큼이라도 가지고 있었다면 조작사건이 저렇게 많이 양산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검사가 수사를 하면서 수사기관의 불법구금과 고문 행위를 모를 수 없고, 판사 또한 의지만 있다면 피고인들이 주장하는 인권침해 사실을 얼마든지 밝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사건을 조작하는데 더 적극적으로 앞장서거나(검사), 피고인들의 눈물 어린 호소와 울부짖음에 눈감음으로써 사건조작에 사실상 동조(판사)했던 것이다. 이런 가운데서 그렇게도 많은 간첩조작 사건이 나왔다. 조작과 오판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들이 오히려 더 높이 출세하거나 승승장구한 것이 대한민국 사법계의 슬픈 현실이었다.

  조작된 간첩사건들이 재심에서 속속 무죄가 되고, 사건조작의 전말이 밝혀지고 있는데도, 그 사건들을 담당했던 이들 판·검사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주심이 아니었다는 말로, 그들의 잘못을 애써 부인하거나 발뺌하고 있다. 심지어 대답을 피하거나 아예 전화조차 받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이들 판·검사 가운데 자신들의 잘못을 고백하고 사과한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나는 들어보지 못했다. 2007년 9월 대법원장의 형식적인 과거사 사과만이 있었을 뿐, 검찰은 그것마저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부끄러움이 없는 사회

  이들의 행적과 행태에서 우리로 하여금 더욱 안타깝고 슬프게 하는 것은 그들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끄러움이야말로 양심과 도덕의 원천이요, 정의로운 공동체를 이루게 하는 기본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 부끄러움이 없어졌다. 그들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이명박·박근혜정부에 들어 오히려 더 기고만장하는 느낌이다. 부끄러움이 없다는 것은 곧 불의가 승리하고 기회주의가 판을 치는 세상이라는 것에 다름아니다.

  브레히트(Bertolt Brecht)는 나치 치하에서 살아남은 것조차 부끄러워 저 유명한 시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썼다. 민족시인 윤동주는 잃어버린 조국에서 기아(棄兒)처럼 태어난 것이 부끄러워 ‘서시(序詩)’에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고 고백하고 있다. 부끄러움을 깨닫는 것, 그것이 인간성의 기초이다. 함석헌 선생이 살아있다면, 암루를 삼키며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할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저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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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김정남
· 언론인
· 前 평화신문 편집국장
· 前 민주일보 논설위원
· 前 대통령비서실 교문사회수석비서관

· 저서
〈이 사람을 보라 -어둠의 시대를 밝힌 사람들-〉두레, 2012
〈진실, 광장에 서다 -민주화운동 30년의 역정-〉창작과 비평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