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김진홍 목사의 아침묵상(1)-(3), (5)-(10)
국부 이승만 (國父 李承萬) (1) 2016-02-06
지난 2일에 인천공항을 떠나 미국 두레마을인 베이커스필드로 왔다. 이번 여행 중에 읽으려는 책들은 이승만 초대대통령에 대한 책들이다. 이번 여행에서 이승만을 세삼스레 공부하고져 하는 이유가 있다.
지난 1월 14일 국민의당 창당식 날에 창당준비위원장이었던 한상진 교수께서 이승만 초대대통령을 국부(國父)라 하였다가 이쪽 저쪽에서 논란이 일어나니 국부는 아니라 하는 헤프닝이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를 지금 공부하는 학생들도 아니고 알만큼 아는 사람들이 무슨 말을 이랬다 저랬다 헷갈리게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이승만 박사를 좋아는 하면서도 그 어른을 국부라 불러야할지 아닐지를 정하기가 어려운 처지여서 이번 10일 여행 중에 이승만 박사를 확실히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서가에서 이승만 박사에 관한 자료를 모두 챙겨와 짬짬이 읽는 중이다.
내가 고등학생시절 즈음 이승만 박사에 대하여 들은 이야기 중에 <이승만 박사를 3신(三身)>이라 표현하는 말을 들었다. 그 시절 이승만 박사가 3신이란 말은 그가 외교에는 귀신, 내치에는 등신, 인사에는 병신이란 듯에서 그렇게 불렸다.
학생시절에는 이승만 박사에 대하여 독재자다. 부패의 원흉이다는 등으로 나쁜 이야기를 주로 듣다가 이승만 박사께서 4.19 이후 경찰의 총격을 받고 병원에 입원하여 있는 학생들을 찾아가 일일히 돌아보며 한 말을 듣고는 그렇게 나쁘기만 한 어른이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이승만 박사에 대하여 다시 공부하여 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승만 박사께서 4.19 때에 데모하다 부상 당한 청년학생들을 병원으로 찾아가 돌아보며 다음 같이 말하였다.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됐어?
부정을 왜 해?
암!
부정을 보고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런 말을 남기고 귀가한 후 신속히 하야성명을 발표하였다. 4월 26일이었다. 그는 하야 성명을 하면서도 죄 없는 학생들이 더 이상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하여서란 말까지 남겼다.
물러날 때의 이런 깨끗한 모습이 나에게는 참 좋은 모습으로 비쳤다. 그래서 이승만 박사의 공(功)과 과(過)를 바로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국부 이승만 (國父 李承萬) (2) 2016-02-11
모든 인물에 그러하듯이 이승만 박사에게도 공이 있고 과가 있다. 생전의 공과 과를 자세히 살펴 올바르게 평가하여 주는 것이 후손들의 책임이다. 내가 이승만의 공과 과를 나 나름대로 살펴 볼 때에 8대 2로 평가한다. 역사와 후손들에게 끼친 공이 8이고 과가 2라 판단한다. 이 글에서 그들 공과 과를 한 가지씩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싶다.
이승만 박사가 우리 역사에 끼친 공의 첫째를 나는 공산화를 막은 공이라 확신한다. 나는 그 시대 그 자리에 이승만 박사가 없었더라면 있었어도 제 역할을 하지 못하였더라면 우리는 지금 김정일을 장군님, 위대하신 장군님하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점은 100%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간에 북한을 여러 번 다녀왔다. 평양에도 여러 번, 변두리 지방에도 여러 번 다녀왔다. 갈 때마다 느끼며 감사드리는 것이 내가 북한 땅에 태어나지 아니하고 남한 땅에 태어난 것을 감사드리곤 한다. 북한 땅에 태어났더라면 어쩔 수 없이 김일성 수령님, 김정일 장군님, 김정은 지도자님 하며 머리를 조아리며 살아야 할 것인데 남한 땅에서 낳았기에 자유를 누리며 사람구실하며 살고 있는 것이라 여긴다.
그리고 6.25 전쟁 때에 이승만 전 대통령이 있었기에 이 땅이 공산화가 되지 아니하고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었다고 확신한다. 내가 현대사에 대하여는 문외한이긴 하지만 내가 느끼고 믿는 상식으로는 초대 대통령에 만일 이승만 대통령이 뽑히지를 못하고 김구 선생이 뽑혔더라면 남한은 공산화 되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김구 선생이 훌륭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각 인물이 지닌 적성과 능력의 차이가 있기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온 나라가 뒤죽박죽이었던 난세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있었기에 이 박사의 통찰력과 외교력으로 남한이 공산화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래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우리 겨레에는 큰 축복이었다.
전쟁으로부터 나라를 구한 지도자는 많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처럼 백척간두(百尺竿頭)에서 니라를 구한 지도자는 드물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 남한의 사정은 모든 것이 벼랑 끝이었다. 군사력은 남한이 북한의 4분의 1이 못되었고 남한 안에는 공산세력이 많았다. 북한 국경에는 중국과 소련이 진치고 있었고 우리 편이 될 미국은 태평양 너머에 있었다.
이승만 박사는 맥아더 장군을 소령시절부터 친하게 알고 있었다. 그래서 북한군이 침략한 다음 날 새벽에 동경에 자고 있는 맥아더를 전화로 깨워 신속히 대처할 수 있었다.
국부 이승만 (國父 李承晩) (3) 2016-02-12
초대 대통령 이승박 박사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상반된 평가가 이어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친미독재자란 불명예스러운 평가와 최악의 조건에서 나라를 세우고 공산주의 위협에서 나라를 지키고 대한민국 번영의 기초를 세운 국부란 평가이다. 나는 이번에 열흘간 미국을 여행하는 중에 비행기에서부터 틈틈이 이승만에 대한 자료를 읽으며 이승만 공부를 하고 있다. 공부를 하면서 느끼는 결론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은 공(功)이 8이요 과(過)가 2이다. 2의 과(過) 때문에 8의 공(功)을 덮어버리는 것은 합당치 못한 처사라는 생각이 든다.
어제 글에서 이승만 박사의 공의 첫째로 공산화를 막은 공을 지적하였다. 이승만 박사에 버금 가는 국부급 인물로 김구 선생이 있지만 만약에 초대 대통령에 이승만이 아니고 김구가 되었더라면 공산화를 막지는 못하였을 것이 확실하다. 그런 점에서 나는 공산화를 막은 것이 이승만 박사가 이룬 업적의 첫째라 생각한다.
이승만 박사의 두 번째 공은 그가 건국하는 과정에서 고집스레 정치적 자유민주주의 경제적 자본주의 체제를 선택하여 이를 정착시킨 점이다.
2차 대전 이후로 많은 신생독립 국가들이 탄생하였다. 무려 120여 나라에 이른다. 그런데 그렇게 새로 시작되는 나라의 지도자들과 국민들은 거의가 사회주의 체제를 선택하는 경향이 있었다.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게 되고 사회주의 이데올로기가 전파되어가게 되면서 사회주의가 시대의 대세가 되었다.
그러나 유독 이승만 박사만은 달랐다. 그는 국가와 국민이 강대하여지고 풍요를 누리려면 사회주의로는 불가능함을 알았다.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음을 알았다. 그는 미국생활에서 그 점을 몸으로 체험하였다.
그는 당시로서는 세계적인 수준에서 최고 학부를 거친 사람이었다.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 그리고 프린스턴 대학에서의 박사는 그가 최고 지성인임을 말해 준다. 그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국가경영의 체제로 선택하여야 국가 발전을 이루고 국민들로 풍요롭게 할 수 있음을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확신하였다.
그래서 이승만 박사는 신생독립국가 대한민국을 자유민주주의체제 위에 세우기로 구상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하여 비판하고 그를 미국의 앞잡이라 공격하였다. 그러나 그는 체제 선택 문제에서만큼은 양보나 타협이 없었다. 그는 고집스레 자유민주주의국가 대한민국을 세우려 하였다. 그의 선택과 고집 덕분에 지금 우리가 북한과의 체제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만큼이나마 나라다운 나라를 이루고 살게 된 것이다.
올바른 체제선택이야말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위대한 공로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그를 국부 이승만(國父 李承晩)이라 불러 마땅하다.
국부 이승만 (國父 李承晩) (5) 2016-02-15
이승만 박사는 1875년 3월 26일 양녕대군의 16대 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에는 아들이 귀하여 그는 6대 독자였다. 이승만에게도 한 아들이 있었으나 어린 나이에 미국에서 죽었기에 이승만 박사로 대가 끊어진 셈이다. 이승만 박사의 어린 아들이 죽은 때는 그가 고종의 외교사절로 미국에 파견되었다가 임무 수행에는 실패하고 미국에서 신학문을 하여 조국에 이바지 하겠다는 일념으로 늦은 나이에 대학에 입학하여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공부하던 때였다.
이승만 박사는 이역만리 미국 땅에 전염병으로 죽은 아들을 묻고 학업에 전념하여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이로써 이승만 박사는 당시로서는 세계 최고수준의 학력을 소유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승만은 국제정세를 판단하는 능력이 탁월하여 일본이 진주만 사건으로 미국을 공격하기 몇 해 전에 일본의 공격을 예견하고 미국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책을 출간하였다.
<Japan Inside Out> 란 제목의 이 책은 출간 당시에는 아무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책이었으나 일본의 진주만 공격 이후 베스트셀러에 오르게 되었다. 당시로서는 아무도 예측하지 못하였던 일본의 야욕을 이승만 박사는 예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패전하는 때가 조선독립의 기회가 될 것임을 예측하고 미국과의 인맥 쌓기와 외교역량을 높이는 일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는 일찍부터 외교의 힘을 믿었다. 그러기에 그는 외교로 대한독립을 이루겠다는 일념을 품고 미국을 중심으로 국제정세의 변화를 늘 살피며 조선의 독립 기회를 살피며 지냈다. 조국 조선이 일본제국주의의 지배 아래 있던 시절에 많은 독립지사들이 조국의 광복을 위하여 인생을 바쳤다. 그들이 내건 독립방략(獨立方略)은 여러 갈래였다.
중국에서 활동한 김구 선생과 미국에서 활동한 박용만(朴容萬) 선생은 무력으로 독립을 쟁취하려 하였다.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 선생은 독립국의 자질을 갖추는 인격을 기르는 교육으로 독립을 이루려 하였다. 조만식(趙萬植) 선생과 이승훈(李承熏) 선생 등은 산업을 일으켜 민족의 힘을 길러 독립을 이루려 하였고 김교신(金敎臣) 선생은 건강한 종교를 일으켜 독립에 이르러는 성서조선운동(聖書朝鮮運動)을 일으켰다.
그렇게 다양한 노선(路線)을 추구하는 독립운동가들 중에서 이승만은 유달리 외교를 통한 조선독립을 이루겠다는 일념으로 미국과 중국을 오가며 외교역량을 길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1945년 8월 15일의 해방과 1948년 8월 15일의 건국을 전후로 하여 이승만 박사의 외교노선과 김구 선생의 무력노선이 손을 잡고 힘을 합하였더라면 대한민국의 오늘의 모습은 훨씬 달라졌을 것이다.
국부 이승만 (國父 李承晩) (6) 2016-02-16
19세기말은 문명의 대전환기였다. 오랜 농경시대가 끝나고 산업사회로 들어가는 길목이었다. 그래서 온 세계는 변혁의 몸살을 앓고 있었다. 나라마다 문명의 전환기에 적응하느라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갔다. 미국은 남북전쟁을 끝낸 후 강대국으로 가는 길을 닦고 있었다. 유럽에서는 시민혁명에 불이 붙기 시작하여 나라마다 소용돌이에 휩쓸려 있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가장 발 빠르게 메이지유신을 1864년에 치르고 밖으로 눈을 돌리고 있는 때에 중국은 잠들고 있었다.
이런 시대에 양녕대군의 16대 손으로 소위 양반 중의 양반으로 태어난 이승만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속한 구체제에 머물고 있을 수 없었다. 그는 과거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시대가 바뀌면서 과거제도 자체가 폐지되었다.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그는 신학문으로 눈을 돌려 단발을 하고 영어를 배우고 미국식 민주주의를 배웠다. 그는 서재필 선생 등과 함께 민중을 깨우치는 운동에 몸을 담았다.
그는 조선 민중을 깨우치려고 신문을 만들고 조직을 결성하였다. 만민공동회란 대중조직이다. 그는 구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주의 세상을 만들려는 뜻을 품고 고종(高宗)을 폐위하는 거사에 참여하였으나 거사는 실패하고 그는 역적으로 체포되어 사형장으로 가야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는 끊임없이 사형장의 위협을 받으며 무려 5년 9개월을 옥살이를 하였다.
그런데 옥중에서 그는 기독교로 입신(入信)케 되었다. 기독교로의 입신은 그의 운명을 바꾸고 겨레의 운명을 바꾸는 큰 사건이 되었다. 그가 크리스천이 되자 열렬한 신도가 되어 옥중에서 무려 40명이나 전도하여 크리스천이 되게 하였다. 그래서 이승만을 통하여 많은 양반들과 고위직 사람들이 기독교로 입신케 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도서관을 세우고 죄수들을 위한 학당(學堂)을 열었다. 그는 감옥을 교실로 바꾸고 예배당으로 바꾸었다. 그를 통하여 예수를 믿게 된 많은 죄수들이 민족의 선각자들이 되어 겨레의 역사를 변혁시키는 일에 헌신케 되었다. 그는 옥중에서 대중을 깨우치는 글을 끊임없이 써서 <독립정신>이란 책을 출간하였다. 옥중에서부터 이승만에게는 두 가지 목표가 세워졌다. 평생을 두고 이를 위하여 삶을 바치게 한 목표이다.
첫째는 이 나라를 어떻게 하면 독립국가를 이룬 후 민주주의 국가로 세울 수 있을까 하는 목표이다.
둘째는 어떻게 하면 이 나라를 기독교 국가로 세울 수 있을까 하는 목표이다.
국부 이승만 (國父 李承晩) (7) 2016-02-17
청년 이승만이 조선을 떠난 것은 1904년 조선 정부의 반일특사(反日特使)로 미국으로 떠났다. 29세 나이 때였다. 그가 고국으로 돌아온 것은 1945년 해방공간에 독립투쟁의 영웅으로 돌아왔다. 70세 나이 때다. 40여년 세월을 그는 독립운동가로 미국-하와이-상해-미국을 떠돌며 지냈다. 한 때는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선생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과 갈등을 겪기도 하였다. 그는 일관되게 외교의 힘을 믿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이 막강한 군사력으로 밀려오던 때에 대한민국의 운명은 바람 앞에 등불 같은 처지였다. 한 때는 미국이 그의 정부를 일본으로 옮길 것을 권하였으나 그는 진해 앞 바다에 빠져 죽을지언정 조국 땅을 떠나지 않겠노라며 고집스레 버티었다. 그는 미국을 다루는 법을 알았다. 그는 영어에 능통하고 미국 정치의 생리를 꿰뚫고 있었기에 전쟁이 일어나자 신속하게 미국과 트루먼의 협조를 받아 낼 수 있었다. 그의 통찰력과 외교력이 힘을 발휘한 것이다.
그가 미국에 머무는 동안에 맥아더 사령관을 소령시절부터 일고 지나던 사이였다. 그래서 북한군이 밀려내려 오기 시작한 다음 날 새벽 3시에 도교에서 잠자고 있는 맥아더를 깨울 수 있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이룬 최고의 업적 중의 하나가 한미동맹의 체결이다. 미국이란 나라는 외국과 군사동맹을 맺기를 싫어하는 나라이다. 그러나 휴전을 앞두고 이승만의 북진통일에의 고집과 반공포로 석방 같은 행동을 달래기 위하여 미국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였다.
한미방위조약은 전쟁 후 한국이 잿더미에서 일어나는 데에 일등공신이 되었다. 한미동맹은 한국에는 축복이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경제성장 역시 이 동맹이 뒷받침 되었기에 가능하였다. 미국이 한국에서 손을 떼지 않은 것은 이승만의 한결같은 반공의지와 국내 통치력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이 이승만 대통령을 평하여 한 말이 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반공 지도자이다"
한미동맹은 미국에도 큰 유익을 주었다. 미국의 국가이익에 합하는 동맹이었다. 그 동맹으로 인하여 미국은 아시아에서 소련과 중국을 막는 튼튼한 방벽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미동맹은 현대 한국의 성장을 가능케 한 가장 효율적이고도 생산적인 역할을 한 동맹임을 증명하여 준다. 그러기에 이 동맹을 지켜 나가는 것이 앞으로도 한국과 미국에 공통으로 유익한 선택이 될 것이다.
국부 이승만 (國父 李承晩) (8)-이승만의 과오 (1) 2016-02-18
이승만 대통령의 탁월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국부로 추대 받는데 대한 반대가 강한 데는 이유가 있다. 2가지가 그 대표적인 이유이다. 첫째는 그가 친일파를 제거하지 못한 과오이다. 친일파를 제거하지 못한 정도가 아니라 때로는 옹호하여 마땅히 제거 되었어야 할 극단적인 친일행적을 한 인사들까지 신생 대한민국 정부의 요직에 등용하였던 과오이다. 이 점은 어떤 이유로도 변명할 수 없는 치명적인 과오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고 위대한 지도자였음을 강조하는 분들 중에서는 그의 친일파들을 옹호한 일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변명하는 분들도 있다. 그러나 이런 변명들은 부질없는 변명들이다.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정권시대에 친일세력을 비호한 과오에 대하여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책이다. 예를 들어 노덕술의 경우를 들어 보자.
노덕술은 친일파 중에 가장 간악하였던 인사였다. 일제시대에 일본형사의 앞잡이가 되어 교묘하게 독립운동지사들에게 접근하여서는 후에 일본경찰에 밀고하여 감옥으로 보내고는 그들의 아내를 겁탈하고 재산을 가로채는 등 악질 중의 악질 친일인사였다. 그런 그를 이승만 정권에서 수도경찰청의 간부로 채용하였다. 명분은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함에 그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노덕술은 자신의 일제시의 과오를 은폐하기 위하여 독립운동가를 검거하여 공산주의자로 만들기 위하여 고문하고 압박하는 노릇을 거침없이 행하였다. 급기야 한 독립운동 애국자를 과하게 고문하아 죽게 하였다. 노덕술은 고문으로 죽은 애국자의 시체를 한강에 버렸다. 후에 시체가 강변으로 나와 발견되어 반민족행위조사 특별위원회에서 조사에 들어갔다.
반민특위로 불리어진 빈민족행위자조사 특별위원회는 국회에서 제정한 법에 따라 일제시대에 과도하게 친일행위를 한 인사들을 색출하여 재판에 회부하기 위하여 세워진 기구였다. 반민특위는 그 애국자의 시체가 노덕술의 고문으로 죽은 시체임을 확인하고 노덕술을 구속하였다.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이 노덕술을 석방하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반민특위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호소하였다.
"대통령 각하 다른 자들은 몰라도 노덕술 만큼은 안 됩니다. 일제시대에 그러 악행을 일삼았던 자가 대한민국에서 은혜를 입어 중책을 맡게 되었으면 과거를 반성하고 바르게 일하여야지 일제시대의 자신의 과오를 은폐하기 위하여 애국자를 억지로 고문하다 죽게 한 자를 석방케 되면 새나라 대한민국의 민족정기가 세워지지 않습니다."
반민특위에서 이렇게 읍소하였으나 대통령은 경찰을 보내어 반민특위 사무실을 폐쇄하고 노덕술을 석방시키고는 복직시켰다. 그 후 노덕술은 경찰고위직에 있으면서 거침없이 하던 일을 계속하였다. 6.25 전쟁 때 그의 아들은 군대에 가지 아니하고 미국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아와서는 군사정권시절 정부의 요직에 발탁 되었다. 이런 일들이 우리 현대사의 부끄러운 한 단면이다.
대학생들이 이런 사례를 들어 의식화 교육에 자료로 사용하여 남한 정부는 반민족적인 반동정부이고 북한 김일성 정권은 친일 분자들을 철저히 색출하여 처벌하였기에 정통성 있는 정권이라고 그릇되게 가르치는 단서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런 사실들로 인하여 이승만 대통령을 국부로 세우는 일에 강력한 반대가 있어 왔다.
국부 이승만 (國父 李承晩) (9)-이승만의 과오 (2) 2016-02-19
이승만 정권이 범한 과오의 둘째는 부패와 독재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이승만의 신념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독재정권을 이끌었다. 그의 독재와 부패정권은 그가 장기집권을 도모하면서 뒤따랐다. 그가 4년 임기에서 2선만으로 멈추고 1956년에 물러났더라면 국부(國父)로 높임 받는데에 의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승만 박사는 3선을 위한 개헌을 강행하면서 민주주의의 기본을 짓밟았다.
그는 장기집권을 위하여 경찰력을 동원하여 국회를 유린하였고 사사오입이라는 변법을 사용하여 3선 개헌을 강행하였다. 어떤 이유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폭거였다. 평생을 민주주의를 외쳐온 그가 어떻게 그렇게 비민주적인 불법을 저지를 수 있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이다. 그렇게 무리한 결과로 결국 1960년 3.15 부정선거로 정권의 몰락을 가져 오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3선에서 라이벌은 조봉암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조봉암 후보를 북한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혐의를 씌워 사형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사법살인이었다. 조봉암 후보의 사형은 이명박 정권 때에 재심 판결을 통하여 무죄를 선언하였다.
3.15 부정선거에 대하여 국민적인 저항이 일어나 학생들이 항의 데모를 일으켰을 때에 경찰은 총격으로 진압하려 하였다. 많은 학생들이 죽고 다쳤다. 바로 4.19 유혈진압이다. 이승만 정권의 도덕성에 대한 치명적인 타격이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의 나이 85세였다. 이미 총명이 흐려져 판단력이 흔들린 나이였다. 자신의 부하들이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항의 데모를 유혈 진압하는 사정을 모른 체 있었다.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된 이승만 대통령은 부상당한 학생들이 입원하여 있는 병원을 찾아간 자리에서 말했다.
"학생들이 왜 이렇게 됐어?
부정을 왜 해?
암!
부정을 보고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지."
이승만 대통령은 학생들이 더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로 신속한 하야를 결단하였다. 1960년 4월 26일이었다. 분명히 이승만은 부정선거를 지시하지도 않았고 발포를 명령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책임은 그에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무리한 장기집권에서 온 결과이기 때문이다.
국부 이승만 (國父 李承晩) (10) 2016-02-20
앞의 글들에서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공과 과에 대하여 나 나름대로의 생각을 적었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치명적인 과오를 있는 그대로 지적하지만 그렇다고 국부 이승만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을 국부로 추대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승만의 국부론에 대하여는 자신의 정치적·이념적 성향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나는 이승만의 과오에도 불구하고 그를 국부로 추대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지금 김구 선생에 대하여는 백범공원이 있고 백범회관이 있을 만큼 대접하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의 경우는 그의 동상이 아직 땅 속에 묻혀 있다. 1960년 4월 19일에 일어난 4.19혁명 때에 무너뜨려져 땅 속에 묻히게 된 동상이다. 이제는 그 동상을 발굴하여 세종로 같은 곳에 국부 이승만의 동상을 세워야 할 때이다.
세계적으로 국부라 불리는 사람들은 근대 독립국가를 세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지도자에게 주어진다. 국부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미국의 조지 워싱턴, 남미의 볼리바르, 중국의 손문(孫文),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 터키의 케말 파샤 같은 분들이다. 문제는 이승만 박사처럼 치명적인 과오가 있는 인물도 국부로 추대 받을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터키의 건국 지도자 케말 장군의 경우 한 예가 될 것이다. 무스타파 케말(1881~1938)은 쿠데타로 왕조를 붕괴시키고 터키를 근대국가로 변모시켰다. 그는 갈리폴리전투에서 영국군을 물리쳤고 희랍의 공격에서도 나라를 지켰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후 그는 독재를 휘둘렀다. 언론을 탄압하고 야당을 해산시켰다. 소수민족 쿠루드의 반란을 무자비하게 짓밟고 쿠르드 지도자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럼에도 터키의회와 국민들은 그를 국부로 추대하고 "Ataturk", 터키의 아버지라 불렀다.
그간에 이승만 국부론에 대한 논란은 숱하게 있었으니 만큼 이제는 그를 국부로 부르는 일에 국론을 모을 때가 되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공과를 논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역할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지금 공산주의 체제 아래 살고 있었을 것이란 점이다. 이승만 박사의 통찰력과 투쟁과 외교력이 있었기에 이 나라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누리고 살고 있다는 점이다. 그 기반 위에서 세계 10위의 국력을 쌓아올 수 있었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국부 이승만으로 추대할 시기가 되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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