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자! (사 53:1-7/요 3:14-15)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3. 4. 13:05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자! (사 53:1-7/요 3:14-15)

 

우리는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렌트(Lent) 라고 하는 봄철이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사순절은 부활주일이 되기 전, 주일을 제외한 40일간으로 주님의 고난을 생각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기간입니다. 사순절이라고 하지만, 6번의 주일이 있기에 합하여 46일이 됩니다. 일년 동안의 여러 교회력에 따른 절기들 중에 주님의 죽으심과 고난을 생각하시면서 우리의 죄를 회개하고, 또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경건하게 지내는 가장 의미 있는 절기가 이 사순절입니다.
초대 교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무덤 속에 계셨던 금요일 저녁부터 주일 아침까지 약 40시간을 금식하였다고 합니다. 오직 예수님,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 후 40시간동안만 십자가를 생각하는 것은 너무 짧다고 하여 40일 동안을 사순절로 정하고 십자가만을 생각하며 살아 왔습니다.
40이란 여러 가지 귀한 의미가 있는 친근한 숫자입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간 금식 기도를 하셨고, 모세도 시내산에서 40일간 금식했으며, 엘리야 선지자도 40일 간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까지 40일간 이 세상에 계시다가 승천하셨고, 예수님이 무덤에 계셨던 시간도 40시간이라고 학자들은 말하고 있습니다.
사순절기는 교회의 아주 오랜 절기였습니다. 주후 325년 니케아 종교회의 문서에서도 사순절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으며, 유명한 교부 '아타나시우스'의 목회서신에도 사순절과 부활절기를 지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보면 교회의 아주 오랜 절기였음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이 절기가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하였으면 종교개혁자들도 이 절기를 버리지 아니하고 그대로 가지고 넘어온 것입니다. 신, 구교 할 것 없이 함께 지키는 절기가 사순절입니다.

▶먼저 십자가 이야기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어떤 목사님이 다방에 손님을 만나려고 가서 기다리는 데 다방 여자가 차를 가지고 왔는데 보니까 목에 십자가가 걸려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반가워서 "교회 다니시나요?" "아니요" "그런데 왜 십자가를 목에 걸었나요?" "예뻐서요" "십자가는 목에 거는 것이 아니라 등에 지는 것이예요" "가끔 십자가가 등쪽으로 갈 때도 있어요"
여러분! 가끔 십자가를 지는 것은 성도의 생활이 아닙니다. 항상 우리는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쫓아야 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16:24절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등에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했고, 마10:38절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모름지기 예수님의 제자는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문자적인 십자가 사형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첫째로 자기비하의 겸손으로 허리를 낮추고 섬기는 삶이요, 다음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은 십자가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결같이 복음의 증인으로 살다가 순교하였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끝으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남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알고 받아들이는 삶입니다. /할/ ◀제목소개!▶

 

독일의 수상 '아데나워'가 빌리그래함 목사님에게 "지구상의 역사 중에 가장 크고 중요한 사건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자 목사님은 "그것은 당연히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세계 인류가 '서기'를 사용하는 것도 주님 십자가 사건부터이고, '역사'라는 말도 "그 분의 이야기"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상의 모든 생애는 십자가에서 종합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신구약에서 나타나는 모든 하나님 사건의 요약입니다.
민21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그 많은 기적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원망하고 불평할 때에 갑자기 이스라엘 진중에 불 뱀이 여기저기 나타나 사람들을 물어서 독이 올라 쓰러져 죽게 되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살려달라고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불 뱀에 물린 자들이 다시 살 수 있는 방법을 지시해 주셨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놋뱀을 만들어 높은 장대에 매달아서 불뱀에 물린 자들이 쳐다보면 낫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놋뱀을 만들어 높은 장대에 매달아 뱀에 물린 자마다 쳐다보게 했더니 쳐다보는 자마다 신기하게도 뱀의 독이 사라지고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인용해서 요3:14-15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후 신구약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 요3:16절의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멸망'이란 '영생'에 반대되는 말인데 이 말은 단순히 죽어 없어진다는 뜻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 '영생'이란 '영원히 존재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영원한 행복'을 말합니다.
▶요3:14절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놋뱀이 장대에 높이 들린 것같이 예수님도 십자가에 높이 들렸습니다.
요12:32-33절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이렇게 말씀하심은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심이러라"

▶예수님이 높이 달리신 것은 '대속의 고난'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치루어야 할 죄의 값을 우리 대신 치루시기 위하여 모진 매를 다 맞으시고 양 발, 양손에 굵은 쇠못이 박혀 장장 6시간 동안이나 고통을 받으시며 마지막에는 피를 다 흘리시고 창에 찔려 물까지 다 쏟으셨습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고 외치셨는데 이는 "죄의 빚을 다 갚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죄는 사망인데 피는 곧 생명이라고 했습니다.
레17:11절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고 죄를 씻는 유일한 원리를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53장의 중요성을 먼저 알아보자!

히브리서를 신약 속에 구약이라고 한다면, 이사야서는 구약 속에 신약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중에서도 특별히 53장은 신약 중에 신약이요 예수님에 대한 예언 중에 예언입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을 받으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내용을 가장 많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여호와의 종의 노래"라고 알려진 부분이 네 군데 있습니다(사42:1-7; 49:1-9; 50:4-11; 52:13-53:12). 여기에 그리스도께서 종으로 오셔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신다는 내용이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그리스도가 오셔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시는 내용을 가장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내용이 이사야 53장입니다.
신학자 켐벨 몰간은 '이사야 5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상화다'라고 말했고, 신학자 델리취는 '이사야 53장은 골고다 십자가의 현장이다'라고 말했으며, 칼빈은 '이사야 53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력서다'라고 말했습니다.
구약학자인 '에드워드 영' 박사는 본문의 제목을 '골고다'라고 정했습니다. 이것은 골고다에서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골고다라는 말은 아람어인데 이것이 영어에서 갈보리(Calvary)로 번역되었습니다. 골고다에서 있었던 사건의 핵심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를 위한 화목 제물로 삼으신 것입니다.
기독교의 중심은 십자가입니다. 그런데 십자가의 본질은 '대신'입니다. 우리가 당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지신 것입니다.

 

▶1절: 믿지 않고 능력을 의심한 것을 보시고 탄식하십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능력)이 뉘게 나타났느뇨."
하나님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 거룩하신 팔을 나타내셨습니다.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 신앙 때문에 메시야를 영접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실을 사도 요한은 요1:10-11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에게서조차도 버림을 당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종교 지도자들이었던 대제사장, 장로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는 종교 지도자들로부터도 버림을 당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고향 사람들로부터도 배척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탄식 가운데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선지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도다."

 

▶왜 예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조차도 배척을 당하셨습니까? 이사야 선지자는 그 이유를 2절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우리 예수님의 외모가 너무 초라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연한 순 같이 나약해 보이셨습니다. 마른 땅에서 겨우 나온 줄기처럼 아무런 힘이 없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고운 모양도 없었고, 위풍당당한 풍채도 없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우러러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인간적인 매력이 전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리켜서 "저가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마리아의 아들이 아니냐? 무슨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겠느냐?"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초라한 모습 때문에 예수님을 그저 별 볼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사람들은 외모를 봅니다. 형편을 봅니다. 혈연을 보고, 지연, 학연을 보고, 인격을 보고 조건을 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우리 예수님의 모습은 영 '아니올시다'입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 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문등병자 취급을 한 것) 우리도 그를 귀히(메시야로 보지 아니했다)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싫어 버림받으셨습니다. 빌라도의 법정에서 빌라도가 사람들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살인강도 바라바를 놓아주랴? 그렇지 않으면 예수를 놓아주랴?" 사람들은 일제히 소리를 질렀습니다. "우리에게 바라바를 놓아주소서!"
예수님은 심지어 살인강도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셨습니다. 멸시를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에게 싫어 버린바 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간고를 많이 겪으셨습니다. 온갖 질고를 다 당하셨습니다.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손바닥으로 예수님의 뺨을 때리면서 희롱했습니다. 갈대로 예수님을 치면서 희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사람들의 외면과 멸시 속에 죄인 취급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까지도 앞을 다투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희롱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든, 그리스도이든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네 자신이나 한 번 구원해 보아라!"
예수님은 이처럼 사람들에게서 멸시를 당하시고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셨습니다. 어디 그것뿐입니까?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고통 가운데서 절규하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서만 버림을 받으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 위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도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버림을 받으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버렸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건축자들이 버린 돌을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예수님을 지극히 높여주셨습니다. 그리해서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하여금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 앞에 꿇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입으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시인케 하셨습니다. 문자 그대로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사람들에게서 버림을 받은 자가 오히려 인류 사회의 큰 기여를 한 예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만유인력으로 잘 알려진 '아이삭 뉴턴'은 학교에 다닐 때 늘 꼴지만 도맡아 하던 열등아였습니다. 놀림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발명왕 '토마스 에디슨'은 어떠했습니까? 선생님에 의해서 "너 같은 멍텅구리는 내가 가르칠 수 없다!"고 해서 학교에서 쫓겨남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그 어머니가 대신 에디슨을 가르쳤습니다.
음악가 '베토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음악 선생님으로부터 "너는 음악에는 전혀 소질이 없는 아이야!"라는 핀잔을 받았던 아이였습니다.
디즈니랜드를 만들었던 월트 디즈니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시 그는 신문기자였습니다. 그러나 아이디어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해고를 당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아이디어를 내서 디즈니랜드를 만들었습니다.
이들 모두가 다 버림을 받은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 오히려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때로는 배운 것이 없고, 가진 것이 없고, 못생겼다고 버림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면서 주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오시기 바랍니다. 나보다도 먼저 버림을 받으신 예수님, 철저하게 버림을 받으신 예수님이 나를 굳세게 붙들어 주셔서 나로 하여금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4절에 보면, 인간의 무지 때문에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왜 그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조차도 앞을 다투어서 예수님을 희롱했습니까? 예수님이 우리의 질고를 대신 지셨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슬픔을 대신 당하셨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이 자신의 잘못으로 징벌을 받고, 하나님에게 매를 맞으며 그것 때문에 고난을 당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5절: 왜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나요? 나 때문에 내 죄 때문에 우리 주님이 대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①우리의 허물 때문에 예수님이 대신 찔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대신 찔리셨습니다. 허물이 무엇입니까? 모르고 지은 죄를 허물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모르고 지은 죄까지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찔리셨습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사실 모르고 지은 죄가 더 많습니다. 완전한 용서를 위하여 예수님이 우리의 허물까지도 가지고 죽으셨습니다.

②우리의 죄악 때문에 대신 상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려고 죽으신 것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죄인은 죽어야 합니다. 우리가 죽어야 할 것을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입니다.
여기서 죄와 죄악은 약간 다릅니다. 죄는 우리가 죄인줄 알면서 인간이 약해서 끌려가는 것이지만, 죄악은 죄 인줄 알면서 자기 욕심을 채우려고 계획하고 준비한 범죄입니다. 과실치사와 음모살인은 형량도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 값으로 죽어야 할 것을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셨습니다. 바로 내 죄, 한 사람 한 사람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셨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본질입니다.

③우리에게 평안을 주시려고 그가 대신 징계를 당하셨습니다.
4절에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다고 했습니다. 인생을 고뇌요 슬픔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지시고 죽으시면서 우리의 슬픔을 다 당하셨습니다.
그분은 지금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들을 다 오라고 하십니다. 왜? 평안을 주시려고!
요14:27절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백낙준 박사님의 간증입니다. 그는 연세대학교 총장을 지내셨고, 교육부장관까지 역임하셨습니다. 그 분의 아버지는 백사경인데 점 잘 보기로 유명한 장님이었습니다. 얼마나 점을 잘 쳤던지 소문난 점쟁이가 되어 엄청난 돈을 벌어 드렸습니다. 얼마나 돈이 많던지 장님인 데도 첩까지 두고 떵떵거리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목사님이 전도지를 한 장 주면서 말하기를 "당신의 영혼과 당신의 후손을 위하여 예수를 믿어야 합니다. 점쟁이는 좋은 직업이 아닙니다. 죽으면 지옥갑니다"
백씨는 호통을 치면서 그 전도자를 내쫓아 버렸습니다. 그래도 전도자는 주머니 속에 전도지 한 장을 넣어주고 "예수님을 믿어야 당신과 자식들이 복을 받습니다" 말 한 마디를 남기고 떠났습니다. 그 후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이 말 한 마디가 영영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사실은 거짓말로 점을 칠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누가 무어라 하지 않아도 양심을 항상 그를 괴롭혔습니다. 그리고 첩을 두고 사는 것이 항상 마음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는 그 전도자가 한 말이 자꾸만 생각이 났습니다. '당신과 당신의 후손을 위하여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라는 말이 양심의 가책이 그를 괴롭히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파서 눕게 되었습니다. 신음 중에 전도자가 준 전도지 생각이 났습니다. 부인에게 꺼내주며 읽어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 죽으셨으니 우리는 죄에서 해방되어 의롭게 되었다"는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내 모든 죄를 용서받을 길이 여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고민하고 있는 문제가 예수님을 믿으면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이 섬광과 같이 빛났습니다. 그는 교회로 찾아갔습니다. 목사님과 온 교우들은 점쟁이 백사경씨가 교회를 왜 찾아 나왔는지 의아해하였습니다. 도무지 올 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가 회개하고 예수 믿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 후 백씨는 점치는 일을 그만 두었습니다. 그 동안 거짓말로 점을 쳐서 번 돈을 모두 정리하여 교회를 지었습니다. 모두 헌금하였기에 가난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미국인 선교사가 들었습니다. 재산을 다 털어 교회당을 짓고 가난하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미국인 선교사가 백씨 식구들을 교회에서 사찰로 봉사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식구들을 유달리 사랑하였습니다. 그 때 백 낙준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 보내어 연대 총장, 교육부 장관이 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하여 십자가를 진 사람은 그 가정의 모든 슬픔을 예수님이 대신 지어 주십니다. 더 많이 주십니다.
우리가 예수를 바로 믿으면 자유함을 누리게 됩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④우리의 질병을 고치시려고 대신 찔리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면서 질고 즉 병을 짊어지셨습니다. 우리의 죄만 짊어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마8:17절에서 마태는 오늘 본문을 들어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예수님은 우리의 병도 짊어지셨습니다. 그래서 채찍에 우리 대신 맞으셨습니다.
출15:26절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 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
마4:24절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6절을 보면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라고 했습니다.
우린 6절에서 두 가지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첫째는, 우린 철없는 양처럼 그릇 행하였고 제멋대로 살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아왔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멋대로 죄짓고 멋대로 놀고 멋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저명 인사 12명에게 발신인의 주소와 이름을 밝히지 않은 채 다음과 같은 똑같은 내용의 전보를 보냈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드러났다. 빨리 도망가라." 그리고 그 다음날 전보를 보낸 열 두 사람의 집을 찾아가거나 전화를 걸어 보았더니 열 두 사람 모두 집을 떠나 어디론가 도망쳤더라는 것입니다.
이 지상에 살고 있는 모든 인간은 너나를 가릴 것 없이 그릇 행하고 있고 그릇 살고 있고 제멋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의 결과도 결국은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우리에게 담당시키시지 않으시고 예수님에게 담당시키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대속의 절정입니다.
4절에서는 질고를 져 주시고 슬픔을 당해 주셨다고 했고, 5절에서는 징계를 대신 받아 주셨다고 했으며, 6절에서는 죄악도 대신 담당해 주셨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로 주님은 내가져야 할 모든 나쁜 것들을 대신 져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나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의 백인들이 서부를 개척할 당시였습니다. 어느 마을에 있는 인디언들을 쫓아내야 되겠는데 쫓아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 때 인디언들은 넓은 평원에 대규모의 옥수수 밭을 만들어 놓고, 그 한복판에 장막을 치고 살았습니다.
백인들은 그들을 쫓아내기 위해서 양 사방에 큰불을 질렀습니다. 불길이 점점 타들어 오기 시작합니다. 이제 한 두 시간만 지나면 그 불길이 마을까지 번지게 되었습니다. 너무나도 불길이 거세기 때문에 어느 방향으로든지 뚫고 나갈 수가 없습니다.
인디언들은 모두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노인 한 사람이 마을 사람들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마을에서 100발자국 떨어진 곳에 불을 질러라! 운동장 크기만 하게 불을 질러라!" 사람들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불 때문에 죽을 지경인데 또 불을 지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노련하고 경험이 많은 노인이 하는 말이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순종해서 마을에서 100발자국 떨어진 곳에 불을 질렀습니다. 드디어 불탄 자리가 운동장 크기만 하게 되었습니다. 노인은 또 마을 사람들을 향해서 외쳤습니다.
"이제는 모두가 그 불탄 자리 위에 올라서라!" 왜 그랬겠습니까? 노인은 경험적으로 한 번 불에 탄 자리는 두 번 다시 불에 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을사람 모두가 불탄 자리 위에 올라서서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다 담당하시고 속죄제물이 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죄 값을 우리 스스로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두 번 다시 결코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우리의 죄 값을 다 지불해 주셨고, 우리를 죄에서 자유케 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7절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깎는 자 앞에 잠잠한 양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곤욕을 당하셨습니다. 그 누가 보더라도 그 법정은 불의한 법정이었습니다. 억울한 재판을 당하시는 예수님은 얼마나 괴로우셨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입을 열지 아니하셨습니다. 한 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침묵을 지키셨습니다.
우리도 입을 열 때가 있어야 하고 입을 침묵할 때도 있어야 합니다.
▶기도에 입을 열어야 하고, 감사와 찬송의 입을 열어야 하고, 복음을 전하는 입을 열어야 합니다. 그러나 ▶원망하거나 불평의 입은 열지 말아야 하며, 자기 자랑의 입도 삼가야 합니다. 남을 헐뜯고 흉보는 일도 믿음의 사람들은 하지 말아야 하고, 부정적인 불 신앙의 말은 입밖에도 내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있는 모든 나쁜 것을 가져가시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셨습니다. 아이에게 고기를 먹이면서 어머니는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고기 대가리를 좋아한단다" 이것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아이들이 자란 후에 "우리 어머니는 고기 대가리를 좋아한다"고 미련한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왜 우리의 나쁜 부분을 다 담당하셔야만 했는지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마11:28-30절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시68:19절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시68:20절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피함이 주 여호와께로 말미암거니와"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연약한 것을 담당하셨습니다. 슬픔과 질병도 허물과 죄악의 짐도 담당했습니다. 우리가 받을 진노와 죽음을 담당했습니다. 우리 스스로 질 수 없는 짐을 예수님이 대신 지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고침과 사죄와 평안과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할/   (2004년 3월 28일 대예배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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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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