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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부활의 영광(고전15:50-58) / 서은철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4. 2. 06:56

그리스도의 재림과 성도부활의 영광 고전15:50-58

                                                                             서은철 목사 설교

주신 말씀 고전15:50-58절을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광과 궁극적 승리]에 대해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함께 은혜 받는 시간되시기 바랍니다.

먼저 50-53절에서 주님께서 천군 천사들의 나팔 소리와 함께 세상에 재림하시면, 이미 죽은 성도들이 생명의 부활에 참예하여 다시는 썩지 아니할 새로운 몸으로 살아나고, 그때 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성도들은 “영생의 부활”에 참예하여 신령한 몸으로 순식간에 변화될 것이라 합니다.

54-57절에서는 그리고 그렇게 되면 아담의 범죄 이래로 인류를 끝없이 지배해오던 사망의 권세가 더 이상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게 됨으로써 , 결국 성도들은 완전한 승리를 누리게 될 것이라 합니다.

58절에서는 성도들이 부활의 영광에 참예하고 궁극적 승리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 현실적으로 여전히 죄악과 죽음의 고통에 직면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부활의 영광을 누리고 사망의 권세를 누리게 될 성도들이 현실적으로 불신자들과 별로 다를 것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더라도 결코 낙심하지 말고 믿음과 소망 가운데 굳게 서서 주님의 일에 더욱 열심을 내면 반드시 자신의 수고에 합당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 성경의 약속이며 핵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누리게 될 부활 신앙이란 그저 미래에 일어날 종말론적 사건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매일 매일 직면하는 현재의 삶의 원동력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광과 궁극적 승리를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재림신앙은 생명의 부활 영생의 부활에 참예하게 된다(50-53)

50절에서 혈과 육과 하나님 나라, 썩은 것과 썩지 아니한 것이 대립되고 있습니다. 즉 혈과 육 썩은 것은 불완전하여 죄 아래 있는 것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인 반면, 하나님 나라 , 썩지 아니한 것은 완전한 것이요 거룩한 것이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장차 썩어질 현재의 육체를 가진 상태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성도이기에 지금이라도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지 않는지요?

그러나 거듭난 것은 우리의 몸이 아니라 영입니다.

우리의 몸은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도 여전히 죄 아래 있을 때의 그 몸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의 몸을 가지고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즉 현재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 상태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신분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썩어질 현재의 육신을 벗고 썩어지지 않을 새 몸을 입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이 육신을 벗을 수 있으려면 죽음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영은 살아있는 동안에는 밀접하게 연합되어 있어서 결코 분리될 수 없습니다. 오직 죽음으로만 우리의 몸과 영이 분리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의 몸을 벗으려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이며, 죽는다고 해서 곧 바로 새 몸을 입는 것이 아니라 새 몸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날 받아 입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 몸을 입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하는 것이기에 죽음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위한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죽음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것의 끝도 아니요 불행도 아닙니다. 그것은 영원한 복과 소망의 시작입니다.

죽음이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기에 죽음을 기쁨으로 맞이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기 위한 과정임을 기억하여 그것을 기쁨과 소망으로 맞을 수 있는 믿음과 소망을 담은 성숙한 신앙인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51-52절은 예수님의 재림 때에 일어날 현상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보라(ίδού)는 자신이 향후 언급할 말을 강조하면서 관심을 집중하라 합니다.

비밀(μυστήριον)은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에 대한 감추어진 진리를 뜻하므로, 복음의 비밀은 곧 종말론적인 진리를 뜻하는 것으로 사람들에게는 감추어져 있고 오직 하나님의 주권 하에 있는 것입니다.

종말론적인 진리라는 것은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라 마지막 나팔 소리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살아있는 자들은 살아있는 상태에서 바로 새로운 몸으로 변화할 것이며, 동시에 죽은 자들 역시 죽어 썩어진 몸의 상태에서 완전히 다른 몸으로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잠 즉 죽음은 종말의 때에 모든 사람에게 다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지만, 몸의 변화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알리는 마지막 나팔이 울리면 모든 사람에게 다 일어나는 사건이 됩니다(마24:31,계8:2).

즉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에는 살아있는 자들이나 이미 죽은 자들이 모두 그들의 상태와 상관없이 변화된 새로운 몸으로 주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지구상의 모든 사람 곧 죽은 다들이든지 아니면 산자들이든지 변화받지 않고서는 이 종말론적이며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52절에 ‘ 순식간에 홀연히(έν άτόμω έν ΄ριπή όφθαλμού)’와 마지막 나팔(ένν τή έσχάτη σάλπιγγι)이 원문에는 52절에 포함되어 있어 52절 전체를 수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마지막 나팔(이라ένν τή έσχάτη σάλπιγγι)는 묵시적 표현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재림을 알리는 표징으로 , 일종의 종말론적 신호라 할 것입니다.

살전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하시리니” 라고 언급하듯이 종말의 때는 정확히 언제인지 알 수 없지만 , 이 사건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모든 사람이 알 수 있도록 공개적이고도 영광스럽게 진행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살고(έγερθήσονται) 변화하리라(άλλαγησόμεθα)는 공히 미래수동태로써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다름 아닌 하나님께서 주도권을 가지고 죽은 자들의 몸의 부활을 일으시킬 것이라는 진리를 함축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ήμείς)는 직접적으로 바울 자신과 고린도 교인들을 가리키는 말로써 주님의 재림 때에 살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포함합니다.

바울 사도는 사망권세가 완전히 꺽이우는 날이 반드시 이를 것이요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바로 그 때라는 것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활신앙은 마라나타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는 바로 재림신앙으로 가서 재림하실 예수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53절에서는 구원의 최종단계는 부활체를 덧입는 것이라 합니다.

여기서 입는다(ένδύσασασθαι)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행위와 아울러 종말론적 영광을 묘사할 때 주로 사용되는 단어로써 썩을 몸과 죽을 몸이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창조 행위를 통해 썩지 않을 것과 죽지 않을 것으로 변화될 것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동시에 그러한 변화를 통해 입게 될 , 더 이상 죽음의 세력에 굴복당하지 않을 새로운 몸에 대한 기대를 점증시켜 줍니다.

영혼이 사람의 몸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갖는 것은 기독교적이 아니라 차라리 불교적인 해탈의 개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완전하고 타락하고 저급한 사람의 육신이 고결하고 거룩한 영혼을 포로로 잡고 있다고 생각한 헬라 사람들은 영혼이 육신에서 벗어나는 것을 구원으로 여겼던 것으로 성경적이지 않고 바른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몸을 벗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몸을 덧입는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영과 육의 분리나 혹은 해탈을 구원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영과 육의 분리는 죽음이므로 영이 몸에서 분리되는 것을 구원이라 하지 않습니다.

물론 우리 성도는 죽을 때 비록 몸은 썩으나 영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최종단계는 아닙니다. 완전한 구원은 영과 육이 함께 받는 것이며 그것은 장차 우리의 영이 부활체를 덧입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장차 우리가 입게 될 부활체는 현재의 몸과 확연히 다르지만, 사실 그 몸은 현재의 몸이 변화하여 되는 것입니다.

부활체는 우리의 현재의 몸이 썩거나 그대로 있거나간에 현재의 몸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 그 현재의 몸이 하나님의 영광을 덧입음으로 완전하고 영광스럽게 변화된 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현재의 몸도 사랑하고 귀중히 여겨야 합니다.

현재의 삶을 귀중히 여겨 열심히 살므로 현재의 이 몸에 하나님께서 영광을덧 입혀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광과 궁극적 승리를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둘째로 사망 권세를 이기고 완전한 승리를 누리리라 (54-57절)

부활은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기에 확실성을 지닙니다.

사25:8“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한 것은 바울의 주장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부활은 사도 바울의 개인적인 주장이 아니라 바울 전 800여년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신 약속인 것입니다. 이사야 역시 부활에 관한 언약이 자신의 개인 생각이나 주장, 혹은 고안이 아닌 하나님이 친히 하신 말씀임을 철저히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활은 반드시 실현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비나 눈과 같아서 촉촉이 대지를 적신 비는 땅으로 하여금 싹을 튀우게 하고 식물이 자라게 하고 꽃피고 열매 맺게 합니다.

해서 파종하는 자에게 씨를 주고 인류에게 양식을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비와 같다는 의미가 단 한마디의 말씀도 유실되는 법 없이 온전히 성취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됩니다.(사55:11)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 그것을 이루는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활 역시 하나님이 말씀하셨으니 반드시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그 약속에 따라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기에 바울 사도가 집요할 정도로 부활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자는 부활을 역사적 사실로 믿고 장차 주님께서 재림하실 것을 믿는 재림신앙으로 무장하게 될 줄 밉습니다.

55절은 사망에 대한 승리의 개가를 높이 부를 수 있어야 참 성도라 합니다.

55절 말씀은 힘이 되는 노래이며 말씀을 하게 된 것은 사망의 권세가 완전히 힘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망에 실제적인 힘이 남이 있다는 것입니다.

죄 없이 의롭게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죄가 전혀 없다고 할 수 없어 의롭게 사는 사람조차 죽을 수 밖에 없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많은 핍박과 환난을 당하여 더 많은 성도들이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이런 노래를 부를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재림의 나팔이 울려날 때 사망이 그 입을 벌려 죽은 자들을 다 토해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노래는 호세아가 노래한 것입니다.(호13:14)

사망이 완전히 패배하고 무력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요, 믿음의 눈을 바로 뜨고 보기만 하면 얼마든지 보이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 사망이 완전히 패망하고 무력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신 것이요 ,믿음의 눈을 바로 뜨고 보기만 하면 얼마든지 보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을 때 아무런 거리낌 없이 바치려고 한 것은 암몬 족속의 몰렉우상을 섬기는 정도가 아니라 그가 부활을 믿었기 때문이라 합니다. (롬4:17)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친 행위는 하나님을 향해서는 철저한 순종과 믿음의 행위요, 사망의 권세를 향해서는 사실상 무기력을 마음껏 조롱한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기 위해서는 죽음을 향해 승리의 개가를 부를 수 있어야 될 줄 믿습니다.

말로는 자기가 성도라고 아니 중직자라고 하면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고 공포스러워하고, 저주하고, 담대함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사망의 권세에 대한 자신의 자세를 분명히 하시기를 부탁합니다.

57절 말씀처럼 성도의 최후 승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습니다.

성도는 사망 권세를 이기시고 반드시 최후승리를 얻게 되어있습니다.

우리가 사망권세를 물리치고 최후 승리를 얻게 될 것 이라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자주 넘어지는 것은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극대화하여 백날 천날 자신을 바라본들 구원의 여망이 있나요 승리의 소망이 있을까요? 그 누구도 구원의 여망이 없습니다.

이렇게 절망적인 인간이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디에도 사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입니다.

승리를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신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승리가 되셔서 세상을 이기셨고 사단의 시험도 이기셨고 사단의 공격도 받아 내셨습니다. 십자가의 부활로 사망권세도 이기셨습니다. 바울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요 우리를 대신한 승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지고 날마다 실패하고 날마다 절망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날마다 이기시고 부활로써 날마다 승리하시고 개가를 부르십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더욱 우리 구주 예수님을 바라보며 승리의 노래를 즐겁게 부르시길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광과 궁극적 승리를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셋째로 주마가편의 신앙으로 요동치 말고 날마다 성장하라 (58)

58절에서 바울 사도는 사랑 가득한 음성으로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 믿음에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 것을 선포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가 흔들리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시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지 아니 하시리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악인에 관해서는 흔들리든지 바람에 날리든지 상관하지 않으십니다.

가끔 교회 내에서도 악인이 복을 받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되는데 시류를 따라 조변석개 하며 이익을 찾아 불나방처럼 떠도는 사람들을 싫어합니다.

하나님은 성도를 의로운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시고 우리 곁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두려움과 고난 속에서 처박아 놓으시고 흔들리고 요동한다고 욕하고 정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극한의 역경속에서 관심과 사랑과 보호의 손을 결코 놓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고 계시기에 오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하신 오른팔로 우리를 붙잡고 계시기에 머리털 한 올 까지도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지키시고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주의 일에 항상 힘쓰는 자들이 되게 하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든지 성과를 올렸든지 결코 그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업적을 한 일을 계산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받기 위해 열심히 경주하는 자입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열심히 하고 있지만 달리는 말에 채찍을 가하듯이 그런 심정과 각오로 더욱 열심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험이 찾아오는 것은 한가할 때입니다. 일손을 놓을 때입니다.

그러나 시간적인 갭을 없애고 말씀 전도 예배 봉사에 집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의 선물을 받게 될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성도들이 누리게 될 영광과 궁극적 승리를 얻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첫째로 재림신앙은 생명의 부활 영생의 부활에 참예하게 된다(50-53)

둘째로 사망 권세를 이기고 완전한 승리를 누리리라 (54-57절)

셋째로 주마가편의 신앙으로 요동치 말고 날마다 성장하라 (58)

사망은 죽은 자를 내어 주게 되어 있지만,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그 일을 시작하여 예수님의 재림과 동시에 실현될 줄 믿습니다.

이 땅에서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귀한 성도님들과 그 가정 되시길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