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수*이동원 목사+목사님들설교

[스크랩] 역경의 때를 지나는 레슨(느 5:6-13) / 이동원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4. 7. 12:01

역경의 때를 지나는 레슨/느 5:6-13

 

                                                                                                              출 처| 이동원목사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는 "IMF때 보다 더 어렵다"는 것입니다. 정부에서는 결코 위기가 아니라고 강변하고 있지만 세간의 극심한 체감경기를 반영하는 지표라 할 수 있는 실질 국민소득(GNI)의 금년도 1.4분기 결과만을 놓고 보면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8%나 줄어든 것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경제학자들의 평가를 빌리면 우리는 그동안 벌어놓은 돈을 곶감 빼먹듯 까먹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제지표이상으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국민들 사이에 광범하게 유포된 불신증후군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그 누구도 아무것도 믿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부도 여당도 야당도 회사도 은행도 학교도 선배도 후배도 더 이상의 내일의 희망도 믿을수 없다는 것입니다. 아니 이제 우리는 우리자신도 더 이상 믿지 못하게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번에 온 국민에게 충격을 던진 이 나라의 대표적인 재벌회장의 자살은 엄격하게 말하면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이 직면한 총체적인 위기의 상징이었는지 모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우리 모두가 그를 죽인 것입니다. 그의 자살은 우리의 자살이었던 것입니다. 이와같은 역경의 때에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일까요?

 

주전400년경 느헤미야라는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민족재건의 역사적 소명을 깨닫고 조국에 돌아와 예루살렘 성벽을 쌓으며 일하던 시점에서 그 역시 바로 이런 절망을 경험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유대민족이 직면한 절망적 위기는 본문에 의하면 몇 가지 요인으로 분석될수 있습니다.

첫째는, 기근 다른 말로 하면 흉년 때문이었습니다.(3절)

둘째는 과도한 세금징수 때문이었습니다.(4절)

셋째는, 과도한 이자놀이 때문이었습니다.(5절--갚을 수 없는 이자 때문에 자식들까지 종으로 잡혀야 했습니다)

 

백성들은 절망속에 부르짖으며 삶을 포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역경의 때에 우리는 믿음의 지도자 느헤미야가 시대적인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보여준 모범에서 레슨을 배우고자 합니다. 도대체 이런 때에 우리가 배워야 할 역경의 때를 지나는 레슨- 무엇입니까?

 

 

1.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시대적인 불안과 절망에 대하여 느헤미야가 제일 먼저 보여준 반응은 분노였습니다. 어쩌다 우리 나라가 이렇게 되었는가, 혹은 어쩌다 우리 사회가 이렇게 되었는가 라는 분노이었을 것입니다.

 

본문이 시작되는 6절을 보십시오.

"내가 백성의 부르짖음과 이런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했습니다.

 

저는 느헤미야의 분노를 공감하고 싶습니다. 저라도 그런 상황에서 분노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입니다.

어떻게 분노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성경은 결코 분노 그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분노를 통제 못하면 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노 그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거룩한 분노, 의로운 분노는 종종 새 역사 창조의 에너지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분노하되 죄를 짓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분노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분노만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피상적인 생각이 아닌 진지한 생각이었습니다.

7절의 말씀을 보십시오. "중심에 계획하고--"라고 기록합니다.

이 말은 본래 "자신의 생각속에서 자기 자신과 의논했다" 혹은 "자기 마음과 의논했다"는 말입니다. 분노가 감정이라면 이 단계는 생각인 것입니다.

 

한국학을 연구하는 이들은 한국인의 장점이 그 끈근한 정서감에서 나온 것이라면 한국인의 약점 역시 지나치게 감정적인데 있다고 지적합니다.

 

따라서 한국인의 이런 약점이 보완되기 위해서는 보다 진지하게 생각하고 사고하는 습관이 있어야 하겠다는 것이 공통적인 지적입니다.

 

함석헌 선생께서도 그가 평생을 통하여 민초들에게 호소한 일관된 메시지 하나가 있었다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적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 생각은 그냥 주관적인 내 생각의 수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는 조용한 생각이어야 합니다.

 

조용한 호수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만납니다.

조용한 호수에는 자신의 투명한 얼굴이 보이고 또한 하늘이 보입니다.

깊고 조용한 사고 안에서 비로서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보고 또 그런 자신을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오거든 역경이 오거든 먼저 침묵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러져 생각을 시작하십시오. 깊이 생각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2. 죄를 직면하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모든 고난이 죄로 말미암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고난은 분명히 죄로 말미암은 것일 수가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민족의 고난의 현실을 직시하면서 이 고난이 초래된 원인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원인이 백성들 가운데 만연한 죄들 때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고 그 죄들을 직면하기로 했습니다.

 

이 죄의 표면적인 현상은 백성들 사이에 만연된 이자놀이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고이율의 이자놀이의 결과로 인간이 인간을 사고 파는 노예화의 현상을 직시하며 여기까지 가게 된 원인은 더 깊은 곳에 있다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그가 진단한 보다 본질적인 원인은 9절에 밝혀져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을 경외함에 행할것이 아니냐"

다시 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일을 행하고 있다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돈을 빌려주는 행위 그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은행은 비성경적인 기업행위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고이율의 이자를 부과하여 어려운 이웃들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것이 죄라고 지적하며 꾸짖는 것입니다.

 

죄를 죄라고 인정하고 고백하는 용기-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질수 있는 가장 고상한 용기라고 할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잘못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잘못을 잘못으로 인정하는 용기가 중요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적 문화권의 영향이 짙은 사회일수록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하십시오"(I'm sorry./Forgive me)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나누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한국사회에 복음적 영향이 아직도 극소하다는 것은 우리 문화가 아직도 '오리발 문화'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른 어떤 민족보다 사과에 인색합니다. 우리는 용서를 먼저 청하는 것을 약자라고 오해합니다. 그러나 진정한 강자, 진정 성숙한 자는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할줄 아는 사람입니다.

 

죄가 보편적인 인생의 실존이라면 죄를 인정하는 용기야 말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양식이어야 할 것입니다.

 

옛날 독일 프러시아 제국의 프레데릭 대왕은 아주 지혜롭고 경건한 믿음을 가진 왕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한번은 감옥을 방문해서 죄수들에게 물었다고 합니다.

 

"무슨 죄로 들어 왔는가?"고.

모두가 억울하게 들어온 사람들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청년이 자기 죄를 시인하며 자기는 벌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하더랍니다.

 

그러자 프레데릭 왕은 이런 유명한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저 죄인을 밖으로 내보내시오. 그래서 이 곳에 계신 저 순결하고 무죄한 분들에게 오염이 되지 않도록 하시오."

 

그렇습니다.

죄는 인생의 실존입니다.

그러나 죄를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의 용기이어야 합니다.

 

성경이 다윗을 가르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말한 이유중의 하나가 그가 자기의 신하였던 나단 선지자에게 잘못을 지적 받았을 때 왕의 보좌에서 내려와 "내가 과연 그 사람이라. 내가 범죄 하였다"고 고백할 수 있었던 용기 때문이 아니었습니까?

 

역경의 시간은 자기 성찰을 요구하는 깊은 생각이 필요한 때입니다.

그리고 주께서 우리에게 죄를 지적해 주신다면 이제 우리는 이런 때에 우리의 죄를 직면하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저는 자살을 선택한 재벌회장께서 차라리 스스로와 기업의 연약함과 남북 경협과정에서 어쩔수 없었던 허물을 정직하게 밝히고 국민의 용서와 심판을 구하는 진정한 용기를 발휘했더라면 우리사회의 발전에 더 크게 기여했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마음을 갖습니다.

 

 

3. 주께 서원하는 결심을 필요로 합니다.

성경적으로 진정한 회개는 단순히 죄를 인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죄를 회개했으면 죄에서 떠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떠남, 이런 진정한 변화를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구약시대 에서부터 서원을 실천해온 전통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신약성경은 헛된 맹세를 삼가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맹세나 서원자체의 무의미를 말하지 않습니다.

저는 오히려 오늘의 우리 시대에서는 이런 서원의 전통이 회복될 필요가 있다고 믿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아직 한번도 하나님 앞에 서원도 못해본 분들이 계시지 않습니까? 특별히 고난의 시간, 역경의 시간을 지나면서 이 역경이 죄의 결과라고 깨달아 졌다면 이제야 말로 하나님앞에 새로운 미래의 삶을 결심할 시간이 아닙니까?

 

"하나님 저를 용서해 주신다면 이제부터 이렇게 살겠습니다" 라는 결심 말입니다. 지금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런 서원의 결심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이제 10절에서 백성들에게 이제부터는 돈을 꾸어주되 이자받기를 그만두기로 결심하라고 촉구합니다.

11절에서는 이미 받은 분량중에서 상당한 부분을 돌려보내라고 촉구합니다.

그리고 12절에서는 그것을 제사장 앞에서 공개적으로 맹세하라고 촉구합니다.

13절은 백성들의 반응입니다. 백성들이 그렇게 하겠다고 아멘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행하였다고 성경은 기록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의 새날을 가져온 것입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 민족가운데 이런 주를 향한 서원의 결심이 필요한때가 아닙니까?

지금이야말로 당신의 삶의 여정에서 주를 향한 단호한 서원의 결심이 필요한 때가 아니십니까?

 

지금으로부터 약200년전 영국에서 폭력배 서클에 가입해 있던 17살 먹은 소년 하나가 유명한 조지 휘필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후 아름다운 신앙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때 옛날 친구들의 유혹으로 다시 교회와 신앙을 떠나간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화창한 주일 아침 그가 런던의 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마차 한 대가 옆에 서더니 "혹시 교회 가십니까?"묻더랍니다.

 

얼결에 "네"라고 대답하자, 부인은 "타시지요"하더랍니다.

부인이 "자기 이름을 소개하자 이 청년도 역시 "저의 이름은 로버트 로빈슨(Robert Robinson)입니다 하자 부인은 깜짝 놀라며 다시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혹시 시인이십니까? 사실 저는 선생님의 시집을 읽고 있었습니다.--이 시가 선생님 작품이 맞지요.--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합소서. 한량없이 자비하심 측량할길 없도다."

 

그래서 그는 할수 없이 "맞습니다. 그런데 저는 사실은 한동안 신앙을 떠나 죄 가운데 있었습니다."고 말하자 부인은 다시 말하기를 "선생님 시의 3절에서 이렇게 쓰시지 않으셨나요?--'주의 은혜 사슬되사 나를 주께 매소서. 우리 맘은 연약하여 범죄하기 쉬우니 하나님이 받으시고 천국인을 치소서'라고. --

주의 은혜의 사슬에 선생님 자신을 매시는 방법은 공개적 서원을 하시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오늘 아침 교회에 가서 공개적인 회개를 하시고 새삶을 결심하시지요"(당시 영국교회에는 이런 공개적인 참회와 서원이 습관화되어 있었다)

 

그날 부인의 권유로 로버트 로빈슨은 주일 아침 교회에서 공개 참회와 서원을 하고 그후 평생을 주께 헌신하는 인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 중에는 이런 결심이 필요한 분이 계시지 않는지요?

 

 

설교 적용 질문>

1. 느헤미야 5:1-13의 대의는 무엇입니까?

2. 본문 6절에 나타난 느헤미야의 분노는 적절한 것이었는지 그리스도인은 분노를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나누어 보십시오.

3. 본문 7절에서 느헤미야가 중심에 계획한 바들은 무엇이었습니까?

4. 본문 12-13절에서 느헤미야가 제사장들을 불러 맹세시킨 이유와 그 결과를 말해 보십시오.

5. 오늘 우리 각자가 지나는 역경과 그 처방에 대하여 본문에서 배운 레슨을 나누어 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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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메모 :

이동원 목사 설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