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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불행의 밤이 찾아 왔을 때(욥1장13-22) / 박조준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4. 10. 14:46

불행의 밤이 찾아 왔을 때(113-22)

 

설교 ; 박조준 목사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예기치 않았던 일들을 당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건강하던 사람이 갑자기 심각한 병에 걸려 고통을 당합니다. 잘되던 사업이 하루아침에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그래서 병은 눈썹에서 떨어진다는 말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갈릴리 바다를 흔히 인생에 비유하는 까닭도 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갈릴리 바다는 잔잔하다가도 갑자기 바람이 불어닥쳐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하며 기술과 경험의 한계를 느끼게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바로 그렇습니다.

 

인생을 사는데 불행은 예고 없이 갑자기 밀어닥칩니다. 불행은 누구에게나 다가옵니다. 이런 고난이 닥칠 때에 이 고난의 밤을 맞이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겠습니까? 고난은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똑같이 당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서 고난이 닥칠 적에 그리스도인으로 어떻게 대처해 나가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욥기를 읽었습니다. 욥은 성경 전체에서 고난 당하는 사람을 대표한다고 말해도 과장된 표현은 아닐 것입니다.

야고보서 511절에 보면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하는 말이 나옵니다. 욥은 단 한 번의 고난이 아니라 고난 다음에 다시 더 심한 고난이 밀어닥치는, 모진 시련의 시기를 맞았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1415절을 보세요. 사자가 욥에게 와서 고하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소와 나귀와 종들이 하루아침에 날아가는 불행, 이 고난의 전갈이 끝나기도 전에 두 번째 사자가 나타납니다.

16절 말씀입니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양과 종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하늘에서 불이 내려 왔다는 말은 벼락에 맞아 죽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비보가 끝나기 전에 또 하나의 고난이 그에게 찾아옵니다.

17절에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갈대아 사람이 세 떼를 지어 갑자기 약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려 왔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욥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 중에서 가장 소중한 재산인 약대가 죽임을 당했다는 비보를 접했습니다. 아마 이 세 번째 비보를 접할 때까지는 욥에게는 견딜 수 있는 그 어떤 힘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네 번째 비보를 또 듣게 되었습니다.

1819절입니다. 그가 아직 말할 때에 또 한 사람이 와서 고하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더니 거친 들에서 대풍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소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한 고로 주인께 고하러 왔나이다 한지라.”

 

자녀들이 삽시간에 떼죽음을 당했습니다. 세상에 이런 날벼락이 어디 있습니까?

 

욥기 처음에 기록된 대로 욥은 도덕적으로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사람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그 소유물이 양 7,000, 약대가 3,000, 소가 500겨리, 암나귀가 500, 그 외에 종도 많이 있었습니다. 욥의 자녀는 남자가 일곱, 여자가 셋, 합해서 모두 10남매였습니다.

욥은 신앙적으로, 도덕적으로 그 시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간증을 남겼을 뿐 아니라 또 하나님 앞에서 많은 재물에 대한 선한 청지기의 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욥은 훌륭한 가장이었습니다.

욥기 14절에 보면 그 아들들이 자기 생일이면 각각 자기의 집에서 잔치를 베풀고 그 누이 셋도 청하여 함께 먹고 마셨다고 했습니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즐거워하는 이런 잔치의 순간들을 보면서, 형제가 화목하는 것을 보는 부모의 즐거움이 또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욥은 그 잔칫날이 지나면 자녀들을 불렀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해서였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경건하게 살기 위해 힘쓰던 욥에게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악덕 재벌이 건방지게 살다가 이런 어려운 일을 당했다면 오히려 당연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는데, 이처럼 도덕적으로 신앙적으로 바로 살던 사람에게 불행이 닥치게 되니 그 이유를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욥도 그 대답을 발견한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왜 이런 고통이 오는가? 내 자식들이 왜 하루아침에 다 세상을 떠났는가?” 이 불행에 대한 이유를, 그 대답을 욥이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욥은 불행과 씨름하면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것이 욥기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하나님이 욥에 대해서 칭찬을 했더니 옆에 있던 사단이 뭐랬어요?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재산 많고 팔자 좋아서 하나님을 섬기는 거지요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왜 하나님을 경외합니까?

축복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습니까?

내 자손들이 잘되고, 재산 늘어나고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이유입니까?

 

그러나 욥기를 보면 그런 것 없어도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었습니다.

돈이 없어도, 자식이 없어도, 모든 재앙 속에서도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사는 욥에게 예기치 않은 불행이 닥쳐왔습니다. 이때 욥이 어떻게 했습니까?

 

욥은 슬퍼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20절을 보세요.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라고 말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미는 행위는 커다란 슬픔의 표시였습니다. 그리고 그 슬픔의 상처가 아물면 그들은 다시 겉옷을 입고 머리털을 기르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은 감정 표현을 정죄하지 않습니다. 슬픔을 당했을 때 슬퍼하는 것은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슬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랑하는 친구 나사로가 죽어 무덤에 있을 때 무덤에 오셔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시게 한 것은 눈물을 흘려야만 할 사건이 인간에게 있을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렇게 만드신 것입니다.

슬픈 일을 당할 때 우리는 울어야 할 권리가 있고 또 울어야 합니다. “눈물은 마음의 창을 닦는 약이란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눈물을 통해서 마음과 양심을 정화합니다.

 

그리고 욥은 불행 속에서도 범죄하지 않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22절에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어리석게 원망하지 아니하니라했습니다.

우리는 슬픈 일을 당할 때 슬퍼하고 우리의 감정을 나타내면서도 한편으로 범죄하지 않는 삶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감정의 표현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서 426절에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는 짓지 말라고 했습니다. 화가 날 일이 생겼을 때 화를 내는 것은 주님이 정죄하지 않으십니다.

 

화가 날 일에 화를 내지 않는 것이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화를 안내는 척 하는 것은 오히려 위선입니다. 슬플 때는 슬퍼해야 합니다. 눈물 흘리고 싶거든 눈물을 흘리세요. 화가 나거든 화내십시오. 그러나 죄는 짓지 말아야 합니다.

 

감정의 표출을 넘어서서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혹은 우리 삶의 가치를 부정하는 쪽으로 가지 않도록 자신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몸의 지체 가운데 범죄하기 가장 쉬운 지체가 무엇입니까? 입술입니다. 이 입술로 하나님을 원망하고, 이 입술로 형제를 저주하고, 이 입술로 친구를 이간시킵니다.

청년 이사야가 하나님의 영광을 뵙게 되었을 때 뭐랬습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했습니다. 불행이 닥칠 적에 제일 먼저 입술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시편 1413절에 이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얼마나 적절한 기도입니까? 슬픔이 찾아올 때, 불행의 밤이 올 때, 역경에 처했을 때, 고난이 닥칠 적에 슬퍼하십시오. 그러나 절대로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입술의 범죄를 경계해야 합니다.

 

욥은 불행이 닥칠 적에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오늘 주신 말씀 20절에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며라고 말씀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살아가시는 동안에 불행한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불행이 올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비하시기 바랍니다. 불행의 밤이 올 때 슬퍼하세요. 그러나 죄는 짓지 말아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 예배하셔야 합니다. 욥은 불행이 닥칠 때에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렸습니다.

 

예배는 엎드림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불행의 밤이 올 때 주님 앞에 엎드리세요. 엎드려서 시선을 하나님을 향해 두는 순간 그때부터 우리 마음 속에는 예배가 시작됩니다.

슬픔을 이기는 가장 위대한 비밀은 슬픔이 올 때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4장에 보면 영광스러운 하늘의 예배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십사 장로들이 자기의 면류관을 벗었다고 말씀했습니다. 예배의 초점이 자기에게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배의 신앙과 의식의 초점은 영광을 나 자신에게서부터 하나님께로 옮기는 것입니다. 자기의 면류관을 벗어야 합니다. 참으로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원하는 사람마다 자기의 이기주의와 명성과 명예와 욕심의 면류관을 벗어야 합니다. 그리고 시선과 의식의 초점을 참으로 하나님께만 두어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411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으셨나이다 하더라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합당하오니이라는 말을 영어로는 “worthy”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 단어의 뜻을 그대로 번역하면 가치있는이라는 말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깨닫는 그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왜 예배하지 않습니까?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는 이유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착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내게 왜 하나님이 필요합니까?”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을 하나님으로 아는, 소위 자아숭배 사상이 우리의 마음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우리가 제한되고 유한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을 향해서 시선을 돌립니다.

그리고 그 영광의 하나님을 뵙는 순간 우리 마음속에서부터 이 찬양이 터지게 됩니다. “하나님,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기에 합당한 가치가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에 대한 가치를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불행의 밤이 올 때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교훈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욥은 불행이 닥칠 적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습니다. 불행의 밤에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세요. 지금 말하는 모든 사항들은 단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불행의 밤이 왔을 때 욥이 한 일은 슬퍼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감정을 표현하는 그 자체가 조금도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눈물은 우리의 마음과 영혼 속에 있는 이미 묻어 버린 모든 찌꺼기를 씻어 버리는 하나님의 치료제입니다.

 

슬플 때 슬퍼하세요. 욥은 슬퍼하면서 죄짓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슬퍼하지만, 감정을 표출하는 지혜를 배워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욥은 하나님께 예배했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사람에게는 그 다음 단계가 다가오는데, 욥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사실 예배의 진정한 목적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참된 예배를 드렸는가는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주권을 얼마나 인정하게 되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십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예배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입니다.

 

불행의 밤이 찾아왔을 때 그 밤에 하나님을 예배할 줄 알았던 욥, 마침내 그의 예배를 통해서 흘러나온 고백을 보세요. 이것은 예배를 통한 고백입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21).

 

주님을 삶의 주인으로 고백하기 위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과연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이 나의 삶의 주인이십니다라는 이 사실을 인정하도록 하기 위해서 몇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내 삶의 출발지점이 어딥니까?

나는 어디에서 삶을 출발했습니까?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주님, 제가 흙에서 지음 받은 사실을 망각하지 않게 하소서.”

우리의 삶의 출발지점이 어디인지 잊지 않아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의 출발지점이 어딥니까? 모태에서 적신으로 나왔다는 욥의 고백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선물입니다.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인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출발지점, 벌거벗은 몸, 빈손으로 우리의 삶이 시작된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 순간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깨닫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을 생각하세요.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렸을 때 그 잃은 것만을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것을 소유하도록 하신 하나님 앞에 내가 무엇을 했는가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우리가 갑자기 건강을 잃게 되면 우리는 건강을 잃어버리게 하신 하나님을 원망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건강을 주신 하나님 앞에 내가 무엇을 했나 하는 것을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비록 무엇을 잃었지만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 속에서 주님을 묵상하는 순간 우리는 욥의 이러한 고백의 자리까지 올 수 있습니다.

 

이 영광스럽고 존엄한 신앙고백의 자리에까지 우리가 오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오늘 주신 말씀의 도전입니다.

 

더구나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의 배후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의 경험대로 말하면 불행은 그 불행의 밤이 지나간 새벽에야 그 이유를 발견하게 됩니다. 고통의 한복판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폭풍우가 다 지나간 새벽의 바닷가에서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합니다. “, 그랬군요, 하나님. 그래서 제게 이 고통을 허락하셨군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지금 당장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주님을 원망하거나 불평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인생의 폭풍과 역경 속에도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뜻과 계획이 있었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감사할 수 있습니까?

 

어떻게 요셉이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의 연속인 13년 간을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고 살아 애굽에서 높임을 받고 자기의 온 식구를 구원하며 대접받게 할 수 있었습니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했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악을 선으로 바꾸었습니다.” 이 사실을 처음부터 믿고 그 자세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귀신들려 점치며 고생하는 여인이 불쌍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았습니다. 이것 때문에 수입이 끊긴 주인의 고발로 많은 매를 맞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 불행의 밤이 찾아 왔을 때 어떻게 그들은 기도하며 찬미할 수 있었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기도하며 찬미할 때 지진이 나고, 옥문이 열리고, 고랑이 풀리고, 옥을 지키던 간수와 그의 가족까지 구원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이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불행의 밤이 올 때 하나님을 찬양해야 합니다. 욥이 바로 그랬습니다. 욥기 121절에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했습니다.

욥은 불행의 밤이 왔을 때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고 범사에 찬양하는 것, 그것은 불행의 밤과 역경의 현장 속에서도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명령입니다.

 

순경과 행복 속에서는 누구나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특권은 역경과 불행 속에서도 찬송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불행의 한밤중에 내가 찬송하는 소리를 듣고 내 이웃이 무엇이라 말할까요?

당신의 그 찬송과 그 이해하기 어려운 찬미의 비밀은 무엇입니까?”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그분이 내 삶의 주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불행의 밤이 찾아왔을 때 부른 찬양이 욥의 생애를 이토록 위대한 승리로 만들고, 오고 오는 세대의 불행을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역경을 이기는 신앙의 비밀로 제시된 것입니다. 욥은 불행의 밤을 사는 지혜를 배운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불행의 밤이 찾아올 때 주저앉지 마시고 벌떡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세요. 찬양은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는 방편 중 하나입니다.

 

찬양은 움직이는 신뢰의 표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실하게 신뢰할 때 하나님은 자유롭게 역사하시며 우리에게 항상 승리를 안겨 주십니다. 그것이 환경을 변화시키는 승리이든지 아니면 우리로 그 환경을 받아들이게 하는 승리이든지 찬양은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줍니다. 사단이 쫓겨납니다.

 

찬양은 우리의 삶 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항상 하나님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양하되 우리의 감정이 무엇이라고 말하든지 하나님을 항상 찬양해야 된다는 의지적 행위와 결정을 내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행의 밤에 눈물을 흘리면서도 찬양해야 합니다. 그러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은 시편 57편에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불행의 한밤중에 일어나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을 붙들게 만드는 것,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것, 이것이 신앙의 초점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이것이 오늘 주신 말씀의 도전입니다.

 

괴로울 때, 역경 속에서, 슬픔의 밤에, 주를 바라보고 찬양함으로 귀신이 쫓겨나고, 병자가 일어나고, 환경이 변하고, 삶이 변하는 기적이 일어나기를 바랍니다.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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