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수*이동원 목사+목사님들설교

[스크랩] 거짓의 죄/행5:1-11 / 이동원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7. 18. 08:52

거짓의 죄/행5:1-11 / 이동원 목사

 

거짓말에 대한 테스트가 있습니다. 내가 어디에 속하는지 마음 속 으로 선택하시면 됩니다. 나는 얼마 나 거짓말에 익숙해 있나 자기 자신 을 점검해 볼 수 있는 하나의 테스트라고 생각합니다. 네 가지 답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만 나에게 적합한 것을 골라서 선택하시면 됩니다.

 

첫째로 나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한다. 둘째 나는 종종 자주 거짓말을 하는 편이다. 세 번째는 나는 거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솔직히 어쩔 수 없는 경우에 한 경우도 있다. 네 번째는 나는 거짓말을 결코 하지 않는다. 넷 중에 어디에 해당되십니까?

 

첫째 나는 거짓말을 밥 먹듯 한다. 이거는 병원에 입원하셔야 돼요. 영적 병원에 입원하셔서 주님의 심각한 다루심을 받으셔야 합니다. 나는 종종 자주 거짓말 하는 편이다. 저는 이런 분들에게 진지하고도 심각한 회개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거의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경우에 한 경우도 사실은 있다. 저는 이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라고 생각을 해요. 네 번째 나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이는 거짓말쟁이의 대표적 진술입니다.

 

한번은 하버드 대학에 지망하는 학생들이 학교 투어를 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투어 가이드가 학 교 내 광장 스퀘어 한복판에 있는 동상, 사람의 동상인데, 동상 앞에 멈추더니 그 동상에 대해 이런 설명을 했다고 합니다. 이 동상은 하버드 대학의 창설자로 알려진 쟌 하버드 목사의 동상입니다. 이 아래 쓰신 것을 보십시오. John Harvard Founder 창설자 1638년.이렇게 쓰여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동상과 이 아래 쓰여진 말은 반쯤은 사실이고 half truth이고 반은 거짓말입니다. half lie에 속합니다.

 

세 가지 면에서 여기에 거짓이 섞여 있다고 말 할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뭐냐 하면 이 John Harvard 목사의 동상은 오리지날 그 분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 조각하시던 조각가가 너무 시간에 쫓긴 나머지 그 분의 사진을 구할 수가 없어서 그 분과 비슷한 사람을 모델로 해서 이 조각을 만든 것입니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그 분의 그림은 아니죠. 둘째로 이 분이 창립 초기에 학교가 창설되는 과정에 헌금으로 많이 기여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엄격하게 말하면 이 분이 창설자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세번째로 이 분이 이 아래 쓴 것을 보면 창설자 Founder John Harvard 1638년 이라고 있는데 대 부분의 사람들은 이 1638년을 그 분의 사망한 연도로 이해를 합니다. 그것도 사실이 아닙니다. 사망한 연도가 아니라 1638년은 그가 재산의 절반을 바쳐서 학교의 library를 만드는 일에 기증을 했던 그 연도가 1638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반쯤은 사실이지만 반쯤은 거짓에 속한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재미있지 않습니까? 우리학교의 모토는, Harvard의 모토는 소위 베리타스Veritas진실 진리입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진실하지 못한 이런 부분들이 있는 것, 이것이 인생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투어 가이드의 설명이 있었다고 해요.

 

반쯤은 진실 반쯤은 거짓말, 이 것은 하버드 캠퍼스 안에만 있는 사건은 아닙니다. 우리들의 삶의 거리 어디에서나 우리가 익숙하게 볼 수 있는 삶의 모습들이라고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교회안에도 이런 모습 들은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두 부부의 얘기가 나옵니다. 그는 초대교회의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할 필요가 있었을 때 이 분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어떤 땅 을 팔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헌납 하면서 한 부분은 상당한 부분은 꼬불쳐 두고 그리고 상당한 부분을 헌금하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우리가 가진 전부입니다. 전부를 드리는 것 처럼 말하고 헌납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사건이 경과되는 고하니 오늘 본문에 읽어 보시면 아주 하나님이 화가 나셨어. 베드로 를 보내서 이것을 책망하시고 그리고 이 두사람 이 내외분 남편과 아내의 목숨을 모두가 다 가져 가셨다 는 그런 사건이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금은 하나님이 너무 지나치지 않은가 물론 이 두 사람이 잘 한 것은 아니지만 뭐 있을 수 있는 잘못인데 또 부분적으로 헌금한 것도 사실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걸 가지고 두 사람의 목숨까지 하나님이 가져 가시다니 하나님이 너무 잔인하신 분은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 실 수가 있을 것입니다.

 

특별히 한국인의 의식구조, 기독교적 가치관이 반영된 서구 사회와 달리 한국에서는 이러한 느낌을 받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한국 사회에서는 거짓말을 심각한 범죄로 별로 받아들이지 않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지난 번 미국에 클린턴 섹스 스캔들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 분의 섹스 스캔들에만 커다란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사실 미국 안에서 문제가 된 것, 법적으로 문제가 되고 사회의 핫 이슈가 된 핵심은 섹스 스캔들이 아니라 그 분이 위증을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거짓말을 했느냐 안 했느냐 그것이 더 중요한 핵심의 내용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와 얼마 나의식 구조가 달라요? 한국에서는 섹스 같은 건 커다란 범죄로 생각을 하지만 우리가 일상적인 거짓말을 매우 심각한 범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거짓을 범죄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매우 심각한 범죄 라고 말합니다. 왜 어떤 의미에서 거짓은 죄악인가? 왜 어떤 의미에서 거짓은 죄악이라고 할 수 있는가?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의 품성을 거스리는 죄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 님의 품성을 거스리는 죄악.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성경은 누누히 일관성있게 강조하기를 하나님 은 진리의 하나님이라고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 진실의 하나님이십니다. 믿습니까? 진리이신 하나님. 우리가 잘 아는 요한복음14장6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말씀 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그 다음에 뭐라고 그랬어요? 진리요 내가 곧 길이요 진리라 진리다. 내가 바로 진리 그 자체이다.

 

요한일서1장9절에 보시면 만일 우리가 우리죄를 자백하면 저는(하나님은) 미쁘시사 하나님은 미쁘시다. 이 말은 하나님은 성실하시다 곧 하나님은 진실하시다. 이런 말씀이죠? 시편5편4절이하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그 다음절 6절에 보시면 거짓말하는 자를 멸하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잠언에도 잠언20장10절에 보면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말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 부정직한 상업윤리 그것을 정죄 하고 있는 성경의 말씀을 볼 수가 있어요.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와 그리고 말은 다 여호와께서 미워하시 느니라 일관성있게 하나님은 진실 하시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라면 참되고 진실하신 그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자녀가 진실하지 못할 때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모습을 보실까요? 반대로 요한복음8장 44절에 보시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는 존재, 마귀, 마귀의 존재를 묘사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즉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다. 진리가 그 속에 없었고 진리에 서지 못하고 저는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습니다. 마귀를 가리켜서 거짓의 아비다 그랬어요.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공부할 때 아버지에 대한 공부를 했죠. 무슨 발명의 아버지 에디슨, 교향악의 아버지 하이든, 뭐 이런 공부를 했는 데 제가 문교부 교과서 편찬위원이면 거기다가 거짓의 아버지? 정답이 뭘까요? 마귀 Satan 사탄이예요. 사탄 마귀가 거짓의 아버지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짓말할 때 그리고 우리의 행동이나 언어에 거짓이 섞여 있을 때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사탄의 지배아래 사탄의 영향력 아래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닫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 본문의 2절을 다시 보시면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아내도 알 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앞에 두니 3절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합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 앞에 붙들린 바된 베드로가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를 향해서 이렇게 말 합니다. 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이런 일을 했다.

 

그렇습니다. 이 거짓의 아버지인 사단의 영향력 아래서 지금 그가 거짓을 말하고 있고 거짓된 행동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4절에서는 땅 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교회를 향하여 교회 지도자를 향해서 이들이 이렇게 말했지만 모든 거짓말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범죄이다. 그것은 진리의 하나님, 진실하신 하나님 의 품성을 거스리는 죄악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두 번째로 이 거짓이라는 것은 공동체를 파괴 하는 죄악입니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인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조금 거짓말을 했다고 그래서 아나니아 삽비라를 이렇게 목숨을 거두어 가시다니 이 것은 너무 한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이런 느낌을 받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깊은 의도를 헤아리지 못하는 인간적 피상성때문이라고 저는 생각을 해요.

 

자, 역사적으로 볼 때 이때 초대 교회는 신약교회는 막 교회의 기초를 놓는 때였어요. 교회가 막 형성 되기 시작한 때였어요. 우리가 흔히 하는 말가운데 이런 말이 있지 않습 니까?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 이 첫 단추가 제대로 끼워지지 않으면 그대로 계속해서 잘못됩니다. 처음이라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가 처음 시작할 때 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교회, 세상의 빛과 소금이어야 할 교회,

 

그 교회가 정말 복음의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진실 위에 그리고 진지한 진리 위에 세워져야 할 교회의 모습을 주께서 기대하셨기 때문에 그 교회 안에 처음에 거짓이 들어왔을 때 처음부터 이것은 단단히 다룰 필요가 있다. 저는 그래서 일어난 사건이 바로 본문의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이라고 생각해요. 이것은 항상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은 아닐지 모릅니다. 예외 적인 사건이고 샘플링에 속하는 사건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진리의 터전 위에, 정직의 터전 위에 하나님의 교회가 세워질 때 비로소 하나님의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복 음 선포의 책임을 다할 수가 있다. 이렇게 믿었던 하나님께서 이 부정 직한 모습으로 섰던 이 한 부부를 하나님께서 가차없이 다루어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냈던 사건. 이것이 아나니아 삽비라 사건의 진상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거짓이 지배하는 공동체, 거짓이 지배하는 사회 이것은 병든 사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는 반드시 도덕적인 위기가 찾아 옵니다. 진실을 잃어 버리고 양심이 통하지 않는, 신용이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었을 때 그 사회의 복된 미래를 우리가 어떻게 기대할 수가 있을까요?

 

수년 전 미국의 시카고 데일리 라는 뉴스지에 신문에 이런 기사가 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리노이 즈주에 어글스피 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마을에 세탁소를 경영하는 한 분이 있었어요. 그런데 손님이 맡긴 세탁물을 뒤지다가 주머니에서 2만불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다렸습니다. 손님을 기다렸지만 그 옷 을 맡긴 주인이 나타나질 않는다 말이죠. 한참 일정한 시간이 경과된 후에 그것을 경찰에 신고를 했습니다. 경찰은 이것을 신문사에 알렸습니다. 그래서 신문에 났어요.

 

이 기사를 취급하던 기자가 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맨 마지막 줄에 이런 흥미 있는 기사를 썼다고 합니다. 그것은 뭐냐하면 이제는 정직이 뉴스거리가 되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정직이 뉴스거리가 되어야 하는 시 대가 되었다. 뭐 자기 돈이 아니니까 그 돈의 원래 주인에게 그것을 돌려주는 것, 당연한 일이죠. 마땅히 해야할 일. 너무나 당연한 일이예요. 그러나 당연한 일이 오히려 드물게 된 시대. 다시 말하면 그만큼 사회가 부정직한 사회가 되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부정직한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정직이 뉴스거리가 되어야 하는 시대, 그리고 세상. 그 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이 시대의 모습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시는 여러분, 사회 속에 누구의 말도 믿을 수가 없다. 한 번 가정해 보세요. 신용이 통하지 않는 사회, 정직이 통하지 않는 사회, 이런 사회에서 어떻게 질서와 공의를 지배할 수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그래서 당신의 교회만이라도 진리 위에, 정직 위에 세워지기를 기대하셔서 이 사건을 몹시도 몹시도 정확하게 거룩하게 엄중하게 다 루신 사건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자, 결과적으로 어떤 결과가 나왔습니까? 11절 한번 읽어 보세요. 11절. 같이 우리 본문의 11절입니다. 마지막 절. 다같이 시작.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 려워하니라 자, 이 사건이 나고  나니까 온 교회가 두려워했어요. 얼마나 그것이 충격이었겠어요. 거짓말 했다 생명을 잃어버렸다 찬양대에서 거짓말 한번 했다가 한 사람이 가셨다. 그러면 얼마나 긴장을 하겠어요? 우리가 얼마나 긴장을 하겠습니까? 우리 삶이 좀 새로워 지지 않겠어요? 실제로 보면 그 다음절 이하에 이 사건 직후에 교회를 통한 부흥이 일어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깨끗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범죄, 그것이 바로 거짓의 죄악인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거짓은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죄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신을 파괴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거짓이 얼마 나 오래 가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실 존주의 작가인 알버트 까뮈는 자기가 쓴 작품의 주인공의 입술을 빌려 서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마지막 심판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내가 살고 있는 거리에서 날마다 심판을 본다. 나는 날마다 심판을 본다. 우리는 이미 거짓을 한 사람들이 이 땅에서도 심판을 경험하고 이 땅에서도 비틀거리는 삶의 모습을 얼마든지 우리 주변에서 도 볼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심판은 여기에도 있다는 것이예요.

 

링컨이 한 유명한 말 가운데 거짓은 사람들은 잠시는 속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영원히 우리를 속일 수는 없다. 거짓은 반드시 노출됩니다. 거짓은 반드시 드러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고등학교 다니는 고등학생 몇 사 람이 일요일날, 주일날 놀러 갔어요. 신나게 하루종일 놀아제꼈습니다. 월요일날 아침에 학교를 가려고 그 러는데 가기 싫거든요. 그러니까 한 학생이 꾀를 냈습니다. 야, 우리 하루 더 놀자. 그리고 완전히 결석이 되면 안 되니까 이따 오후에 학교 끝나기 직전에 들어가서 사실 주일 날 우리가 놀러 갔었는데 시골 깊은 곳에 놀러 갔다가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가 났는데 공구를 tool을 가져 오지 않아서 바퀴를 고칠 방법이 없었다. 하루종일 애쓰다가 가까스로 고쳐서 겨우 왔습니다. 이렇게 선생님께 보고하자. 넷이서 합의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월요일날 하루 더 신나게 놀아제끼고 오후에 학교에 들어갔어요. 그리고 선생님에게 선생님 참 죄송합니다. 어제 우리가 사실은 깊은 산골에 놀러 갔다가 월요일날 아침에 학교에 오려고 그러니까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가 나 있었습니다. 우리가 공구를 안 가져와 서요. 고칠 방법이 없었어요. 하루종 일 애쓰다가 가까스로 고쳐가지고 이제야 도착했습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아 그러냐고 빙그레 웃으면서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러면서 메모지 하나를 다 주더래요. 네 사람에게. 떨어져. 그러더니 그 메모지에 다가 자동차 타이어 어느 쪽 바퀸지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앞 바퀸지 뒷 바퀸지 어느 쪽인지 네 사람 각자 쓰라. 거짓은 반드시 드러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거짓의 사람들이란 책을 쓴 정신 분석학자인 스코트팩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가 거짓에 익숙해 지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향해서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그 거짓을 믿을 수가 있다. 그렇게 되면 그는 거짓말장이가 된다. 그리고 나중에 이 사람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상태는 그는 자기 자신도 믿을 수 없는 인생을 산다. 이것은 최악의 비극이다. 자기 자신을 믿을 수가 없는 인생, 자기 파멸의 인생을 살아 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거짓은 자신을 파괴하는 죄악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이 있어요. 우리가 어떻 게 이 거짓을 극복할 수가 있습니 까? 혹은 어떻게 이 거짓을 예방할 수가 있습니까? 혹은 우리가 거짓에 빠졌을 때 어떻게 빠져 나올 수가 있습니까? 우리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서 이 성경에 나타난 아나니아 삽비라 부부가 어떻게 했어야만 했었는가 라는 질문으로 질문을 바꾸어 보겠습니다. 몇 가지 대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로 사람보다 하나님을 의식 해야 합니다. 우리가 거짓의 죄를 극복하려면 혹은 예방하려면 사람보 다 하나님을 더 의식해야 합니다. 대부분의 경우 저와 여러분이 거짓말을 하게 될 경우에 가만히 분석해 보세요. 왜 그러냐? 사람을 의식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자기 최면, 자기 위신 때문에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 아나니아 삽비라는 더 많이 드린 것처럼 보여지기 위해서, 자기 희생을 가장하기 위해서 이런 거짓말을 하게 된 것이죠. 그가 하나님만 의식했더라면 이 거짓을 범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랜드빌트라는 대학에 수학을 가르치던 교수인 매디슨 새럿 이란 교수님이 계셨는데 아주 존경받는 경건한 크리스챤 교수였습니다. 이 분은 자기 클래스에 와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시작할 때마다 늘 똑같은 말로 했고 특별히 시험을 칠 때 시험을 치를 때는 어김없이 이런 말로 시험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시험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시험관은 두 분입니다. 나 매디슨 교수와 함께 하나님이 시험 관이십니다. 여러분은 두 분을 다 의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두 가지 시험을 치르는 것입니다. 하나는 수학 시험이구요 또 하나는 정직이라는 시험입니다. 여러분은 수학 시험보다도 정직이라는 시험에 패스하는 것을 더 생각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정직한 인생, 이것은 인생 전체를 살아가는 여러분의 중요한 테스트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얼마나 우리는 하나님을 의식할까요? 우리의 그 조잡스러운 작은 거짓의 실수들의 상황 속에는 언제나 하나님보다도 사람을 의식했던 그런 자기 Defense, 나를 방어하기 위해서 아니면 나를 과장하기 위해서 혹은 나를 겉치레 하기 위해서, 내 체면을 위해서 우리가 거짓말하는 점들이 얼마나 많으냐 말이죠. 우리가 하나님을 의식할 때 우리는 좀 더 정직 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는요 우리가 서로가 서로 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좋은 친구가 주변에 많아야 정직할 수가 있어요. 서로 정직을 격려하는 분위기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실수했다고 하십시다. 뭐, 실수가 있을 수가 있죠. 그래서 자기 실수를 교정하기 위해서 그때 내가 사실은 진실을 말하지 못했어. 야 너 거짓말했구나. 그럴 수가 있니. 그러면 안 돼죠. 그래 네가 지금이라도 진실을 말하는 것은 그것은 정직한 것이야. 그것은 용기있는 행동이야. 여러분, 자기 잘못을 인정할 수 있다 는 것보다 용기있는 행동이 어디 있습니까?

 

요즈음 일련의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태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관련되어 있는 모습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무 소리 하지 않고 이것 이 지나가요.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최근의 몇몇 한국 교회의 지도자들이 함께 모여서 우리가 이것에 관한 공개적인 사과가 필요 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조선일보나 한겨레를 여러분이 보셨겠습니다만 제가 속한 단체인 한국 교회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 또 침례교 미래를 준비하는 모임, 한국교회 목회자 협의회와 연계해서 하나님과 국민 앞에 우리 자신을 고발합니다. 우리가 이런 성명서를 최근에 냈습니다. 여러분, 저는 정직한 자기 토로, 이것은 용기있는 일이라고 생각 해요. 잘못할 수도 있으니까. 잘못했습니다. 말하면 되쟎아요. 잘못했다고 말하면 되쟎아요. 또 그것을 격려해 주는 분위기가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다시 본문의 사건으로 돌아와서 아나니아와 삽비라 두 사람 중에서 만약 한 사람이라도 정직할 수 있었더라면. 자, 남편이 그렇다고 하십시다. 아내만이라고 정직할 수 있었더 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 본문의 사건을 보면 재미있어요. 1절에 어떻게 시작됩니까?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더 불어 소유를 팔았다. 자, 2절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아마 주도적으로 남편이 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얼마를 감추매 2절에 보시면 누가 알았어요?, 그 아내도 알더라 아내도 알았어요. 자, 이때 아내가 여보 우리 정직합시다. 이러면 안 되잖아요. 그랬으면 얼마나 좋아요. 자, 우리가 결정적으로 본문의 8절을 보시면 이런 말이 나와요. 

 

9절 같이 읽겠습니다. 9절 다같이 시작.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대 베드로가 삽비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가 어찌 함께, 중요한 단어가 함께 꾀하여 이 부부는 아주 환상의 콤비였어요. 죄도 같이 짓고 그러나 부인 만이라도 정직할 수 있었더라면 여보 안돼요. 우리 하나님 앞에 정직합시다. 한 번 따라서 하십시다. 여보 크게 해요. 여보 정직합시다. 평소에 우리가 이 말을 하는 것이 필요해요. 여보 정직합시다. 둘 중에 한 사람만이라도 이렇게 챌린지 challenge를 했더라도 이 사건은 얼 마나 달라질 수가 있었겠어요.

 

옆의 사람에게 한 번해 보세요. 정직합시다. 여보, 정직합시다 아무 한테나 여보 그러면 어떻게 해요? 집사님 정직합시다. 한다든지 자매님 정직합시다. 이렇게 얘기를 해야지요. 우리가 서로에게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해요. 도움이 될 수 있는 친구, 유익한 친구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정직한 인생의 길을 함께 갈 수 있는 친구가 된다는 것, 얼마나 중요한 일이예요. 우리가 서로에게 좋은 친구로서 필요로 할 때 그만큼 건강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 더 우리가 이 거짓을 예방하기 위해서 혹은 거짓을 극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했어야만 했던 것, 세 번째는 뭐냐하면 회개 할 수 있을 때 바로 회개했어야 합니다. 회개할 수 있을 때 바로 회개 해야 돼. 회개는 빠를수록 좋은 것 입니다. 시간을 더 끌지 말고 늦을 수록 안 좋아요. 우리가 빠를수록 좋다. 회개는 빠를수록 필요한 것입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늘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요. 사도행 전5장을 묵상할 때마다 늘 안타까움이 있는데 저는 3절이 제일 안타깝 더라구요.

 

3절에 베드로가 가로되 성령충만하여 베드로가 아나니아 삽비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이때 아나니아가 맞습니다. 베드로님. 제가 하나님 앞에 범죄했습니다. 그랬더라면 얼마나 달라졌겠어요? 얼마나 달라졌을까요? 오리발 내밀지 말고 자기 변명하지 말고 네 잘못했습니다. 제가 그때 실수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사건이 달라졌을 거예요. 아주 안타까워요. 그 찬스를,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 다음에 삽비라의 경우 아내의 경우를 보세요. 결정적 때가 또 찾 아왔어요. 이 부인에게도. 7절에 보시면 세 시간쯤 지나 (남편이 죽고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8절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이것이 전부냐) 내게 말하라 (이것이 전부더냐) 이것이 기회였습니다.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사실은 우리의 거짓이 섞여 있었습니다. 우리의 허영이 섞여 있었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그것은 잘못이었습니다. 말하면 된다 말이죠. 그런데 묵살해버리고 양심의 음성을, 그리고 성령의 음성을 묵살하고 이렇게 말 했습니다. 예, 이것이 전붑니다. 그리고 모든 상황은 끝났어요. 그것이 비극의 마지막 종말이었습니다.

 

회개할 수 있는 찬스, 회개의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계속적으로 이런 기독교인의 윤리적인 삶을 말할때마다 이런 강조를 합니다. 성령을 속이지 말라. 혹은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이럴 때 성령이 역사하세요. 정직하라고. 너 고백해야지. 마음은 있어요. 체면 때문에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성령의 이 감동을 소멸치 말고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 용기있는 사람이예요. 예 제가 잘못했습니다. 이것이 회갭니다. 회개는 죄를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되어야 마땅합니다. 네 제가 잘못했어요. 죄를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떠나야 합니다.

 

죄를 떠난 것은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내가 거짓을 중단하고 있는 것, 그것만으로 아직 회개가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언제 또 다시 거짓이 튀어나올지 몰라요. 내가 거짓말을 중단하고 있다는 것으로 충분하지 못해요. 거짓을 말하던 내 입술에서 이제는 진실한 말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 앞에 나와 나의 거짓의 범죄 그리고 나의 모든 범죄를 짊어지고 보배로운 피를 떨구신 그 분 앞에 무릎 꿇고 그 거룩한 보혈로 씻음 받고 죄를 자백 하고 용서를 받고 일어나 이제 거짓으로 지배되던 내 입술 속에 진실의 새로운 언어를 담아야 합니다. 미움의 언어 대신에 사랑의 언어를 담아야 합니다.

 

죽음의 언어 대신에 이웃들을 중상하고 모략하고 그리고 파헤치던 그런 언어 대신에 내 입술에 사랑의 언어를, 생명의 언어를, 창조의 언어를 담아야 합니다. 그리고 진실한 말을, 새로운 언어를, 정직한 말을, 거룩한 언어를 담고 그리고 이 언어 속에 복음을 담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하는 사람이 되었을 때 그때 우리는 거짓을 벗어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얘기 하나 하고 마치려고 합니다. 실화예요. 오래 전에 전세계 기독교인들을 감동시켰던 얘기라고 합니다. 독일에서 참 불쌍한 사람 많이 돕고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그리스도인 자매 하나가 혀암으로 판명되어 수술을 받게 되었 습니다. 어쩌면 언어를 잃어버릴지 모른다. 이제 나는 언어를 잃어버릴지 모른다. 당신은 앞으로는 말을 잃어버릴지 모릅니다. 자, 그 순간 그는 간호사나 의사를 바라보면서 마치 유언 같은 이런 아름다운 신앙 고백을 남겼다고 합니다. 그래요 지금까지 하나님이 나에게 언어를 주셔서 이 언어를 가지고 제가 하나님 을 찬양했고 그리고 복음을 증거했고 이웃들을 격려할 수가 있었습니다. 오 하나님, 하나님의 이 은혜를 찬양합니다. 더 이상 만약 내가 더 이상 언어를 사용할 수 없다면 이제는 하나님 내 마음의 언어로 당신을 찬양하고 당신을 높이고 여전히 이웃들에게 진실과 사랑의 마음의 언어를 가지고 다가서겠습니다. 하나님, 언어를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진 언어, 그 언어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고 계신지요? 기도하십시다.

오늘 우리는 거짓이 유행하는, 거짓이 편만한 사회 속에, 시대 속에, 분위기 속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정직해야 되는데 오늘 우리의 체면, 우리의 위신 때문에 정직을 외면하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이제 그만 거짓을 포기하십시다. 그리고 새로워 지십시다. 그리고 정직하십시다.

 

하나님, 내게 주어진 나머지 인생만이라도 정직하게 살고 싶습니다. 진실하게 살고 싶습니다. 내 입 술에 묻어있었던 거짓의 피흘림을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어 주시고 하나님 성령충만하게 도와주십시오. 내 입술에 거룩의 언어, 생명의 언어, 사랑의 언어를 담아 이웃들에게 다가설 수 있는 내 입술이, 내 언어가, 내 마음이, 내 존재가 되게해 주시옵소서. 우리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하십시다.

 

살아계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 합니다. 주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오늘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 앞에 나오게 하셨사오니 오 하나님, 우리에게서 거짓을 제거하시고 생명의 언어, 거룩의 언어 하나님 담아 주시사 주앞에 한 평생 정직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 소서. 우리가 연약합니다. 우리가 부족합니다.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 의 삶 속에 거룩의 언어를 담아 주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오 하나님,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께 우리의 감사와 사랑을 드립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과일향♡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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