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수*이동원 목사+목사님들설교

[스크랩] 강하고 담대하라(수1장1-9)

성령충만땅에천국 2016. 8. 24. 17:08

강하고 담대하라(11-9)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한 땅을 얻게 하리라." (1:6)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당시의 청년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의 속박에서 해방하여 40년 동안 인도하던 모세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때 아직 모압 땅까지밖에 오지를 못한 것입니다. 앞으로 가나안 땅을 점령할 큰 과업이 그들 앞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들이 나아가는 길에는 요단강이 가로막혀 있었습니다. 때마침 요단강은 물이 범람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강 건너에는 가나안 7족 원수들이 도사리고 있었던 그러한 때입니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모세와 함께 한 것 같이 너와 함께 하리니 너를 당할 자가 없으리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이 은혜의 약속의 말씀과 같이 권면한 말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고."

둘째는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네게 명한 모든 율법을 다 지켜 행하리라" 는 것입니다.

 

오늘은 일년에 하루씩 특별히 청년 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십자군의 전위대인 기독 청년에게 이 말씀은 매우 적절한 훈계라고 생각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과 남북통일을 위해서 분투하는 모든 한국 청년들에게 또한 국민들에게도 적절한 훈계인 줄로 생각합니다.

 

기독교 원리는 온유와 겸손의 면을 매우 강조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를 배우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해서 독일의 철학자 니이체 같은 사람은 기독교 도덕을 노예 도덕이라고 비웃었습니다.

약자의 윤리라고 비난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에 기인한 것입니다.

온유와 겸손은 결코 약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성품을 잠깐 생각해 봅시다.

그는 사실 온유하고 겸손한 성품을 가지셨습니다.

 

어린이들을 사랑하고 병든 자를 고쳐주시며 가난한 자들을 동정해 주시고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분입니다.

사실 문자 그대로 상한 갈대도 꺽지 아니하시고 꺼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시는 성품을 가지신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이와 같은 성품만 가지고 계신 분은 아닙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손에 채찍을 드시고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 돈 바꾸는 사람의 상을 뒤집어엎고 비둘기파는 사람과 소, 양을 몰아내어 성전을 깨끗이 하신 주님의 모습도 바라볼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당시에 세력이 있던 바리새 사람, 제사장들, 서기관들을 향해서 그들의 죄악을 책망하시며 "화 있을 찐저 너희 서기관과 제사장이여" 하는 그런 모습도 바라볼 줄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자기를 기다리는 줄 알면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장서서 담대히 올라가시는 우리의 주님의 모습도 연상해 보실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잡히던 그날 저녁의태연한 모습, 또한 공판정(公判廷)에서 재판을 받을 때의 그 태연 자약한 모습을 생각해 보셔요. 주님은 온유하시고 겸손하시지만 또한 강하고 담대하신 분이올시다.

 

그래서 주님에 대한 상징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어린양이 우리 주님의 상징인 것입니다.

어린양은 온유의 상징이올시다. 그러나 그러한 상징만은 아닙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 주님을 유대 지파의 사자라고도 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어린양과 같이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그러나 사자 같이 강하고 담대하신 주님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품격에도 이 두 가지 면이 있어야 합니다. 강유(剛柔) 겸전(兼全)해야 합니다. 외유내강해야 합니다.

 

밖으로 부드러우나 속은 강해야 합니다.

산에 들어가 보면 보드라운 이끼로 덮인 바위를 볼 수가 있습니다.

겉은 부드러운 이끼입니다. 그러나 속에는 반석이 있습니다. 이런 신앙과 성품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이기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이렇게 하려면 강하지 않고서는 할 수가 없습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다보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따르려고 할 것이면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도 고린도 전서1613절에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 외친 것입니다.

 

에베소 610절에 보면 "주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지고 마귀의 궤계(詭計)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全身)갑주(?)를 입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디모데 후서 21절과 3절에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한 것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내 자신 안에서 악을 멸하는데 강해야 합니다.

내 속에 악마의 시험을 이겨야 합니다.

광야에서 악마가 예수를 시험한 것처럼 지금도 우리 믿는 사람의 심령 깊은 속에서 항상 사탄이 우리를 시험합니다.

먹는 것을 가지고 시험합니다.

돌로 떡을 만들라고 했습니다.

명예와 허영을 가지고 시험합니다.

성전에서 내려 뛰라고 합니다.

세상 권세와 영광으로 시험합니다. 나에게 절하면 이것을 다 주겠다고 합니다.

 

그밖에 정욕을 통해서, 탐심을 통해서, 사치의 마음을 통해서, 나태를 통해서 여러 가지로 우리를 시험합니다.

 

강해야 이런 시험을 이깁니다.

약하므로 금주(禁酒)단연(斷煙)도 못합니다.

약함으로 악한 동무의 유혹을 끊지 못합니다.

약해서 주일도 잘 지키지 못합니다.

약함으로 자기 책임도 잘 감당 못합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은 내 자신 밖에서 악을 저항하고 소멸하는 데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악한 사상이 있습니다.

무신론 사상이 있습니다.

유물론이 있습니다.

악한 사상을 저항하고 소멸하는 데 강해야 합니다.

 

우리 한국 기독 청년들은 각종 사회악이 범람하는 중에 살고 있습니다.

부정과 부패가 있습니다.

음란이 많습니다.

사치가 많습니다.

밀수가 많습니다.

사기 횡령이 많습니다.

절도와 강도가 많습니다.

간첩들이 많습니다.

요새는 무장 공비까지 많습니다.

 

작은 일로 싸우지 말고 우리 기독 청년들과 믿는 사람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우리 사회악의 세력을 소멸하는데 여호수아와 같이 강하고 담대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바울이 옛날 아덴 성에 가 보니 아덴 성은 문화의 도시었습니다. 예술의 도시였습니다. 철학의 도시였습니다. 과학의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도처에 우상이 많이 섰습니다. 이것을 보고 바울의 심령 속에 분한 마음이 일어났다고 합니다.

의분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참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복음을 담대히 전파했다고 했습니다.

 

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는 문화의 사회라고 합니다.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원자탄의 시대에 살고있습니다.

그러나 죄악이 많습니다.

기독 청년들이 여기에 대해 의분을 느껴서 담대히 이런 사회와 싸우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복음을 전파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강하고 담대 하라"고 했습니다.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라."

"내가 모세를 통하여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라.“

곧 하나님의 법을 다 지켜 행하여 흠 없는 신앙생활을 하라는 그 말입니다.

특별히 여기 보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권면 했습니다.

 

제가 두 주일 전에도 잠깐 이런 말을 했지만 치우치지 말아야 됩니다. 성경 해석에 있어서도, 신학 사상에 있어서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됩니다. 신앙 노선에 있어서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아야 됩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는 언제나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지적인 요소, 감정적인 요소, 의지적인 요소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균일해야지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너무 지식 방면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너무 감정 방면이나 신비 방면에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너무 의지적 방면에나 사회 모든 생활에만 치우쳐서도 안 됩니다.

 

이 세 가지가 균일해야 됩니다.

조화가 되어야 합니다.

다 지켜 행하는 신앙 생활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사생활에 흠이 없어야 내가 내 책임을 바로 감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문자그대로 성적 혼란 시대입니다.

음란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런 때에 순결로써 우리 기독 청년들이 모범을 보여줘야 합니다.

이 시대야말로 허위와 사기의 시대올시다.

이런 때에 우리 기독 청년들이 진실과 정직으로 본을 보여줘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를 소위 빽의 시대라고 합니다.

빽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고 하는 시대니 만치 공명 정대의 생활로써 본을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이 시대가 얼마나 냉정합니까?

이런 시대에서 사랑과 관용의 모범을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겸손과 절약과 근면으로 모든 방면에서 기독 청년들은 빛과 소금의 직책을 해야 할 것입니다.

가정에서도 그리하고 직장에서도 그리하고 사회에 나아가서도 빛과 소금의 직책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켜 행해서 다른 사람에게 모범이 되고 감히 내 사생활에 대하여 비난하는 자가 없는 생활을 해야 이런 세상에서 담대히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생활의 뒷받침이 있는 이만이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용기의 뿌리의 근원은 양심적 생활에 있다."

 

양심적 신앙 생활을 하는이라야 강하고 담대하게 불의와 싸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이 어떻습니까?

요새 무장 공비 침투 사건과 미 구축함 푸에불로호 납치 사건 등으로 다소 우리 국민들이 흥분된 것이 사실인 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억하세요.

조금도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북괴의 의도는 남한의 사회적 안정과 경제적 발전을 저해하려는 신경전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큰 전쟁은 못 일어납니다.

우리는 느혜미야 때와 같이 한 손에는 무기를 잡고 한 손에는 쟁기를 잡고 예루살렘 성을 쌓는 것을 조금도 늦추어서는 아니 됩니다.

이런 때 우리의 건설에 방해를 받아서는 아니 됩니다.

 

문화 건설과 산업의 발전과 근대화 작업에 꾸준히 힘써 나갈 것뿐입니다.

신경전에 패배하지 마세요.
기독 청년들은 자기 직장에서 솔선 수범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민족의 가나안 복지는 반드시 쟁취될 날이 올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세요.

"내가 네 조상에게 반드시 주리라고 맹세한 땅을 네가 얻으리라."

이 땅에 민주주의 나라를 건설하고 남북을 통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반드시 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이와 같은 태도로 신앙 생활을 계속하면 우리의 영적 가나안도 반드시 올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이 시대에 있어서 우리의 갈 길을 바로 가고 우리의 할 사명을 다 수행해야 되는 것입니다.

 

한경직 목사(서울 영락교회)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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