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율법의 관계
1. 들어가면서
많은 설교들이 율법 준수를 힘있게 강조한다. 그러나 이 율법 준수는 구원 얻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렇게 살아야 할 생활 규범으로 법칙으로 강조 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 얻음에 결부되어 강조 되어왔다. 그러므로 더욱 혼란이 가중되어 그리스도인의 마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와 해방을 누리지 못한다. 율법이 구원의 길로 강요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율법이 구원의 조건으로 자주 개입하게 된 근본은 루터의 율법 이해에 기인하지만, 기독교의 발생 배경과 종교개혁의 발생 배경과도 관계한다.
처음 그리스도인들이 된 유대인들은 예수 믿고도 조상 전래의 율법을 잘 지켰다. 그들은 예수 믿어 성령 받음과 율법을 지킴 간에 아무런 충돌과 갈등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하므로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방인들은 율법을 지킴과는 무관하게 복음의 선포를 들으므로 예수 믿어 구원에 이르렀고 따라서 성령을 받았다. 그러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들이 예수 믿음만으로는 안되고 예수 믿음에 율법 준수가 병행되어야 그들의 구원이 완전해 질 것으로 여겨 율법 준수를 강요하였다. 이로써 사도들의 공회의가 열려 구원 얻음에는 예수 믿음만으로 충분하고 율법은 생활 규범으로 확정하였다.
그러나 로마교회에 의하면 신자들이 세례 받을 때 갖는 믿음은 잠재적 신앙이다. 이 신앙이 구원적 신앙이 되려면 사랑으로, 곧 선행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사랑으로 표현된 율법의 행위 없이는 구원은 불가능하다. 이것이 로마교회의 주장이었다.
로마교회의 이 복음과 율법의 교리를 벗어나는 것이 종교개혁이다. 복음에서 율법을 제거한 것은 루터가 이루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믿음뿐이고 선행에 의한 공로는 전적으로 배제되었다. 그러나 율법과 전혀 무관한 믿음이 아니라 믿음의 시작에 율법이 개입한다.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기 위해 율법이 복음에 앞서서 선포된다. 루터에게는 율법과 복음이 사망과 생명처럼 마주선다. 그의 이해에 따르면 아직도 율법은 구원의 길로 역사한다. 그에게 가장 큰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를 루터처럼 구원 서정적으로 곧 칭의 관계에서 어찌 내가 구원에 이를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이해한 것이 아니라 구원사적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율법은 복음의 예비 단계이다. 율법은 몽학선생이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율법을 다 성취하시므로 구원은 그를 믿는 것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에다 율법준수를 첨가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충족성과 주권성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구원사적으로 믿음의 길이 준비되었고 이제 성취되었으므로 각자의 믿음에 율법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율법의 폐지를 반복하였던 것이다.
2.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한 이해
바울이 개신교회의 신학자로 인정받고 주장되는 것은 그의 칭의 교리가 종교개혁의 출발점이라고 강조해서 가르친 사도이기 때문이다. 이 칭의 교리가 종교개혁의 출발점이고 이것에 근거해서 루터교회 뿐 아니라 개혁교회도 믿음으로 구원얻음을 계속하여 강조해 왔다. 개혁교회는 이에 더 나아가 성화를 강조하므로 칭의에만 과도히 집착하지는 않았지만 이신득의가 그 출발점이요, 기초임에는 다를 바가 없었다.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전개한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는 구원서정 혹은 순서의 도식에서 이해될 것이 아니고 구원사적 관점에서 개진되었다. 왜냐하면 바울의 모든 관심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서 종말론적 구원을 성취하였다는데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바로 하나님의 구원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이루어지기까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구원 섭리를 전개해 오셨는지의 관점에서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를 다룬다. 즉 아브라함에게 미리 의의 길, 곧 구원의 길을 내실 것을 약속하시고 아브라함이 믿는 믿음의 길로 하나님의 구원이 가능함을 아브라함과의 언약에서 보았다. 그 후에 율법 수여는 그 약속의 실현을 앞당기기 위한 섭리적 조치라고 보았기 때문에 담대히 구원의 길로서 율법을 배제할 수 있었다.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진리에의 집착은 바울이나 종교개혁자들이나 동일하였으나, 바울은 칭의 교리를 구원사적 관점에서 이해하였고, 개혁자들은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구원 서정(순서)적으로 이해하였다. 즉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믿음의 길을 하나님께서 예비해 오셨다는 사실에 바울의 주안점이 있다. 즉 하나님의 구원섭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의 준비라는 진리를 바울은 간파하였다.
루터가 이해한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살펴보면, 루터를 지배한 근본 문제는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가 율법을 지켜 의에 이르기를 위해 노력하면 할수록 율법은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지키기는커녕 범함만이 계속됨을 절감하였다. 이런 절망적인 상황에서 율법을 지킴으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믿기만 하면 구원에 이른다는 진리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율법과 상관없이 복음만이 선포되고 믿어지는 것이 아니다. 믿음의 첫 단계에 율법이 개입하고 선포되어 사람들을 절망에 이르게 하고서 그들을 복음 곧 죄의 용서의 선포에로 이끌어야 한다. 그러므로 율법과 상관 없이 복음의 선포만으로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정죄 선언을 받은 후 복음을 선포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리스도 이후에도 구원의 과정에 개입한다. 구원의 길은 율법의 정죄 선언과 복음의 선포의 두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율법의 정죄 선언으로 인한 절망에서 복음에로 나아간다. 이 루터의 율법과 복음의 관계 이해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구원 과정에 필수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적용되었다. 그러나 바울에 의하면 율법은 그리스도 오시기 위한 준비였고, 그의 강생과 속죄 사역 후에는 더 이상 구원과정에 개입하지 않는다. 모든 율법은 시민법으로서 죄를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율법의 다른 기능은 범죄를 더 증가시킨다. 율법은 인간에게 자기의 죄들을 계시하고, 연약함과, 눈멀음, 죽음, 지옥과 하나님의 심판을 현시한다. 이것이 율법의 본래적 기능이다.
이처럼 율법의 선포로 죄를 깨닫고 절망하여 겸손하게 한 후 은혜가 부어져 믿음에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복음의 선포와 그에 응답한 믿음 곧 회개에 의해서 이르는 것이 아니고 먼저 율법의 선포로 정죄가 와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 가능한 일이요, 처음 예수 믿을 때 회개와 믿음은 복음의 선포로만 된다.
루터의 말들을 인용해서 살펴본 것처럼 이방인들이 처음 믿음에로 들어올 때 복음 선포가 이루어지기 전에 먼저 율법이 선포되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먼저는 율법을 선포하고 그 다음 단계로 복음을 선포하여 이방인들을 믿음에로 인도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다 성취하사 구원을 이루셨으므로 복음만 선포하면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얻기 때문이다.
3.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
복음과 율법의 관계에 대해서는 바울 서신인 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히브리서에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특히 바울은 로마서 3장부터 8장까지에서 이에 대한 집중적인 논의를 전개하며, 갈라디아서는 믿음 후에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즉 구원을 얻은 후에도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소위 갈라디아니즘에 대한 잘못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복음과 율법의 관계, 그리고 율법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복음과 율법의 관계, 그리고 율법의 역할과 기능에 대해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특히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하나님이 구원의 길로 제시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함을 얻었는데, 갈라디아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은 후에도 할례를 받고 구원의 길로서 율법을 지킬 의무를 스스로 지녀 절기를 지키고, 여러 규례들을 지키고 있음에 대하여 책망하고 그 잘못을 지적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갈라디아인들처럼 할례를 받고 율법을 다시 지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무화(無化)되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루터와는 달리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구원사적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을 복음의 예비단계라고 했다.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백성들이 율법을 지킬 수가 있고, 또 그렇게 함으로 그들이 의롭다는 선언을 받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율법을 통해 그들의 죄가 드러나게 하여 자기들을 위해 율법을 온전히 지켜 주실 율법의 완성자로서의 메시야, 곧 예수 그리스도를 고대하게 한 것이라는 것이다.
바울의 말대로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죄의 결과 사망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키려고 하지만 잘 지키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율법은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범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절망하게 되고 구속주, 곧 율법의 완성자의 도래를 열망하게 된다. 그래서 율법은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게 한다. 한 마디로 율법은 구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몽학선생이다.
구원은 오직 믿음의 길이고, 율법의 길이 아니다. 구원의 길로서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뿐이요, 그 이후 율법은 전적으로 무력해졌다는 것이 바울의 주장이다. 바울은 이러한 믿음을 통한 구원의 진리를 율법시대에까지 적용시켰다. 바울에 따르면 하나님의 의의 길이 율법을 지킬 의무를 지녀 지키기가 힘들게 된 율법시대에 비로소 갈망 받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으면 율법의 모든 계명을 지킬 의무를 지니게 되는 할례의 조상 곧 유대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언약에서 약속되고 선포되었다고 한다. 즉 유대민족의 시작이 은혜로써 구원을 얻는 길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내신 의의 길은 우리는 지킬 수 없는 율법을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해 지키게 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완성하셨다. 그가 십자가에서 율법의 저주를 지고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다.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면 받아야 할 형벌을 지고 율법의 요구인 그 형벌대로 죽으셨다. 십자가에서 모든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이제 더 이상 백성들에게 그 준수를 요구할 수 없게 되었다. 율법이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으로 성취된 것이다. 따라서 성취된 율법은 더 이상 무엇을 요구할 수 없다.
바울이 구원의 길이나 방편으로서 율법이 전혀 효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밝힌 것과 달리 히브리서는 구약시대의 제사장 아론의 제사직의 관점에서 율법과 제사직의 효능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그것의 부족과 한계를 분명히 밝히고 그리스도를 통한 완전한 제사를 강조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사죄의 기능으로 일했던 아론의 제사직이 구약백성이 생각하듯이 죄를 제거하고 양심을 깨끗하게 하지 못했다고 한다. 율법은 속죄의 길을 가르치려는 관점에서 도입되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짐승의 제사로는 사람의 죄가 속량되지 못함을 가르치기 위해, 또한 완전한 속죄가 오고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 구약의 제사제도가 세워졌다는 것이다. 즉 완전한 속죄 제사인 그리스도의 희생을 예표하기 위한 섭리에서 구약의 제사제도가 세워지고 수행되게 하셨다는 말이다.
결국 구약의 피의 제사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희생제사에 비하면 그림자요 예표(豫表)였고, 그리스도의 제사는 실체요 원형이다. 오직 그리스도의 단번에 드린 희생만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하신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옛 언약 아래에서 주어진 율법과 제사는 완전한 속죄와 구원을 가져올 수 없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완전한 율법준수와 완전한 제사로 그것들을 성취하고 대치하였을 뿐 아니라 폐해졌다고 한다. 옛 언약의 율법과 제사의식은 그리스도께서 다 지키시고 완성하였으므로 그리스도 이후의 그리스도의 백성에게는 구원의 길로, 구원의 방편으로는 아무런 세력도 없고 아무런 구속력도 행사하지 못한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구원의 방편이나 길로서의 율법의 폐지를 말한다.
이렇게 성경은 구원에 관한 한 율법의 무익함으로 말한다. 그리고 구원은 오직 우리의 영원한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다.
종교개혁 신경들의 가르침을 살펴보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7조에는 그리스도의 영은 사람의 뜻을 종속시키고 능력 있게 하여 율법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자유롭고 기쁘게 행하게 한다고 진술하므로 율법이 구원의 길이 아니고 또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을 얽어매지 않으나, 생활의 규칙으로 역사함을 말했다. 종교개혁으로 나타난 최초의 신앙고백서로 1530년에 작성된 아우그스부르크 신앙고백서는 처음부터 반복적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 얻는다는 진리를 강조한다. 칼빈에 의해 기초된 불란서 신앙고백서는 율법은 그리스도의 강생으로 종결되었으나 우리 생활 법칙으로 역사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화란 고백서도 율법은 다 그리스도의 그림자여서 그의 오심에서 다 성취되고 그 사용이 그리스도 안에서는 폐기되었으나, 우리 생활의 법칙으로는 역사한다고 가르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길로서의 율법을 폐하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옛 언약에 대한 새로운 해석 내지는 적용을 가능하게 한다. 그 대표적인 예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날이 안식일에서 주일로 바뀐 것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라는 전우주적 사건에 근거한다. 부활은 단순한 부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사역이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재창조의 시작이요 부활의 날은 재창조의 첫날로서 하나님의 처음 천지창조의 첫날에 상응한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과 신약이 통일성을 가지게 된다.
4. 성경의 역사적 권위와 언약백성들의 생활 규범
구약의 해당 부분 곧 역사적 권위는 부분들이 그 권위를 일점 일획이라도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건 이후에도 구약 없이 신약이 성립하지 않으며, 신약 없이 구약이 바로 설 수가 없다. 둘은 늘 함께 읽고 들어야 한다. 둘은 상호 의존적이고 또 통일성을 이룬다. 왜냐하면 옛 언약의 역사에서 일하신 하나님이 신약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증거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즉 옛 언약에서 일하신 하나님은 새 언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의 구속을 이루시기 위해 일해 오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을 이루시려고 구약의 경륜을 내셨다. 바로 이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사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시므로 구약을 다 성취하셔서 우리가 기념하는 고난 주간과 부활절을 이루셨다. 하나님의 구원의 길은 오직 사람이 되사 율법의 요구대로 율법을 지키고 고난당하사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는 길뿐이다. 구약이 증거하고 신약이 그 성취를 말하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구원이다. 이 길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만이 구원이다. 율법의 준수로가 결코 아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남은 큰 질문은 구원의 길로서 율법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끝나고 무력해지고 아무 구속력도 없으면 그리스도인들과 율법은 어떤 관계를 갖는가? 아니면 전혀 무관한가? ‘율법은 언약 백성의 생활 규범으로 주어졌고 역사한다’는 진리이다.
여기서 한번 더 강조할 것은 구원의 길로서 율법은 끝이 났다.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율법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 필수불가결하다. 바로 이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가감없이 엄한 하나님의 권위로 서 있다.
통상 율법을 의식법, 시민법, 윤리법으로 나눈다. 이들이 다 그리스도의 속죄로 성취되었지만, 성취되므로 그 기능이 정지되지 않는 법은 곧 윤리법이다. 윤리법 혹은 도덕법은 그리스도의 속죄 이후에 하나님의 뜻의 표현으로서 더 강화되어 그리스도인들의 생활에서 그대로 시현되기를 요구한다. 즉 율법이 언약 백성들의 생활 규범으로 역사한다. 특히 윤리법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후에도 일점일획의 가감도 없이 더 강한 요구로 그대로 지켜지되 더 과격히 지켜지도록 요구한다. 바로 이 진리를 예루살렘 공의회가 결정하고 분명히 하였다.
율법의 기능과 그 역할을 정의하러 사도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을 때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에게 할례를 베풀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도록 명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였다. 즉 그들은 율법을 구원의 길로 재도입할 것을 강하게 요구하였다. 단지 할례와 율법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음에 모세의 길을 부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길이 아니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 저들의 확신이었다.
바울은 동료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의 오류에 도저히 동참할 수가 없었다. 그에게는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요, 그를 믿음 뿐이다. 율법은 결코 구원의 길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후에만 아니라 구약시대에도 동일하였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작정하시고 섭리해 오셨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율법을 구원의 길에 이르게 하는 몽학선생으로 주셨다.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 뿐이요, 그를 믿음으로 만이다.
두 구원의 길이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크게 충돌하였다. 사도들은 믿음만을 대변하였고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은 복음과 율법을 함께 요구하였다. 바리새파 그리스도인들이 장로들의 다수를 이루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파의 대표는 주의 형제 야고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 파의 영수인 야고보의 복음에 대한 바른 이해와 결정이 사도들의 공의회를 기독교 공의회로 결말지었고 율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만이 하나님의 구원의 길이라고 확정지어, 바울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 해석이 가장 바름을 승인하였다.
바울은 율법이 구원의 길이 아니라 언약 백성들의 생활 법칙과 규범임을 다른 측면에서 말한다. 롬6장에서는 그리스도인들이 은혜 아래 있고 율법 아래 곧 율법의 지배 아래 있지 않으므로, 곧 금하고 제재하는 율법의 권세 아래 살지 않으므로 죄를 지을 수 있느냐? 아니다. 다시 죄를 지으면 그 결국은 사망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여기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바울이 증명하고 롬8:1~4에서는 영으로 사는 자들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셨다는 명제에 근거해서 율법이 언약 백성들의 생활 규범임을 전개한다. 옛 언약의 백성들은 아무리 율법을 지키려해도 지킬 수 없었지만, 새 언약 백성들이 지킬 수 있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율법을 지켜 의를 이루시고 그 의를 우리에게 전가해 주셨을 뿐 아니라 자기 안에 계신 영을 우리안에 보내심으로 자기가 율법을 지키신 것처럼 우리도 그리스도의 영, 곧 성령으로 율법을 지키게 하셨다.
그러나 육신으로는 연약하여 율법을 지킬 수가 없다. 그렇다고 울법의 요구가 철회되고 소실된 것이 아니다. 육신이 연약하여 율법이 지켜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율법의 의로운 요구 곧 율법이 지켜져야 함과 그 기대를 철회하시거나 폐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율법이 지켜지지 않으면 안되게 섭리하셨다.
위에서 살폈듯이 율법은 바울에 의하면 구원의 길이 아니라 언약 백성의 생활의 법칙이고 규범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옛 언약의 구원 질서들 곧 모든 의식법들의 시행을 종결시키고 폐하셨다. 그러나 그 의식법의 본질과 정신까지도 소실되게 하신 것이 아니다. 그 의식법의 본질과 정신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와 경건 생활의 규범이 되게 하셨다.
옛 언약의 백성들의 국가 생활을 규정하고 제재한 시민법은 현대 사회에서 그대로 다 법칙으로 통할 수 없는 면이 많으므로 그 정신에 있어서는 법칙이라기보다 규범적이라고 할 것이다. 그 한 국가의 모든 생활이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도록 조직되고 진행되어야 한다는 진리는 지금의 <국가=교회>의 공식이 성립되지 않는 국사들에 있어서는 법칙이 못되고 규범성을 지닌 이상이라고 할 것이다.
구원의 길로서 율법의 기능 종결과 폐지를 말하는 히브리서와 종교개혁 신경들도 이구동성으로 주장하기를 율법 중 윤리법은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더욱 강화되었다고 한다. 그리스도께서 마5:18에 말씀하신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고 하신 말씀은 통상 윤리법에 적용된다.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서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말씀들이 주로 윤리법 곧 생활규범과 법칙들이었던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이 본문에 성취되기 까지는 이라는 구절은 특히 윤리법이 다 성취되어야 할 것임을 분명히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원의 길로서 율법이 그치고 폐지되었으며, 시민법도 그 기능을 다 행사하고 주장하지 못해도, 윤리법은 엄히 지켜지고 준행되어야 할 법칙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거룩하게 살지 않는 자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규범 뿐 아니라 법칙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을 받은 자들인데 그 받음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 그 길 외에 그리스도인 되는 법도 없고 거룩해 질 수도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작정된 자들이다. 이 거룩을 이루고 지킴은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데 있다. 이 거룩하게 되는 법 즉 계명은 마침내 이루어지고 말 것이다.
그런데 이 율법 중에 사랑의 계명이 가장 규제력이 강한 생활의 법칙이다. 그리스도인의 행동 원리는 사랑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사랑을 실재화하고 구체화했다. 율법의 성취 이후 모든 행동의 원리는 사랑이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은 사랑에 의해 동기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율법을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하셨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모든 율법과 선지자의 대강령으로 규정하셨다.
그러므로 주를 사랑하는 자는 그의 사랑의 계명을 꼭 지켜야한다. 왜냐하면 주를 사랑하는 자는 주의 사랑을 이웃에게로 자동적으로 나타내기 때문이다.“너희가 나를 사랑하는 자가 주를 사랑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사람에게서 발원하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연원한다. 그러므로 이 사랑은 계속되어 세상 끝까지 이를 것이다.
5. 신․구약의 통일성 문제와 예수의 메시야적 권위
바울에 의하면 율법은 처음부터 구원의 길이 아니고 구원의 길은 율법과 상관없이 예비되고 준비되었다. 율법은 오히려 복음의 준비를 위해 도입되고 그리스도를 맞아들이기 위해 세워졌다. 구약이나 신약이나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만이 구원의 길이라고 가르친다. 구약은 신약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에게로 진행해 왔다. 모세오경과 역사서와 시편과 선지자들이 다 그리스도를 증거한다. 즉 구약은 전체로 예표론적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그를 지향한다.
따라서 신약의 저자들은 그리스도를 긴밀히 구약에 관련시켰다. 그들은 구약에 없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였다. 예수는 구약의 그리스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가 신․구약의 전부이다. 따라서 구약과 신약은 분리해서 읽고 해석할 수 없다. 구약을 읽을 때 반드시 그 성취요 완성인 신약을 함께 읽어야 한다. 또 신약을 읽을 때 그리스도 예언인 구약을 함께 읽고 해석해야만 바르게 해석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그리스도로 세상을 구원하시고 그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심이 신․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과 경륜이다. 그러므로 신․구약은 상호 귀속한다. 구약을 인정함없는 신약 연구는 기독교가 아니다. 그리스도 교회는 양 성경의 통일성의 인정에 존폐를 함께 한다. 즉 사도적 선포에 있어서 결정적인 것은 예수는 구약이 증거한 그리스도라는 증거이다. 이 진리 때문에 구약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귀속한다.
예수는 자기의 출현을 하나님의 뜻과 종말론적인 성취로 여겼다. 그리고 종말론적인 마지막 때의 도입자 곧 성령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궁극적으로 도입하는 자로 여겼다.
예수가 이렇게 전권 의식을 갖고 누구도 할 수 없는 전권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오심이 곧 하나님 나라의 도래, 곧 하나님의 통치가 자기의 인격에서 영적 실재가 되었다는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전권 주장은 그의 구원 사역과 구원사적 관점에서만 바로 이해될 수 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이후부터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의 시대이다.
또 메시야로서 예수의 전권 주장은 그가 안식일에 사람을 고치고 자기를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한데서 너무도 강렬하게 나타났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정결 사건은 그의 초월적 유래에 근거한 권위의식에서 나온 사건이었고 또 그의 전권 주장은 중풍병자를 낫게 하면서 죄를 사하여 주신데서 밝히 드러났다.
예수는 자기 자신이 자기 권위의 신임장이었다. 즉 그는 자기 자신이 권위 외에 다른 권위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이것은 그의 어법에서 너무도 명백하였고, 듣는 자들의 귀에 당돌할 뿐 아니라 “참람하다”고 할 만큼 들렸다. 선지자들과 율법의 교사들은 말할 때 “주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니라”로 시작하고 결말 하였으며, 또 “율법에 기록되어 있으되”로 시작하였다.
6. 결 론
바울에 의하면 율법은 복음의 예비 단계였고, 복음이 온 후에는 파괴 세력으로서 율법의 지배는 구원사적-종말론적인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에 의해 제거되었다.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 곧 값없이 주신 선물이므로 인간의 공로가 개입할 수 없다. 인간의 공로가 조금이라도 개입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은혜되지 못해 하나님의 은혜의 주권성이 파괴된다. 율법은 결코 구원의 길이 아니고 예수 믿음만이 구원의 길이다.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고 생활규범이다.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약속하신 후 430년 후에 주신 것은, 율법으로 구원의 가능함을 보이심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구원을 재촉하기 위해서였다. 즉 언약 백성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 곧 그리스도만이 구원자임을 알게 하여 그를 믿게 하시려고 율법을 주셨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율법의 기능을 종결시키신 후 하나님은 물리적 세력으로 제사 제도를 폐하셨다. 폐해지기 이전에도 옛 언약의 구원 질서들 곧 제사제도가 백성들의 죄를 속하고 양심을 깨끗케 한 것이 아니다. 구약백성들의 죄도 그 제사가 지시하는 그리스도의 희생으로만 이루어졌다.
율법이 규범적 기능을 가짐을 예루살렘 사도들의 공회의가 결정하였고 특히 주의 형제 야고보가 결정적으로 공헌하였다. 율법은 언약 백성들의 생활 규범이다. 구원얻은 백성은 율법을 하나님의 법으로 지키되 그 정신을 따라 온전하게 지킨다. 모든 행동이 하나님의 말씀의 빛 아래서 이루어진다. 즉 그리스도의 법 아래서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행동은 사랑에 의해 동기되고 수행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모든 신자들의 마음을 강권하시기 때문이다. 자기의 피를 플려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 그 사랑이 새 언약 백성의 심장을 지배한다. 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율법을 사랑의 계명 곧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셨고, 자기 피로 언약을 세우시므로 그 피에 기초한 언약은 그 근거가 그 피에 표현된 하나님의 사랑임을 분명히 하셨다. 그러므로 새 언약 백성은 그 모든 삶과 행동에 있어서 사랑으로 행해야 한다.
그러나 신․구약의 이 통일성은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이 구약의 한낱 연장이나 그 중 한 사건의 연속임을 뜻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은 옛 언약의 구원 질서들을 종결할 뿐 아니라 지양하였다. 그리스도는 사망과 정죄 세력으로서 율법의 마침인 동시에 의롭다함을 얻는 구원의 길로서 율법의 마침이다. 율법 기능은 종결되었다.
복음과 율법과의 관계는 바울이 전개한 구원사적 관점에서만 바로 이해된다. 이 관점에서 이해할 때만 기독교가 기독교로 남는다. 율법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기독교이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의 바른 해석에 바울이 그의 사도로 서 있다. 연약하여 율법 준수로는 구원얻을 수 없는 인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길로 내셨다. 이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이다.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켜 구원에 이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 꼭 한 사람만이 율법을 다 지켰는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구원은 오직 이 예수를 믿음 뿐이다. 이 예수 믿는 백성들이 의거해서 살 법이 율법이다. 율법은 구원의 길이 아니라 언약 백성의 생활 규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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