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천 목사 설교

[스크랩] 무소유를 소유한다. (눅 19;1-10)

성령충만땅에천국 2011. 7. 3. 20:41

무소유를 소유한다.

                                                                                         눅 19;1-10.

 

성경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무소유의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소유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모세, 베드로, 바울 모두 소유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무소유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난 주간 나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었습니다. 법정의 무소유 책은 370만권 팔렸습니다. 만원씩이라면 370억원입니다. 대단한 책입니다.

이 책을 김 수한 추기경이 살아 있을 때 읽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읽었다. 아무 것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데 법정 스님의 무소유책만은 소유하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무소유가 무엇입니까?

법정 스님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안 가지는 것이 무소유가 아니라 필요없는 것을 안 가지는 것이 무소유다.>

정확한 정의입니다.

무소유를 살았기에 역사상 존경받는 사람들을 몇 사람 소개합니다.

등 영초

중국에서 여자 정치인으로 대표적인 사람을 찾으라고 하면 등 영초여사입니다. 그가 1992년 7월 11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중국 공산당 정치국원이었습니다. 중국 수상 주 은래 아내입니다. 그의 유서가 공개되자 온 중국이 놀랬습니다.

그는 청념결백하고 공정하고 살았습니다. 그는 죽기 오래 전엔 1978년 7월 1일 유서를 써놓고 살았음이 밝혀졌습니다.

“내가 죽은 후 장례식이나 고별식이나 추도식을 하지 말아라. 내 시신은 의과대학 해부 연구용으로 기증하여라. 남은 시신은 화장하여 남기지 말고 뿌려 버려라.

내가 살고 있는 집은 죽은 후 국고에 넣어라. 유명한 사람이 살던 집이라고 기념관을 만들지 말아라. 내 친척에게도 특혜를 주지 말아라.”

그런데 그의 남편 주 은래 수상도 이런 유언을 하였습니다.

“내 시체는 화장하여 뿌림으로 한 줌의 재라도 이 땅을 비옥하게 만드는 데 사용하여라.”

그래서 그가 죽은 후 화장하여 비행기에서 가루를 땅에 뿌렸습니다. 부부가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주 은래와 등 영초 부부를 살아서 정치할 때에도 존경하였지만 죽고 나서 더 존경하고 있습니다.

무소유의 삶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벤구리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70년 7월 9일 나라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1948년 5월 14일에 독립하였습니다. 우리나라도 같은 해 8월 15일 나라를 세웠습니다.

이스라엘의 국제 공항 이름은 벤구리온(David Ben-Gurion)입니다. 벤구리온(David Ben-Gurion 1886~1973)은 이스라엘 초대 수상이었습니다. 그는 13년동안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수상직을 마치는 날 그는 기사에게 말했습니다.

“차를 네게브 사막으로 몰아라.”

벤 구리온은 네게브 지방의 키부츠 스데 보케르(Sde Boker)로 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키브츠 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77세 때였습니다. 키브츠에서 그에게 베푼 특전은 4평짜리 방 하나였습니다. 그 곳에 도착한 그는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앞으로의 희망은 사막 개척에 달려 있다. 나는 이 사막을 개척하여 이스라엘에 쓸모 있는 땅을 한 평이라도 늘리겠다.”

그리고 이어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이 광야에서 우리의 창조능력과 개척정신의 유무를 테스트 받을 것입니다.”

그는 87세에 숨을 거둘 때까지 사막을 농토로 개간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가 죽자 그의 재산으로 남은 것이라고는 입었던 옷 한 벌과 신발 한 켤레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밀밭으로 그가 개간한 사막의 토지만을 남겼습니다. 무소유로 살았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정신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겨주었습니다. 하나는 무소유 정신이고 다른 하나는 개척정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존경하여 국제 공항 이름을 벤구리온이라 부르며 영원히 영원히 그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수상까지 지낸 그가 죽기까지 4평에서 살면서 옷 한 벌과 신발 한 켤레를 남긴 것은 큰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웨슬리

감리교를 창설한 요한 웨슬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의 재산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평생을 말을 18필을 갈아 탈 정도로 많이 다녔습니다. 그러나 그의 재산이란 입던 옷, 사용하던 냄비 그리고 보던 책뿐이었습니다.

웨슬리도 무소유의 사람이었습니다.

무소유의 정의는 무엇일가요?

다시 말씀드립니다.

“무소유란 안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필요없는 것을 안 가지는 것이다.”

필요없는 것은 가지는 것이 소유입니다.

필요없는 것은 안 가지는 것이 무소유입니다.

크로디 페이턴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박왕 아리스토틀 오나시스가 죽고 나니 5억불 약 6천억원이 남아 있습니다. 미국 타임지는 이런 글을 썼습니다.

<그는 아무 유산도 남기지 못 하였다. 조그만 기념비가 될 만한 일 하나 한 적이 없다.>

컬럼니스트 제임스 tishs(James Shannon)은 이렇게 글을 썼습니다.

<부동산을 남기지 못 하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어떤 정신적 유산도 남기지 못 하는 것이야 말로 슬픈 일이다. 가룟 유다가 자살하였을 때 주님은 차라리 나지 않으면 나았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잠비아에 반대적인 선교사가 있습니다.

클로디 페이턴(Claudie Peyton)이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났을 때 병에 들었습니다. 의사가 진단하였습니다.

“이런 건강으로는 아프리카에 가서 그 기후에 일년도 못 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가서 54년 일하다가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는 54년 동안 아프리카에 살면서 고국에 단 한번밖에 가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아원을 설립하였습니다. 18명 양자를 길렀습니다. 그는 늘 말했습니다.

“늘 무엇인가 준비하라. 무엇인가를 늘 잃을 준비를 하라. 늘 고통받을 준비를 하라.”

그가 죽었을 때 잠비아 대통령은 그에게 영광스러운 메달을 주었습니다.

성 프란시스

성 프란시스는 늘 말했습니다.

“수도사가 사는 집은 흙과 나무로만 지어야 합니다. 기본적인 소재입니다. 다른 재료를 사용하면 검소를 넘어 사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소유하지 말아야 합니다. 수도사들이 다 같이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무소유의 모델은 역사 삭개오입니다.

우리는 삭개오에 대하여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삭개오는 여리고 세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부자였습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간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삭개오는 그 유명한 예수님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키가 작았습니다. 그는 앞에 있는 뽕나무로 올라 갔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모습을 보셨습니다. 예수님은 뽕나무 밑으로 오시더니 말씀하셨습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이 말에 대한 삭개오의 반응을 보십시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하거늘”(6)

이 말을 듣고 삭개오는 급히 나무에서 내려 왔습니다. 즐거워하며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즉각적으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였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의 이런 고백을 듣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이것이 삭개오 이야기입니다. 삭개오는 소유에서 무소유로 돌아 섰습니다. 어떻게 하면 소유에서 무소유로 돌아 설 수 있을 가요?

우선 순위가 바뀌면서 시각이 달라지면 소유가 무소유로 바뀌게 됩니다.

1. 물질이 보이지 않고 사람이 보이까 무소유가 되었습니다.

삭개오는 지금까지 세금만 보였습니다. 돈만 보였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세리는 세금에 충성하여야 하는 것이 본질이요, 본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시선이 바뀌었습니다. 돈만 보이던 눈이 사람이 보였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가난한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중국 순제왕 이야기입니다.

순제는 장님 아버지밑에서 태어났습니다. 게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가 재혼하였는 데 계모는 몸시 그를 박대하였습니다. 모진 운명속에 태어났지만 사람들을 사랑하고 아끼며 무엇이든지 있으면 주면서 살시 그를 박대래서 놀라운 일이 생겼 그를 박대가 산속으로 가서 살든지, 광쉼니다가서 살든지 2년만 살면 동네가 만들어졌 그를 박3년만 살면 그 곳니다도시가 되었습니다. 그를 따르는 이들이 많시 그를 박이런 소문으로 요 왕이 사위로 삼았습니다. 요 왕이 죽자 그 자리를 물려 받아 황제가 된 사람입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을 하나님은 축복하여 주십니다.

삭개오는 돈을 사랑하다가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반을 죄값을 보상하는 데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러시아에 <황금의 궁전>이라는 유명한 전설이 흘러내려 오고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한 사람에게 황금의 궁전에 들어갈 열쇠를 준다는 전설입니다. 아주 예쁜 여인이 그 궁전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최대한으로 예쁘게 단장하고 궁전 문으로 갔습니다. 문지기가 자기의 미모를 보고 궁전 열쇠를 줄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문지기는 입장을 거절하면서 말했습니다.

“이 곳은 예쁘다고 들어가는 곳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선한 일을 한 사람에게 열쇠를 주지요.”

그래서 그 여인은 길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선한 일을 할 것이 무엇인지 찾았습니다. 거지를 만났습니다. 주머니에 있는 돈을 모두 그에게 주었습니다. 거지가 너무나 좋아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궁전으로 달려 가서 그렇게 하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문지기는 거절하였습니다.

실망한 여인은 다시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튿날이었습니다.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고개를 넘으며 힘들어 하는 할머니가 보였습니다. 그 여인은 달려 갔습니다. 그리고 그 짐을 자기가 짊어지고 날라 주었습니다. 그리고 궁전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문지기는 역시 거절이였습니다.

그 여인은 또 실망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 오고 있었습니다. 강아지 한 마리가 사냥군의 덫에 걸려서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자기도 모르게 달려갔습니다. 피가 흐르는 것을 보고 자기 치마를 찢어 닦아 주고 씻어 주고 싸매주었습니다. 품에 안았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정신없이 강아지를 돌보았습니다. 강아지가 살아났습니다. 그 때 궁전 문지기가 나타났습니다. 열쇠를 내밀었습니다. 그 여인이 말했습니다.

“나는 그 열쇠를 받으려고 이렇게 하지 않았는 데요.” 문지기가 말했습니다.

“이 열쇠는 자기를 잃어버리고 선한 일을 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지요.”

드디어 황금의 궁전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받으려고 일하는 것이 아니라 일하다가 보면 받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삭개오는 자기는 지금까지 당당하게 살아 오고 정당하게 재산을 모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돈이 보이지 않고 사람이 보이면 무소유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2. 당당함이 보이지 않고 죄가 보이니까 무소유가 되었습니다.

삭개오의 뜻은 <순전하다> <정의롭다>라는 의미입니다. 삭개오는 지금까지 자기는 정정 당당하게 살아 온 것으로 착각하고 살았는 지도 모릅니다. 세금을 받아도 정정 당당하게 합법적으로 받은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보니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토색한 것이 많이 드러나 보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고백하였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그리고 무소유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칸트가 이 세상에는 빛나는 것이 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는 하늘에 빛나는 별이고 다른 하나는 마음에 빛나는 양심이라고 하였습니다. 누구나 양심이 있습니다. 삭개오도 사실은 세금을 걷으며 조금 더 걷어서 자기가 약간씩은 가졌던 것같습니다. 이것이 늘 양심에 걸려 있었던 것같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양심의 불이 환하게 켜지면서 아끼던 물질을 그들에게 다시 되돌려 줌으로 보상받고 싶어 하였던 것같습니다.

죄가 보이니까 무소유로 마음이 환원되었습니다.

아주 가난한 집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아이들이 먹지 못 하고 입지 못 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어머니는 병들어 누워 있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돈만 생기면 술을 마시고 가정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엉망이었습니다.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아이들이 홑바지를 입고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옆집에서 고기 굽는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아이들이 야단이었습니다.

“엄마! 우리도 고기 먹고 싶다.”

어머니는 울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그래. 엄마가 베 한 필을 짜서 팔아서 고기 사줄 께.”

그리고 아픈 몸을 일으켜 아들에게 고기 한번 먹게 하여 주려고 기를 쓰고 베를 짰습니다. 며칠 걸렸습니다. 죽을 힘을 다 한 것입니다.

자기가 아파서 시장에 팔러 갈 수 없었습니다. 남편에게 팔아서 고기를 사오라고 하였습니다. 어머니와 아들은 꿈에 부풀어 기다렸습니다. 고기 먹을 생각을 하니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집안을 들락날락하였습니다. 그러나 해가 졌는 데도 남편은 돌아 오지 않았습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아들 손을 붙들고 시장으로 나가 보았습니다.

남편이 장터에 앉아서 화로에 고기를 구워 먹으면서 온 종일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죄를 깨끗하게 버리기가 얼마나 힘든 것이지 모릅니다.

루터에게 이런 순간이 있었습니다.

1511년 11월부터 1513년 4월까지 기록된 그의 글의 중심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죄, 죄. 오 나의 죄...”

자꾸만 범하는 죄에 노예가 된 자기가 미워서 자기가 해결할 수 없는 죄문제 때문에 몹시 고뇌하던 순간이 계속 되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까지 증오하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당신은 미울 정도로 무서운 신입니다. 어찌하여 지킬 수 없는 율법을 주시면서 나를 멸망시키려 하십니까? 당신은 정말 밉습니다.”

그는 한 때 극렬하게 하나님을 미워하였습니다.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죄의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던 1515년 어느 날 그에게 밝은 빛이 임하였습니다. 로마서 1;17이 그에게 빛을 주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7)

드디어 그는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죄의 문제로 씨름한 적이 있나요? 삭개오도 세금을 토색한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다가 뽕나무 밑에서 자유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면 물질적으로 자유함을 받게 됩니다.

어느 분이 여름 휴가에 강원도 산골 민박집에서 민박을 하였습니다. 뜰에 도라지가 있어서 캐서 고추장을 찍어 먹었습니다. 주인이 알았습니다. 난리가 났습니다. 주인이 산에 가서 캔 산삼이었습니다. 감정을 받아 보니 5천만원짜리였습니다. 주인은 감정서를 보이면서 산삼 머리를 찾아 들고 5천만원을 요구하였습니다. 안 내놓으면 도둑으로 몰아 신고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모르고 그런 것이니까 3천만 받으라고 사정사정하였습니다.

겨우 3천만원을 주고 풀려 났습니다.

죄에는 댓가가 지불되어야 합니다. 구약은 소, 양, 염소, 비둘기를 속죄물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4배나 갚겠나이다 하면서 물질로 속죄함을 받았습니다.

죄가 보이면 무소유로 바뀔 수 있음을 삭개오는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3. 땅만 보이다가 하늘이 보이니까 무소유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아브라함의 자손이란 하늘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을 의미합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에서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지옥에 갔습니다. 그러나 지옥에서 고통중에 천국에 있는 나사로가 보였습니다. 그 때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아브라함의 품에 있다는 것은 구원받은 천국백성을 의미합니다. 천국 하늘을 보니까 무소유가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사람이 이 땅에서 금이 너무나 좋아서 금만 모았습니다. 한 자루가 되었습니다. 그가 죽었습니다. 천국 문에 이르니 베드로가 문앞에 있었습니다. 그는 금덩어리가 가득 들어 있는 자루를 메고 있었습니다. 그는 베드로에게 사정하였습니다.

“베드로 사도님! 이 금은 내가 평생동안 모은 재산입니다. 이 금자루만은 가지고 들어가게 하여 주세요.”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그렇게 많은 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오지 왜 가지고 왔습니까? 가지고 가야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기어코 가지고 들어가야 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할 수 없이 허락하였습니다. 무거운 금 자루를 메고 천국에 가서 그는 크게 실망하였습니다. 천국에서는 금이 도로 포장 재료였습니다. 온통 천국은 금이었습니다.

하늘 나라를 보면 무소유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삭개오가 그랬습니다.

아서왕이 전투에서 돌아온 장군들에게 언제나 심각하게 묻는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대는 희생의 상처를 안고 돌아 왔는가?”

상처가 있으면 왕의 만찬에 참석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상처가 없으면 다시 전선으로 내보냈습니다.

이 다음에 하나님께서 심판대에서 한 명 한 명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그대는 하늘 나라를 위하여 일한 흔적이 있는가?”

이렇게 물으시고 복음을 위한 흔적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면류관을 주실 것입니다. 없는 이들에게는 책망하실 것입니다.

감리교를 창설한 웨슬리 목사님이 시골에 가서 전도할 때였습니다. 시골 교회에 둘렀습니다. 교회가 성장되지 않고, 항상 미자립으로 있어서 실망하고 있던 목사를 만났습니다. 그와더불어 전도하다가 어떤 집을 방문하였습니다. 외양간에 소가 벽만 멍하니 쳐다 보고 있었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저 소가 왜 멍하니 벽만 쳐다 보고 있는 줄 아는가?”

젊은 목사가 대답하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웨슬리 목사님이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소는 벽을 뚫고 건너 편을 볼 수 없으니까 저렇게 한심하게 바라보고만 있지. 그러나 사람은 영의 눈이 있기에 벽을 뚫고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어야 한다네.” 그렇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땅만 보지 말고 안 보이는 하나님의 축복의 세계를 영적으로 바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삭개오가 그랬습니다.

삭개오는 지금까지 땅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브라함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삭개오는 지금만 보았습니다. 그러나 내일을 바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선이 바뀌면 소유가 무소유를 바뀔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말했습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그렇습니다.

아무 것도 가지지 않는 것이 무소유가 아니라 필요없는 것을 가지는 것이 무소유입니다.

1. 물질이 보이지 않고 사람이 보이까 무소유가 되었습니다.

2. 당당함이 보이지 않고 죄가 보이니까 무소유가 되었습니다.

3. 땅만 보이다가 하늘이 보이니까 무소유가 되었습니다.

일본을 변화시킨 유명한 목사님이 한분 계십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님입니다. 그는 기생에게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가 자기 아들이 무시당할 가 두려워서 아버지 집앞에 버렸습니다. 아버지 부인은 그를 기르면서 학대하였습니다. 가출하였습니다. 길거리를 방황하며 거지로서 살았습니다. 좋지 않은 환경에서 좋지 않은 아이들과 어울리며 살았습니다. 깡패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길거리에서 전도지 한 장을 받았습니다. 그 전도지를 받고 교회에 나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수백만에게 영감을 주는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평생 무소유로 살았습니다.

모두를 주님과 이웃을 위하여 주며 살았습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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