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수*이동원 목사+목사님들설교

[스크랩] {송년}용서의 매듭 풀기(마 18:15-20) / 이동원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1. 11. 04:20

{송년}용서의 매듭 풀기(마 18:15-20)

 

한해를 마무리하는 주일입니다. 금년을 잘 결산하기 위해 우리가 할일이 적지 않겠지만 저는 무엇보다 세월의 한 과정을 후회 없이 매듭짓고 지나가기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용서의 실천이라고 생각합니다. 금년 한해 국내외적으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칸 영화제 여우 주인공(전도연) 수상작으로 그리고 국내적으로도 최고의 영화로 평가받은 한 영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창동 감독의 손으로 만들어진 ‘밀양’말입니다. 저도 오래 동안 감상의 기회를 벼르다가 지난 9월 미국 가는 비행기 기내에서 비로소 이 영화를 접할 수가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감상하기에 매우 불편한 영화였지만 이 영화가 이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 실천 전반에 대한 특히 용서의 문제에 대하여 매우 진지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고 느꼈습니다.


영화 밀양의 스토리는 교통사고로 남편과 사별한 여 주인공 신애가 유치원 나이의 아들과 함께 남편의 고향 밀양에 내려와 피아노 학원을 차리고 정착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점차 낯선 도시에서 정착해 갈 무렵 신애에게 예상치 않았던 불행이 찾아옵니다. 신애의 유일한 인생의 희망이었던 아들이 유괴를 당하고 아들을 구하고자 얼마 안 되는 자기의 전 재산을 갖다 바치지만 아들은 차디찬 시체로 발견됩니다. 범인은 아들을 가르치던 웅변 학원 원장이었습니다. 그는 곧 검거되어 감옥에 들어가서 복역하게 됩니다. 슬픔의 나락으로 떨어져 가던 어느 날 신애는 길 건너 편 약국 집사님의 전도로 교회에 나가고 그는 부흥회에서 안수도 받으면서 치유를 경험합니다. 그는 구역예배 우리 식으로 말하면 목장 모임에 나가 간증까지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애는 목사님에게 자기 아들을 죽인 범인을 감옥으로 찾아가 용서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리는 성도들도 있었지만 어떤 교우들은 장한 결단이라고 칭찬하며 감옥까지 동행합니다. 면회소의 창살을 두고 범인을 면회한 신애에게 범인은 의외로 얼굴도 깨끗하고 마음도 안정되어 보였습니다. 범인의 근황을 묻자 그는 교도서안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세례를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용서받아 이제는 신애씨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순간 주인공 신애는 큰 충격과 혼란에 빠져들어 갑니다. “피해자인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그를 어떻게 먼저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내가 당신을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당신이 용서받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때부터 신애는 신과 교회를 버리고 반항을 시작한다는 줄거리입니다.


물론 이것은 영화속의 이야기인 픽숀이긴 하지만 우리는 주인공에게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리고 어쩐지 그런 이야기가 우리 주변에도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 같아 우리의 얼굴이 뜨거워 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다시 한번 진정한 성경적 용서의 실천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 이제 본문에서 가르치신 예수님의 교훈에 근거하여 용서의 매듭 풀기가 어떻게 실제로 가능할 것인가를 묻고자 합니다.


1. 용서의 과정에는 인간적 매듭 풀기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의 레슨은 15절에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이라는 전제로 시작됩니다. 다시 말하면 죄를 범한 형제를 어떻게 용서하고 교회적으로 회복시킬 것인가를 다루고 있습니다. 용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인생에게 베푸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만이 가장 완벽한 판단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용서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인간적 매듭 풀기의 중요성을 간과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범죄가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발생하고 거기에 반드시 상처라는 매듭이 만들어지기 때문입니다. 18절의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에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우리의 용서가 감동으로 열매 맺지 못하는 많은 경우 대부분 이런 인간적 매듭 풀기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영화 밀양에서 제작자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고 싶은 가장 큰 메시지가 이 대목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셨다”고 간증하기에 앞서 우리가 잘못한 일이나 대상에 대하여 진솔하게 용서를 구하는 것 말입니다. 만일 영화 밀양에서 범인이 간증하기에 앞서 신애에게 먼저 진지한 용서를 구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것은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강조하신 바와도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습니까? 마태5:23-24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저는 성경이 인간적 화해를 반드시 하나님께 용서받는 조건으로 강조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럴 수 없는 상황도 얼마든지 가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용서의 과정에서 인간적 매듭 풀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할 수 있는데도 안하는 상황과 할 수 없는 상황은 구별되어야 마땅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께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생각나거든”이라고 말씀하실 때 그 생각은 인간적 매듭 풀기가 가능한 상황을 전제하신 것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형제들과의 관계의 회복에 대한 부담과 생각” 그 자체가 성령의 인도라면 그런 성령의 인도를 소멸하면서 우리가 어떻게 온전한 용서의 기쁨을 누릴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성경은 남편이 아내를 귀히 여길 것을 권면하면서 그 이유로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벧전3:7)고 강조하지 않았습니까? 인간적 매듭 풀기를 외면할 때 그것은 곧바로 우리의 기도 생활에 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고, 땅에서 매이면 하늘에서도 매인다는 뜻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해가 지나가기 전 매듭을 풀어야 할 사람들이 생각나지 않으시는지요?


2. 용서의 실천에는 기도의 은혜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용서의 교훈을 가르칠 때 거의 예외 없이 기도를 함께 가르칩니다. 주기도문이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겠지요.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기도하라고 시작되는 주기도의 내용에서 그 절정에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가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까? 본문에서도 예외가 아닙니다. 본문의 18절 다음은 19절입니다. 18절은 이미 우리가 묵상한 것처럼 용서의 실천을 통한 매듭 풀기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19절 이어지는 구절에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합심 기도의 중요성을 가르칩니다. 같이 읽으실까요.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땅에서 풀어 하늘의 응답을 받아내는 방편이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왜 성경은 용서의 실천으로 기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일까요?


용서는 인간의 의지로만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도움 없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도가 용서할수 있는 은혜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인간을 하나님께 연결시키는 은혜의 통로입니다. 기도하는 순간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이 통로를 통해 흘러오는 것입니다. 영화 밀양에서 주인공 신애는 용서를 너무 쉽게 생각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그녀가 정말 난 할수 없지만 하나님의 도움으로만 할수 있다고 생각하고 기도로 범죄자에게 나아갔다면 다른 상황이 전개될 수가 있었으리라고 믿습니다. 화란의 믿음의 여인 코리 텐 붐은 자기의 언니의 목숨을 앗아간 원수, 나치 수용소의 간수를 직면하는 순간 외마디 말을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주님, 난 저 사람을 용서 할 수 없어요.” 그러나 이 고백조차도 그녀의 기도였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기도 중에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난 너에게 용서 할수 있느냐 없느냐를 묻지 않았다고. 넌 나에게 순종하겠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코리가 다만 순종의 마음 하나로 상대방을 의지적으로 안는 그 순간 그녀에게 용서하는 진심이 위로부터 자신의 마음속에 쏟아지고 있었다고 간증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진정한 용서의 실천을 위해서 기도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용서의 실천을 위해 진지한 기도를 시작하시겠습니까?


3. 용서의 완성에는 공동체의 도움이 함께 해야 합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범죄 한 우리중의 지체를 어떻게 회복시킬 수 있느냐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회복이 1:1로 이루어지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경우라면 그것은 궁극적으로 교회의 과제가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보실까요.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전통적으로 이것을 교회의 치리 혹은 징계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징계의 목적은 회복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은 교회 공동체로서 우리가 이웃의 회복을 위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 중보기도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18절 말씀을 보십시다. “진실로 너희에게(복수)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복수)가 땅에서 매면--” 19절을 계속 보시면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중 두 사람이(복수)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20절도 읽겠습니다.“두 세 사람(복수)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상처 받은 영혼들의 회복에는 무엇보다 공동체의 관심과 중보 기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화 밀양의 마지막 장면은 주인공 신애가 병원에서 퇴원하여 미장원에 들러 머리를 자르는데 하필이면 그녀의 머리를 만지는 미용사가 유괴범의 딸임을 인지하는 장면입니다. 그녀는 머리를 자르다말고 미장원에서 뛰쳐나와 집에 돌아와 마당에 거울을 내다놓고 가위로 머리카락을 자르게 됩니다. 그때 머리를 자르는 마당 한 구석의 지저분한 곳을 한 조각의 빛이 비추면서 영화는 막을 내립니다. 저는 이 마지막 ‘빛의 메시지’야 말로 이 영화가 포기하지 않은 마지막 희망이라고 믿습니다. 이 한 조각의 빛은 혼란 속에 방황하는 한 슬픈 여인의 인생의 마당에도 여전히 내려 비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며, 이 빛을 따라서 슬픔의 마당에 버려진 영혼들을 포기하지 말고 따뜻한 사랑의 빛으로 비추어야 할 교회 공동체의 책임이라고 믿고 싶었습니다. 밀양이라는 단어 그 자체가 ‘비밀한 태양’인 것도 매우 상징적이고 이 영화가 외국에 소개된 제목 자체가 'secret sunshine'이었다고 합니다.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이웃들에게 그 비밀한 한 조각의 빛이 되어 줄 수 없다면 누가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 영화 속의 주인공 신애가 영화의 내용만으로는 정말 거듭난 그리스도인 이었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만일 밀양의 교회 공동체가 신애의 반항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수 없는 이 상처받은 가련한 영혼을 사랑으로 끌어안고 중보하고 계속 사랑의 빛을 비출 수만 있다면 그녀는 반드시 주께로 돌아올 것이라고 저는 믿고 싶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할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교회의 소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 한해가 저물기 전에 우리 주변에 한 조각의 빛을 가지고 찾아야 할 상처 받은 영혼들은 없습니까? 그 누군가를 용서해야 할줄 알면서도 용서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는 이웃들 곁에 머물며 성령의 기름부으심이 그에게 함께 하도록 중보 기도해야 할 영혼들은 없습니까? 아니 본의 아니게 내가 상처를 준 이웃들이 있는 것 같아 마음에 부담으로 머물고 있는 영혼들이 있다면 이 해가 지나가기 전 참으로 미안했다고 나를 용서해 달라고 호소해야 할 이웃들은 없는지요? 만일 우리의 이런 용서의 결단을 주께서 기뻐하신다면 교회 공동체의 중보와 성령의 역사를 통해 비로소 우리의 용서의 실천은 완성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사는 모든 곳은 더 이상 어둡고 추운 밀양이 아닌 따뜻한 밀양이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가 맞이하는 이 겨울은 우리가 경험한 지난 모든 겨울 중에서 우리의 용서로 아름다운 화해의 열매를 맺는 가장 따뜻한 겨울, 그리고 서로를 진심어린 사랑으로 축복하는 새해가 될 것입니다. Happy New Year!

출처 :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글쓴이 : 박종태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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