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수*이동원 목사+목사님들설교

우리가 서로 함께 머물 수 없을 때 (창 13:5-13) / 이동원 목사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1. 11. 04:29

우리가 서로 함께 머물 수 없을 때 (창 13:5-13)


저 유명한 시성 괴테의 남긴 말 가운데 태초에 갈등이 있었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태초에 갈등이 있었다. 역사의 처음부터 인생의 장에는 갈등이 존재했다는 말이죠. 갈등은 어쩌면 우리의 삶에서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직장, 우리의 사업의 장 심지어는 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장에서도 갈등은 존재할 수가 있습니다. 제가 자주 인용하는 이야기입니다만 저 유명한 스펄전 목사님의 전기에 보면 어떤 날 어떤 젊은 형제 가 찾아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 님 저는 교회생활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는데 저에게 완벽한 교회를 하나 소개해 주십시오. A perfect church 완벽한 교회를 소개해주십시오. 그때 목사님이 웃으시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형제여 형제가 만약 그런 완벽한 교회를 찾거든 나에게 꼭 일러주시오. 나도 그 교회의 멤버가 될 것이요. 그러나 당신은 만약 그런 교회를 찾거든 당신은 절대로 그 교회의 멤버가 되지 마십시오. 그래서 왜요? 그러니까 당신이 끼면 그날부터 그 교회의 완전은 깨질 테니까 말이예요.

 

불완전한 인간이 모여 형성하는 공동체는 언제나 그런 불완전성이 나타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는 죄성이나 부패성의 필연적 결과인 것입니다. 우리 인간의 삶의 장에 있어서 그러므로 갈등과 더불어 사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갈등은 피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갈등이 올 때 어떻게 우리가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보시면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서 이런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 사이에서 갈등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갈등의 정체를 본문의 6절에서 읽어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다 같이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창세기13장6절입 니다. 다같이 시작.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 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소유가 갈등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 정착하여 목축의 숫자도 늘어가고 재산이 늘어가면서 점차로 아브라함과 롯 사이에서 이런 갈등이 증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보편적인 삶의 모습이라고도 할 수가 있을 것입니 다. 가난하게 살 때 화목했던 형제들이 좀 살 만하게 되니까 재산 문제를 둘러싸고 싸움을 벌이는 광경은 인생에서 드물지 않은 보편적 삶의 모습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렇습 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갈등이 이제 한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했습니다. 더 이상 그대로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주도적으로 갈등에 대한 manage를 시도합니다. 이 갈등에 대한 해결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성경이 이 갈등을 해결하는 아브라함의 에피소드를 기록한 이유는 우리의 삶의 장에 지금도 존재할 수 있는 갈등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승리의 모본으로 기록했다고 볼 수가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갈등을 경험하게 될 때 아니 우리가 서로 함께 머물 수가 없을 때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본문에서 우리는 그 대답을 함께 찾고 싶은 것입니다. 첫째는 더 중요한 이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가 내가 어떤 사람과 갈등을 갖게 될 때 더 중요한 이슈, 내가 그 사람과 갈등이 생겼다 내가 불편하다 그것 보다도 더 중요한 이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을 우리가 배울 수 있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등에 휘말리게 되면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대의 비극은 뭐냐 하면 인생의 커다란 그림을 놓칠 수가 있다는 것이예요. 그 갈등 때문에, 그 갈등에 빠져 버린 나머지 더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게 되고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라든지 꿈이라든지 그 인생의 비전을 상실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정말 염려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우리가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문제에 집착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또 문제에 집착하다 보면 문제에 빠져버려요. 문제 속에 빠져버리면 그 문제에서부터 빠져 나오지 못하고 허우적 거리게 되면 이건 정말 문제입니다. 그것이 문제예요. 그래서 우리가 갈등이 일어날 때 좀 갈등을 벗어나서 큰 그림을 봐야 돼요. 더 큰 그림. 이 순간 내 삶에 있어서 더 중요한 문제가 무얼까? 보다 중요한 가치가 무엇일까? 내가 붙들고 계속해서 나가야 할 인생의 비전이 무엇이냐? 이 순간 내가 염두에 두어야 할, 저 사람이 나를 괴롭힌다 내가 저 사람과 불편하다 이 것보다도 더 중요한 인생의 이슈가 무엇이냐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는 말입니다. 자, 오늘 본문에서 아브라함의 고백을 한 번 들어보겠습니다.


8절입니다. 같이 읽을 까요? 8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아브라함이 롯보고 이렇게 말하죠. 우리는 한 골육이 아니냐 다투지 말자. 우리는 골육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형제다 이 말이죠. 우리는 형제다. 당신과 나 형제 라는 이 형제관계는 재산보다 더 중요 한 것이 아니냐? 그러니까 인간관계, 당신과 나 사이 형제라는 인간 관계를 보존하도록 하자. 더 중요한 이슈에 그는 초점을 맞추었어요. 물 론 세속적인 가치관에서 볼 때는 어떤 사람은 돈이 더 중요하다고 우겨댈지 모릅니다. 형제관계가 뭐 그리 중요하냐? 이래서 뭐니뭐니해도 money다. 그래 갖고 그 관계를 단절해 버릴 수도 있겠지요. 그건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관이다 말이죠. 그러나 우리가 정말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수용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우리가 적어도 돈에 의해 지배를 당할 수는 없잖아요? 그 보다는 더 중요한 어떤 가치를 붙잡아야만 할 것입니다. 인간의 관계, 이 얼마나 중요한 관계입니까? 이 관계를 상실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을 가져야 하겠지요. 더 중요한 것은 저는 본문에 직접적으로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본문이 암시하고 있는 매우 중요한 아브라함의 행동의 배경을 설명하는 한 구 절이 여기 7절에서 볼 수가 있습니 다.


7절을 한 번 더 읽겠습니다. 같이 7절 읽겠습니다. 시작.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저는 여러분들이 7절의 하반부에 있는 말씀을 좀 주목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지금 아브라함의 종들과 롯의 종들이 다투고 있습니 다. 다투고 있다 이렇게만 보도를 한 것이 아니라 7절의 하반부에 보시면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했다. 이 말을 왜 기록했겠어요? 거기 왜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세요? 자, 아브라함과 롯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란 말이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끼리 서로 다투고 갈등하고 있을 때 거기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있었다. 요즈음 식으로 말하면 믿지 않는 사람도 거기에 있어서 보고 있었다 이 말이죠. 이것 이 아브라함이 주도적으로 이 사건을 해결하고자 하는 열쇠를 제공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리스도인들이 다투고 갈등할 때 우리가 단 한 번이라도 이런 생각을 했었더라면 우리들의 행동을 불신자들이 지켜보고 있다 불신자들의 눈이 오늘 교회를 향하고 있습니다. 교회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보고 있다. 내가 교회가 부끄러움이 되는 대상으로서 내가 쓰임을 받을 수는 없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또 그리스도인들의 명예를 위해서 우리의 삶이 부끄럽지 않게 세상 속에 간증으로 나타나기 위하여 라는 더 커다란 어떤 이슈가 만약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더라면 얼마나 행동이 달라지겠어요? 최근의 어떤 부끄러운 일들이 참 그 리스도인들끼리 경험하고 있는 그런 아픔과 갈등의 모습들이 세상 앞에 노출될 때 우리는 얼마나 함께 괴로워하고 아파했습니까? 만약 이와 같은 분들 가운데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더럽히지 않기 위하여 양보하는 사람들, 그리고 자신을 기꺼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죽이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더라면 이런 사건들의 행방은 얼만큼 달라질 수가 있었을까요! 참 중요하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더 커다란 이슈. 그렇습 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그리스도인들이, 내가 이런 갈등의 한 복판에 서게 될 때 우리는 나와 그 사람, 이것만 생각해서는 안 돼요. 뛰어넘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큰 그림을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이 순간도 내가 붙잡아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평화,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런 더 커다란 그림과 비전을 보고 있다면 우리는 갈등을 넘어서는 어떤 해결책을 붙잡게 되리라고 생각해요. 그렇습 니다. 갈등이 올 때 저와 여러분이 이런 더 커다란 이슈를 바라볼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것이 갈등을 푸는 중요한 출발점이라고 생각해요. 더 중요한 이슈의 초점을 맞출 줄 알아야 한다.


두 번째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할 수가 있어야 하겠다 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대안 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 현실적인 대안, 반대는 무엇일까요? 비현실적인 대안이 되겠지요. 비현실적인 대안. 자, 비현실적이란 무엇 입니까? 문제해결에 도움이 안 되는 어떤 비생산적인 노력들. 예를 들어서 어떤 것이 비현실적인 노력이겠습니까? 저는 오늘 본문의 아브라함의 케이스 같은 그런 케이스 속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방법 중의 하나는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누가 옳으냐 누가 틀리느냐. 여 러분, 시시비비를 가리는 것으로 갈등이 해결이 됩니까? 별로 도움이 안 되면서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저는 한 판사님의 에세이집을 읽어 본 일이 있었는데 이 분이 자기의 일생의 법조인 생활을 회고하면서 자기가 판결을 내린 많은 판결들, 그 중에 절반 이상, 그 분이 정확하게 이런 말을 썼습니다. 거의 3분의 2정도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주관적으로 옳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는 문제들, 대부분 그런 것을 가지고 판결을 요청 할 때 그는 얼마나 많은 딜레마 속에서 자기의 법조인 생활을 계속해 왔는지 모른다. 맞습니다. 일생에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것들이 너무나 많아요.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는 문제들. 주관적인 판단에 따라서 사고의 전망에 따라서 옳을 수도 있고 그를 수도 있는 문제들이 훨씬 더 많아요. 명백하게 옳고 그른 것으로 나눌 수 없는 문제들이 너무나 많다는 말입니다.


제가 탈무드을 읽다가 이런 이야기를 읽었는데요. 옛날 우리나라 황희 정승을 연상시키는 그런 얘기라서 혼자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어떤 젊은이 두 사람이 갈등이 생겨서 유대인 랍비를 찾아 옵니다. 지혜로운 선생을 찾아 왔습니다. 자기들의 케이스를 호소합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그러지 말고 한 사람씩 와서 따로 따로 이야기 하라. 그래서 첫 사람이 와서 자기의 문제를 쭉 이야기했어요. 다 듣고 나서 랍비가 당신 말이 옳소. 그 다음에 두 번째 청년이 와서 자기 입장에서 그 케이스에 대한 설명을 쭉 했습니다. 이 사람이 다 듣고 나서 이 랍비가 또 당신 말이 옳소. 그 얘기를 뒤에서 듣고 있던 마누라가 이 랍비의 마누라가 아니 두 사람 다 옳다고 해 놓으면 도대체 당신 그게 판단이요 뭐요 어떻게 된 거요? 그러니까 마누라를 바라보면서 당신 말이 옳소. 당신 말이 옳소. 사실 옳고 그름이란 쉬운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학자이 면서 윤리학자 가운데 라인홀트 니이버 란 사람이 있습니다. 이 니이버 란 사람이 이런 얘기를 했습니 다. 사실 우리들의 선택은 대부분 옳고 그름 사이의 선택이 아니다. 더 많은 경우에 그것은 보다 큰 악과 적은 악 사이에 선택해야 할 문제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이것은 선이다 악이다 하지 말고 보다 적은 악을 선택해야 할 경우들이 훨씬 더 인생에서는 많다. 이런 이론을 통해서 그는 소위 기독교 현실주의 라는 그런 윤리적인 이론을 제창했습니다. Great evil과 less evil 큰 악과 작은 악. 예를 들어서 아브라함의 케이스 속에서도 아브라함과 롯이 피가 터지도록 서로 싸운다. 그거 나쁜 일이죠. 악한 일. 그러나 그걸 예방하기 위해서 우리는 아예 관계를 단절한다. 관계 단절도 악이예요. 둘 중에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 말이지요. 둘 다 나쁜 것인데 보다 적은 악을 선택하자. 보다 적은 악이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생각해 보고 이렇게 계속 갈등을 지속하면서 피투성이가 되도록 우리가 싸우는 것보다 우리가 헤어지자 이런 제안을 한 것이예요.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것은 완전한 결별, 완전한 단절을 아브라 함이 롯에게 제안한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자, 일단 본문의 8절 이하에 보시면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서로 떠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문맥을 우리가 살펴보면 이 것은 완전한 단절이나 완전한 결별이 아니라 이 갈등을 줄이고 우리의 생산적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일단은 떠나서 좀 살아보자 그리고 좋은 관계를 후일에 도모하자. 저는 그랬으리라고 생각을 해요. 이런 내용이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자, 우리 본문이 창세기13장인데 다음 장은 몇 장입니까? 대답에 곤란을 느끼십니까? 14장이죠. 14장에 들어 가면 어떤 얘기가 나옵니까? 혹시 읽어보셨어요? 좀 주일날 오시기 전에 읽어보시고 그러면 더 좋은데. 14장에 보면 롯이 포로가 됩니다. 전쟁 포로가 돼요. 그때 전쟁 포로가 된 롯, 아브라함을 떠나서 이제 롯이 더 좋은 땅을 가졌어요. 아브 라함이 화가 날 수도 있어요. 그렇게 좋은 땅 챙겨가지고 떠나간 롯, 자기 조카 롯이 전쟁의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브라함이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14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요? 조카 롯을 구출합니다. 여전히 도와줘요. 그러니까 이것은 완전한 단절은 아니예요. 그리스도인들은 완전한 관계의 단절, 이런 것은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계속되는 갈등의 증폭을 막기 위해 잠시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서로 떠나서 생산적인 관계를 한 번 도모해보자. 굉장히 필요한 거예요. 이것이 현실 적인 대안이란 말입니다. 현실적인 대안. 저는 종종 고부 관계에 대한 카운셀링을 맡았을 때 이렇게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같은 공간 안에서 계속 갈등하면서 그냥 싸우는 것보다 차라리 조금 더 경제적인 지출이 있고 손해가 있더라도 그렇다면 좀 따로 살면서, 따로 살면서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방 법을 모색하는 것이 훨씬 더 건강한 인생의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 그 신앙의 장에서 그럴 수가 있습니 다. 하나님의 일 하다가도 서로 하나님의 일 하는 사람끼리 갈등을 경 험할 수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나바와 바울이 같이 전도여행을 하다가 두 사람이 갈등을 빚게 되었습니다. 마가 요한이라는 청년 때문에. 마가 요한이라는 젊은이가 전도여행 하다가 그만 무단이탈을 했습니다. 뺑뺑이를 친 거예요. 그러니까 바울은 아주 단호한 사람입니다. 엄격한 사람이고 목적지향적인 사람이고. 그러니까 바울은 이렇게 성실하지 못한 사람을 데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은 좋지 못하다 이 사람 데리고 가지 말자. 이것이 바울의 지론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기독교는 바로 이런 사람을 받아주고 이런 사람의 상처를 치료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겠습니까? 기회를 줍시다 데리고 갑시다. 그래서 둘이 싸우게 되었어요. 바울과 바나바가. 여러분, 누가 옳습니까? 바나바가 옳습니까 바울이 옳습니까? 대답해 보시죠. 둘 다 옳아요? 그러나 선택한다면 어느 것이 옳은 것 같아요? 바나바적인 사람은 바나바가 옳다고 그럴 것이고 바울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바울이 옳다고 할 것입니다. 이건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예요. 방법론의 차이예요. 사고의 전망의 차이예요. 이것을 가지고 어느 쪽이 옳았다 글렀다 옳고 그름의 차이로 접근하면 안 된다 말이죠. 그러나 항상 자기는 옳고 다른 사람은 그르다는 전제에서 인간 관계를 형성하는 사람이 있어요. 이 거 참 문제예요. 심리학자 해리슨 이라는 사람이 쓴 책 가운데 유명한 I'm OK You're OK 라는 책이 있습니다. 나도 옳고 당신도 옳을 수가 있다. 이건 건강한 사람이예요. 나도 옳을 수가 있고 당신도 옳을 수가 있다. 또 나도 틀릴 수가 있고 당신도 틀릴 수가 있다. 이것도 건강한 사람이예요. 그런데 문제는 어떤 사람이냐 하면 I'm OK You're not OK. 나는 OK 인데 네가 틀렸다. 네가 틀렸다. 항상 자기가 정의예요. 자기가 정의의 잣대, 다른 사람은 항상 불의한 거예요. 단순한 방법론의 차이, 주관적 해석의 전망의 차이를 가지고 자기는 정의예요 항상 다른 사람은 불의예요. 항상 정의감을 가지고 다른 사람 공격하는 항상 공격적이고 파괴적이고 비판적인 그런 이론을 진술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요. 심리 학자들은 이런 사람을 거의, 정신의학계에서는 이런 사람을 환자라고 봅니다. 병자라고 봐요. 이거 병이예요. 치료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치료하지 않으면 자신도 불행하고 공동체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들이예요. 아니면 이런 좁다란 렌즈를 갖고 사는 사람들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살면 돼요. 떠나서 그런 공동체에 속하면 되는 것이예요.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공동체 안에서 굉장히 공동체의 삶을 부조화스럽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건강한 삶의 모습이 아닙니 다. 우리는 누구나 다 잘못할 수가 있습니다. 틀릴 수가 있어요. 나도 잘못 할 수가 있고 당신도 잘못할 수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보다 건강한 대안을 함께 현실적으로 모색할 줄 알아야 돼요. 나는 정의고 당신은 불의요 라고 소리치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더 좋은 의견을 찾아 보십시다. 이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할 줄 아는 사람들, 이것이 지혜롭게 인생을 사는 가장 중요한 방법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아브라함의 케이스 속에서 주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좀 지혜를 주셔서 참 갈등 많은 인생의 현장에서 이런 현실적 대안을 찾아갈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현실적인 대안을 찾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다음에 세 번째로 중요한 것은 믿음에 근거한 결단을 내릴 수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에 근거한 결단을 내릴 수가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선택, 믿음의 결단을 할 줄 알아야 돼요. 자, 대안만으로 족하지 않고 인제 어느 한 순간 결단을 내려야 돼요. 그런데 어떻게 결단하느냐? 믿음의 결단을 해야 된다. 믿음의 선택을 해야 된다. 그런데 믿음의 결단은 어떤 것인가? 오늘 본문에 보시면 아브라함의 선택과 롯의 선택이 아주 대조적인 contrast 대조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자, 믿음의 선택이 뭔가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아브라함의 선택을 생각하고 그러면 믿음이 아닌 선택이 뭐냐? 롯의 선택을 생각해 보면 돼요. 자, 한 번 찾아 보겠습니다.


본문의 10절입니다. 창세기13장10절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창세기13장 10절 다같이 읽습니다. 시작.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절까지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 라"


자, 이제 아브라함이 9절에 보시면 먼저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네가 먼저 선택하라.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측을 선택하겠다.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준 것입니다. 자기가 양보한 것이지요. 양보하는 아브라함의 심정은 이 문제를 하나님이 좀 주관했으면 좋겠다. 일단 롯에게 선택권을 주고 나는 나머지 땅을 선택하겠다. 하나님께 맡긴 거예요. 거기서부터 믿음의 선택이 시작된 것이지요.


그 다음에 10절에 보시면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의 들을 바라본즉"


여기서 바라본즉 이란 단어에다 언더라인해 두세요. 그게 중요한 거예요. 딱 봤어요. 롯이 딱 보니까 소돔과 고모라 쪽의 땅이 아주 비옥해 보였어요. 거기 호수도 있고 땅의 모양새가 생김새가 아주 좋아 보였어요. 아주 비옥한 땅 같았습니다. 저기가 좋겠다. 그러므로 롯이 소돔과 고모라 쪽의 땅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롯의 선택은 보이는 것에 의한 선택이예요. 보이는 것에 의한 선택.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선택했느냐? 아브라함은 choice가 없어요. 롯이 선택하고 난 나머지를 아브라함이 선택한 거예요. 소돔과 고모라 쪽이 아닌 땅, 헤브론 쪽의 땅을 선택했어요. 헤브론 이란 지금의 가자 신문에 많이 나는 가자 팔레스타인 해방기구의 가자 지역과 붙어있는 곳에 헤브론이 있습니다.


자, 18절. 창세기13장18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다같이 시작.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헤브론 쪽의 땅은 안 좋은 땅이예요. 안 좋은 땅. 헤브론에 가면 지금도 아브라함의 성지가 거기에 준비되어 있고 성지순례 하는 사람들이 찾게 됩니다. 아주 안 좋은 땅 이예요. 지금도 안 좋아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 곳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헤브론을 선택하고 나서 보니까 거기다 장막을 짓고 뿐만 아니라 마지막에 보시면 18절 마지막에 뭐라고 했습니까?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비록 안 좋은 땅이지만 하나님 제가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한 이상 여기가 하나님 주신 땅으로 믿습니다. 여기서 살겠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선택이예요. 여러분, 성경이 믿음을 설명할 때 이 보는 것하고 대조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십니까?


고린도후서5장7절에 보시면 한 번 따라 하세요.
"우 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우리가 믿음으로 행한다 그런데 보는 것에 의해서 하지 않는다. 믿음은 단순히 보는 것에 의해서 무엇을 선택하거나 결정하지 않는다. 그런데 롯은 딱 보니까 소돔과 고모라가 좋았거든요. 보시기에 좋았어요. 아주 비옥한 땅 이었어요. 그래서 선택했어요. 그건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보이는 것에 의해서만 결단하는 것은 믿음이 아 니고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가치를 생각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면서 이것이 안 좋아 보이지만 하나님 내가 하나님께 맡기겠습니다. 이것이 손해 같지만 나에게는 희생 같지만 하나님을 의뢰하고 주님을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쪽 땅을 선택한 것입니다. 결과는 잘 알죠? 결과는 어떻게 됐어요? 롯이 선택했던 소돔과 고모라가 나중에는 불바다가 됐어요. 불바다. 아브라함의 선택이 옳았어요. 믿음의 선택. 믿음의 선택이라는 것은 당장의 이익을 생각하지 않는 거 예요. 우리는 당장의 이익이 되기 때문에 당장에 이것이 편리하기 때문에 선택합니다. 그러지 말고 당장에 손해가 되더라도 당장에 나에게 불리해 보여도 내가 정당한 선택을 하겠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내가 투명한 선택을 하겠다. 이런 믿음의 선택이 중요하다 말이죠. 믿음의 선택. 그랬더니 아브라함은 드디어 믿음의 조상이 될 수가 있었다. 우리들의 존경을 받는다.


롯은 지금까지 그 잘못한 선택의 사례가 되어버리고 말지 않았습니까? 아브라함이 마지막 승리자가 된 것이죠. 여러분, 갈등을 넘어선 아브라함의 최후의 승리가 저와 여러분에게 무엇을 시사하고 있습니까? 인생의 장에서 갈등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 그리스도의 생애를 봐도 예수님의 생애 속에도 갈등이 있었어요 없었어요?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향해서 가까이 갈수록 주님의 생애 가운데 더 많은 갈등이 증폭되고 있는 광경을 볼 수가 있습니다. 대제사장들과의 갈등, 백성의 장로들과의 갈등, 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하고 음모하고 예수님의 입지가 자꾸만 좁아집니다. 그런데 예수님 그들과 싸우지 않아요. 싸우지 않으셨어요. 어떻게 하셨습니까? 또 이들을 대결 할 수 있는 어떤 전략을 구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럴 수 있었어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가만히 있어요. 그냥 그리고 십자가에 매달리세요. 그리고 매달리시면서 자기를 십자가에 매단 자들을 아버지 저들이 자신이 하는 것을 모르오니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그들을 용서하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어요. 원한다면 그는 십자가를 부술 수 있는 힘이 있었어요.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십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저는 늘 만화 같은 상상을 많이 하는데 십자가에 딱 매달려 계시다가 갑자기 예수님이 딱 십자가를 비틀고 이단 옆차기로 딱 십자가를 부수고 나와서 요놈들 하고서 로마의 병정들을 그냥 작살을 내버렸으면 얼마나 통쾌할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어요. 그냥 십자가에 매달리셨어요. 무력하게 그냥 당하시고 죽어가시고 용서하시고 그런데 바로 그 분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찬송과 영광을 받으시는 인류의 구세주가 되시고 주님이 되셨다 말이죠. 그것이 주님의 방법 이예요. 그 것이 주님의 방법. 그 분이 그러나 마지막 승리자가 되실 수가 있었습 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기를 원하는 여러분과 저라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오늘 여러분과 저의 삶의 장에 어떤 갈등이 있습니까? 그 갈등만 생각하지 마세요. 큰 이슈를 바라보세요. 우리가 붙잡아야 할 더 위대한 가치, 또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이 현실 속에서 최선이 무엇인가 란 현실적인 대안을 모색하십시오. 그리고 결단의 그 순간 좀 나에게 손해가 되어도 당장은 나에게 불리한 것 같아도 정당한 선택을 하겠다.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겠다 주님을 신뢰하겠다. 믿음의 선택을 했을 때 마지막에 웃는 자,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삶. 그리고 더 중요한 하나님의 가치를 붙잡았기에 하나님의 평화 속에 하나님의 은혜 속에 살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증거하는 자로 한평생을 살겠다. 이런 더 위대한 삶의 축복을 붙잡고 진정한 승리자가 되는 새 천년의 새해를 맞이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우리 인생의 장에 언제나 갈등은 존재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가정, 저의 가정에 어떤 갈등이 존재하고 있는 지요? 우리 인생의 장에 어떤 갈등의 상대방만 생각하지 마세요. 하나님 바라보세요. 하나님 바라보시고 또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인생의 꿈과 비전을 바라보시면서 내가 주 앞에 어떤 모습으로 살 것인지를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정말 평화를 만드는 자 그리고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사람다운 사람으로 한평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주여 내 가슴을 찢고 누르고 있는 갈등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진정한 평화를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는 자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다같이 우리 통성으 로 기도하겠습니다.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감사합니 다 주신 말씀을 받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따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주 앞에 묻습니다. 우리 부족하고 우리 연약하여도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면 우리가 우리 삶에서 진정한 승리를 거둘 수가 있는 줄로 믿습니 다. 인도해주시옵소서. 함께 해 주시옵소서. 주님 바라보고 걸어갈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