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성한 은혜의 법칙 시36:5-12, 빌4:10-20
서울 어느 학교 가정 연구원에서 상, 중, 하 부류의 가정, 약 60만 가정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습니다. 그 중에 '우리 가정은 행복합니다.'는 응답이 약 2만 가정이 나왔습니다. '우리 가정은 불행합니다.'는 응답은 약 43만 가정이 나왔습니다. '우리 가정은 잘 모르겠습니다.'는 응답은 약 13만 가정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60만 가정 가운데 행복하다는 가정은 2만 가정밖에 안 나왔습니다. 그 2만 가정을 분석하니 기독교인이 85%였습니다. 여기서 불교인은 3%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응답의 결과가 우연일까요? 살아계셔서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행복감을 느끼는 일은 당연한 것입니다. 신앙생활 하면서 행복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이상합니다. 오늘은 두 본문을 중심으로 “풍성한 은혜의 법칙”이란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매 순간 은혜의 원천으로부터 공급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구약 본문 시36:8에 “그들이 주의 집에 있는 살진 것으로 풍족할 것이라 주께서 주의 복락의 강물을 마시게 하시리이다.”했습니다. 신약 본문 빌4:19에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으신 풍성하신 분이십니다. 우리의 부족을 알면서도 안타까워만 하는 무능력한 아버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우리들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하루 종일 말씀을 듣다가 배고픈 군중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해 모두 배불리 먹고도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나 되었습니다(요6:5-15).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 이상의 것을 주십니다. 그래서 엡3:20에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엡3:20)라고 소개합니다.
유명한 무디 목사님은 시편 36:8의 구절을 그리스도인들의 은행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의 공급의 원천은 나의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그분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이 은행은 영광스러운 은행이며 이 은행의 금고는 결코 바닥나지 않을 만큼 풍성합니다. 이 은행은 고객들의 필요를 반드시 공급하는 철저한 신용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의 쓸 것을 채우십니다. 온갖 좋은 것으로 풍성하게 채우십니다.
그런데 왜 이런 풍성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할까요? 문제는 이 전능하신 하늘 아버지에 대한 믿음을 같지 못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강퍅한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미국 개척 초기 서부텍사스에서는 하도 살인사건이 많이 일어나 아예 살인자는 반드시 사형에 처한다는 법을 제정해 놓았습니다.
어느 날 한 술집에서 젊은이들이 서로 어울려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한참 흥겨워진 술자리에서 갑자기 총성이 들렸습니다. 그 중에 한 젊은이가 옆에 앉은 친구를 권총으로 쏴 죽인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총을 쏜 사람이 평소에 아주 선량한 사람으로 언제나 이웃들에게 칭찬을 많이 받던 젊은이였습니다.
살인을 한 젊은이가 사형에 처할 운명이 되자 그 젊은이를 아끼는 많은 사람들이 구명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많은 지역 주민들의 간곡한 바람이 담긴 탄원서가 주지사에게 전해졌습니다. 탄원서를 읽은 주지사는 큰 감동을 받고 자신이 직접 그 청년을 만나 죄를 용서해 주겠다고 주민들에게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은 죄를 짓고 난 뒤 성격이 완전히 변해버렸습니다. 그는 자기의 삶을 자포자기하여 비뚤어진 생각만 하고 나중에는 행동까지 난폭해졌습니다. 주지사가 사면장을 가지고 그를 면회하려고 했지만 그는 이를 거부했습니다. 여러 사람의 구명 운동 덕분에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큰 은혜를 그는 저버렸습니다. 결국 그는 사형으로 인생을 마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총을 받지 못하고 심판을 받게 되는 것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길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열어 놓으셨지만 믿음으로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회개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기 때문에 용서받을 기회를 잃고 결국은 멸망의 길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 믿음의 사람이 되어 은혜의 원천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풍족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2.항상 드리고 베푸는 일에 인색하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풍성하게 공급받을 욕심만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공급해주시는 것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별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공급해주셔도 자신을 위하여 쌓아 놓기만 한다면 고여 있는 물처럼 썩어 못쓰게 되고, 결국 그 공급은 중단될 것입니다. 우리가 풍족한 삶에 계속 거하려면 나누고 드림에 있어서도 풍성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릴 때에도 체면 때문에,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드리지 않고 마음에 정한대로 즐겨 드리는 모습을 보일 때 하나님께 사랑을 받습니다. 그런자에게 넘치는 복으로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낌없이 십일조를 드리고 부당한 제물을 거절하고, 심지어 독자 이삭이라도 아끼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바치려는 아브라함에게 창12:2에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하고 축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 믿는 성도들을 통하여 축복과 은혜의 강수를 다른 사람들에게 부어 주는 복의 근원으로 삼으시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물질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해도 계속 탐욕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나눔과 드림의 삶에 인색하다면 그는 부족함이 많은 인생입니다. 그러한 자의 마음에는 기쁨도 감사도 평안도 없습니다.
그러나 넉넉하지 못한 가운데서도 드리고 나누기를 기뻐하는 성도, 그러한 교회에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우리에게 넘치게 하셔서 모든 일에 항상 넉넉하여 착한 일을 넘치게 할 수 있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렇게 아름다운 삶을 사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축복하고 싶어 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 편지를 쓰게 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아직 연륜이 얼마 되지 않았고 믿음이 어린 성도들이었습니다. 바울이 아시아를 향해 가다가 성령의 지시로 방향을 유럽으로 돌이켜 전도한 유럽의 첫 번째 개척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통해 복음을 받아드리고 구원을 경험한 그들은 바울사도의 복음 선교 사역에 동참하고 싶어 물질적으로 지원을 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15절과 16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절에서는 복음을 받은 그들이 이제 복음을 주는 일에 참예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16절에서는 이런 빌립교인들의 선교적 지원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지속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7절에서는 이런 삶은 그들 자신을 영적으로 유익하게 하는 일이었고, 18절에서는 그것은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일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부나 만족은 창고나 은행에 쌓아 놓을 때 오지 않습니다. 기쁨으로 나누고 드릴 때 찾아옵니다. 아무리 많이 쌓아 놓는다 해도 그것은 결코 쌓아 놓는 자의 것이 아닙니다. 많이 쌓아 놓고서 벌벌 떨다가 쓰지도 못하고 죽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도적이 와서 도적질 해 갑니다. 자기 욕심만을 위하여 사용한 것은 무익한 것입니다. 죄만 더 쌓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2장에서 자기 밖에 모르는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교훈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넘치도록 공급해 주시는 그분의 뜻대로 가치 있게 사용한 것만이 영원히 기억되는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가 아름답게 베풀고 드리는 삶을 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천국 창고에 쌓아 놓는 보물이 되게 하시고, 동시에 하늘 보고의 문을 활짝 열어 아낌없이 부어 주심으로 풍족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주고 베푸는 일에 본을 보이면서 사도행전 20:35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본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힘써 일해서 약한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주 예수께서 친히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 항상 드리고 베푸는 일에 풍성하여 복의 근원으로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3.환경을 초월하여 자족하는 비결을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풍족해지는 세 번째 법칙은 자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는 엄청나게 쌓아 놓고도 만족함도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르고 더 갖지 못해서 욕심 부리고 안달을 하며 남의 것을 빼앗으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만족 할 수도 행복할 수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아름답고 풍부한 환경 속에 살면서도 만족해하며 행복할 줄 모르고 늘 다른 사람이 가진 것만을 바라보거나 손에 잡히지 않는 먼 곳을 동경하며 살다가 하나님의 풍성하심과 점점 멀어져가고 있습니다.
오늘 서신서 본문 빌4:11-12에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했습니다. 바울사도는 자신의 평생을 통해서 배운 소중한 교훈중의 하나가 자족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자족한다면 더 원함이 없으므로 만족할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라면 다윗처럼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 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본문의 맥락을 살펴보면 자족은 하나님과의 영적인 관계에서 오기 때문에 환경의 지배나 영향과는 관계없이 오는 자족의 마음입니다. 워렌 위어스비 목사님은 그리스도인은 온도계와 같은 사람이 아니라 온도 조절기와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온도계는 공기가 더우면 올라가고 추우면 내려갑니다. 그러나 온도 조절기는 바깥 공기가 더우면 시원한 바람이 나오도록 만들어 온도를 내려주고 추우면 더운 바람이 나오게 하여 온도를 올려줍니다. 그래서 덥든지 춥든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살아가도록 조절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온도조절기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배부를 때가 배고플 때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배부를 때 우리가 직면하는 영적인 위험도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는 배부른 중에 교만하기 쉽고 게으르기 쉬우며 도덕적으로 더 쉽게 타락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배고플 때에도 배부를 때에도 한결같은 믿음의 사람답게 적응하여 승리하는 비결을 배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했습니다. 그의 사역의 배후에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주님이 계시기에 늘 부족함이 없고, 염려할 것이 없고,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가난한 사람이 다 부자가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도 배부를 수 있고 또는 배고플 수 있습니다. 문제는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어떤 환경 중에서도 자족할 수 있고,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우리의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는 분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부족함이 있다고 생각 될 때 우리가 할 일은 믿음으로 기도 하는 일입니다. 빌4:6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배부르다고 교만하지 말아야 하며, 배고프다고 비굴치 말고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거기에 함께 계시는 그리스도와 교제하며 그리스도 때문에 만족해하고 승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풍성하신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혹시 너무나 부족함에 사로잡혀 살아오지는 않았습니까? 궁핍함에 눌려 여유를 찾지 못하고 늘 쩔쩔매며 살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임이 사실이라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분은 온 세상의 주인이신데, 재물, 건강, 평안, 능력, 생명, 지혜와 지식, 사랑, 행복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하였고 그분께는 언제나 풍성하신데 왜 그분의 자녀인 나는 만족함이 없이 부족함 투성이로 괴로워하고 초라하게 살아간다면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만약 내 생각과 믿음이 잘못되었으면 바로 마음 그릇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기도의 특권을 가지고도 기도하지 않고 살았다면 오늘부터 기도를 시작하고 풍성함을 부지런히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께 드리는 자세가 빈약했다면 결단하시고 성령의 감동에 따라 기쁘게 드리는 삶을 힘쓰시기 바랍니다. 나누는 마음이 인색했다면 기쁨으로 나누는 성도가 됩시다. 그리고 감사가 부족했다면 어떠한 형편에서도 범사에 감사하는 성도가 됩시다. 독일의 정치가 중 한 사람이 정치적인 노선 때문에 관직에서 쫓겨나 어렵게 고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잘못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서 고생하는 것이 늘 불평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한 가지 사건을 경험한 후로는 불평을 버리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나는 이제 나의 운명을 슬퍼하거나 불평하지 않겠다.” 했는데, 그것은 그가 한번은 구두가 다 떨어 졌는데도 구두를 사 신을 수 없는 극도로 어려운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무거운 마음으로 불만이 가득한 가운데 예배를 드리고자 예배당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때 그는 거기서 두 발 없는 사람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모습을 보면서 그의 마음은 순식간에 변하고 말았습니다. 감사할 줄을 모르는 자신을 발견하고 완전한 두발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렸습니다. 그까짓 구두쯤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이란, 내가 원하는 이상적인 환경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욕심을 버릴 때,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 감사가 나옵니다. 우리 모두 환경을 초월하여 자족하는 마음을 배우기를 소망합니다. 정리합니다. “풍성한 은혜의 법칙”은,
◎.매 순간 은혜의 원천으로부터 공급 받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항상 드리고 베푸는 일에 인색하지 않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환경을 초월하여 자족하는 비결을 배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2017. 1. 29. 성산 교회. http://cafe.daum.net/sungsansarang>
호현낙선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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