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종수*이동원 목사+목사님들설교

[스크랩] 손양원목사 양아들 손재선씨의 후손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2. 4. 0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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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일보

[안경선목사의 삶과 신앙] “할아버지 뜻따라 신실한 종으로 살겠다”

기사입력 2004-06-27 15:45 |최종수정2004-06-27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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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께서 아버지가 못다하신 삶을 제게 주셨습니다. 할아버지의 뜻에 누가 되지 않도록 사랑과 소망을 갖고 죽기까지 충성하는 하나님의 종으로 살겠습니다.”

강원도 원주 중앙그리스도의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는 안경선(44) 목사. 그는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의 손자다. 그의 아버지는 1948년 손 목사의 두 아들 동인 동신 형제를 죽인 이들 중 한명인 안재선씨다. 손 목사는 총살 위기의 안씨를 구해내고 양아들로 삼아 ‘손재선’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마음 같아선 영원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일을 가슴에 묻고 살려 했다는 안 목사는 주위 동역자들로부터 이제는 짐을 나눠지자는 말을 듣고 지나온 삶의 이야기들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저는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관계를 고3 겨울에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알게 됐습니다. 손 목사님의 유복자인 손동길 목사님께서 저를 찾아와 ‘내가 너의 작은아버지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책을 주셨습니다. 그 책을 읽고서야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았습니다.”

그때가 1979년 12월이었다. 안 목사의 아버지는 숨을 거두기 직전 안 목사에게 “신학교에 가서 목회자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

1950년 9월28일 손 목사가 순교할 때의 나이가 48세. 안씨 역시 후두암으로 48세 때 숨졌다. 안 목사는 “할아버지께서 살려주신 만큼 아버지는 그만큼 살다가신 것”이라고 말했다.

안 목사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크리스천이 아니었다. 교회를 가라고 권하지도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손 목사님의 가족과 아버지가 계속 왕래하고 지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또 할아버지의 도움으로 신학을 전공하고 목회자가 되려고 하셨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주위의 눈총 때문에 이룰 수 없었고 결국 세상사람의 눈을 피해 숨어 사셨던 것입니다.”

삶의 자유로움을 잃어버린 안씨는 신앙도 잃어버렸다. 행여 가족이 자신의 과거를 알면 평생 마음의 짐으로 여길까 노심초사하며 손 목사와의 관계에 대해 일절 말하지 않았다. 안 목사는 “완고하고 엄격한 성품의 아버지셨지만 넉넉지 못한 생활형편을 늘 걱정하며 가족을 염려했다”고 회고했다.

안 목사는 고2 때 친구의 전도로 교회에 처음 나갔다. 그때 신앙생활을 하면서 손양원 목사의 삶에 큰 은혜를 받고 막연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안 목사는 “아버지가 교회에 가는 것을 반대할 줄 알았는데 전혀 말씀이 없으셔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죽음을 눈앞에 둔 아버지는 아들에게 “신학교에 가라”며 자신이 못다한 꿈을 이뤄달라고 유언한 것이다.

안 목사는 고교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1980년 한국그리스도의교회협의회 소속 신학교(현 서울기독대학)에 입학했다. 그때만 해도 손 목사가 할아버지인 것이 짐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이 때문에 절친한 친구에게도 그 사실을 고백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안 목사 스스로 위축돼 갔고 방황이 시작됐다.

“상관 없을 것 같았던 아버지의 과거가 덧입혀지면서 계속 저의 목을 조여오는 듯했습니다. 목회가 아닌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했지만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혹시 부흥회에 참석해 기도하면 길이 열릴까란 생각으로 많은 부흥회에 참석했지만 안 목사는 어떠한 구체적인 응답도 듣지 못했다.

그러던 중 안 목사는 급성폐렴과 합병증으로 쓰러졌고 급기야 폐 일부를 도려내는 수술을 받고서야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안 목사는 퇴원하는 날 ‘할아버지께서 아버지가 못다한 삶을 나에게 주셨구나’라며 자신을 향한 소명을 깨닫게 됐다고 고백했다.

8년만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첫 목회지인 청주에 이어 1992년부터 10여년간 ‘땅끝 마을’ 해남에서 사역했다. 그리고 원주에는 지난해 부임했다. 현재 교회에는 학생 청·장년 등 60여명의 성도가 출석하고 있다.

안 목사는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말을 아꼈다. 언제쯤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안 목사는 그저 “시간이 좀더 걸릴 것 같다”고만 했다. 절친한 동역자인 오세황 목사는 “안 목사가 그래도 마음의 문을 많이 연 것”이라며 “그는 형편이 넉넉지 못해 차를 팔아서라도 다시 신학공부를 하고 싶어하며 매주 목요일 서울에서 교회성장 훈련을 받는 등 열정을 갖고 있는 목회자”라고 말했다.

원주=노희경기자 hkroh@kmib.co.kr
출처 : ImagoDei
글쓴이 : Ho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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