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수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연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헌법학
헌법재판소가 재판관 전원일치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파면을 결정했다. 이로써 박근혜씨는 우리 헌정사에서 처음으로 재임 중에 탄핵심판을 통해 파면된 대통령이 되는 오명을 남기게 되었다. 헌정적 측면에서는 몹시 유감스럽고 참담한 일이다. 그러나 국민주권주의, 대의제도, 법치주의 등에 터 잡은 우리 헌정질서의 수호 측면에서 볼 때 국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통치자에게서 앞으로 이같이 황망한 국정농단과 권한남용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준엄한 경종을 울린다는 의미에서는 다행이다. 이로써 새로운 희망을 내다볼 수 있는 디딤돌이 마련됐다.
헌법재판소가 밝혔듯이 주권자인 국민의 신임에 따라 선출된 대통령은 맡은 소임을 다하지 않은 채 헌정질서를 훼손하면서 그저 권력을 지키고 누리는 데에만 골몰해왔다. 그런데도 직을 유지한다면 더 이상 민주공화국이 아니다. 헌재의 탄핵 결정과 함께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임이 다시 확인되고, 지난겨울에 매섭도록 추운 광장에서 촛불을 밝혀왔던 많은 이들은 민주공화국의 진정한 시민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혹자는 ‘비정상의 정상화’를 말한다. 몇 년 전 온갖 추문과 부패를 일삼았던 이탈리아의 베를루스코니 총리가 물러난 뒤 누군가는 베를루스코니 체제가 이탈리아가 그간 지녀왔던 ‘정상성의 가장 날카로운 한 단면’이라고 표현했다. 유신체제와 5공체제가 현행 헌법이 만들어진 1987년의 민주화항쟁으로 극복되었다고 많은 이들이 기대했지만, 그 적폐는 그대로 온존해왔다. 이번 탄핵 결정과 함께 정경유착 등 그간 쌓인 적폐가 청산되고 새로이 거듭나는 계기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이번 탄핵심판으로 박 대통령이 헌재 심판대에 올랐지만, 이정미 헌재소장 대행이 선고에 앞서 밝힌 바대로 헌재 역시 준엄한 ‘역사의 법정’에 오른 셈이었다. 탄핵소추를 의결한 국회 그리고 탄핵심판을 떠안은 헌재 등의 대의기관과 우리 헌정질서에 대한 신뢰를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이번 결정은 매우 다행스럽다.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탄핵사유야 말 그대로 넘치고 넘쳤다. 박 대통령은 최순실 등의 국정농단이 불거지고 촛불집회와 함께 시민사회와 정치권에서 자진사퇴를 요구했을 때 진즉 물러났어야 했다. 나라를 대표하는 국정의 최고책임자로서 자신으로 인해 불거진 사회적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라도 물러난 뒤 사법부의 판단을 구하는 것이 마땅한 태도였다. 그러나 박 대통령은 “자신이 엮였다”는 등의 발언으로 오히려 갈등을 증폭시키면서, 국민 앞에 행한 약속은 아랑곳없이 진실 규명을 위한 최소한의 사법적 절차인 검찰과 특검의 조사를 외면했고, 헌재의 심리에 출석하지 않은 채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했다. 더욱이 대통령 쪽 대리인들은 법리로 방어하기보다 헌재 심판정을 이념선전의 장으로 만들면서 재판부를 공격하고 억지 주장을 내세워 재판 지연만을 꾀했다.
이번 탄핵심판에서 문체부 고위공무원들에 대한 사직 강요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한 국민의 생명권 보호 의무 위반 등 일부 소추사유들이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법 위반으로 확인되지 못한 점은 못내 아쉬운 대목이다. 탄핵심판의 본질이 형사재판이 아니라 징계재판임을 밝히면서도 나름 객관적인 증거에 입각해서 판단해야 하는 헌재의 입장이 이해되지만, 이번 기회에 국가의 의무와 권력자의 책무를 보다 엄중히 밝히는 새로운 전환점이 되기를 기대했던 이들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운 판단이다.
재판관 전원 일치로 탄핵 결정이 내려진 것은 불거진 사안에 비추어 보면 지극히 상식적이고 당연한 결과다. 조용하지만 거세게 타올랐던 수많은 촛불 속에 담긴 국민의 뜻, 국민의 대표기관인 국회의 탄핵소추 의결, 그리고 권력 통제의 과업을 지닌 헌재가 한마음으로 대통령의 탄핵을 결정했다. 이제 우리 모두에게 남은 과제는 헌재의 판단을 존중하는 가운데 정치적 혼란에 마침표를 찍고 ‘정상국가’를 위한 새로운 미래를 진지하게 고민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을 대표해 나랏일을 떠맡은 공직자와 정치인들은 이번 사태를 반면교사로 삼아 앞으로 스스로를 더욱 경계하면서 헌법이 부여한 소임을 다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다. 무엇보다 이번 결정으로 ‘역사의 신’에 대한 믿음을 놓지 않게 되어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