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강. 강함과 약함 (롬 14:1-13)
롬 14:1-13=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4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5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6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7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9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11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 하리라 하였느니라 12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13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에덴동산에 두 과실이 있습니다.
먹으면 영생하는 과실이 있고, 먹으면 죽는 과실이 있습니다.
이걸 신약적으로 말하면 먹으면 영생하는 생명과는 은혜를 상징하고, 먹으면 죽게 되는 선악과는 율법을 상징합니다.
은혜는 살리는 일을 하고, 율법은 죽이는 일을 합니다.
생명은 은혜에서 나옵니다.
율법에게서는 생명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직 정죄와 죽음만 나옵니다.
이 세상은 아담의 범죄 이후 법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법 아래 놓였다는 말은 죽음 아래 놓였다는 말입니다.
이는 곧 아담이 살아갈 땅에서는 생명이 나올 수가 없다는 뜻입니다.
생명은 오직 세상 바깥에서 주어져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그 아들을 죽은 세상에 보냈습니다.
이는 죽은 세상 속에 창세전에 어린 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된 영생주시기로 작정한 자기 백성들에게 하늘에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로부터 하늘에 생명을 받은 성도는 법 아래서 은혜 아래로 빼내심을 입었습니다.
이렇게 부르심을 입고 빼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합니다.
교회를 일컬어 “에클레시아” 라고 하는데 이는 빼내심을 입은 자라는 뜻입니다.
영역적인 의미로는 세상에서 교회로 빼내심을 입었고, 신앙적으로는 율법에서 은혜로 빼내심을 입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일컬어 은혜 공동체라고 합니다.
은혜 공동체라 함은 율법으로 판단 받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또한 서로 간에 율법으로 판단하지도 않는 곳이란 뜻입니다.
세상은 법으로 판단하지만 교회는 은혜로 대합니다.
우린 원래 법 아래서 태어나서 법으로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었어요.
그리고 그 은혜를 계속하여 공급을 입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법이 난무하는 죽은 세상에서 은혜 안에서 산 자로 살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교회에 편지를 합니다.
두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초반부에는 교리를 이야기 하고 후반부에는 교리가 어떤 식으로 삶으로 나타나는지를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1장에서 11장까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에 대한 교리 이야기입니다.
교리의 핵심은 구원 받는 의에 관한 것입니다.
그 의는 다름 아닌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발생된 의입니다.
율법아래 있는 인간들은 율법대로 살면 그것이 의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난 의로만 주어진다고 합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피 뿌림이라는 은혜 때문임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피로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여기심을 입은 자들이 모인 곳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럼 12장에서부터 예수그리스도의 대신 죽으심으로 구원을 입은 자들이 교회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그 삶도 우리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공급해 주는 은혜로 삽니다.
그래서 너희는 각자 받은 은사로 서로 섬기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은사는 교회 안에서 사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걸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정죄함이 없습니다.
모두가 용서 받은 자들로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결코 정죄 당하지도 않고 남을 정죄 하지도 않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뜻대로 착하게 살아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사랑으로 대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의 삶은 은혜이고 감사인 것입니다.
이건 마치 부모가 자식을 사랑으로 키우는 것과 같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법으로 키우지 않습니다.
비록 자식이 잘못을 해도 징계는 할지라도 잘라내는 법으로는 대하지 않습니다.
남의 자식에게는 법이라는 잣대를 들이대지만 내 자식에겐 은혜로 대합니다.
이걸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두 부류의 사람으로 대합니다.
하나는 법으로 대하고!
다른 하나는 은혜로 대합니다.
은혜로 대하는 자들을 일컬어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라고 합니다.
이들이 성도들입니다.
이렇게 은혜로 대하는 자들을 교회로 불러 모았습니다.
그리곤 은혜로 살게 하십니다.
오늘 본문은 은혜로 사는 성도들의 모습은 이런 것이라고 이야기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판단하지 말고 받으라고 합니다.
판단하지 말라는 것은 정답의 문제가 아니고 감당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어떤 사람은 부드러운 음식을 먹는 어린 아이와 같은 사람이 있고, 어떤 이들은 단단한 음식을 먹는 어른과 같은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쉬운 말로 교회 안에는 가정과 같이 어린아이도 있고 어른도 있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들도 있고, 믿음이 연약한 자들도 있다는 뜻입니다.
믿음이 강한 자를 어른이라고 하고, 믿음이 연약한 자를 어린아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어린아이란? 율법으로부터 갓 벗어난 자들을 말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율법 아래 있다가 부르심을 입은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까지 율법적 사고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서 율법식 신앙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은혜 아래서 살지만 율법적 행동을 신앙의 내용으로 내어 놓을 수가 있습니다.
그걸 오늘 본문에서는 먹고 마시는 것과 날을 지키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혹시 예수를 믿으면서도 율법식으로 믿더라도 기다려 주라는 것입니다.
스스로 법으로부터 벗어 날 때까지 믿음이 강한 자들이 받아 주라는 것입니다.
법으로 판단하지 말고 은혜로 감싸주라는 것입니다.
누구에게 연약한 자를 받으라고 합니까?
믿음이 강한 자들입니다.
어른이 어린 아이들의 그릇된 것들을 사랑으로 보듬어 안듯이, 교회도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믿음이 강한 자들이 감싸 안으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너희도 은혜로 부르심을 받았고 은혜로 대하심을 입고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받았기에 은혜로 대하라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들은 율법에 속한 것들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믿음 믿음 하면서도 율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고 여전히 율법적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율법적 행위로부터 완전히 자유하지 못하고 그 행위를 의와 불의로 생각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믿음의 분량이 아직까지 그 일을 소화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혹여 누가 먹고 마시는 것과 날을 지키는 것을 신앙의 척도로 주장을 하더라도 잘라내는 정죄를 하지 말고 너그러히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이처럼 비록 복음을 안다고 하여도 아직까지 복음 안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율법적 사고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도 초기에 이러한 모습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보게 됩니다.
시도행전 11장을 봅시다.
행 11:1-18=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2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3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4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 가로되 내가 욥바 성에서 기도 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을 네 귀를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워 내 앞에까지 드리우거늘 6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보이더라 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으라 하거늘 8 내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말라 하더라 10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11 마침 세 사람이 내 우거한 집 앞에 섰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13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16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한 내용을 가지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청문회를 하기 시작합니다.
알다시피 예루살렘 교회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세워진 교회입니다.
은혜로 세워진 교회란 말입니다.
여기에 사도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 집에 가서 복음 전한 것을 가지고 시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아직까지 율법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행위를 가지고 탄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자기도 어쩔 수 없이 하나님께서 하라고 해서 했다고 합니다.
자신이 기도를 하고 있는데 환상 중에 하나님께서 보자기 안에 각양 더러운 곤충들을 보여 주면서 잡아먹으라고 하더라는 겁니다.
이에 베드로가 하나님 이러한 것은 율법에 금하는 것이므로 나는 먹을 수 없다고 했다고 합니다.
베드로의 이러한 모습은 베드로도 아직까지 율법적 사고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다고 하니까 괜찮다고 잡아먹으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곤 환상을 사라집니다.
그러자 고넬료가 보낸 하인들이 와서 자신들이 베드로 선생을 찾아 온 것은 우리 주인 고넬료가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욥바에 가면 베드로라는 사도가 있는데 데리고 오서 복음을 들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가 환상 속에서 하나님께서 잡아먹으라고 한 더러운 곤충은 곧 이방인을 상징하는 것임을 알고 부름을 사양치 않고 가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성령이 내려서 이방인도 유대인처럼 구원 얻는 모습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러자 베드로를 탄핵 하던 자들이 아! 하나님께서 구원을 이방인에게도 주는가 보다! 라고 하면서 베드로의 탄핵을 철회 하였다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결국 베드로나 다른 사도들이나 모두가 아직까지 율법적 사고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나중에 바울을 통해서 완전히 교정을 받게 됩니다.
오늘 본문도 바울이 쓴 편지에요.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 어떤 일을 가지고 어떤 사람은 이해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으니 그걸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건 싸울 일이 아니고 마치 어른들이 어린 아이들의 잘못을 이해하고 기다려 주듯이 그들도 그 수준을 넘어 서도록 기다려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루아침에 짠~! 하고 득도하는 것이 아니에요.
말로는 은혜로 살아야 한다는 정답은 알아도 그 정답대로 은혜로 감싸고 사는 것은 오랜 세월을 필요로 해요.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것은 마치 생명의 자람과 같이 서서히 자라가는 과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자람이란? 하나님의 은혜와 일하심을 깨닫는 것을 말해요.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으라는 말은 성도들의 행함을 가지고 옳으냐 그르냐 라는 율법적 사고로 접근하지 말고 은혜로 이해하는 자세로 접근하라는 뜻입니다.
즉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대신 지는 자세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연약한 자가 등장하고 그를 이해하고 연약한 자를 받는 자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앙꼬 없는 찐빵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걸 예수님 버전으로 하면 긍휼이 빠진 제사는 제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 라는 했습니다.
이 말은 제사를 지내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제사 속에 긍휼을 담으라는 말입니다.
제사는 형식이고, 긍휼은 내용입니다.
제사라는 형식은 긍휼이라는 내용을 담기 위한 그릇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식과 내용 이 둘은 항상 함께 있어야 합니다.
둘 중에 하나 라도 없으면 온전치 못합니다.
알다시피 제사는 율법에 속한 것이고, 긍휼은 은혜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통하여서 은혜를 드러내고자 함입니다.
은혜를 주기 위하여 율법을 먼저 주신 것입니다.
이건 마치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기 위하여 세례 요한을 앞서 보낸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은혜와 긍휼을 가지고 오십니다.
은혜와 긍휼은 법을 바탕으로 깔고서 일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은혜와 긍휼을 담기 위한 그릇으로 세례 요한을 율법의 종으로 보내서 백성들의 죄를 고발하게 하신 것입니다.
구약은 신약을 전제로 주어진 것이고, 신약은 구약을 바탕으로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구약과 신약, 율법과 은혜는 항상 짝이 되어서 일을 하게 됩니다.
구약은 법이고, 신약은 은혜입니다.
이것이 신약의 서신서에서는 교리와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면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시끄러운 꽹과리 소리 같고, 예언하는 능이 있고, 모든 비밀한 것을 말하고, 성경적인 모든 지식을 알아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고, 또한 산을 옮길 만한 일을 하고 구제하고, 내 몸을 불사르는데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 합니다.
결국 모든 것이 다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무얼 말하고자 하는가요?
이런 일을 하지 말라는 것인가요?
아니에요.
그 일을 함에 있어 사랑이 결여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무슨 일이든지 사랑이 원인이 되어서 행하여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걸 우리 신앙에 적용해 보세요.
우리의 신앙도 사랑이 없으면 앙꼬 없는 찐빵과 같다는 말이 됩니다.
즉 성경적 지식이 해박하고 복음 안다고 큰 소리쳐도 그것이 남에게 유익을 주는 사랑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죽은 것이란 말입니다.
이사야 1장을 봅시다.
사 1:11-14=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은 율법에 의하여 제물을 드렸습니다.
또한 안식일과 정한 절기와 날과 달을 지켰습니다.
백성들은 이러한 것들은 율법이 하라고 하였기 때문에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내가 언제 이런 걸 원했느냐고 하십니다.
꼴도 보기 싫다고 합니다.
다시는 가지고 오지 말라고 합니다.
백성들은 분명히 율법에 의하여 제물을 드렸고 성회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고 합니다.
마당만 밟고 다닌다고 역정을 내십니다.
뭐가 잘못 되었나요?
제사란 죄 때문에 드리는 것입니다.
그럼 제사 속에는 죄에 대한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마음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에겐 그게 없었어요.
제사만 드렸지 왜? 제사를 드려야 하는지 그 의미를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곧 내용이 빠진 껍데기만 드린 것이 됩니다.
이걸 말라기에서는 “절기의 똥”이라고 했습니다.
말라기 2장을 봅시다.
말 2:1-3= “너의 제사장들아 이제 너희에게 이같이 명령하노라 2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 3 보라 내가 너희의 종자를 견책할 것이요 똥, 곧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말라기를 끝으로 하나님이 400년 동안 침묵 모드에 돌입합니다.
그러다가 400년 후 세례 요한이 나타나서 회개 하라고 외칩니다.
하나님께서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하신 말씀이 구약 신앙의 결론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신앙을 어떻게 정의합니까?
한마디로 똥을 얼굴에 처바른다고 합니다.
무슨 똥을 처바른다고 합니까?
절기의 똥입니다.
똥이란? 양분이 다 빠지고 없는 찌꺼기를 말합니다.
그럼 절기의 똥이란? 절기 속에 담겨 있어야 할 양분은 없고 형식만 있다는 말입니다.
절기 속에 담겨 있어야 할 양분이란 무엇인가요?
그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속에 답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은 제사를 원치 않고 긍휼을 원한다”고 했습니다.
그럼 양분이란 긍휼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가 절기의 똥을 얼굴에 처바른다는 말은 결국 구약의 율법 신앙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긍휼이 빠진 제사라는 껍데기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말라기 후 400년이 지나서 예수님이 오신 때에도 바리새인들이 이러한 신앙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습니다.
과거 이사야 선지자가 외식하는 자들을 향하여 야!~ 이 소돔 고모라 새끼들아! 라고 하면서 저주를 끌어 부었듯이 예수님께서도 내용이 없는 껍데기만 붙들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에라이~! 이 독사 새끼들아! 지옥으로 가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내용이 빠진 신앙을 외식이라고 했습니다.
이건 어느 시대나 동일합니다.
신약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귀신의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믿음과 행함은 신앙의 두 바퀴와 같습니다.
야고보서의 믿음과 행함은 십계명의 두 돌 판과 같습니다.
두 돌 판은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야고보서 식으로 말하면 믿음과 행함과 같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고,
행함은 이웃에 관한 것입니다.
이 둘이 정상적으로 움직여야 온전한 신앙이 됩니다.
십계명의 두 돌 판은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계명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관한 계명입니다.
이걸 신약적인 의미로 본다면 첫 돌 판에 새겨진 하나님에 관한 계명은 교리적인 것으로서 믿음에 관한 것이고, 둘째 판은 이웃에 관한 계명은 실천적인 것으로 사랑에 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관한 계명은 교리이고,
이웃에 관한 계명은 사랑으로서 삶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교리와 삶이라는 두 구조로 짜여져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란? 이 둘이 하나가 되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걸 성경의 결론을 말하는 요한계시록에서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했습니다.
다른 말로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19장을 봅시다.
계 19:7-8=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러서 그 신부들에게 흰 옷을 입혀 줍니다.
그런데 그 옷을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성도의 옳은 행실을 왜? 옷이라고 할까요?
이해를 돕기 위하여 예를 듭니다.
옷을 만들기 위하여 먼저 실을 가지고 천을 만들어야 합니다.
천을 어떻게 만드느냐 하면 씨실과 날실로 만듭니다.
즉 두 실이 가로 세로 십자 모양으로 서로 교차하여 엮어지면서 천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씨실과 날실이 가로 세로로 서로 한 눈금씩 지날 때마다 하나로 엮어지면서 옷을 만드는 천이 되는 것입니다.
씨실과 날실은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성도가 입을 옷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위로는 하나님께 입고 나갈 의(義)에 옷이고!
아래로는 이웃에게 입고 나갈 사랑의 옷입니다.
십자가 속에는 두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위로는 하나님과 화목 하는 사랑이 담겨져 있고!
아래로는 이웃과 화목 하는 사랑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 둘은 씨실과 날실이 서로 교차하여서 천을 만들고 그 천으로 옷을 만들듯이 예수님의 십자가 도(道) 역시 성도의 삶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렇게 십자가 정신으로 살아가는 것을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도의 옳은 행실을 그리스도로 옷을 입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야고보는 믿음과 행함이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은 반드시 교리와 삶이라는 두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교리가 뭔가요?
율법의 의(義) 말고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난 의(義)를 말합니다.
즉 인간의 공로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고 예수님의 피 흘리심으로 주어지는 것이란 말입니다.
율법적 행함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의 교리가 이 사실을 이야기 해 주고 있습니다.
이걸 믿으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이걸 믿어지게 하시려고 믿음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성령이 이 믿음이라는 선물 보따리를 가지고 성도에게 오셨어요.
성령은 성도들 안에서 이 교리기 믿어지게 하십니다.
이 교리가 믿어지는 성도는 자기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비록 죄를 짓고 살지만 예수님의 대신 죽어주심으로 정죄 받지 않는다는 그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이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는 것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건 대신(對神) 관계로서 하나님 앞에 예수그리스도의 의(義)로 나아가는 것으로서의 삶입니다.
이건 교리적으로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의 피로 하나님과 화목이 이루어진 자들은 이웃과 화목하는 일들이 남아 있습니다.
즉 대인(對人) 관계로서 이웃과 사랑으로 살아가는 것이 남아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계명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즉 율법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 의미를 물은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위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아래로는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하나님의 계명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를 알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완성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로부터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십계명의 두 계명을 완성 하셨습니다.
두 가지 사랑을 이루셨어요.
위로는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사랑을 이루셨고,
아래로는 이웃과 화목하는 사랑을 이루었어요.
에베소서 2장을 봅니다.
엡 2:12-19=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外人)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9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가 외인도 아니요 손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眷屬)이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죄인을 이어주는 길이면서도 또한 사람과 사람을 연결 시켜주는 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죄인 간에 막힌 담을 허셨습니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막힌 담도 허물었습니다.
십자가가 위로는 하나님과 화목의 길이므로 수직적 관계로 서 있고, 아래로는 사람들과의 화목의 길이므로 수평적 관계로 눕혀져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늘과 땅을 연결해 주는 길이고 이웃과 이웃을 연결해 주는 길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것을 성도들에게 적용을 시키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십자가 정신을 삶에서 구현이 되도록 간섭을 당하게 됩니다.
성령이 성도 안에서 간섭하십니다.
어떻게 간섭하는가 하면 하나님 앞에는 예수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교리로 나아가게 하고, 이웃과의 관계는 너와 나는 모두가 용서 받은 자라는 차별이 없는 사랑으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때는 예수님의 피로 맺은 새 언약을 믿음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웃에게 나아갈 때는 서로가 용서 받은 자로서 사랑으로 다가가게 됩니다.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로서의 삶이라고 하고 성도의 옳은 행실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성도의 옳은 행실을 빛의 갑옷이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이란? 교리가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1장을 봅시다.
행 11:19-30=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22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23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24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25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26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27 그 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28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29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30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이라는 말을 들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는 뜻으로서 이는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사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걸 예수쟁이라고 합니다.
쟁이란? 전문가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안디옥 교회 성도들과 같은 자들이 바로 예수쟁이들이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바나바가 예수쟁이들이 있는 안디옥 교회에 갔습니다.
가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어요.
바나바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을까요?
하나님의 은혜란? 추상 명사입니다.
눈으로 볼 수가 없어요.
그럼에도 바나바는 안디옥 교회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다고 합니다.
어떻게 보았습니까?
십자가 정신으로 나타나는 삶을 본 것입니다.
은혜가 성도들 안에서 어떤 일을 하게 하신 것을 본 것입니다.
은혜가 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은혜가 일을 일으킨 것입니다.
이걸 사역(使役) 동사(動詞)라고 합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가 안디옥 교회 성도들 안에서 일을 하게 하였다는 말입니다.
은혜가 일을 하게 되면 십자가 정신으로서의 삶이 나타납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찬미하고 아래로는 형제간에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에게서 이러한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에서는 십자가의 사랑이 자기 교회를 넘어서까지 유출이 되었어요.
어디까지 그 사랑이 전해졌느냐 하면 예루살렘 교회로 까지 확대 되어서 전해졌습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아가보라는 선지자를 통해서 예루살렘에 기근이 들어서 예루살렘 교회에 있는 성도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너무도 고통을 당한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돕고자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십시일반으로 연보를 하여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구제금으로 보내서 기근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었습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보니 예수의 사랑이 형제를 돕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은혜가 삶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믿음이 일으킨 행함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시적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이고 사랑인 것입니다.
알다시피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 교회이고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 교회입니다.
안디옥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는 약 520km 떨어져 있습니다.
서로 알지도 못하고 왕래가 없었어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남남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기근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한다고 하자 너도 나도 한 마음으로 구제를 했습니다.
이건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벽이 허물어지고 우리는 한 형제라는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구제가 오순절 성령이 임하고 나자 실제로 나타났어요.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이 앉아 있는 앉은뱅이에게 나는 은과 금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하면서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고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자기 안에 있는 것으로 구제를 한 것입니다.
즉 예수로 구제를 한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그들 속에 있는 예수로 구제를 한 것입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준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물질이라는 그릇에 담아서 준 것입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가시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크기 기뻐하였다고 하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교리를 삶으로 풀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리와 실천이 씨줄과 날줄처럼 하나가 되어서 옳은 행실이 되어서 사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 사랑이 바로 성도의 옷입니다.
사랑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마음으로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은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하는 것입니다.
요한1서 3장을 봅시다.
요일 3:16-19=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17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로다”
예수님이 먼저 우리에게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어떻게 보이셨나요?
죄인을 위하여 대신 죽어주신 것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사랑을 빚졌습니다.
그 사랑을 누구에게 갚으라고 합니까?
형제에게 갚으라고 합니다.
입술로 하지 말라고 합니다.
자기 것을 나누어 주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리에 속한 증거라고 합니다.
즉 그 속에 진리가 살아서 일을 하니까 이러한 삶이 나오더란 것입니다.
쉬운 말로 진리에 속한 자는 진리로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 진리를 의인화 하면 예수님입니다.
이렇게 진리로 사는 성도를 일컬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고 예수님의 신부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신부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신부들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신부인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서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게 하십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께서 빛나고 흰 세마포 옷을 어린 양의 아내에게 입혀 주었다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이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가 있었을까요?
이는 율법의 의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교리를 받고 보니 너무도 기쁜 겁니다.
그 기쁨이 밖으로 발산 되어 나타난 것이 바로 형제 사랑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게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바울은 지금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이 이렇게 나타난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 것이고!
사랑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이기는 것이 사랑입니다.
모든 계명은 사랑 안에서 완성이 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율법을 자신의 죽음으로 끌어안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율법으로 인한 정죄함이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이 자기 백성들을 참소하는 죄의 삯인 사망을 자기 몸으로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는 율법이 요구할 수가 없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하시려고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셨습니다.
성령은 성도 안에서 이 사실을 믿어지게 하십니다.
모든 율법의 요구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는 것을 알려주고 믿어지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그 안에 거하는 성도는 법으로 살지 않고 은혜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걸 사랑의 빚진 자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마땅히 저주 받아야 할 죄인인 우리의 죄를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일방적으로 긍휼을 베풀어서 구원을 해 주셨습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빚 이외는 지지 말라고 하십니다.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그 사랑의 빚을 예루살렘 교회에 갚은 것입니다.
그리하여 안디옥 교회 성도들은 이 시대 우리를 고발하는 거울로 서 있는 것입니다.
우린 안디옥 교회 성도들로 하여금 우리의 죄가 고발당하여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랑이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나는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1-3절을 봅니다.
롬 14:1-3=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2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3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으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의심”이라는 말은 “디알로기스몬” 이라고 하는데 이는 그 사람의 수준으로 생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건 마치 어린 아이들이 어떤 일을 자기 수준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의 의심이란 말은 어린 아이들 생각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럼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의심하는 것을 받으라는 말은 어린 아이들의 생각과 행동이 어른과 다르다고 해서 잘라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생각이 짧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어린 아이인 것입니다.
그러니 어른이 어린아이와 싸우려 하지 말고 이해하고 기다려 주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면 다 알게 될 테니까 지금 다르다고 해서 법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성도의 신앙을 생명의 자람으로 이야기 했습니다.
마가복음 4장을 봅시다.
막 4:26-29= 또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저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그 어떻게 된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씨앗처럼 와 있어요.
씨앗이란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씨가 싹을 내고 이삭을 내고 곡식을 내듯이 우리 안에 예수의 생명도 생명의 자람과 같이 자라가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많이 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어린아이가 부모의 은혜를 아는 것과 시집가서 자기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부모의 은혜를 아는 것은 달라요.
어린 아이도 부모의 은혜를 알지만 그건 얕습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에서 어른이 되어가면서 부모의 은혜를 아는 일에 점점 깊어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에 나이가 들고 신앙의 경륜이 쌓일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가는 깊이가 달라집니다.
하나님과 많이 부대끼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많이 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 때는 어린 아이 만큼만 알아요.
그렇다고 그걸 사랑이 아니라고 폄훼해서는 안 되어요.
아이는 자기 수준만큼 사랑한 거에요.
과거 학교 다닐 때 수학여행을 가면 부모님 선물을 사오잖아요.
부모님이 주신 용돈으로 엄마 아빠 선물을 사와요.
어떤 선물을 사옵니까?
아이 수준에서 사오지요.
그렇다고 부모가 에이~ 뭐 이런 것 사왔느냐! 고 타박하지 않잖아요.
기특하고 고맙다고 하잖아요.
대부분 아이가 사온 선물은 부모가 사용하지 않아요.
사용하지 않더라도 부모는 그걸 가치 없게 여기지 않아요.
반대로 나이가 들어 시집가고 장가가서 부모님에게 드리는 선물을 학창시절 때 수학여행 가서 사오는 수준으로 사오진 않잖아요.
이는 부모님의 은혜와 사랑을 학창시절보단 많이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동일해요.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면서 철이 들어가듯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더 많이 더 깊게 알아가는 것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 믿음이 연약한 자들이 하는 것을 보고 업신여기거나 가볍게 판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시 13장을 봅시다.
고전 13:11절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어린 아이일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 일을 버렸노라고 합니다.
무슨 말인가요?
어린 아이 일 때는 어린 아이만큼만 깨닫고 생각하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10살짜리는 10살짜리 입장에서 세상을 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10살짜리가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법으로 옳다 그르다 판단하지 말라는 겁니다.
10살짜리 일 때는 10살짜리의 말을 할 수 밖에 없어요.
어른이 10살짜리와 옳고 그름으로 싸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른은 10살을 지나 온 사람이에요.
그러므로 10살짜리의 생각과 말을 법으로 판단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 지나가는 과정에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과정을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고 사랑으로 품어 줄 수밖에 없어요.
어린 아이가 어른이 되면 10살 때 옳다고 생각한 것이 철없는 것임을 알아요.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아요.
지금은 전부이고 옳다고 한 것이 세월이 지나고 나면 가벼운 것임을 알게 되어요.
그건 싸울 일이 아니고 기다리고 참아 줄 문제였다는 것을 알게 되어요.
믿음이 연약한 자란? 하나님의 일하심을 읽어내는 안목이 약하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강하고 약함이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는 눈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깨닫는 차이를 말해요.
신앙이 초보일 때는 아직까지 하나님을 다 몰라요.
알아가는 과정에 있어요.
그러니 철없는 짓을 해도 이해하라는 것입니다.
철없는 짓이란? 율법적 사고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과,
날과 달을 지키는 것이지요.
이러한 것은 율법 아래서는 옳고 좋은 신앙이라고 지켜온 것들입니다.
초대교회는 교회마다 유대교에서 개종한 신자들과 이방인 신자들이 함께 섞여 있었어요.
거의 모든 교회마다 그랬어요.
로마 교회도 마찬가지에요.
그러다 보니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은 과거 율법 아래서 행하던 것들이 습관화 되어서 나타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 자체가 은혜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의 모임이에요.
그럼 교회는 은혜로 다스려져야 합니다.
그러니 교회에서는 어떤 일을 가지고 옳다 그르다 판단할 문제가 아닌 겁니다.
그런데 로마 교회 안에서 따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바울은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행위와 상관없이 부르셨는데 왜? 인간의 행위로 서로 판단하느냐!
그건 사랑으로 행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들의 신앙을 돌아보게 하는 좋은 시금석이 되는 말씀이에요.
우리도 누군가를 판단 할 때 본능적으로 그 사람의 행위를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람의 행위가 신앙을 판단하는 하나의 척도가 될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신앙생활이란? 예수로 살아가는 삶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삶도 그 사람의 신앙경륜에 따라서 다를 수가 있어요.
그 사람의 영적 수준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믿음이 강한 자와 연약한 자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 할게요.
한국교회 안에서는 금기사항이 있어요.
술과 담배와 제사 문제에요.
사회적 인식이 교인이라고 한다면 술 담배를 안 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또한 제사도 안 지내는 것으로 되어 있어요.
이러한 것은 한국 교회 안에서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불문율처럼 되어 있어요.
교리처럼 행사되어지고 있어요.
그래서 과거에는 교회들이 술을 먹고 담배를 피우면 직분자로 세우지 않았어요.
지금은 다 무너졌지만 예전에는 그랬어요.
제사를 지내면 믿음 없는 것으로 간주했어요.
예전에는 세상 윤리와 도덕적 기준이 교회 안에서 그대로 신앙의 법으로 통용이 되었어요.
그래서 교인 그러면 착한 사람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어요.
제가 어렸을 때는 교인들은 법 없이도 살 사람들이라고 했어요.
그만큼 교인들이 세상 사람들보다 윤리 도덕적으로 더 깨끗하고 순수했어요.
그 당시에는 신앙이 율법 신앙이었어요.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가르쳐졌어요.
문자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이 신앙의 틀로 자리 잡고 있었어요.
우리는 그렇게 신앙생활을 했어요.
저도 과거엔 그랬어요.
저는 수십 년을 교회에 다녔지만 복음이 뭔지를 몰랐어요.
그냥 문자적으로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착하게 사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했어요.
당시에는 제 눈에는 성경이 그렇게 보였어요.
또한 목사님들의 설교도 그러했구요.
전 행함이라는 열심은 특심했지만 언약이라는 말을 몰랐어요.
물론 율법이라는 의미도 몰랐어요.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어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를 몰랐으니까요.
그저 목사님 말씀에 순종하고 사십시오! 라는 것 밖에 들은 말이 없어요.
목사님 말씀이 하나님 말씀과 같다는 생각을 했으니까요.
그 당시에 저의 신앙은 날과 달을 지키고 먹고 마시는 것을 구별하는 기준으로 하고 있었어요.
주일성수와 십일조!
교회에 봉사와 충성!
술 담배를 하지 말아야 하고!
열심히 성경보고 기도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가르침을 받았고 그렇게 해 왔어요.
그래서 그 당시에는 율법적 기준으로 믿음이 있다 없다로 판단했어요.
이게 오늘 본문 식으로 하면 믿음이 연약한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교인들이 이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수많은 교회에서 여전이 제가 어렸을 때 행하여지던 그러한 설교가 선포되어지고 있어요.
그러니 교인들의 신앙이 율법 신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주일성수와 십일조!
교회에 봉사하고 충성하고!
제사 지내지 않고!
술 담배 하지 않고!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보고!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신앙의 기준을 삼고 있어요.
이러한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에요.
또한 봉사하지 않아도 되고 술 담배 하라는 말도 아니에요.
장려하는 것은 하고 금기하는 것은 하지 마세요.
열심히 지키고 하세요.
그러나 신앙의 본질은 이런 것이 아니란 것을 말해주고자 합니다.
신앙의 본질은 내가 무얼 하고 안 하고가 아니고 예수 믿기 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새 언약을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본질이 아니기 때문에 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데 전 그 말에 동의 할 수가 없어요.
율법은 은혜를 드러내기 위하여 반드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율법이 없으면 은혜를 드러낼 방도가 없어요.
율법과 은혜는 서로를 드러내는 짝이에요.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서로를 드러내는 짝이에요.
새 언약은 옛 언약을 통해서 드러나고!
옛 언약은 새 언약을 통해서 드러나요.
율법과 은혜는 알맹이와 껍데기와 같아요.
율법은 껍데기에요.
하나님은 그 율법이라는 껍데기 속에 알곡이라는 생명을 담아놓았어요.
이 둘은 떨어질 수도 없고 없어서도 안 되어요.
껍데기는 알맹이를 위해서 있고!
알맹이는 껍데기를 통해서 영글어 가요.
벼를 심으면 먼저 쭉정이부터 생겨요.
이 쭉정이 속에 알곡이 채워져 가요.
만약에 껍데기가 없으면 알곡은 채워지지 않아요.
그러므로 벼가 쌀이 되기까지는 껍데기인 쭉정이를 지나서 알곡이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농부가 금방 씨를 뿌리고 알곡이 없다고 해서 벼를 뽑아내지 않아요.
때가 되면 그 껍데기 속에 알곡이 채워지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이 이러한 과정을 거치게 되어 있어요.
짐승도 새끼로부터 시작해서 어른이 되어요.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아요.
율법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은혜로 넘어오게 되어 있어요.
옛 언약을 거쳐서 새 언약으로 넘어오게 되어 있어요.
그러므로 옛 언약인 율법 신앙을 버리거나 폄훼해서는 안 되어요.
옛 것과 새 것을 적절하게 사용할 줄 알아야 해요.
택한 성도는 반드시 율법을 지나 은혜로 나아오게 되어 있어요.
주께서 그렇게 간섭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머물러 있으면 악한 것이 되지만 과정이라고 한다면 나무랄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은혜 안에 들어 와서도 마찬가지 생명의 과정을 거처요.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다 알아지는 것이 아니에요.
많은 세월을 지나면서 많은 부대낌과 사건과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의 풍성함을 알아가게 되어 있어요.
진짜 새 언약 안에 있는 성도는 옛 언약인 율법 신앙도 귀히 여겨요.
새 언약 안에 있다고 하여서 옛 언약을 버리는 것이 아니에요.
도리어 옛 언약을 통해서 새 언약의 귀함을 더 알아가게 되어요.
복음은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생명으로 받은 성도는 반드시 복음의 내용이 삶으로 점진적으로 구체화 되어서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이러한 것을 말씀이 육신화 된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을 육신으로 풀어냈어요.
성도도 마찬가지에요.
말씀을 삶으로 풀어내게 되어 있어요.
성령이 우리 가운데서 이 일들을 행하게 하세요.
말씀이 소욕을 일으키세요.
이건 우리가 말씀을 온전하게 다 지켜 낸다는 말이 아니에요.
말씀에 순종하고자 하는 경향성이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이 경향성이 우리 안에 또 다른 법인 죄의 법과 충돌을 하게 되어요.
이 충돌 과정에서 우리의 죄가 고발되어지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피로 맺은 새 언약 안에서 결코 정죄당하지 않고 용서 받고 산다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판단하지 말라는 말이 참 많이 나오지요.
왜?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하는가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저희를 받으셨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무슨 말인가요?
이는 구원이 우리의 행위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록 믿음이 연약하다고 할지라도 구원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한 것은 믿음에 분량을 저울에 달아서 한 것이 아니에요.
구원하는 믿음은 사람마다 동일해요.
너도 나도 주 예수를 믿게 해서 구원을 주셨어요.
차별이 없어요.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비록 믿음이 연약한 모습을 보인다고 하여서 그를 옳다 그르다 를 정죄하고 판단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린 판단 받을 자들이지 누굴 판단 할 자들이 아니에요.
강함이란 게 뭔가요?
약함을 감싸 안을 때 강함이 되는 것입니다.
강자가 약자 위에 군림하는 것은 폭력이에요.
진짜 강함은 약함을 위하여 자기 강함을 포기 하는 것입니다.
이게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으로 나타났어요.
예수님은 강한 분이에요.
그런데 그 강함을 약함을 위하여 포기하셨어요.
이게 은혜이고 사랑인 겁니다.
지금 사도바울이 로마서를 어디에 쓰고 있나요?
로마 교회에요.
교회 안에 약한 자들이 있다는 겁니다.
어떤 이들은 먹고 마시는 것으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있고!
어떤 이들은 날과 달을 지키는 것으로 자유롭지 못한 분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것을 옳고 그름이라는 법률적인 잣대를 가지고 판단하여서 교회의 화목을 깨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8장을 봅시다.
고전 8:4-12= “그러므로 우상의 제물 먹는 일에 대하여는 우리가 우상은 세상에 아무 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 밖에 없는 줄 아노라 5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6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여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 7 그러나 이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하여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고로 그들의 양심이 악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 8 식물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세우지 못하나니 우리가 먹지 아니하여도 부족함이 없고 먹어도 풍족함이 없으리라 9 그런즉 너희 자유함이 약한 자들에게 거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10 지식 있는 네가 우상의 집에 앉아 먹는 것을 누구든지 보면 그 약한 자들의 양심이 담력을 얻어 어찌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지 않겠느냐 11 그러면 네 지식으로 그 약한 자가 멸망하나니 그는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형제라 12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13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
고린도교회 안에서 우상의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 안 되느냐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이걸 오늘 본문식으로 말하면 먹고 마시는 것으로 믿음이 연약한 자를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먹어도 되고 안 먹어도 된다고 합니다.
바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었어요.
왜냐하면! 바울에겐 신은 하나님 한분뿐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우상을 신으로 인정하지 않았어요.
그러니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는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식은 사람마다 가지지 못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아직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남아 있어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부정한 음식이라고 생각하고 먹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안 되어요.
왜냐하면! 그 양심이 우상에 대하여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우상에 대하여 살아 있으면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으면 자기 양심이 너 죄었지! 라고 참소를 해요.
그러면 스스로가 자기 행위에 참소를 당해요.
그럼 구원의 즐거움을 상실합니다.
죄책에 사로잡혀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주신 그 은혜로 살지 못하게 되어요.
그러니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처럼 세상 신은 신도 아니야!
신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기 때문에 우상의 제단에 올려진 고기라 할지라도 바울의 눈에는 그냥 고기 일 뿐이에요.
바울에게는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이나 바쳐지지 않은 제물이나 다 같은 고기에요.
그러니 거리낌 없이 먹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자유함도 조심해서 사용하여야 해요.
알다시피 믿음이 연약한 자들은 아직까지 우상에 대하여 살아 있어요.
이런 사람들은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 자신이 죄를 지었다고 생각을 해요.
그러므로 이렇게 우상에 대하여 살아 있는 사람들 앞에서는 비록 바울처럼 우상에 대하여 초월한 사람일지라도 우상의 제물을 먹어선 안 되어요.
왜냐하면!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보면 시험에 들기 때문입니다.
비록 나는 우상에 대하여 자유 한다고 하여도 그 자유를 마음대로 사용하지 말아야 해요.
그 이유는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내 자유를 보고 자신의 믿음으로는 소화 하지도 못하는 일들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는 아직까지 우상에 대하여 살아 있는 사람이 바울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걸 보고 자기도 따라 하다가는 마음에 상처를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본인은 자유하여도 그 자유를 맘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걸 한국교회 식으로 적용해 봅시다.
한국교회에서는 제사와 술과 담배는 금기합니다.
이는 기독교가 처음 조선 땅에 들어 올 때 선교사들의 눈에 술과 담배의 폐해가 심하다고 생각하여서 금기시 하게 된 것입니다.
이건 건덕상의 문제이지 진리가 아니에요.
하지만 한국교회에서는 진리처럼 통용되고 있어요.
그래서 교인들은 제사와 술 담배는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건 마치 고린도교회에서 금기시 하던 우상의 제물과 같아요.
바울이 그랬듯이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 죄냐 아니냐 라고 따지는 것은 사람에 따라서 달라요.
양심상으로 어떤 이에게는 죄가 될 수가 있고, 어떤 이에게는 죄가 아닐 수도 있어요.
이는 바울처럼 우상에 대하여 죽어 있는 자에게는 죄가 되지 않지만, 믿음이 연약하여 아직까지 우상에 대하여 살아 있는 사람에겐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께 죄가 된다는 말이 아니고 자기 양심상 죄라고 생각하여서 죄책에 빠지게 되니까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을 양심상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은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도 나중에 바울처럼 아! 신은 하나님 한 분 뿐이고 우상은 신도 아니라는 믿음이 생기면 그 땐 바울처럼 우상의 제물이다 아니다 따지지 않고 그냥 음식으로 생각하고 감사함으로 먹을 수가 있어질 것입니다.
바울처럼 모든 것을 소화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먹느냐 마느냐 라는 문제로 시시비비할 이유가 없어요.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하는 것이 정답이다! 라고 말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음식에 대한 문제를 말하고 또 날에 대해서 말하면서 어떤 정답을 내리지 않고 있어요.
왜냐하면! 이건 정답의 문제가 아니고 감당 할 수 있느냐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하늘나라 백성인 성도에게 있어서 음식과 날은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것이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모두가 세상에 속한 것들이고 육체에 예법 밖에 안 되어요.
성도는 역사 속에서 묵시로 사는 자에요.
육을 가지고 살지만 영적 원리로 사는 자들이에요.
그러니 육의 예법에 매일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난 할 수 있어! 라고 하지 마세요.
왜냐하면 당신의 그 자유가 믿음이 연약한 성도에게 상처를 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알다시피 먹고 마시는 것과 이 날과 저 날을 지키는 일들은 모두가 율법에 속한 것들이에요.
율법에 속한 일은 아무리 잘해도 의가 되지 않아요.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날을 지키는 것을 의(義) 차원으로 접근하지 말고 건덕상의 문제로 접근을 하시기 바랍니다.
이 땅에 있는 것들은 모두가 믿음으로 받으면 감사할 것들이에요.
그러니 먹고 마시는 것이나 날과 달과 절기를 지키는 것도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에 따라서 유익이 되기도 하고 해(害)가 되기도 해요.
기억 할 것은 나의 자유가 다른 사람에겐 시험이 될 수가 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됩니다.
나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남이 보았을 때 나의 자유함이 그 사람의 신앙에 걸림이 되면 하지 않는 것이 좋은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상대를 배려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대신 지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내 맘대로 할 수 있어! 가 아니고!
내 맘대로 할 수가 있지만 상대방의 유익을 위하여 자기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사랑이에요.
고린도전서 10장을 봅시다.
고전 10:23-3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25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니라 27 불신자 중 누가 너희를 청하매 너희가 가고자 하거든 너희 앞에 무엇이든지 차려 놓은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28 누가 너희에게 이것이 제물이라 말하거든 알게 한 자와 및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29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요 30 만일 내가 감사함으로 참예하면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다 하는 것에 대하여 비방을 받으리요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2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요.
무슨 말인가요?
모든 것을 할 수가 있지만 아무 일이나 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하는 모든 것이 나에게는 가(可)한 일일 수는 있지만,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에겐 받아드리기 어려운 불가(不可)한 일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를 듭니다.
예전에 제가 석가탄신일에 등산을 가다가 그 길목에 절간이 있어서 법당에 들어가서 스님이 무슨 말을 하는가 설법도 듣고 점심도 얻어먹고 잠시 커피도 마시고 쉬다가 온 적이 있어요.
저는 그 일로 인하여 죄의식을 느끼지 않아요.
그런데 만약에 절간을 아직도 우상의 전각이라고 생각하고 절간에서 나오는 음식은 부정한 음식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함께 동행 하였다고 한다면 그 사람을 위하여서는 하지 말아야겠지요.
왜냐하면! 나의 자유함이 그 사람에겐 시험이 되고 마음에 상처가 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의 자유함을 나의 유익을 위하여 사용하지 말고 남을 위하여 과감히 포기하는 것으로 사용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유는 내 유익을 위하여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위하여 구속을 당하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강한 자가 약한 자의 짐을 대신 지는 것입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그러므로 먹든지 마시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은 내 자유를 타인을 위하여 구속당하는 것이고!
욕망은 타인의 자유를 내 유익을 위하여 구속하는 것이에요.
사랑은 배려이고, 타인을 위한 것이에요.
그래서 바울은 남에게 시험거리가 되는 일은 하지 말라고 하는 것입니다.
“32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나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하라”
보세요.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모든 일을 함에 있어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라고 하잖아요.
이게 범사에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에요.
성도는 인간의 행위로 인하여 정죄함을 받는 것으로부터 해방이 되었어요.
성도에게는 먹고 마시는 것으로 인하여 심판 받지 않아요.
이는 하나님은 우리의 죄 값을 예수님에게 대신 담당케 하셨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 안에서는 우리의 잘잘못으로 인한 심판은 없어요.
성도에겐 징계는 있어도 심판은 없어요.
먹고 마시는 것과 날과 달을 지키는 것으로 인하여 심판을 받지 않아요.
우리가 받을 심판을 예수님께서 대신 담당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새 언약 하에서의 죄는 예수를 안 믿는 것이에요.
하나님은 예수님을 기준으로 해서 심판을 하세요.
예수 믿는 자는 의롭다 여겨서 구원을 하시고, 예수를 믿지 않는 자는 심판하세요.
그러므로 새 언약 하에서의 신앙은 주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성도는 무엇이든지 다 할 수가 있어요.
원리적인 측면에서 그렇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내 맘대로 살 수가 없는 것은 나의 행동이 자칫하면 남에게 상처를 줄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 사람들보다도 더 윤리적이어야 하고 더 도덕적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비윤리와 부도덕을 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에요.
금방 교회에 온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세상에서의 죄관과 율법적 죄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을 수가 있어요.
믿음이 연약한 사람은 아직까지 율법적 사고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지 않고 먹고 마시는 것과 날과 달을 지키는 것을 신앙생활이라고 생각 할 수가 있어요.
이런 초보적인 신자들 앞에서는 믿음이 있는 직분자들이라고 한다면 그들 앞에서는 술 담배도 먹지 말고 주일도 지키셔야 해요.
그렇지 않고 그 사람들 앞에서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어! 라고 하면서 주일날 교회에 오지도 않고 놀러 다니면서 술 담배를 하게 되면 시험이 들어요.
바울은 이러한 것은 연약한 자를 실족케 하는 것이므로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어요.
예수님은 소자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빠져 죽으라고 했어요.
이건 은혜를 많이 받은 자들 일수록 책임도 그만큼 많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많이 맡긴 자에게 많이 요구하세요.
즉 어른들의 책임이 아이들 보다 더 크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아직까지 율법적 잔재가 남아서 주일 성수하고 십일조를 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말씀대로 사는 것을 신앙의 내용으로 가지고 있을 수가 있어요.
또한 술 담배 안하고 제사를 안 지내고 윤리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법으로 신앙의 내용으로 인식할 수가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믿음이 강한 사람은 그 사람을 위해서 주일날 교회에 빠지지 말고 헌금생활도 하고 기도하고 봉사하고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타인을 의식하게 되어요.
혹여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시험 들지는 않을까 염려하게 되어요.
이게 믿음이 강한 자에요.
그래서 제가 복음 안다고 하면 막 살수가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유가 복음에 구속을 당하여야지!
복음을 내 자유로 이용하면 안 되어요.
그러면 죄인이 죄 짓는 게 당연하지 라고 하면서 마치 죄 짓고 사는 것이 신앙 있는 것인 냥 거드름을 피우게 된단 말입니다.
복음에 붙잡힌 성도는 그럴 수가 없어요.
하고 싶어도 복음이 이를 억제하게 역사를 해요.
복음이 죄와 싸우는 모습으로 끌고 가기 때문입니다.
이건 죄를 전혀 안 짓고 완전하게 산다는 말이 아니라 육신의 소욕을 죽이는 식으로 일을 한단 말입니다.
성도가 되어서 교회에 열심히 모여서 섬기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연보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복음 안다고 하면서 교회도 안가고 봉사도, 헌신도, 연보도 안하고 게으름을 피운다는 것은 그 사람은 복음에 의미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속된 말로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고 집사가 되어서 주일날 교회도 안 오고 놀러 다니고 설령 교회에 와서도 봉사도 안하고 연보도 안하고 거드름 피우면서 빈둥거린다고 한다면 일반 성도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그럼 믿음이 연약한 사람들은 야! 복음 알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겠네!
교회 다닐 필요도 없구나! 라고 생각하지 않겠느냐 에요.
복음을 자기 사욕을 좇는데 합리화 시키지 않겠느냐 에요.
이러한 모습을 오늘 본문에서는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게으름을 합리화 시켜주는 면죄부가 아니에요.
도리어 이러한 것을 악이고 죄라고 고발을 하고 있어요.
제가 요즈음 성도의 삶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말하면서 하는 행동은 반 복음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아서 그래요.
참 많은 분들이 전화를 해 와요.
대 부분의 상담 내용이 이 딜레마에 빠져 있어요.
첫 마디가 복음 알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됩니까? 라고 물어요.
해도 되나! 안 해도 되나! 를 묻는 것 자체가 자기 행함에 매몰되어 있다는 증거에요.
자기에게 관심이 있는 겁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하라고 해도 복음에 걸리고 하지 말라고 해도 복음에 걸려요.
왜냐하면! 복음은 나의 어떠함을 보는게 아니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상담하는 저의가 결국엔 복음 핑계 되고 자기 몸뚱이 편한 쪽으로 살고 싶다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하고는 싶은데 찜찜하니까
저에게 인준을 받고자 하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복음을 들으면 뭔가 마음에 감동 되는게 없으세요.
그 감동하심으로 사세요! 라고 말을 해 줍니다.
왜? 복음을 받으면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겠네요! 라고 합니까?
복음을 받으면 기쁘지 않으세요.
더 잘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듭니까?
율법 아래서 종노릇하다가 해방이 되었으니 얼마나 기뻐요.
그 기쁨이 더 잘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요.
율법 아래서는 억지로 했지만 복음 안에서는 자발적으로 감사함으로 하게 되지 않나요?
아니 어떤 복음을 어떻게 들었길래 복음 알면 안 해도 되겠네! 라고 하는지 참 궁금해요.
성경을 보세요.
복음을 받은 성도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았는가?
성경 속에서 복음을 받고서 기뻐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들이 안 보이세요.
안디옥 교회를 보세요.
어디에 아무 것도 안 해도 되겠네요! 라고 한 사람들이 있었나요.
없잖아요.
오순절 성령 강림 후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들을 보세요.
율법 아래서는 일주일에 하루 안식일에만 모이던 사람들이 얼마나 기뻤으면 날마다 모여서 찬미하고 교제 하였겠어요.
율법 아래서는 소득의 십분의 일만 드리던 사람들이 얼마나 감사했으면 전 재산을 바쳤겠어요.
율법 아래서는 사람 간에 차별을 했는데 이젠 그 차별도 다 무너지고 서로 한 형제가 되어서 떡을 떼며 교제한 모습들이 안 보이세요.
좋은 것 있으면 자랑하고 싶지 않으세요.
복음이라는 좋은 것을 받았잖아요.
그럼 기쁜 마음으로 교회에 가서 자랑하세요.
봉사도 더 열심히 하고 더 감사하세요.
믿음이 연약한 사람이 있거들랑 타박하지 말고 감싸 안으세요.
어른이 될 때까지,,,
아이를 키우듯이 잘 돌보세요.
아이가 커 가는 모습을 보는 재미가 얼마나 솔솔 한대요.
그 재미에 푹 빠져 보세요.
그게 믿음이 강한 자에요.
그 사람의 신앙이 옳으냐 그르냐는 주님께 맡기시고 주께 받은 은혜로 감사하면서 사세요.
기쁨 마음으로 감사하면서 살면 사람들이 궁금해 할 것 아닙니까?
뭐가 그리 신이 납니까? 라고 물으면 예수를 내어 놓으세요.
나 이런 사랑 받았어!
나 이런 은혜를 받고 있어!
주님께 받은 사랑을 내어 놓으세요.
돈 없다고 징징거리지 말고!
아프다고 비관하지도 말고!
또 돈 좀 있다고 까불지 말고!
건강하다고 큰소리치지도 말고!
잘난 척도 하지 말고 못난 척도 하지 마세요.
이 세상은 다 지나가는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고 우리가 가야 할 세상은 따로 있음을 알고 하루 하루 살게 해 주신 그 은혜에 감사하고 사세요.
예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몰고 오시고 있어요.
곧 도착해요.
안 보이세요.
제 눈에는 보이는데,,
그 날이 멀지 않았어요.
저는 살아서 주님을 본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생각하고 살아요.
그만큼 세상이 주님이 곧 오신다는 징조들을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린 모두가 길동무들이에요.
그러니 함께 하는 그 시간은 서로 열심히 사랑하며 사세요.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남의 눈에 티를 보지 말고 내 눈에 들보를 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눈을 여기서 귀를 여기고 마음을 열어서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크고 중한 것인 줄 알게 하옵소서. 또한 남을 판단하는 입은 닫게 하시고 주의 은헤에 감사하는 입이 열려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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