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도문 연구
1. 들어가는 말
나이가 들면서 사람은 존경하는 사람을 따라서 그 어른이 하시는 말씀을 마음에 담고, 생각하며, 한 걸음 나아가서는 그 어른이 하는 몸짓까지 닮는다. 곧 말과 행동을 닮는다.
현대의 심리학자들은 사람의 <행동>에는 두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말, 곧 언어이고, 다른 하나는 사람의 <행위>라고 한다. 그런데, 그 행위라는 것도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그 바탕은 <말로하는 생각>에서 나온 것이란다. 그만큼 말의 힘은 강한 것이다. 말의 힘이 있으므로 남에게 대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 그런 힘이 있으므로 사람은 그 말을 따라서 닮는다. 심지어는 그 심정까지도 닮는다.1)
그런데 오늘 우리는 ‘말이 말이 아니라서 말이 그 본연의 생명력을 상실해가고 (상실한) 있는 언어 공해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 기독인의 삶과 언어가 모델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신 ‘주의 기도문’을 새롭게 이해한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겠다. 이 기도를 드릴 때 기도의 내용과 의미를 이해하고 진실된 마음으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기독인은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예배시 목사의 축도가 없을시에 그것을 대용한 형식적인 암송에 그치거나 예배나 회의시 폐회신호, 혹은 필요한 한 가지 순서로만 생각하는 심각한 현실을 직시해 볼 때 주의 기도문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연구는 절박한 우리의 과제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필자가 이 분야의 연구를 위한 해박한 기초 지식이 부족함으로 아직은 학계에 나와있는 여러 견해들을 이해하고 수용하는 단계에 놓여있기 때문에 그 내용에 있어서 빈약하고, 깊이가 부족하며, 다소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고백한다. 아울러 본 소고는 누가보다 마태의 기록에 더 중점을 두었음도 밝혀둔다.
1.1 연구의 목적
주기도문 속에는 예수의 모든 사상과 교훈이 함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너무 경솔히 이 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래서 필자는 본 연구를 통하여 기도자가 주의 기도문 속에 있는 진실된 의미를 깨닫고 올바르고 경건된 믿음과 마음으로 이 기도를 드리게 함에 본 소고의 목적이 있다.
1.2 연구의 방법 및 절차
본 소고의 목적은 주의 기도문의 내용에 나타난 원어적 의미를 파악하는데 그 일차적 목적이 있다. 그런데 주기도문에 나타난 원어적 의미에 보다 가깝게 접근하기란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니다. 이것은 상당히 복잡한 작업과정을 거쳐야만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주의 기도를 가르친 주체로서의 예수와 그가 놓인 삶의 자리에 대한 철저한 전이해(pre-understanding)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전승사적 맥락에서 마태와 누가 공동체에 대한 전이해, 두 저자의 삶의 자리에 대한 전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러한 작업들이 보다 객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당시 전체적인 (국내는 물론 주변국과의 관계 등)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대한 치밀한 연구작업이 밑받침되어야 할 것이다.
사실 지금 상황과 위치에서 본인이 이런 방대한 작업을 한다고 하는 것은 역부족이다 (그러나 이 분야에 대한 학문성이 성숙해지는대로 깊이 있는 접근을 다시 해보고 싶은 욕심은 참으로 간절하다). 그래서 본 소고에서는 기존의 연구성과물 (비록 본인이 소유하고 있는 자료는 지극히 일부분이겠지만)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 한계가 너무나 자명하다고 할 수 있겠다.
또한, 기존의 모든 성서주석 방법론을 본 소고에 도입, 적용함이 지극히 상식적인 일이나, 여기에서는 문학비평, 편집비평을 중심으로 해서 원어적 의미파악을 하려고 하였다. 독자들의 창조적인 비판을 수용하고 싶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소고는 먼저, 주의 기도문의 구조를 마태의 주기도를 중심으로 살피고, 마태, 누가 두 주의 기도문을 문학, 편집비평으로 살핀다음 기도문에 나타난 내용을 원어분석적인 방법으로 접근해 보았다.
2. 주기도문의 구조
(마태의 주기도 : 표준 새번역)
<도표 - 1>
A. 부름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
B. 빎 | 1.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오며, 2. 나라를 오게하여 주시오며, 3. 뜻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시옵소서. 4. 일용할 양식을 오늘 우리에게 내리어 주시옵고, 5.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6. 가.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시옵고, 나.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구하여 주시옵소서. |
C. 기림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 |
주기도문은 위의 도표에서 보는 바와같이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곧, 부름(=부르는 말), 빎(=비는 말), 기림(=기리는 말) 이다. 그런데 주기도문 가운데서 주석상으로, 또는 번역상으로 가장 논란이 많은 곳은 비는 말 부분이다. 비는 말 하나하나의 뜻을 올바로 파악하려고 하면, 그 하나하나를 비는 말 전체의 구조속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비는 말은 모두 여섯이다(6번을 둘로 셈하면 비는 말은 일곱이라 할 수도 있다). 첫째 부분은 1.2.3.으로서 헬라어 원문에 보면 모두 2인칭 속격(συ)를 사용하며, 둘째부분은 4.5.6.으로서 1인칭 속격 (눅 ημων)혹은 대격 (눅ημα?)을 사용하고 있다.2)
그리고 첫째 부분은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이 핵심주제이고 둘째부분에는 양식, 죄, 위험이 핵심주제이다. 보다 상술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 (하나님의) 나라를 오게하는 것,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것은 모두 하나님 자신의 존재에 관련된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와 관련하여 친히 일으키시는 신적인 일이요, 종말론적인 사건이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사건은 열 개의 사건이 아니라 동일한 사건의 다른 국면이다.
헬라어 원문에서 이 세 가지 비는 말을 살펴보면, 아무런 접속사를 사용하지 않고 이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이 세 가지 비는 말의 내용이 하나의 사항으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음을 나타낸다(이 부분은 마태와 누가의 원어비교에서 다루기로 하겠음). 일찍부터 한국어 성경에 이 세 비는 말이 [...며]로 이어져 번역된 것은 아주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며]는 앞의 내용을 머금어서 뒤에 나오는 말에 이어주는 접속어이기 때문이다.3)
둘째 부분에 있는 세 가지 비는 말은 인간의 일상사를 다룬다. 밥을 먹는 것, 죄를 짓는 것, 유혹에 빠지고 악한 자에게 당하는 것은 각 사람에게, 또는 사람과 사람사이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사람은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한, 하나님께서 그에게 일용할 양식을 내리어 주시기를 빌어야 한다. 그런데 양식을 받는 것과 죄를 용서받는 것과 시험에 빠지지 않고 악한 자에게 구출을 받는 것은 내용이 맞물리지 않는 별개의 일이다. 헬라어 원문에서 이 비는 말 4.5.6.은 연결 접속사 “카이”(και;and; 그리고)로써 이어져있다. 한국어 성경에서 이 셋이 [...고]로 연결된 것은 적절하다. 왜냐하면 [...고]는 앞뒤의 말을 내용적으로 단절하여 나열시키는 접속어이기 때문이다.4) 따라서 주기도문은 구성상 크게 3부분으로, 내용상 2부분으로 나눠져 있음을 알 수 있다.
3. 두 개의 주의 기도문
(마6:9-13 ; 눅 11:2-4)
<도표 - 2>5)
Πατερ ημων ο εν τοι? ου Πατερ,
ρανοι?, αγιασθητω το ονομα σου.
αγιασθητω το ονομα σου, ελαθατω η βασιλεια σου.
ελαθατω η βασιλεια σου,
γενηθητω το θελημα σου,
ω? εν ουραν ω και επι γη?.
τον αρτον ημων τον επιουσιον τον αρτον ημων τον επιουσιον
δο? ημιν σημερον. διδον ημιν το καθ ημεραν.
και αφε? ημιν τα οφειλη και αφε? ημιν τα? αμαρτια?
ματα
ημων ω? και ημει? αφηκαμεν τοι? ημων και γαρ αυτοι αφιομεν
καμεν τοι? οφειλεται? ημων. παντι οφειλοντι ημιν.
και μη εισενεγκη? ημα? και μη εισενεγκη? ημα? ει?
ει? πειρασμον, πειρασμον.
αλλα ρυσαι ημαΣ απο του
πονηρου.
신약성서의 4개의 복음서에서 주의 기도문은 마태복음서(6:9-13)와 누가복음서(11:2-4)의 두 곳에서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은 두 기도문의 형성에 있어서 누가의 것이 마태의 것보다 더 오랜 것(더 원형에 가까운 것)이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인다.6)
그러면 두 개의 기도문에 대한 상이점을 문학 비평과 편집 비평을 중심으로 아래와 같이 살펴보겠다.
3.1 본문이 위치해 있는 문맥
마태의 본문은 산상설교부분에 있어서 제자들이 행해야 할 3가지 선행7)중의 하나로 기도를 제시하고, 여기에 주의 기도문을 위치시키고 있다. 이에 비해 누가는 갈릴리에서 활동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루살렘 상경기의 부분에 주의 기도문을 위치시키고 있다.8)
3.2 동기
마태 6:1-18에서 예수는 바리사이파 계통의 평신도들이 실천하던 외적인 경건성을 공박한다. 자선, 기도, 단식은 유대종교의 3대 동기라 할만한 것으로 유대인들의 대표적인 선행의 요소였다. 그런데 예수는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공연한 자선, 기도, 단식행위는 자신들의 안정감과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질책한다.9)
여기에서 예수는 그의 제자로서 행해야 될 자선, 기도, 단식의 3가지 선행을 가르치면서 그 중 기도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예수는 ① 그의 제자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달리 문을 닫고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해야 한다는 점, ②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자녀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이방인처럼 빈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제자들이 행해야 할 모범으로 주의 기도를 가르친다.10)
그런데 누가에서는 갈릴레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상경 중 어떤 곳에서 기도를 마쳤을 때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준 것같이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눅 11:1)라는 한 제자의 요청에 의하여 예수가 그 청을 들어주는 것으로 주의 기도문을 전해주고 있다.11)
3.3 본문 (도표 - 2 참조)
① 마태 6:9과 누가 11:2a에서 πατερ(아버지)라는 호칭은 일치한다. ημων ο εν τοιΣ ουρανοιΣ (하늘에 계신 우리의)가 누가에는 없고 마태에서만 나타난다.
② 마태 6:10의 γενηθητω το θελημα σου, ω? ουρανω και επι γη?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 편집자 역)가 누가에는 없다.
③ 마태 6:11과 누가 11:3의 양식을 청하는 기도에서 마태의 δοS(제 2부정과거 능동태 명령법 2인칭 단수로 1회적 동작을 나타낸다. 이러한 용법을 희랍어 문법에서는 aorist명령법이라고 한다.12)
이에 반해 누가는 διδου(현재, 능동태, 명령법)을 쓰고 있다. διδου는 “계속 주옵시고”라는 의미로써 역시 διδωμι의 활용이다.13) 그리고 이 귀절에서 마태는 σημεραν (날마다)이라는 부사구를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누가는 το καθ ημεραν (오늘)이라는 부사구를 사용하고 있다.
④ 마태 6:12과 누가 11:4의 용서에 대한 빎말에서 마태는 τα οφειληματα(빚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반해, 누가는 τα? αμαρτια? (죄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이 용서(탕감)에 대한 조건문으로서 마태는 ωΣ και ημειΣ (우리가 우리의 빚진 자들을 용서하여 준것같이)를 쓰고 있는데, 누가는 και γαρ αυτοι αφιομεν παντι οφειλον τι ημιν (우리 자신도 우리에게 잘못한 모든 사람을 용서하여 주기 때문에)를 쓰고 있다.
⑤ 마태 6:13의 αλλα ρυσαι ημα? απο του πονηρον (우리를 악에서 구하옵소서)는 누가에는 나오지 않는다.
3.4 특성
주기도문은 예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신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장 완전하고 위대한 기도문으로 손꼽히고 있다. 이런 주의 기도문이 갖는 특성들은 다음과 같다.
3.4.1 간결성
주의 기도문은 그 형식이 매우 간결하고 단순하다. 유대인들이 매일 드리던 기도문14)은 이보다 10배나 더 길다.15) 그래서 이 기도문을 암송하는데 소요되는 시간도 상당히 짧다. 그러나 이 간결하고 짤막한 기도속에 우리가 기도해야 할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모든 내용이 다 들어 있다.16) 예수께서 이같이 간결하게 주의 기도문을 주신 이유는 당시 입으로만 수없이 되풀이 하던 유대교의 긴 기도문과 달리 그리스도인들을 분명한 자각을 가지고 한 마디를 하더라도 진실된 마음에서 하도록 하기위함이었다.17)
3.4.2 독창성
예수께서 주의 기도문에서 독창성을 보여주셨다. 그는 유대교의 전승기도를 드린 대신 새로운 기도를 가르치셨다. 이 주의 기도문에는 당시 사용되던 말이 있지만 그 통찰력이 새롭다. 예수께서 완전히 새로운 형식의 기도를 지으시지 않았으나 제자들이 익숙히 외우던 기도의 말들을 사용하여 새 기도를 가르치셨다.
예수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나라의 임함과 동시에 세상에서도 우리를 도와 주시기를 하나님께 구할 것을 제시한다. 이 기도속에서 예수는 진정한 제자의 생활은 마음에 하나님 나라를 생각하면서 하루하루의 생활을 값있게 사는 것임을 보여 주시는 등 독창성을 보여주셨다.18)
3.4.3 모범성
주의 기도문은 우리가 무엇을 먼저 기도하고 무엇을 나중에 기도할 것인가에 관해 완벽한 모범을 보여주고 있다.19) 따라서 기도의 순서가 아주 이상적이다. 여섯 가지 간구의 처음 셋은 하나님의 영광과 존엄성에 대한 것이며, 다음 셋은 인간편의 요구에 대한 것이다. 즉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세 가지 문제인 “떡”의 문제, “용서의 문제”, “보호의 문제”이다.20) 그래서 우리는 주의 기도문을 하나의 모범적인 기도라고 하는 것이다.21)
3.4.4 만민성
주의 기도문은 만민을 위한 것이다. 시대와 종족, 계급을 초월한 것으로 나타난다. 다른 여러개의 유대인 기도문과 비교해 볼 때 만민성이 뚜렷하다. 유대인 기도문은 아름답기는 하지만 국부적인 것을 넘기지 못함에 비해 주의 기도문은 만민적이다. 유대인 기도문은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시고 그에게 구하는 축복은 그가 특별히 선택한 백성들을 위한 것에 불과하다. 주의 기도를 제외한 고대의 기도문의 공통점은 편협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모습으로 간구하고 특별한 모습으로 기도하는 사람만 보호하신다고 생각하였다. 주의 기도문에는 배타적 요소가 없다. 그것은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아버지임을 보여주고 있고, 지도자가 어떤 사람에게나 공통된 요구사항을 이 기도를 통해 구하고 있기때문이다.22)
3.5 마태와 누가의 편집부분
3.5.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호칭에 있어 누가는 단순히 πατερ (아버지)만을 부르는데, 마태는 ο εν τοι? ουρανοι? (하늘에 계신)를 덧붙이고 있다. 이 귀절은 마태 복음서에만 나오는 것으로서23) 마태 공동체의 특유한 용법인데24), 유대교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마태가 편집한 부분이다.25) 그리고 마태는 ημων(우리의)을 덧붙이고 있는데, 나의 아버지와 너희 아버지를 근본적으로 구별지은 것이 초대교회 공동체의 그리스도론적인 용법이고 예수가 그의 제자들과 우리 아버지라고 하지 않았으므로26), 이 단어 역시 마태의 편집상의 결과이다.
3.5.2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이 귀절은 누가에는 없고 마태에게서만 나오는 부분이다.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마태의 첨가부분이라고 주장한다.27)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이 귀절은 일찌기 주의기도문의 본문이었다. θελημα (뜻)이 사용되는 경우를 보면 마태에게서 6회(7:21 ; 12:50 ; 18:14 ; 21:31 ; 26:42 ; 그리고 6:10), 마가에서는 1회(3:35), 누가에서는 4회(12:47에서 2회 ; 22:42 ; 23:45)사용된다. 마가 3:35에서의 το θελημα του θεου (하나님의 뜻)는 마태에서는(12:50) το θελημα του πατρω? μου του εν ουρανοι?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으로, 그리고 누가에서는(18:21) του λογον του θεον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형되어 나타나고 있다. 마태 18:1에서의 θελημα 에 이어지는 귀절도 누가는(15:7) “하늘에서는”으로 처리하고 있다. 한편 누가의 특수 자료인 12:4728)과 23:2529)에서 누가는 θελημα를 사용하고 있고, (마태 26:42)에서도 예수의 인간적인 뜻에 대해서만 θελημα를 사용하고 하느님의 뜻에 대해서는 θελημα를 삭제한다.30)
θελημα가 나오는 위의 귀절에서 사용된 동사를 보면, 마태 7:21 ; 12:50 누가 12:47)에서는 ποιεω를, 마태 18:14에서는 ειναι31), 그리고 누가 23:25에서는 παρεοωκεν32) 을 쓰고 있다. 그런데 마태 26:42에서만 주의 기도문과 같은 단어인 γενηθητω33) 동사가 사용되고, 누가 22:42에서는 γινεσθω34) 가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주의 기도문 본문에서 aorist 수동형을 현재 수동형으로 변형시키는 누가의 작업과 일치하는 것으로, 여기에서도 누가의 편집적인 경향을 말해준다. 따라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는 마태의 본문이 원래적이고 누가는 오직 인간적인 뜻에만 한정시켜 θελημα 를 사용하는 그의 편집 경향에 따라 주의 기도문에서도 이를 삭제한 것이다.35)
마태 6:10c의 ωS εν ουρανω και επι γηS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는 마태의 편집절이다. 왜냐하면 마태 28:18의 동일한 표현이 예수 부활 후 초대교회 공동체의 의식을 전해주는 대목에서 나타나고 있고, επι τηΣ γηΣ 라는 표현은 누가(5회 : 2:14 ; 5:24 ; 18:8 ; 21:23,25)보다도 마태 (10회 : 6:10,19 ; 9:6 ; 16:19 2회 ; 18:18 2회,19 ; 21:23,25)에 훨씬 더 많이 나오는 용어이기 때문이다.36)
3.5.3 양식에 대한 빎말
여기에서 마태와 누가의 본문은 2가지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하나는 διδωμι (주다)동사의 시제문제로서 마태가 동작의 단순한 발생을 나타내는 aorist형인 δο? 를 사용하고 있는데 비해, 누가는 동작의 계속이나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시제형인 διδου 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태의 본문에서 사용된 동사가 aorist형임을 생각할 때 누가가 사용한 διδου 라는 현재시제는 예외적인 현상으로 누가의 편집부분이라고 본다.37)
다른 하나의 차이점은 마태가 σημερον (오늘)을 사용하는데, 누가는 το καθημεραν(날마다)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표현은 누가의 특수한 표현으로서(누가 2:11 ; 4:21 ; 5:26 ; 12:28 ; 13:32,33 ; 19:5,9 ; 22:34,61 ; 23:43)38), 또 그의 복음서에서 마태보다도 많이 사용하고 있음에도(마태는 8회 사용하는데 누가는 11회 사용)이 용어를 쓴 것은 명백히 누가의 의도적인 작업으로 다음에 나오는 επιουσιο? 에 대한 해석상의 어려움을 명백히 하려고 하는 의향인 것으로 보인다.39)
3.5.4 죄의 용서에 대한 빎말
이 귀절에서 문제가 되는 점은 마태의 οφειληματι (빚)와 누가의 αμαρτια? (죄)에서 보여지는 어휘상의 차이와 조건절을 인도하는 접속사, 그리고 동사의 시제상의 차이점이다. 예수의 모국어인 아람어에서 hoba는 원래 빚을 뜻하지만 죄를 뜻하기도 한다.40) 이 말을 마태는 아람어 그대로의 뜻을 따라 οφειληματα로 번역하였고, 누가는 αμαρτια?로 번역하였다. 누가의 이 번역은 다음에 나오는 οφειλοντι (빚진 이)의 뜻을 정확히하여 이방인 독자들로 하여금 오해의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41)
죄의 용서에 대한 조건절에서 마태는 ω? και 와 aorist형의 동사를 사용하는데 누가는 και γαρ 와 현재시제형의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 누가의 και γαρ 는 마태의 ωS και 의 형태에서 발견될 수 있는 “무엇대신 무엇”이라는 1:1의 대응적 요소를 피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는 것으로 누가의 편집부분이다. 그리고 동사에 있어서도 마태의 완료형이 하느님에게 청하기 전에 시행해야 할 조건(마태 5:23-24 ; 6:14-15 참조)을 의미할 수 있으므로 누가는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하여 현재형을 사용하여 계속적으로 용서해 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함을 나타내준다.42) παντι는 누가의 전형적인 애용어로서 (루가 6:30 ; 7:35 ; 9:43참조) 누가의 첨가용어이다.43)
3.5.5 악에서 구하소서
이 귀절은 누가에서는 나오지 않고 마태에서만 나온다. 마태는 πονηροS 라는 단어를 공관복음서 중 제일 많이 사용한다(마태 26회 ; 누가 13회). 그리고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이 말을 적용시키기도 한다(마태 9:4 ; 12:34,39,45 ; 16:4 ; 22:18). 이 귀절은 마태가 첨가한 대목으로 보인다.
4. 주의 기도문의 의미(마태의 주기도를 중심으로)44)
4.1 부름(9a절):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4.1.1 하늘에 계신
유대적 어구로서(왕상 8:36 ; 느 2:20 ; 사 57:15 등), 하나님의 거룩성과 전능성을 나타내는 표현이다(전 5:2 ; 시 115:2).45) 즉 “하늘에 계신”이라는 하나님의 자리는 그 분이 지상적인 인간과 교제하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초월적이고 거룩한 분이심을 말한다.46) 그리고 이 표현은 유대인들이 성전이나 예배시 사용하던 하나님께 대한 공식적인 수식어였다.47)
보다 원어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ουρανοιS(하늘)는 복수 여격인데, 원형은 ουρανοS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 ?하마샤임?의 번역으로서 다른 성경 저자보다도 마태가 자주 사용한 말이다. 성경에는 ?하늘?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오는데 그 하늘의 용법들이 다양하다. 몇 가지 실례를 찾아 그 용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ㄱ. 금속 조각품 (욥 20:13 ; 37:8 ; 시 104:2)
ㄴ. 휘장 (사 40:22)
ㄷ. 하늘의 창 (창 7:11 ; 왕하 7:2 ; 시 24:8 ; 말 3:10)
ㄹ. 하늘의 기둥들 (욥 26:11)
ㅁ. 하늘의 보좌 (행 7:48)
이렇게 볼 때 ?하늘?이라는 성경의 표현은 하늘이 어떠한 장소적 위치보다는 하늘 전체가 하나님을 위해 예비된 도구이며, 환경이고 또 물체로 나타냄을 볼 수 있다. 본문이 하늘을 복수로 취급하고 있는 것을 감안해 볼 때 하늘 <ουρανοιS>는 모든 하늘, 즉 우주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본다.48)
4.1.2 우리 아버지
원어적 의미에서 ‘우리’(ημων)은 1인칭 복수 소유격이다. 여기서 ‘우리’에 포함할 수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신앙의 소유자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자격이 그 신앙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기도자가 우리라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기도를 혼자서 드리던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드리던지 우리속에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을 위한 기도의 뜻이 항상 내포되어 있다고 보기때문에 이것은 모든 성도를 위한 기도가 될 수 있다.49)
그리고 ‘아버지’(πατερ)는 호격으로서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을 인생의 창조자란 의미에서 (신 32:6 ; 사 64:8 ; 말 2:10), 이스라엘 백성의 구속자란 의미에서 (출 4:22 ; 신 14:1-2) 아버지라 불렀다. 그런 경우 그것은 모두 집합적인, 혹은 연대적인 의미에서 부른 호칭이었고, 개인적인 의미에서 부른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주의 기도문을 통해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을 주셨다. 즉 예수의 하나님 칭호 ‘아빠’(αββα)는 자식이 아버지를 부를때 쓰는 칭호로서 어린 아이들이 거리감없이 그들의 아버지를 향해 믿음과 신뢰와 사랑의 자연적인 발로로서 “아빠”라고 부르는 칭호였다.50)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은 이런 호칭을 하나님께 적용하는 것을 너무 버릇없고, 무엄하고 불손한 일로 여겼기 때문에 감히 ‘아빠’호칭으로 하나님을 부르려는 사람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 호칭대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란 관용적인 호칭을 사용하였다).51)
따라서 예수의 하나님 칭호 “아빠”는 당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 분의 거룩성 앞에서 떨던 유대인에게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파격적이다 못해 하나의 신성모독적인 행위(요 5:18)였다.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을 두려움과 떨림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과 긍휼을 베푸시고 연약한 인간의 처지에 찾아오셔서 그를 감싸주고 치료하시는 하나님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의 기도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는 하나님의 가족공동체(막 3:35 ; 마 12:50 ; 눅 8:20)를 가능케 하고, 그 높고 거룩한 하나님을 향한 부름을 공동체 안에서 함께 나누도록 요청한다.52)
a+b
따라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말의 깊은 곳에는 하나님의 초월성이 보이고 (하늘의 표현), 또 친밀성(내재성)을 볼 수 있다(아버지의 표현). 친밀과 초월의 정이 조화된 대상이 주의 기도문의 서두 호칭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다.53)
4.2 빎(9b-13a)
4.2.1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오며”
4.2.1.1 이름을
το ονομα σου는 직역하면 ?아버지의 그 이름?54)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의 유일하신 존귀한 이름을 가리킨다.55) 옛날 사람에게 이름은 단순히 관습적인 칭호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본질적인 신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성서적인 사고방식에 의하면 이름은 신분의 호칭을 넘어서 그 이름이 대표하는 사람의 본성, 인격을 나타낸다.56)
구약성경에 있어서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존재와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며 한 인격의 본질이자 내적존재의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한 인간이 출생시에 얻게되는 이름은 그 사람의 활동이나 운명, 상황을 드러내 주며, 결국 그 이름을 가진 본인 자신, 고유한 바로 그 인격임을 말해주는 것이 된다.57)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본성 또는 본질을 의미한다.58)
4.2.1.2 거룩하게 하여 주시오며
이름과 관련하여 일어나기를 비는 사건은 “이름을 거룩하게 하라”이다.59) 여기서 ?거룩하게 하다?함은 어떤 무엇을 신성한 목적을 위해서 다른 일체로부터 구별하고 분리해 둔다는 뜻이다.60) 원래 거룩하게 하다(αγιαζω)라는 말은 70인역이 히브리어 qades를 번역한 말로서, “떼어놓다”, “자르다”, “분리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세속적인 것과 구별되어 초자연적인 것을 느끼게 하는 힘, 신비, 존엄성을 갖추고 있어서 두려움과 매혹을 느끼게 된다는 뜻을 지니는 개념이다.61) 이같은 의미에서 ‘영광되게 한다’든지 ‘욕되게 하지 않는다’(존경을 받으시며)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62) 그런데 이 단어가 수동태로 되어 있어(αγιασθητω)63) 누가 거룩하게 하느냐에 애매성이 있다. 그러면,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 분은 오로지 하나님이시다. 왜 그런가?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같이 제 1, 제 2, 제 3 빎말의 내용(앞으 주기도문의 구조 참조)은 단순히 신적인 일이요, 종말론적 사건으로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의 존재 자체와 관련하여 일으키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종말론적 사건이요, 종말론적 약속이다(겔 36:23 ; 38:23 참조). 그래서 헬라어 원문에서도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는 행위의 주체이신 “아버지”가 언어형태로 전혀 명시되지 아니하였다. 만일 아버지를 행위의 주체로 분명하게 표현하려면, 헬라어로는 2인칭 단수, 명령법을 사용하여 “아버지께서는 (“당신은”의 우리 말 공손용어에 의한 번역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옵소서”라고 표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에서는 그러한 표현을 피하였다.64) 그런데 이 거룩함 동사의 헬라어 형태는 일회적인 사건을 표현하고 있으므로 (αγιασθητω) 하나님이 언젠가 만유의 주가 되시며(고전 15:28),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땅에서나 어느 곳에서나 모두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가 주라고 고백되어질 (빌 2:10-11) 마지막 성취에 대한 간구라고 볼 수 있다.65)
a+b
그러므로 “이름을 거룩하게 하여 주시오며”인 제 1빎말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본질이 가리움없이 완전하게 나타나게 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게 해달라는 뜻이 된다.
4.2.2 나라를 오게하여 주시오며
4.2.2.1 나라를
?나라? η βασιλεια σου는 직역하면 ?아버지의 그 나라?인데, βασιλεια 는 원래 히브리어 malkut에서 유래하는 말로서 왕국(kingdom), 왕권(kingship), 통치(reign), 주권(sovereignty)을 뜻한다.66) 따라서 여기서 나라는 곧 ‘아버지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킨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뜻하는 말로서 모든 생명 (나아가서는 하나님이 만든 모든 피조세계)을 부자유케 하고 억압하며 파괴하는 사탄의 세력을 쳐부수는 생명과 자유와 해방의 자리로 인도하는 궁극적이고 종말론적인 하나님이 다스리는 평화의 세계를 의미하며67), 예수의 복음선포의 주된 내용이었다.68)
4.2.2.2 오게하여 주시오며
ελθετω는 원형이 ‘온다’, ‘돌아온다’, ‘나타난다’라는 뜻을 가진 Ερχομαι의 제 2부정과거 명령 (단순과거 명령, aorist명령)으로 단회적이고 일회적인 행동임을 보여준다.69) 그런데 이 동사는 도치되어 있다(제 1, 제 2빎말 역시 도치되어 있다). 이러한 용법은 결과적 의미 동사로 쓰여져서 완전하게 임하소서란 뜻이 있고, 또 부정과거이므로 그 나라의 완성, 즉 영광의 나라만이 아니라 최후에 영광의 통치가 은혜로 다스릴 그 나라만이 아니라 앞서 있을 모든 것까지 포함한다.70) 그런데 이 빎말은 제 1빎말의 원인이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해지려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야하기 때문이다.71)
a+b
그러므로 이 간구의 깊은 뜻에는 내가 하나님 나라에 가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있게해 달라는 뜻이 있으며 이것은 또 현재적인 것과 종말적인 것 두 가지를 내포한다. 전자는 불행, 모순이 찬 땅위에 그 불행의 요소가 제거되고 지상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룩되기를 원한다는 뜻이요, 후자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이루어질 영원한 천국을 가리킨다. 이 둘은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72) 따라서 우리들은 전자를 노력하고 후자를 기다리며 살아야 한다.
4.2.3 뜻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주시옵소서.
4.2.3.1 뜻을
정확히는 ‘아버지의 뜻’, ‘하나님의 뜻’이다. 여기서의 뜻은 윤리적인 하나님의 뜻이라기 보다는 인간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뜻을 가리킨다(마 18:4,14, cf.요 6:39).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하나님의 구원 의지는 완전히 이루어지는 것이다.73)
4.2.3.2 하늘에서 이루신 것같이 땅에서도
이는 “하늘과 땅 모두에서”가 아닌 (이루어짐의 동시성이 아니라)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이루어짐의 원형성 즉 하늘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짐을 땅에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져야 할 원형이라는 차원에서)의 뜻이다. 하늘은 사탄의 추방으로 인해 (계 12:7-12) 하나님의 뜻을 100% 수행할 뿐이다. 이처럼 하늘에서 하나님의 뜻이 방해를 당하지 않고, 또 온전히 이루어지듯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라는 것이다.74)
4.2.3.3 이루어 주시옵소서 (γενηθητω)
이 동사는 ‘이중서술’(중복서술), 즉 땅과 하늘 모두에 걸리는 서술로서 단순과거 수동태로 되어 있어 단회적인 동작, 즉 과거의 행위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행위의 결과가 현재와 미래까지 현실로 남아있음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75) 동시에 이 동사는 신적인 수동태(divine passive)로 되어 있어 하나님의 동작인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이 청원 역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실현된 종말사상을 전제하고 있기에 그리스도로 말마암아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 지상에서의, 인간에 의한 실현을 내포하지 않을 수 없다. 구약에서도 인간이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름을 언급하는 구절들이 나와 있으며(시 40:8, 140:10), 마태에서도 여러군데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행함에 관한 언급이 나와있다(7:21, 12:50, 2:31).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하나님의 주체적인 행동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온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역사속에 실현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 나라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곳이며, 그 뜻은 인간을 구원하려는 뜻외에도 예수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윤리적인 뜻을 포함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도래했기 때문에 이런 뜻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실현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 제 3빎말의 내용의 일부이다.76)
4.2.4 일용할 양식을 오늘 우리에게 내리어 주시옵고77)
이 빎말에서 가장 해석상의 어려움이 많은 것은 ετιουσιον (우리말 번역 “일용할”)이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마태와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과 ‘디다케’에 나오는 주기도문 외에는 헬라사회와 그리스도교 어느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어 학자마다 그 의미에 대하여 주장을 달리하고 있다. 즉 ① 이는 επι와 ουσια의 합성 형용사로서, ‘존재에 필요한’의 뜻이다(Origen, Chrysostom, Tholuck) ② 이는 επι와 την ουσαν (ημεβαν)의 결합으로서 ‘오늘’(현재의 날을 위하여)의 뜻이다(A. Debrumer, K. Brugmann). ③ 이는 επιουσα에서 온 것으로 “다음날을 위한”(행 16:11 참조 ; 그래서 오는 날이라고 아침기도에서는 오늘, 저녁기도에서는 내일이 된다)의 뜻이다(Th. Zhan, G. Weiss, E. Klostemann). ④ 이는 επιεναι에서 온 것으로, “미래를 위한”(우리에게 그 날에 먹을 빵을 주십시오)의 뜻이다(R. Brown, E. Lohmeger, A. Schweitzer, J. Jeremias) 등.78)
필자는 아직 이 분야에 대한 연구가 성숙치 못하기 때문에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연구단계라기 보다는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이해’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일관된 어느 하나의 견해를 주장한다고 하는 것은 역부족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 중에서도 가장 본문의 원어적 의미에 가장 충실한 박수암 교수의 견해를 ‘유보적 견해’로 지지하면서 여기에 소개할까 한다.
박수암 교수는 하나님 나라 선교의 빛하에서 볼 때 ④가 가장 합당한 해석이라 본다. 즉 예수는 제자들로 하여금 미래에 있을 하나님 나라 양식, 즉 생명의 떡을 오늘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79) 여기의 ‘미래’는 하나님의 위대한 내일 (God's Grest tommorrow)을 가리킨다. 예수의 선포가 종말론적이며 주기도문의 앞부분이 종말론적 기도임을 생각할 때 이러한 종말론적인 해석은 위의 모든 비종말론적 해석보다 훨씬 자연스러운 해석인 것이다. 이와 정반대의 견해를 소개하면, 김창락 교수의 견해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제 4,5,6의 빎말이 절박한 일상적 삶의 영역에서 부닥치는 일을 놓고 비는 것이라고 볼 때에, “내일의 양식” 또는 ‘미래의 종말론적 구원 양식’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본다.80)
예수는 이로써 그의 제자들이 “미래를 위한 혹은 다가오는 종말을 대비한 떡”을 구하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이것은 마태가 누가와는 달리 단순과거 명령형 δο?를 사용한 것을 보아서도 확실해 진다. 마태는 이 제 4빎말로서 신자가 내일의 양식을 즉 하나님 나라 양식을 오늘 구하라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나 구원의 상징인 성찬식의 떡은 종말을 위한 양식이다. 그러나 이 말속엔 물질적인 떡도 없지않다. 예수에게 있어서 지상의 떡과 미래의 떡 사이엔 구별이 없다. 하나님 나라 영역에는 모든 지상적인 것이 신성한 것이 된다.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뗀 떡은 단순한 지상의 물질적인 떡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떡이었고, 구원의 떡이었으며, 하나님 나라 맥락에서는 종말론적 해석과 비종말론적 해석사이엔 구분이 없게 된다). 비종말론적인 것이 종말론적인 것이 되며, 현재의 것이 미래의 것이 되며, 물질적인 것이 신성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이 기도문으로 떡(물질)을 구하는 것을 말씀하셨고, 신자의 경우 그것은 곧 “내일의 떡”, “천국의 떡”이 되는 것이다. 누가는 이를 잘 통찰했다. 그는 αρτον을 물질적인 떡으로 보기위해 마태의 δο?를 διδου로, σημερον을 κατ ημεραν으로 고쳤다.81)
4.2.5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고
4.2.5.1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여기 “죄”를 마태는 οφειλημα를 사용하여 빚 또는 세금의 의무 등을 의미하는 낱말을 썼고, 누가는 ?μαρτια를 사용했다. 그러나 마태의 본문이 더 아람어에 가까운 번역이다. 그것은 아람어 (????)의 번역으로서, “빚” 혹은 “부채”를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죄를 빚으로 생각했던 것이다.82)
문자 그대로의 빚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서 성립되는 것으로서 하나님과 인간사이에는 그러한 것이 성립될 수 없다.83)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죄는 근본적인 죄라기보다는 일반적 사유, 즉 믿음 후에 인간과 인간사이에서 범하는 허물에 대한 용서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84) 그러나 뒷부분의 “죄”는 인간사이에서의 죄라기보다는 그 의미의 무게중심이 하나님께 대한 잘못과 하나님 사랑의 거부로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이라는 결과론적 의미를 내포한다고 볼 수 있다(실제로 헬라어 성서원어 대전을 보면 이 부분의 의미를 “도덕적으로 하나님께 대한 범죄자”로 해석한다).85)
4.2.5.2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고
여기서 “용서하여 준”의 αφηκαμεν은 현재 완료형으로서 금방 발생한 행위를 표시한다. 이것은 현재에 용서해 준 상태를 표시하는데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주었다란 말은 그들이 우리에게 지은 죄를 더이상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다.86)
그러나 이는 현재의 뜻을 나타내는 아람어의 완료형을 그대로 직역한 것으로 보면 꼭 선행(先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마태의 ω? αφηκαμεν이든 누가의 και γαρ αφιξμεν이든 하나님의 용서는 행위를 조건으로 한다는 점에서 마태나 누가의 본문은 의미상 차이가 없다. “용서하여 준 것같이”. 이는 어떻게 보면 철저한 조건부 사죄의 청원인 것같이 보이나 그렇지 않다. 이 주기도는 불신자에게 준 기도가 아닌, 그리스도의 제자들에게 준 기도이며, 한번도 용서를 받지 못한 자에게 주신 기도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과거에 지은 죄를 이미 사함받은 자들에게 주신 기도이므로, 이 다섯번째 빎말이 의미하는 바는 조건적인 사죄가 아닌, 순환적인 사죄라 할 것이다. 즉 하나님께 무조건적인 죄용서의 은혜를 받은 인간은 거기에 대한 반신작용으로 형제의 죄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러한 용서행위가 있을 때만이 하나님은 완전한 구원을 허락하신다는 것이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마 5:7). 마 18:23-35의 무자비한 종의 비유는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해 준다. 이는 결국 수직적 차원과 수평적 차원은 결코 분리될 수 없으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신자가 어떤 자세로 하나님앞에 서야하는 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의 “용서하여 준 것같이”는 바로 이런 복음의 빚하에서 하는 말인 것이다.87) 그리고 후반부의 “용서하여 주옵시고”의 αφο?는 부정과거로서 명확하고 최종적인 명제를 표시해주는 낱말인데 이것은 문장의 처음부분에 위치해 있기때문에 강조되어 있다.88)
4.2.6 우리를 시험에 들지 않게 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구하여 주시옵소서
4.2.6.1 우리를 시험에 들지않게 하여 주시옵고
정확한 번역은 “우리를 시험으로 인도하지 마옵시고”이다. 여기서 “시험”(πειρασμοS)은 성서에서 좋은 뜻으로도 (“시련”이란 뜻으로 눅 22:8, 행 20:19, 약 1:2) 나쁜 뜻으로도 (“유혹”이란 뜻으로 마 4:1, 26:41, 약 1:14) 사용되나, 여기서는 이 모두를 포함하는 뜻으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 “시험으로 인도하지 마옵시고”, 혹은 “시험에들지 말게 하옵시고”의 뜻이다. 그것은 “시험으로부터의 보호”(preservation from temptation)가 아닌 “시험가운데서의 보호”(preservation in temptation)인 것이다.89)
4.2.6.2 우리를 악한 자에게서 구하여 주옵소서
누가의 주기도문에는 없는 빎말이다. του πονηρου은 문법적으로 볼 때 중성으로 보아 윤리적인 악으로도, 남성으로 보아 인격적인 “악한 자”(the evil one)으로도 가능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기도문의 종말론적 성격을 보아 이는 인격적인 악한 자, 즉 심판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마태는 13:38에서 마귀의 대용어로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여섯째 이 빎말은 하나님 나라를 앞에 둔 그리스도인이 그 종말론적인 사탄의 시험에서 우리를 보호해 달라는 간구인 것이다. 90)
a+b
제 5의 빎말이 과거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위한 것이라면 마지막 빎말은 미래의 인도와 구원을 위한 것이다.91) 이 제 6빎말은 (가)와 (나) 두 개의 빎말로 구성되어 있다. 제 6(나)의 빎말은 제 6(가)에 독자적으로 연결된 제 7빎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제 6(가)와 제 6(나)는 και(=and)로 연결되지 않고, 부정문 (가)와 (나)를 내용적으로 대립시켜 연결되어 있기때문이다. 즉 “...가 아니고 ... ...이다”(not ~ but)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가)와 (나)는 의미상으로 하나의 대립적인 통일체를 이루고 있다.92) 전반부는 “아니오”로, 후반부는 “예”로 요구하는 간구이다. 전자는 악을 향한 저항과 도전이며, 후자는 하나님의 거룩성을 향한 갈망이다. 이 간구에서 보여주는 것은 인간이 지닌 연약성과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는 깨지고 부서지는 속성과 동시에 인간을 행해 유헉의 손길을 뻗치는 유혹자에 대한 전면적인 도전과 거부의 영성이다. 따라서 실제로 이러한 악한 자의 유혹에 빠져 어둠의 세력에 두었을 때, 우리로 그 악한 자의 손에서 건져내어 달라는 말씀이다. 악한 자의 유혹과 힘은 거대하고 사나우나 우리의 힘은 연약하고 부족하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인 하나님께서 우리의 힘이 되시어 이 유혹을 물리칠 수 있도록 하시고 악한 자의 세력에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올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성에 참여하려는 인간의 간구이다.93)
4.3 기리는 말(13b):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이옵나이다 아멘.”
이 기림말은 본문비평상으로는 주기도문에 속하지 않는 것이 확실하다. 그래서 이 기림말을 번역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내포하고 있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호티(?τι)’라는 접속사가 맨 앞에 놓여있다. ‘?τι’는 본래 원인을 나타내는 종속접속사이다. 그러므로 ‘?τι’는 원칙적으로 종속문에 사용되지 독립된 문장에서 사용되지 않는다. 원인을 나타내는 종속접속사일 경우, 그 뜻은 “...하기 때문에”(because)이다.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서는 물리적인 인관관계를 서술하는 ‘원인(cause)’이라는개념을 모두 ‘(?τι)’를 사용한 경우가 많다. 영어 문법으로 설명하면,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는 ‘for’인데, 그것은 대등접속사이고, 독립된 문장에서 사용할 수 있다. 서구의 번역서들은 모두 이 기림말의 ‘?τι’를 이유의 대등접속사로 옮겼다. 그것은 옳다. 왜냐하면 기림말의 내용이 빎말의 내용에 선행하는 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기림말이 바로 직전에 있는 제 6빎말에 연관되느냐 빎말 전체에 연관되느냐? 기림말이 후대에 첨가되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그것은 빎말 전체에 연관하여 그렇게 비는 신앙적 근거를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참고 : 현대의 모든 한국어 성경에는 이 기림말에 아무런 연결사나 부사가 붙어있지 않다). 그러나 <구약성경>과 현재 사용되고 있는 <찬송가>의 겉장에 적힌 <주기도문>에는 “대개”라는 부사가 붙어있고 현재까지도 대다수의 기독자들은 그것을 붙여서 주기도를 드린다. 그러나 “대개”라는 부사는 뜻도 애매하고, 또 여기에 어울리지도 않기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쪽이 바람직하다.
기림말의 핵심어는 ‘나라’, ‘권세’, ‘영광’이다. 이 셋은 절대자, 또는 권력자를 서술하는데, 사용되는 개념이다. 이 기림말이 처음 작성된 그 당시에는 모든 로마시민들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오로지 로마 황제의 것임을 인정하고 살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기독자들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라고 용감하게 고백하였다. 이러한 고백속에는 로마 황제의 절대권을 부정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따라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은 아버지의 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다른 이를 배제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고유한 권리로 확인하는 신앙적 행위이다.94)
5. 나오는 말
기도문은 주님 자신의 인격과 모든 사역을 대변하고 있으며, 그의 교훈의 요약인 것이다. 그것의 전반부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온 것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것의 후반부는 가난한 생활을 통해 물질청원에 대한 모범을 보이시고, 죄를 안고 밤낮 간구와 눈물의 기도를 올리심으로 사죄청원에 대한 모범을 보이시며,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되 그것을 물리치고 승리함으로써 승리청원에 대한 모범을 보이신 주님의 말씀을 보여주는 것이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그 혹독한 시련속에서 이런 의미있는 주기도문을 정말 진실된 마음으로 드렸을 것이다. “이미” 온 하나님 나라와 “아직 아니”의 하나님 나라 사이에서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확신하면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사탄의 모든 시험에 그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혼신을 기울여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주기도문을 드렸을 것이다. 초림과 재림사이를 살아가는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도 간절한 기도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 도래와 물질, 죄, 시험의 문제는 그들에게 못지않게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95)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는 주기도문이 형식적인 기도문이 되어가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필자는 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문 연구에 손을 대면서 이 기도문이 오늘 우리에게 주는 그 깊은 의미들을 조금씩 이해할 수 있었고, 나아가서 이제는 이 기도문의 그 원래적 의미들을 또박또박 마음에 아로새기면서 혼신을 기울여 간절한 마음으로 한조목 한조목씩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게 되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이름을 거룩하게 하옵시며, 나라를...”
본 연구로 인하여 필자에게는 ‘죽은 언어의 나열’에 불과했던 주의 기도문이 ‘살아 움직이는 주님의 말씀’으로서의 기도문이 되었다. 이것은 필자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경험이라 할 수 있겠다. 바라옵기는 이러한 고백이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과 고백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모든 기독인들의 공동체적 경험과 고백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 간절하다.
주의 말씀을 ‘살리는 것’, 아니 주의 말씀이 내 삶의 전 영역에서 ‘살도록’ 내 마음을 비우고 한없이 낮아지는 것, 그래서 말씀이 우리의 삶을 강하게 지배하도록 하는 것.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드려지는 주의 기도, 그것이 참 기도요, 참 신앙고백이 아닐까...
6. 참고문헌
6.1 성서원문
Aland, Kurt. ed. The Greek New Testament. Stuttgart : United Bible Society, Collins Clear-Type Press,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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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사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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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영진 편. [성서대백과 사전 vol. 10]. 서울 : 성서교재간행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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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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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단행본
6.4.1 원서
Manson, T. W. The Teaching of Jesus. Cambridge :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63.
6.4.2 번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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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3 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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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모. [누가복음서]. 왜관 : 분도출판사, 1987.
최기재.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서울 : 성은출판사, 1978.
6.5 학위논문
권대영. “주기도문에 대한 연구.” 침례신학대학 신학대학원 논문, 1984.
현상보. “주의 기도.” 광주카톨릭대학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6.
6.6 정기간행물
Tilborg, S. Van. "A Form Criticism of the Lord's Prayer." Novem Testamentum 14 (1972).
김지철. “예수의 기도(2).” 교회교육 (1992.9).
김창락. “주기도문의 번역과 주석상의 문제점.” 성서한국 38권 1호 (1992.6) : 25-26.
김철손. [산상설교 III]. 기독교교육 (1983.5)
박수암. “산상보훈연구(IV).” 교육교회 (1992.6).
박창해. “우리말다운 <주기도문> 어법.” 기독교사상 (1993.5).
박창희. “사람은 닮는 존재다.” 기독교사상 (1993.3) : 267-268.
주기도문 강해 (마 6:9-13)
예수님께서 기도하신 요한복음 17장의 기도는 주님의 기도문이고, 눅 11: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라고 한 제자들의 요청에 기도에 대하여 가르쳐주신 내용이 여기 누가복음 11장과 마태복음 6장 본문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는 소위 주기도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기도문은 주 예수님이 하신 기도문이고(요 17:), 주기도문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들이 할 기도의 중심이라는 말입니다. 보통 생각하기를 기도는 개인적으로 알아서 하면 될 신령한 일인데 왜 가르침을 받아야 하는가? 하고 의구심을 가질 수 있으나 성경에 분명히 제자들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으니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에 대한 상세한 이해와 믿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도 배워서 하는 것이 옳은 일입니다. 십계명은 1-4 계명이 먼저 하나님을 위한 것이며, 다음 5-10번째의 인간을 향한 윤리적 계명이 그것입니다.
주기도문도 요약하면 꼭 십계명의 순서와 같은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기도문 요약
기도의 대상 :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1. 하나님을 위한 간구
1)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2) 나라이 임하옵시며
3)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2. 우리를 위한 간구
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2)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기도의 목적: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1.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기도대상 호칭)
하늘이라면 영어로 sky가 아니고 heaven입니다.눈으로 보이는 우주 공간의 하늘이 아니라 영적인 뜻을 포함한 하나님 영광의 나라를 뜻합니다.
전5:2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고 하며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다는 차이를 말하는 것은 소위 하늘과땅 차이라는 말이 있듯이 하나님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위치에 계신가를 의도합니다.
(1)하늘에
하늘은 높고 넓고 영광스런 곳입니다.태양과 달과 별과 별들의 빛이 비치는곳입니다. 하나님은 그 영광 위에 계십니다. 하늘에 계신다고 할 때, 하나님의 영광스런 좌소, 그 높으신 위치를 말합니다.
바다 속의 용왕신이 아니고 땅속에 묻힌 지신이 아니고 돌 속에 있는 석신, 나무의 목신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우러러 봐야 할 하늘 위에 계신 분입니다. 그리고 하늘은 천국의 또 다른 말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나라를 지으시고 우리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 되면 가장 먼저 천국을 믿는 것이 복이 되고 소망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8가지 복을 가르치실 때에도 먼저,
마5:3『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하셨고, 기도하고 구하는 일에도 그 중심에 먼저,
마 6: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시며 먼저 그의 나라를 구하라 하셨습니다.
성도가 바라는 본향이 곧 하늘나라요, 우리는 그 나라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로 천국에 대한 소망 없이는 교회 생활이 무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기도의 중심에 천국백성 된 것을 먼저 의식하며 감사하며 그 나라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그 나라의 주인 되신 하나님을 부르라는 것입니다.
(2)계신
하늘에 계신, 이라고 할 때, 계시다는 말씀은 생존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죽은 신이 아니라 살아계신 신이라는 말입니다." 너희 할아버지 계시냐?" 하고 물을 때, 살아 계시면, 예 지금 집에 계십니다. 라고 답할 수 있지만 돌아가셨으면,"예, 2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등으로 답해야 합니다.
계시다, 안 계시다는 말은 생존하신다, 돌아가셨다를 뜻하는 말입니다. 계신 곳도 집이냐, 사무실이냐, 청와대냐에 따라 어떤 장소에 계시냐를 묻게 될 때, 너희 아버지가 어디 계시냐? 하면 세상에서는 우리 아버지가 대통령이면 청와대 계신다 할 때 가장 높은 위치가 되겠지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는 말입니다. 물속도 땅 속도 아닌 하늘에 계신 분이란 말입니다. 계신다는 말은 살아 계심이요, 살아계시니 말씀하고 그 의지를 나타내실 분이라는 뜻이 포함됩니다.
막 12:27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
세상에 신들은 죽음의 신, 마귀가 만들어 낸 죽은 신들의 이름이 가득합니다. 자연이나 죽은 자의 이름으로 신들을 만들었습니다. 때로는 이런 신도 있습니다.
행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 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살아계신 것은 고사하고 알지도 못하는 신에게 라고 위패를 걸고 제를 드린다고 하는 것은 참 우스운 일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은 살아 계셔서 우리 기도를 들으심을 믿어야 합니다.
시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로다』
(3)우리 아버지여
여기서 아버지여, 라고 하는 말은 성을 나타내는 남자로서의 아버지가 아니라 믿음의 아버지라는 뜻이며 인생을 지으신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롬3:29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 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우리, 라고 하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특이하게 많이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독자로 태어나서 부모를 부를 때에도 우리 아버지, 우리 어머니라고 부릅니다. 기도할 때 호칭으로 우리 아버지여,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한 가족 공동체 의식을 가진 것을 뜻합니다.다같은 형제자매가 되었기에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게 됩니다.
요1:12『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롬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우리 아버지라고 할 때는 아버지의 권위와 능력 면에서 크시다는 의미입니다.
영역이 좁게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들의 아버지가 되면 크신 분이 됩니다.
2. 하나님을 위한 간구
우리가 무슨 기도를 할때라도 하나님의 성호를 먼저 찬양하는 것이 바른 기도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찬양 할 것을 가르치셨습니다.
1)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십계명에도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 하시고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신 후 하나님의 성호를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하셨습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성호를 무시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러 신들 중에 단순히 한 신처럼 가볍게 여기지 말라는 뜻입니다.
(1)이름이
이름은 존재의 상징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야훼( )라고 4개의 철자로 되어있습니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존재한다는 말이며 어떤 성격을 표현합니다.
레 22:32 『너희는 나의 성호를 욕되게 말라 나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거룩하게 함을 받을 것이니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요』
호랑이라면 호랑이 성격을, 토끼하면 토끼를 이해합니다. 이름은 그 성격을 말해줍니다. 또 죽은 자는 고 홍길동, 이렇게 '고'라는 말을 덧붙여 표시합니다.
그냥 이름을 적으면 살아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부를 때 경건하게 존귀하게 영광스런 이름으로 부릅니다. 저 유대인들은 아직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때나 기록을 할때는 잠시 일어서서 묵도하는 마음을 가지고 부르고 쓴다고 합니다.
말세에 거짓 선지자들은 특징적으로 주의 이름을 별스럽게 난발하면서 유혹할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마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아멘'이란 말도 주님의 다른 별칭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아멘소리도 이상한 소리로 부르는 것은 삼가해야 옳습니다.
계 3:14『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하나님을 불신자에게 쉽게 전달한다고 카톨릭에서는 하느님으로 표기하고 부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라는 단어의 어휘 출처는 저 불신자들이 하늘공간을 뜻하는 하늘에다가 님이라는 존칭어를 합성해서 하늘님이라는 우상심리로 하늘 자체를 신으로 부르짖는 단어였다가, 'ㄹ'탈락현상으로 나중에 하늘님에서 하느님으로 바뀐 것뿐이고 인격적 신을 뜻하지 않고 사용된 단어입니다.
물론 가령, 아버지를 경상도 방언으로 아부지라고 한다고 해서 아버지와 다른 뜻이 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확실히 믿고 있는 신을 표현하는 언어 차이에서 극단적으로 비난할 것은 아니지만 가능한 세상이 쓰는 단어와 구별되는 것이 좋겠다는 뜻으로 하느님 보다 하나님으로 하는 것이 옳은 줄 압니다.
성경에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그 영광 면에서 여러가지로 다르게 표현하는데, 구약에 엘로힘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뜻하려 할 때 부르는 명칭이고, 아도나이는 재판자, 통치자, 엘샤다이는 위로자, 여호와는 자존자, 구원자 등으로 쓰입니다. 그리고 신약에 데오는 높으신 분, 큐리오스는 지배자, 권세자, 파테르는 아버지의 뜻을 가지고 부르는 호칭들입니다.
이방인들의 신명(神名)은 일본:가미사마, 중국:상제(上帝), 영어로는 표기할 때, 라지 지(G)를 표기하면서(God)라고 하고 스몰 지를(g) 쓰면서 god(s)라고 할때는 잡신들을 통칭하는 단어로 씁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1939년 9월 8일 제28회 평양신학교 총회 때 '하나님'으로 규정 짓고 그렇게 부르기로 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고 하는 것은 성도가 세상 중에 가장 귀하게 공경하고 섬겨야 할 분으로서의 이름이라는 것이며 우리 믿음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신앙고백이기도 합니다.
시 16:2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시 73: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
행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2)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거룩이라는 코데쉬()는 부정한 것을 짤라 내다는 뜻으로 영적으로는 세속적인 것과 구별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경적으로 사용되는 교회가 쓰는 단어는 거의 성(聖);거룩이란 단어로 합성되는 명칭이 많습니다. 성소, 성민, 성시, 성산, 성경, 성일, 성령, 성성(城), 성직, 성찬, 성례, 성미, 성의, 성가, 성막, 성전, 성회, 성역등 입니다.
우리 신앙 중심에 교회의 것과 교회 중심적 생활의 모든 성도의 삶은 세속의사람들과 구별되어야 합니다. 사생활에도 하나님과 늘 함께 하는 마음으로 행사를 치러도 속되거나 하지말고 거룩히 구별되고 본이 되고 불신자들이 의아해 하더라도 우리 식의 영적 뜻을 지녀야 합니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 시오며, 라고 기도하는 중심은 하나님을 거룩한 신이시오, 모든 신이라는 이름들 중에 참 신이심을 최상으로 찬양하는 마음의 표시입니다. 오직 하나님만 참 신이심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달라고 구하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호칭하고 하나님의 영광된 이름자체로도 찬미하고 감사할 의중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문화적 축복은 뒤로하고 먼저 하나님을 찬미하는 정신을 잃지 않았습니다.
합 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18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2)나라이(가) 임하옵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믿고 소망하고 땅에서 실현코자 하는 뜻에서 기도하는 중심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에 충만하여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찬미하는 일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마음에 천국이 충만한 사람은 무엇을 구할 때에도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기쁨으로 찬미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나의 마음이 천국으로 충만하게 해주시기를 간구하는 마음입니다.
눅17:21『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있느니라』하나님의 나라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은 천국의 존재를 믿는 바이고 그 천국을 소망하며 기뻐하며 기다리고 있음을 의도합니다. 구하는 내용도 결국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에 목적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3)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기도할 때 나의 생각대로 모든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라구해야 한다는 점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라고 함은 모든 역사의 경륜이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에 달려있다는 것을 고백 하는 것입니다.
전 11:5『바람의 길이 어떠함과 아이 밴 자의 태에서 뼈가 어떻게 자라는 것을 네가 알지 못함같이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네가 알지 못하느니라』
렘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그래서 주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실 때에
마 26:39『 ...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하나님의 성호와 영광의 나라, 천국을 사모하는 중심으로 시작하여 모든 섭리는 하나님의 장중에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믿고 그렇게 삶을 살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동화에 나오는 요술방망이가아니라 인격적으로 살아 계셔서 우리가 바라는 것들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거룩하게 쓰임 받기를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달라고만 하는 것은 기복신앙으로 일반 종교인들이 기원하는 기도 태도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그렇게 목적도 불분명하게 하나님 관계없이 내게 필요한 것만 요구하는 기도를 하고, 마귀는 이때라 싶어 물질도 명예도 주면서 불법과 온갖 불의한 가운데서도 부흥이네 뭐네 하게 하여 타락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적극적사고방식이니 긍정적이니 하면서 뭐든 잘되고 높아지는 것을 구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 여기도록 잘못 가르치는 지도자 때문에 현재 한국교회는 기복신앙과 맘모니즘 사상으로 크게 타락했습니다. 제자의 어미도 자식들이 축복 받기 위해 고난은 생각지도 않고 요즘 잘못 배운 신자들처럼 적극적 사고방식으로 자기 아들들 영광만 소원했을 때 잘못 구 하는 것 이라고 주님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막 10:35『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여짜오되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 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
막 10:37-38『여짜오되 주의 영광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38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 하는 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아무쪼록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문의 중심을 따라 기도해야 가장 정확하고 응답을 받아도 후회할 일 없을 것입니다.
3.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1)오늘날
이것은 미래가 아니라 현실을 의도합니다. 기독교는 피안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나 불확실한 극락 같은 가상의 세계나 심리철학과 동경의 세계로 선전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현실에 참여하고 현실 속에 하나님의 역사를 실현하는 역사성이 있는 종교입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주께서 찾아가시어 마르다에게 신앙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때 답변이,
요 11:24-26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25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시고 아는 대로 지금 그런 역사가 될 줄 믿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세인들보다 자연히 진리에 대한 지식이 많아서 교회 다니면 말하는 법이 발달하고 대체로 똑똑해지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신앙심으로 세상을 이기며 사는 것은 별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된 언약을 실행하는 현실성 있는 신앙생활인이 되어야합니다. 오늘날입니다. 죽고 난 뒤, 상상의, 잘 모르지만, 뭐 그런게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야 할 우리들의 현실을 신앙으로 풀어야 합니다. 기도로 풀어야 합니다.
2)우리에게
물론 자신의 문제만을 집중으로 기도하는 일과 타인과 전체를 위한 대신하여 기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공동체 의식이 있어서 나와 및 형제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습관적인 바램이 있어야 합니다.
3)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이렇게 먼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은, 물질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만물과 삶의 주인 의식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롬 11:36『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학 2: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일용할 양식은 달랑 하루만 살 양식의 뜻이라기 보다 매일의 양식을 의도합니다.
그러므로 만물의 주인을 알고 삶에 용이한 양식과 물질이 필요 충분 조건에 맞게 구하는 것은 성도의 권리이자 기도의 의무입니다. 문제는 과도한 욕심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가? 하는 점이 분별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하나님이 주실 축복의 땅 가나안으로 가기 전에 광야에서 훈련받고 살 때 양식을 하늘로서 땅에 떨어지게 하셨습니다.
만나와 메추라기를 떨어뜨려 주셨는데, 매일같이 주워서 요리해먹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과도한 욕심쟁이는 하루에 먹을 것 이상으로 너무 많이 거둬 와서 재고 했더니 썩었습니다.
출16:17-20『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18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1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 두지 말라 하였으나,20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
또, 출16:26-27 『 육 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두되 제 칠 일은 안식일인즉 그 날에는 없으리라 하였으나, 27 제 칠 일에 백성 중 더러가 거두러 나갔다가얻지 못하니라』고 하셨으므로 신약에도 주일에 상업적 행위는 안 하는 것이 안식일 개념에 맞습니다. 주일에 혹 어쩔 수 없는 수입이 될 일이 생겼다면 그 전액을 주님께 드림이 옳다고 봅니다.
4.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양식을 먼저 구한 것은 근본적인 원죄가 해결된 성도로서 삶의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신앙 고백적 삶을 살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상하지요? 회개부터 하라는 교훈이 훨씬 많은 편인데 주기도문에서는 일용할 양식을 먼저 구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먼저 먹고 힘을 내야 회개를 하든지 더 구할 것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먼저 사람을 살려놓고 그 다음 교정할 것을 바르게 고치고자 하십니다. 죄에는 원죄(原罪)와 자범죄(본죄(本罪)가 있습니다. 원죄는 순전히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예수님의 보혈로 사함받았으나 본죄인 스스로의 죄는 역시 하나님의 용서로 해결되지만, 조건이 붙습니다. 그것은 형제의 죄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형제를 용납하는 문제는 자신의 영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에 주기도문에 이어,
마6:14-15『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는 말씀을 더 첨가하셨습니다. 본절에 죄는 옵페이레마(ojfeivlhma)라는 단어로 실수나 빚진 것을 뜻하는 말이고, 14, 15절에 나오는 과실은 파라프토마(paravptwma)로 범죄와 과오 등을 뜻합니다.
비슷한 용어인데 먼저의 것은 도덕성에 가깝고 뒷 단어는 종교성에 가까운 범죄를 말합니다. 상대로부터 도덕적인 부담감이나 원칙을 벗어난 행동으로 위해를 받았을 때 이런 것들을 다 용서해야 내가 주께 잘못한 것들, 하나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반항한 것이거나 부도덕으로 잘못된 모든 범죄에서 사함 받을수 있다는 것입니다.
원죄와 달리 자범죄는 이렇게 형제를 용서할 수 있을 때 나의 영혼도 사함 받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마18:21-35절에 일만 달란트(6천 데나리온, 16,500,000달러)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즉 일만 달란트에 비하면 1/600,000 의 차이로 작게 빚진 자를 놓고 용서해야 할 사실에 대한 비유를 하셨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로부터 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사함 받았다면 당연히 자기에게 작은 빚진 자는 용서함이 마땅하지 않냐는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눅17:4『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자신의 죄 사함을 위해 기도할 때, 이렇게 형제의 죄를 용서해야 하며,
참된 회개의 요건은 3가지로 정리됩니다
1)지적 인식이 필요합니다
죄란 정의를 어떻게 내리느냐에 따라 감정을 달리합니다. 불신자는 죄라 여기지 않기에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죄의 정의를 성경에 근거하여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원죄나 모든 죄를 성경적으로 이해합니다.
롬7:7『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2)정적 아픔이 있어야 합니다
죄는 인정하나 정서적인 동요가 없으면 회개가 안됩니다. 큰 문제이지요? 말세의 사람들이 독해진 정서를 성경은 예고했습니다.
딤후3: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시34:18『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 도다』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였지만 통곡할 수 있는 정서가 살아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마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3)의지적으로 죄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알고, 통회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그 죄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공간적인 이동과 갚아야 할 문제는 갚은 일을 수행해야 합니다. 억지가 아니라 당연히 갚은 즐거움으로 해야 합니다.못 갚을 상황의 일이면 겸손히 낮은 자세로 살아가는 것뿐입니다.
5.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시험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선한 시험과 악한 시험이 있는데,
1)선한 시험은 하나님이 주시는 훈련입니다
신 8: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다 먹이셨나니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약 1:2-3『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게 시험하실때 반드시 우리가 이기고 승리할 수 있도록 하셨음을 기억하면서 낙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고전10:13『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2)악한 시험은 우리들의 욕심입니다
약1:13『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우리들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죄악된 본성에다 죄된 세상을 살아갈 때 안팎으로 오는 여러유혹과 악한 시험들에 넘어지고 잠기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1)항상 기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 26: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하시고』
(2)말씀과 함께 하는 생활이 중요합니다
마4: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3)악한 시험은 정면으로 거부하고 대항해야 합니다
약 4:7『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히 12:4『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치 아니하고』
3)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다만이란 뿐만 아니라, 꼭 들어주십시오, 는 뜻입니다. 은 마귀와 그 역사를 말합니다.
요17:15『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일5:19『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약 3:15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이러한 마귀와 마귀적인 역사에서 구해달라는 기도는 일상의 기도 중심이어야합니다.
성도의 영혼은 성령으로 거룩히 지켜질때 행복이 충만하기 때문에 신령한 삶을 위해 죄악과 전쟁을 치러야 합니다. 마지막 결언으로 주기도문을 마치는데,
4. 기도의 목적: 대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 옵 나이다. 아멘
대개는 지당하게, 뿐만 아니라는 뜻입니다. 세상 나라도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장중에 있습니다. 모든 영광은 원칙적으로 하나님의 경륜 가운데서 하나님의 것이니 사람이 스스로 잘 난체 하면 안 됩니다.
롬 13:1『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뜻이 하늘에서 이뤄지는 것을 알고 땅에서 그대로 실현됨을 초두에서 고백하고 믿음을 가졌듯이 응답을 받아서 누릴 것들도 모두 하나님의 영광 위해 쓰임받기를 다짐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모든 것들로 이뤄진 영광이 하나님의 것이며 영원한 가치를 지닐 것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물질이라도 쓰임의 내용에 따라 그 역사가 영원한 가치가 될 수 있습니다. 끝에 아멘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진실로 그렇게 될 줄 믿습니다고 하는 믿음의 고백이며 다짐이고 확신입니다.
그리고 아멘은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아멘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별칭이기도 합니다.
계 3:14『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주님은 기도의 본이 되신 분입니다. 성역을 위한 40일 금식기도부터 시작해서 제자를 선택하시기 전의 기도와 공생애 중 의 기도, 그리고 마지막 겟세마네의 피땀 흘리신 기도와 십자가 상에서의 운명 직전까지 기도로 일생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승천 이후에도 계속하시는 일은 기도입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십니다.
롬8:34『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히7:25『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시121:4『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 하시리로다』열심히 기도하는 성도는 아름답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행복해집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승리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근심에서 벗어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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