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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거룩의 재발견: 교회갱신을 위한 기초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4. 26. 04:29
거룩의 재발견: 교회갱신을 위한 기초

 

 

 


 

배정훈 (장로회 신학대학교, 구약학)

 

. 서론

오늘날 기독교의 문제는 거룩의 상실이다. 종교개혁의 유산은 곧 칭의와 성화인데 이는 무도덕주의와 율법주의로 변화되고 있다. 가톨릭의 잘못된 성서이해를 수정한 종교개혁의 유산은 왜곡되었다. 칭의는 “오직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구원 자체를 위하여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권을 강조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구원 이후의 삶에서도 오직 믿음만을 강조함으로 무도덕주의로 빠진다. 성화는 구원 이후의 거룩한 삶을 강조하지만, 신학적인 취약성으로 인하여 율법주의로 빠지고 있다. 거룩해지려는 노력들을 성화라는 이름으로 시도하고 있으나 교회 현장에서의 문제는 이 성화가 율법주의 경향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거룩에 관한 신학은 옳은데 실천이 되지 않는 문제가 아니라 바로 거룩의 신학 자체의 부재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당면한 과제는 거룩의 재발견으로 요약할 수 있다. 한국의 개신교는 종교개혁을 정체성으로 태동하여 발전하였지만, 이제는 그 종교개혁의 유산의 남용가운데 성화를 율법주의로 이해하는 신학적 빈곤가운데 있다. 개신교의 오랜 모토인 구원과 성화는 신앙생활의 실체를 진단하는데 모호하다. 이러한 이해는 성화를 계명으로 이해하도록 왜곡되고, 이 오해는 목회자를 비롯하여 경건을 표방하는 여러 사람들에게 나타난다.

이 연구는 이러한 칭의와 성화에 대한 잘못된 신학을 수정하기 위하여 거룩을 재발견하는 시도이다. 이 연구는 구원과 성화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적인 틀인 구약의 율법서에 나타나는 구약의 신명기문헌과 제사장 문헌에서 이신칭의와 성화를 진단하는 신학적 기초를 살피고 포로기 이후의 유대교 신학을 진단한 후에, 종교개혁의 유산이 어디에서 잘못되었으며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를 검토하려고 한다.

Ⅱ. 신명기와 제사장 문헌에 나타난 신학의 차이

1. 율법서 이해의 출발점

거룩의 문제를 논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율법서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율법서에 나타난 거룩을 논하기 위해서 먼저 율법서를 학자들이 어떻게 이해하는 가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나의 논지를 확증하기 위하여 나는 그라프-벨하우젠의 문서가설을 비판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최근의 이론에 따르면 야웨문서(J)와 엘로힘 (E)문서는 원래 신학적이라기보다는 문학적이며, 율법서의 최종 본문은 신명기 문헌과 제사장 문헌이 긴장을 이루고 있다.

이렇게 서로 독립된 신명기 문헌과 제사장 문헌을 어떠한 방법으로 이해하는가가 중요하다. 잘못된 율법서 이해중의하나는 신명기와 제사장 문헌의 차이를 인식하지 않고 제사장 문헌을 신명기 신학의 발전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러한 견해는 벨하우젠으로부터 시작하는데, 그에게 있어서 신명기 전승은 유일신교를 위한 유일한 정통성 있는 이스라엘 전승이며, 제사장 문헌(P)은 제2성전의 시대정신을 반영하지만 신명기와 다른 것이 아니라 신명기에서부터 시작한 토라의 권위를 강화하는 것이다. 벨하우젠의 뒤를 이어, 샌더스는 신명기가 예루살렘에 관한 전승을 모세화하여 유대교를 급진적으로 형성시켰다고 주장한다. 샌더스는 신명기 신학은 토라중심의 모세전승이 성전중심의 다윗 전승을 통합하고, 요시야 개혁 때부터 이스라엘 역사를 지배해왔다고 주장한다. 이 후의 제사장 문헌은 신명기사가의 미완성 작업을 계속 수행한 자들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명기와 제사장 문헌은 최종 편집된 토라에서 전혀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 샌더스에 따르면, 신명기에서 시작된 계명의 권위는 최종 편집된 토라 안에서 제사장 문헌을 통하여 계속 강화되었다. 이러한 이해의 문제점은 제사장 문헌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현현과 예배의 역동성이 사라짐으로 제사를 계명으로 이해하는 유대교 이해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개신교 신학자들은 지난 몇 세기동안 제사장 문헌의 신학을 신명기 신학의 연장에서 이해하여, 제사장 문헌을 제거하고 신명기 신학만을 강조함으로 기독교를 이신칭의의 유산에 갇히게 만든 것이다.

새롭게 등장하는 다른 견해는 최종 편집된 토라에서 신명기 신학과 제사장 신학이 긴장을 이룬다는 주장이다. 이 견해의 핵심은 제사장 문헌의 신학이 신명기와는 전혀 다른 신학을 가지고 있다는 이해이다. 신명기와 제사장 문헌의 신학적 차이점에 대하여는 여러 학자들이 주목하였다. 폰라드는 일찍이 신명기 전승이 이전의 어떤 전승에 대한 획기적인 개혁임을 발견함으로써 신명기 신학과 제사장 신학의 차이를 발견하는 출발점을 제시한다. 많은 학자들이 신명기 신학의 특징을 발견하였다. 와인펠드 (Moshe Weinfeld)는 카우프만(Y. Kaufmann)을 따라 제사장 문헌과 신명기 문헌의 차이를 조직적으로 발전시킨다. 그는 이 다른 두 학파가 종교적인 개념이나, 정신적인 분위기 그리고 표현양식 등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고 말한다. 와인펠드에 따르면, 제사장 문헌이 하나님의 성전과 성전의 건축에 관심있는 반면에, 신명기의 특징은 비신화화와 세속화이다. 제사장 문헌은 거룩한 제도에 관심이 있는 반면에, 신명기는 사회적-법적 제도에 관심이 있다. 블렌킨소프 (J. Blenkinsopp)도 신명기와 제사장 문헌의 신학적 차이를 구별하였는데, 그의 출발점은 정경이 서로 상충하는 주장들의 긴장으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제사장 문헌에서의 제사는 신명기 문헌과는 다른 독립된 권위의 핵심을 드러내면서 율법을 해석하거나 연구하지 않고도 계시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제사장 문헌이 제사와 제사 종사자들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세계에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신명기 문헌과 제사장 문헌의 신학적인 차이

신명기 전승과 제사장 전승의 중요한 차이점은 신현현(theophany) 전승, 천상의 성전과 지상의 전승의 일치, 그리고 보좌이상(throne vision) 등 세 가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제사장 전승은 성전에서의 제의를 통하여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반면에, 신명기 전승은 말씀 선포를 통하여 하나님의 현존을 드러낸다. 제사장 전승은 천상의 성전과 지상의 성전의 일치를 나타내는데 반하여, 신명기 전승은 천상의 성전과 지상의 성전의 불일치를 강조한다. 제사장 전승은 보좌이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존재를 강조하는 반면에, 신명기 전승은 토라(tôrāh)의 개념을 발전시킨다.

제사장 전승에서는 세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는 합법적인 제의를 통한 하나님의 현현(theophany)이다. 제사장 전승은 엘로힘(E) 문서에 나타난 회막(miškan)전승을 흡수하여 회막 전승과 성막을 구별하지 않고 사용한다. 제사장 전승은 성막, 궤 그리고 회막을 한 개의 제도로 표현한다. 제사장 전승에서 회막은 더 이상 진 바깥에 있지 않고, 회막은 진 한가운데 있는 성막과 동일시되었다. 제사장 전승에서는 신현현을 위하여 반드시 지정된 제의가 필요하다(레 9:23-24).

둘째로, 천상의 성전과 지상의 성전의 일치이다. 제사장 전승은 지상의 성전이 천상의 성전을 따라 만들어졌으며(출 25:9, 40; 26:30), 지상의 성전을 통하여 천상의 성전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이른바 지상의 성전과 천상의 성전의 일치를 강조한다. 신명기 전승은 천상의 성전과 지상의 성전의 불일치를 강조한다. 신명기 전승에 따르면,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지상의 성전에서 보이지 않고, 지상의 성전에는 오직 그의 이름만이 거하신다는 것이다. 제사장 신학이나 신명기 신학은 모두 하나님의 초월성을 전제하지만, 제사장 신학은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에 관심이 있는 반면에 신명기 전승은 초월하신 하나님의 내재적인 역사에 관심이 있다.

셋째로, 제사장 전승은 하나님이 앉아 계시는 장소를 의미하는 보좌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다. 율법서에서는 그룹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율법서 바깥에서는 보좌대신 그룹이라는 단어가 사용된다. 솔로몬의 지성소에서 발견되는 그룹들은 (왕상 6:23-28; 8:6-7) 제사장 전승에서 하나님을 위한 보좌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두 그룹 사이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출 25:22; 30:6; 민 7:89, 레 16:2). 성막의 속죄소에 있는 두 그룹들은 솔로몬 성전의 지성소에 있는 두 그룹들과 짝을 이룬다. 성막에서 그룹들은 속죄소를 덮고 (출 25:20; 37:9), 제사장 전승이 오경 이외의 문헌에서 보좌 이상 주제를 채택한다(왕상 22장, 이사야 6장, 에스겔 1-3 장, 다니엘서 7장). 제사장 전승과는 달리 신명기 전승에서는 천상의 성전과 지상의 성전의 불일치가 강조된다. 신명기 전승은 보좌 이상의 개념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지상의 성전에서 하나님의 보좌대신 하나님의 이름이 있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Ⅲ. 거룩이라는 개념의 역사적인 전개

이제 거룩이라는 개념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살펴보려고 한다. 이스라엘에서 이 개념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발전했는가를 살피기 위해서는 문헌에 대한 통시적인 연구가 유익하다. 그라프-벨하우젠의 가설에 의하면, 오경은 J, E, D 그리고 P라는 문서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이 문서들 간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J 와 E 가 처음에 편집되었다; 2) JE는 신명기 사가적 편집자에 의하여 편집 되었다; 3) JE는 P에 대해 독립적이다; 4) 후기 편집자가 P를 JED안에 포함시켰다. 이중 J와 E는 신학적이라기보다는 문학적이기에 우리의 관심은 P와 D 그리고 H의 변화이다. 전통적인 견해에 따르면, 성결법전 (H)은 신명기 (D)와 제사법전 (P)사이에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러나 이 세 문서에 대한 다른 견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1) H는 D를 따라 옛 이스라엘 계약에까지 소급된다; 2) H는 P보다 후기에 나타난다; 3) H는 제사장 전승의 중요한 특징을 포함한다는 면에서 제사장 전승을 수정하고 발전시킨다. 결론적으로 신명기와 제사법전은 서로 평행을 이루고, 성결법전은 신명기 전승의 영향을 받아 제사장 전승을 개혁하였다. 거룩의 역사를 위해 먼저 살펴야 할 것은 우선 신명기의 거룩과 제사법전에 나온 거룩의 차이점이다. 이어서 성결법전에서 거룩에 관한 신학이 어떻게 발전하였는지를 살펴야 한다.

 

1. 신명기와 신명기 역사에 나타난 선택과 계명

균형 잡힌 거룩의 신학을 위하여 신명기에 나타나는 거룩의 의미와 제사장 문헌에서 나타나는 거룩의 의미가 다른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신명기와 제사장 문헌은 같은 용어인 거룩 (카도쉬)을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거룩 (카도쉬) 이라는 말은 주로 제사장 문헌에 사용되지만 신명기에서는 부분적으로 사용된다. 신명기에 나타나는 거룩은 주로 거룩한 백성이라는 용어로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거룩은 인간의 어떤 행위로 인한다기보다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주도권에 의하여 거룩한 백성 (성민)으로 선택됨을 말한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신 7:6; 14:2; 14:21; 26:19; 28:9). 이 성민이라는 용어는 신명기에서 나타나는 이신칭의 사상이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당신이 인간을 선택하고 거룩하다고 말씀하시면서 거룩의 시작이 하나님의 주권에 의하여 시작됨을 말하고 있다. 곧, 신명기에서 강조되는 거룩은 인간이 성취하는 의가 아니라,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인정하는 의이다. 하나님의 선택의 이면에는 스스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상황을 전제하고, 또한 신명기에서 이 선택은 이스라엘의 민족성을 전제하고 있다. 적어도 이 선택에 아직 이방인이 포함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명기에서 선택과 짝을 이루는 것은 바로 계명이다. 신명기는 하늘과 땅의 이원론적인 사고를 전제한다. 땅에 있는 인간이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하나님과 인간을 매개하는 토라이다. 토라는 곧 초월하신 하나님이 세상에 내재된 형식이다. 인간은 계명에 순종함을 통하여 초월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선택한 자를 향하여 기대하는 것은 토라에 담긴 계명을 행하는 것이다. 계명은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구원 얻은 자가 하나님의 사역을 위하여 지켜야 하는 것이다. 언약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로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택과 계명은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하늘에 올라갈 필요가 없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계명을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을 만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을 받았고, 선택된 인간은 계명에 순종함으로써 하나님을 만난다. 이와같이 신명기에 나타난 하나님은 내재적인 하나님이시다.

그렇다면 인간이 계명을 지키거나 지키지 않았을 때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인가? 그것이 인과응보 사상이다. 하나님은 행한 대로 대가를 치르게 하신다. 신명기 신학은 인간이 타락한 존재일지라도 하나님이 선택한 이후에는 계명을 순종할만한 가능성이 있다고 전제한다. 그리고 선택한 자에게 기대한다. 순종하는 자에게 복이 주어지고, 순종하지 않는 자에게 벌이 주어진다고 하는 인과응보 사상이 나타난다. 신명기의 인과응보 법칙은 집단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적용된다. 모든 사람들이 왕인 것처럼 토라 앞에서 개인적인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신명기 전승은 지도자보다는 공동체를 강조한다.

인과응보 사상은 신명기 28장에 나타나는데 죄를 지은 자에게 벌을 주고, 선을 행한 자에게 복을 주는 원리이다.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나타나지 않고도 인간의 행위에 따라 이 원리가 인간에게 적용된다. 그렇다면 벌을 받은 인간은 어떻게 되는가? 돌아올 길이 없다면 처음의 선택이 무효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죄를 지어 벌을 받는다고 해서 끝은 아니다. 회개를 통하여 돌아올 길이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벌을 받아 포로생활을 할 때 하나님은 인간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물론 회개한다고 모두 회복되는 것은 아니다. 회복은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임을 보여주는 것이 “혹시”라는 단어이다. 돌아올 가능성이 열려있다. 포로생활을 한다할지라도,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가 있으며, 하나님은 그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여기에서 제기되는 질문은 범죄하여 가나안 땅을 빼앗기고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에게 아직도 신명기의 출발점인 선택이 유효한가 하는 것이다. 벌을 받고 있는 자들도 아직 돌아갈 기회가 있기 때문에 선택이 무효된 것은 아니다.

신명기의 선택은 예레미야서의 새언약에서 나타난다. 예레미야서 31장에 나타난 새 언약은 옛 언약과 연속성이 있다. 새 언약과 옛 언약의 유사점은 언약의 출발점인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렘 31:33)이다. 새 언약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되시고 우리가 그분의 백성이 되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새 언약의 새로운 것은 무엇인가? 새 언약이 필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해야 하는 백성들이 언약을 깨뜨렸기 때문이다. 새 언약은 하나님의 법이 문제 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못하는 백성의 무능을 문제 삼는다. 새 언약이 암시하고 있는 것은 언약의 갱신이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최초의 선택을 위협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백성들의 죄는 언약의 기초인 선택을 위협한 것이 아니라, 언약의 지속을 위협한 것이다. 언약의 대상은 변함이 없지만, 언약의 대상이 돌비에 새겨진 하나님의 법을 준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약의 갱신은 계명을 순종하지 못하는 백성을 다루는 데 초점이 있다. 이와 같이 새 언약에서 신명기 전승에서 나타난 백성의 선택은 무효화되지 않았지만, 인간이 어떻게 계명을 지킬 수 있는지의 질문은 남는다. 예레미야서는 돌판에 새기지 않고 마음판에 새김으로 방향을 제시하였지만, 실제로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도한 것은 돌판에 새겨진 계명을 철저히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이는 에스라-느헤미야서를 거쳐 유대교로 가는 계기가 된다.

 

2. 제사법전(P)에 나타난 거룩

제사법전(P)은 하나님의 현존을 다룬다. 제사법전(P)에서 거룩은 하나님의 현존과 관계된다. 거룩은 하나님의 존재론적인 본성이며, 거룩하신 하나님과 접촉하는 영역이 거룩해진다. 하나님과의 현존으로 인하여 거룩해지는 부문은 거룩한 도구(제사 도구), 거룩한 사람(제사장), 거룩한 장소(성소), 거룩한 시간(속죄일) 등이 해당되는데, 이들은 거룩해짐을 통하여 세속적인 세계와 구별된다. 제사법전(P)은 천상의 성전을 나타내는 구절들을 포함하고 있고, 지상의 성전은 천상의 성전에 따라 건설 되었다(출 25:9, 40; 39:43). 제사법전에서 초월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성소나 성전을 통하여서이다. 성전은 곧 지상의 제한된 공간이 초월하여 하늘과 만나는 장소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초월하신 분으로서 하나님의 주권아래 지상에 강림하시는데 바로 성전에 현현하신다. 지상의 성전은 곧 천상의 성전과 만나는 장소이다. 성전은 하나님이 거하시기 위하여 거룩하게 유지되었다. 제사장의 역할은 성전을 죄로부터 보호하여 성전에 하나님이 거하시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전에 거하시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은 제사이다. 제사는 하나님을 성전에 거하시지 못하게 만드는 악을 제거하는 수단이다. 제사장 문헌에서 거룩의 개념은 거룩, 속화, 정결, 그리고 부정 등의 용어로 이루어지는 구조 안에 나타난다. 이 네 가지 용어를 구별하는 것은 제사장의 임무이다 (레 10:10). 특별히 이 두 쌍의 대립은 서로 관련되어 있다. 속화는 정결과 부정일 수도 있고, 정결은 거룩과 속화일 수도 있다. 그러나 거룩과 부정은 절대로 공존 할 수 없다. 부정한 것은 결코 거룩한 것을 접촉할 수 없다. 성결법전과 구별되는 제사법전(P)에서 죄는 도덕적이라기보다는 제의적이다. 제사는 하나님의 현존을 유지하며, 하나님을 성전에서 떠나시게 만드는 부정을 제거한다 (에스겔 8-10 장). 성전의 거룩은 제사라는 도구와, 계속적인 정화와 성화를 통하여 유지되었다. 성전에서 거룩을 상실하면,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 사람들을 성전에서 쫓아낸다(민 19:20; 레 15:31). 제사법전은 죄를 범한 후에 사람들이 속죄제나 속건제를 통하여 거룩을 회복하기를 요구한다. 제사법전은 언약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고 시내산에서의 언약을 언급하지 않는다. 밀그롬에 의하면 거룩은 생명을 뜻하며, 부정은 바로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부정의 핵심에는 생명을 죽이는 것이 포함되어 있는데, 홍수의 원인이었던 강포는 바로 피를 흘리는 것이다 (창 6:11). 나아가서 죽음으로 가는 문둥병과 시체를 만지는 것을 부정의 원인으로 보았으며 (민 5:2), 정결을 필요로 하는 나실인에게는 발효되는 포도주가 금지되었다(민 6:2-3). 부정의 원인중의 하나로서 생명의 원인인 남성의 정자에 대한 규정도 중요하다. 즉, 남성의 정자는 생명의 근원으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적절한 관계 이외에 사용될 경우 가증한 것으로 이해된다(레위기 18장, 20장). 예를 들어 동성애의 경우나 근친상간의 경우에 남자의 정자가 남용되는 경우 가증스러운 것으로 자신의 생명으로 값을 치러야 했다. 하나님이 계시되는 지성소의 접근은 죽음을 동반할 수 있다. 성전에서 거룩을 상실하면,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 사람들을 성전에서 쫓아내기도 한다 (민 19:20; 레 15:31). 제사장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주기적으로 성전에서 부정을 제거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잘못한 것을 보상하도록 하는 것이다. 제사장들은 모세에게 종속되고, 성전을 거룩하게 유지하기 위해 거룩해졌다.

 

3. 성결 법전 (H)

구약에서 신명기와 제사법전(P)은 서로 대조를 이룬다. 제사법전이 주로 하나님의 현존을 강조한 수직적인 신학이라면, 신명기는 제사장 문헌의 신학을 비신화화하여 인간에게 초점을 맞춘 신학이다. 제사장 문헌의 약점은 하나님에 대한 강조가 구별된 수직적인 장소에서만 강조되어 인간이 무시되는 고르반의 형태가 될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신명기의 약점이라면 초월적인 하나님이 내재화되어 하나님을 인간 안에서 발견하지만 자칫 이신론(理神論)적인 신학으로 변형되어 인간학을 신학으로 대치할 위험이 있는 것이다.

성결법전(H)은 주로 레위기 17-27장을 다루지만 학자들은 성결법전이 율법서의 최종편집에 관여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결법전(H)은 제사법전(P)와 함께 레위기를 이루고 있지만 제사법전과도 신학적으로 차이가 난다. 성결법전의 주체가 보기에 제사장 전승의 문제는 수평적인 윤리에 대한 관심이었다. 성결법전의 관점에서 신명기의 문제는 성전에서의 하나님의 현존의 부정, 모세 이전의 역사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하나님의 현존과 분리된 제의 등이다. 성결법전(H)은 제사장 문헌의 전승을 따라 하나님의 임재의 전제아래 거룩을 강조한다. 그러나 제사장 문헌의 약점으로 지적되는 수평적인 윤리를 위하여 신명기로부터 계명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제사장 문헌의 전제아래 신명기로부터 계명이 채택되어 제의를 통한 거룩과 계명에 대한 순종이 함께 강조되었다. 제사법전에서는 제의적인 죄만 강조된데 반하여 성결법전에서는 제의적인 부정만이 아니라 윤리적인 부정을 문제 삼는다. 성결법전은 이스라엘의 언약위반을 강조한다(레 16:3-22). 성결법전은 시내사건을 강조하면서도, 이 언약을 조상들의 언약과 연속성이 있는 것으로 둠으로써 제사법전을 수정하고 있다 (레 26:45-46). 성결법전은 신명기에서 언급한 것처럼 모세와의 언약을 유일한 권위 있는 언약으로 보지 않는다. 모세와의 언약은 처음 언약이 아니라 이미 아브라함, 이삭, 야곱과 맺은 언약을 갱신일 뿐이다 (레 26:42). 그 결과 모세의 권위는 상대적이 되고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상 많은 영웅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수평적인 계명과 수직적인 제의법을 모두 포함한 토라는 모세가 토라를 받기 이전에 조상 때부터 지켜진 것이기에, 토라의 권위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와 같이 성결법전은 신명기보다는 제사법전 안에서 일어난 개혁이다. 제사법전에서 강조하는 하나님의 현존의 사상을 이어받고 있다. 그러면서 제사법전의 약점인 이웃에 관한 관심을 신명기를 통하여 받고 있다. 성결법전이 제사법전을 발전시켰다는 증거는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제사법전에서 거룩은 오직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에 국한되었지만, 성결법전은 이 거룩을 성전이 존재하는 땅으로까지 확대한다. 강포로 인하여 땅에 피를 흘리면 인간은 땅에 거할 수 없다. 땅을 더럽힌 인간을 땅은 토해낸다 (레 18:24-30). 신명기와는 달리 레위기에서 포로는 땅이 안식을 통해 회복되는 기간이다 (레 26:34-35; 대하 36:21). 제사법전에서 공간적인 거룩은 성전에 제한되는 반면에, 성결법전에서는 이 거룩은 약속의 땅에까지 확대된다. 제사법전에서 거룩에의 책임은 제사장과 나사렛인들에게만 제한된다 (민 6:5-8). 반면에 성결법전은 땅이 거룩하기 때문에 이 책임을 그 땅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확대시킨다. 제사법전에서 거룩은 성전과 제사장들에게 제한되어 있는데, 성결법전에서 성화는 제사장(레 21:8; 22:9, 16)과 평신도들(레 21:8, 22:32)에게 계속적인 과정이다. 그리하여 이제 거룩은 제사장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땅에 속한 모든 사람들이 계속하여 이루어야할 명령이 된 것이다. 성결법전의 경우에 땅을 오염시키는 사람들은 추방을 당한다, 왜냐하면 제의로는 오염된 땅을 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레 18:24-29; 20:2).

성결법전의 신학적 중요성은 거룩의 요소로서 제의와 윤리를 모두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결법전에서 윤리는 신명기에서처럼 율법에 순종하는 인간을 강조하기보다는 이웃사랑이라는 윤리를 하나님의 현존의 맥락 안에 위치시키는 역할을 한다. 제사법전에서 제의는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하나님의 현존으로 인한 수직적인 거룩을 강조한다면, 성결법전에서 윤리는 일상의 삶을 사는 백성들의 거룩을 지키기 위하여 필요한 것으로 강조된다. 이와 같이 일상생활에서의 제의와 윤리를 함께 강조하는 것은 레위기 19장에서 나타난다. 레위기 19장은 제사법전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현존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거룩이 전제되고, 인간의 거룩이 명령으로 주어진다. 거룩이 준비되지 않는 사람은 땅에서 끊쳐진다 (레 19:8). 인간이 하나님의 거룩에 이르기 위하여 흠 없게 되는 방법은 제의와 윤리 두 가지 면으로 강조된다. 제의의 강조는 제사장 문헌의 신학을 잇고(레 19:5-8), 윤리는 신명기 신학을 이어받고 있다 (레 19:9-18). 이와 같이 성결법전은 하나님의 현존의 기초아래 제의와 윤리를 하나님의 현존에 이르는 길임을 명시하고 있다. 이와 같이 변형된 거룩의 신학은 역대기와 희년서에서 발전되고 신약으로 넘어간다. 신약에서는 로마서나 갈라디아서가 신명기의 이신칭의를 강조한다면 마태복음은 성결법전의 뒤를 이어 성화를 강조한다. 산상수훈은 이신칭의를 통한 하나님의 선택을 전제하고 (마 5:1), 믿는 자의 성화를 명령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8). 산상수훈에 나타나는 윤리의 목표는 성결법전을 따라 하나님의 현존이며, 이것이야말로 형식을 강조하는 바리새인들의 율법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인 것이다 (마 6:4, 6, 18).

 

4. 거룩을 이해하는 개념의 틀

율법서에 나타난 신명기 문헌과 제사장 문헌을 비교할 때 우리는 앞으로 역사적인 발전을 설명하기 위하여 신명기, 제사법전, 성결법전을 다음과 같이 도식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신명기는 내재적인 신관을 전제한다. 하나님과 인간은 분리되고 접촉할 수 없다. 하나님은 그분의 은혜로 인간을 선택하심으로 하나님과 백성의 관계가 시작된다. 인간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은 계명을 통해서이다. 계명은 하나님과 인간을 매개한다. 인간은 계명에 대한 순종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난다. 하나님은 인과응보라는 법칙을 통하여 인간을 다스리신다. 그러나 벌을 받는다고 선택이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다. 벌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도 인간이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 신명기의 중심에는 인간이 있다. 인식론적으로 인간이 중심이 되어 계명을 지키는 인간에게 초점을 두는 인간학이 있다.

제사법전은 초월적인 신관을 전제로 한다.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로서 인간과 구별되는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가지고 인간에게 내려 오셔서 인간가운데 거하실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현존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전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성전에 강림하실 때 강림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인간에게 제사가 필요하다. 제사는 인간의 모든 악을 제거하는 것으로 제사를 통하여 공동체는 정화되고, 개인은 완전(타밈)에 이른다. 하나님이 성전에 거하시기 위하여 제사장은 정화를 관리하는 책임이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다.

제사법전은 수직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수평적인 면이 약한 것을 인식하고 신명기에서 채택한 언약사상을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현존이라는 기본적인 틀은 무시되지 않은 상태에서 계명이 강조된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현존은 제의와 윤리를 통하여 이르게 된다. 거룩한 장소는 거룩함의 강도에 따라 다르게 표시된다. 가장 거룩한 곳은 하나님이 계시는 성전이며, 그 다음은 성전이 있는 땅이고, 마지막으로 땅에 속한 백성들이다. 이제 거룩함에 대한 명령은 제사장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반 백성들에게도 요구되었다. 이 세 가지 특성은 앞으로 유대교와 종교개혁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문헌

신명기

제사법전

성결법전

신관

내재적 신관

초월적 신관

초월적 신관

거룩의 의미

선택

지속적인 명령

지속적인 명령

인간이 행해야 할 명령

계명

제의

제의와 계명

행동의 평가

인과응보

(축복 또는 저주)

제사장의 완전

또는 끊쳐짐

제사장, 모든 백성들의 완전

또는 또는 끊쳐짐

중심개념

인간

하나님

하나님, 땅, 인간

 

Ⅲ. 유대교과 바울

 

1. 유대교의 이해

유대교의 형성에 대한 이해는 제사장 문헌과 신명기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율법서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달려 있다. 그런데 개신교 학자들은 율법서를 바르게 이해한 것이 아니라, 유대교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반-유대주의의 입장에서 개신교 학자들은 제사장 문헌을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 벨하우젠은 이러한 해석의 시조라고 볼 수 있다. 즉, 그는 신명기 문헌과 제사장 문헌이 상호 영향을 주지 않고 독립된 문헌임에도 불구하고 제사장 문헌을 신명기의 입장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신명기는 제사장 문헌의 정신에 영향을 받지 않았으며, 제사장 문헌은 신명기 문헌의 예배 집중법을 전제한다. 나아가서 그는 제사장 문헌에서 나타나는 제사를 이스라엘의 고유한 전승이라기보다는 이 전승에 대하여 이질적인 것이요, 유일신 숭배를 반영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제사장 문헌의 기능은 하나님의 현존을 매개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권위를 발전시키는 것이 된다. 벨하우젠에 따르면 제사장 문헌은 독립적인 위치를 갖지 못하고 신명기 문헌에 종속된 율법의 한 요소가 될 뿐이다. 이와 같이 최종 편집된 토라에서 벨하우젠은 제사가 율법에 대한 순종으로 표현되고 있다고 이해한다. 이 제의는 원래 비(非)-이스라엘적인 것이었지만, 그 본질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명령인 계명으로 변형되었을 때만이 이방적인 요소를 상실하고 이스라엘적인 것이 되었다는 것이다. 벨하우젠에 따르면 제의가 계명이 되었을 때 제사장 문헌 안에서 이방적인 요소가 제거되었으며, 제사는 더 이상 신을 위한 가치를 갖지 못하고 율법에 대한 순종이 되어 버렸다. 이러한 벨하우젠의 이해는 제사장 문헌이 문학적으로 신명기와 분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명기적인 틀로 제사장 문헌을 해석하여, 제사를 계명으로 이해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이다.

유대교의 특징은 레벤슨(Jon D. Levenson)의 진술을 통하여 더 잘 알 수 있다. 레벤슨은 토라를 시내산에서 주어진 계명의 준수라고 요약한다. 레벤슨은 구약성서에서의 두 축을 토라와 성전이라고 정의하면서도, 벨하우젠과 마찬가지로 성전의 의미를 덜 강조한다. 벨하우젠은 토라만을 이스라엘적인 순수한 것으로 보고 성전을 단지 이방 종교의 영향을 받은 비(非)-이스라엘적인 것으로 본 반면에, 레벤슨은 성전전승을 시내전승에 종속시켰다. 레벤슨은 성전을 의미하는 시온 전승은 토라를 의미하는 시내전승에 영원히 포함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문헌이 구분됨에도 불구하고 시온전승을 시내전승에 종속하는 유대교의 해석을 보여줌으로 벨하우젠의 해석이 유대교의 해석과 같은 틀임을 보여주게 된다. 레벤슨은 율법이 최종적인 권위를 가졌으며, 순종이 포로후기 시대의 유대교의 핵심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벨하우젠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아이로니컬하게도 개신교에서 드러난 신명기 편향적인 신학은 바로 유대교 율법주의가 초래한 오류였으며, 유대교를 비판하는 개신교 신학자들도 유대교와 같은 틀을 견지하며 유대교 율법주의의 입장에서 구약을 해석해 왔다. 유대교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는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이후 계속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유대교와 천주교회에서 동일한 율법주의를 발견한다. 종교개혁자들에게 율법주의란 율법의 행위를 완벽하게 수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이러한 율법주의는 자기숭배에 기원이 있다고 보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기독교와 대비시킨다. 율법은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예비된 하나님의 구원을 가리킨다는 면에서 율법의 긍정적인 역할도 있다고 이해한다. 이러한 종교개혁의 유산은 불트만의 신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에 따르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게 되려고 힘쓰는 것은 자기 노력을 통하여 안전을 얻으려고 애쓰는 인간을 나타낸다. 불트만의 시도는 루터의 전승에 따라 칭의를 바울 신학의 중심에 두려는 시도이다.

20세기 초에 바울에 대한 종교개혁적인 견해를 의심하는 연구들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브레데는 바울의 신학에서 이신칭의는 중심적이라기보다는 유대교와의 논쟁으로 등장한 것이며, 유대교 대적자들과 싸우는 서신인 로마서, 갈라디아서와 빌립보서 이외에는 이신칭의 교리가 등장하지 않음에 주목한다. 슈바이처에게도 이신칭의는 바울에게 보조분화구에 불과하였다. 이들의 연구는 바울 신학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촉구하였다. 이러한 견해는 샌더스(E. P. Sanders)를 통하여 명백해 진다. 그의 역할은 율법에 대한 바울의 견해에 대한 종교개혁적인 견해를 넘어선다. 샌더스는 팔레스틴 유대교를 율법주의적인 종교로 이해하는 것이 잘못 되었다고 이해한다. 그는 팔레스틴 유대교 율법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후 100년 사이의 유대교 문헌인 외경과 위경을 연구한 결과 이 시대의 유대교의 특징을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라고 이해하였다. 즉, 하나님은 은혜로 구원하시지만, 은혜로 얻은 구조 안에서 선한 행위에 따른 보응을 얻고, 악한 행위로 인하여 처벌을 받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선택과 계명에 따른 인과응보를 강조하는 신명기 신학의 표현이다. 샌더스에 따르면 유대교에서 "의롭게 된다"는 것은 토라에 순종하고 범죄를 회개하는 것이다. 유대교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계명을 지키기로 결심하는 것은 곧 언약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이고, 순종을 통한 의의 성취는 언약 공동체 안에 계속 거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의 결론은 팔레스틴 유대교가 결코 율법주의가 아니고, 바울이 율법을 거부한 것은 율법에의 헌신이 율법주의에 이르기 하기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다. 샌더스에 따르면, 바울이 율법을 거부한 이유는 율법이 어떤 본질적인 결함을 가져서가 아니라, 인간적인 딜레마에 대하여 그리스도께서 해답이 되시며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기 때문이다.

샌더스의 뒤를 이어 주목할 만한 바울과 율법에 관한 연구들이 나타났다. 하이키 레이제넨(Heikki Räisänen)은 율법에 대한 바울의 견해가 여러 가지 불일치와 모순으로 차 있다고 주장한다. 던(J. D. G. Dunn)에 따르면, 바울에게 유대인의 결점은 율법주의가 아니라 민족주의였다. 유대교에서는 오직 유대민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만일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할례, 안식일 준수, 또는 음식법이나 정결법을 준수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러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배타적인 정의에 동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대인들과 대립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던은 유대교를 율법주의자로 보지 않고 민족주의적인 배타성을 문제시하였다고 본다. 이어서 개스톤(Lloyd Gaston)과 게이저(John G. Gager)는 유대교 연구에 있어서 반셈주의와 반유대교주의의 영향을 인식하였다. 그에 따르면, 율법을 통하여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바울의 주장은 유대인들이 아니라 이방인들과 관계있다. 율법에 대한 바울의 주장은 모두 이방인들과 관련되고 유대인들에게는 샌더스가 말한 대로 언약적 율법주의가 적용된다는 것이다. 즉,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각기 다른 언약에 의하여 구원받는다는 두 언약적 접근을 고수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유대교 연구는 몇 가지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다. 종교개혁자들이 유대교와 카톨릭을 유사한 율법주의로 부른 것은 타당하다. 그러나 율법주의에 대한 그들의 정의는 불완전하다. 율법주의에는 신명기의 계명의 정신을 잃고 형식적으로 지키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율법주의는 제사를 계명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유대교 율법주의는 신명기에서 강조하는 계명의 정신을 상실함으로 초래되는 문제점이 아니다. 유대교 율법주의란 제사법전의 제사를 신명기의 계명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유대교는 신명기와 제사장 문헌으로 이루어진 율법서에 대한 독특한 이해에 기초한다. 유대교에 대한 샌더스의 이해도 기독교가 태동되던 시대의 유대교가 아니라, 유대교로 발전되기 이전의 신명기에 근거한 제2성전 시대의 신앙에 대한 이해이다. 예를 들어 희년서(The Book of Jubilees)의 저자는 희년서 당대의 유대인들이 지키는 언약을 신명기 언약으로 통일하고 있다. 희년서에서 모든 언약은 하나로 통일되어 노아와 아브라함도 창조 때부터 지켜오던 동일한 언약을 갱신하였으며, 모세 시대에 맺은 언약도 이 언약의 갱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해한다. 적어도 유대교 직전까지 언약과 계명의 균형은 유지되었다.

그러나 기독교 시대 이후의 유대교를 샌더스가 말한 것처럼 신명기 신학의 충실한 적용이라고만 본다면 잘못된 이해이다. 언약(Covenant)과 순종이라는 두 축의 균형은 유대교 안에서 점차적인 변화를 겪게 된다. 다스 (A. Andrew Das)는 이 변화의 분기점을 주후 70년으로 보고 있다. 주후 70년 이전에는, 신명기 신학에 따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법을 준행해야 하지만 이 요구는 하나님의 선택과 은총이라는 은혜로운 구조 안에 있었다. 그러나 주후 70년 이후에는 강조점이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으로부터 행위에 따르는 심판으로 옮겨졌다는 것이다. 주후 70년 이후의 유대교 문헌들에서는 계약, 선택, 회개, 제사 또는 속죄 등의 중요성이 약화되고, 토라에 대한 순종이 전면에 나타나고 완전이나 선행 등이 점점 더 강조되었던 것이다. 에스라 4서에서 논쟁 중이던 언약 율법주의와 율법적인 완전은 계약 구조의 붕괴를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에녹 2서, 바룩 2서, 바룩 3서 그리고 아브라함의 유언서들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선택이 사라지고 토라에 대한 엄격한 준수만이 강조된다. 요약하면 신명기의 언약신학으로부터 팔레스틴 유대교로의 변화는 은혜의 구조 안에 서 있는 계명과 인과응보로부터 율법에 대한 순종의 강조를 통하여 계명에 대한 불순종이 은혜의 구조를 넘어서는 것을 받아들이는데 있다. 즉,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언약 공동체에 들어가지만, 그 언약 공동체 안에 거하기 위하여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며, 만일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언약 공동체 안에 거하지 못하고 첫 은혜로 시작한 선택이 무효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팔레스틴 유대교로의 변화는 단지 계명에 대한 순종이 은혜의 구조를 넘어서는 것을 허용하는 것만이 아니다. 신명기에 나타난 계명과는 틀이 다른 제사장 문헌의 제사법들을 계명으로 이해하는 변화가 나타난다. 즉, 유대교의 특징은 신명기 신학과 제사장 문헌의 신학을 절묘하게 조합한 것인데, 유대교는 신명기와 제사장 문헌의 신학적인 차이점을 인정하지 않고 신명기적인 틀로 제사장 문헌을 이해하였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우선 모든 제사의 절차를 계명으로 이해하였다. 원래 제사는 하나님이 현현하시기 위하여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악을 처리하는 절차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제사는 하나님의 현현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이행하여야 하는 계명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유대교 율법주의의 핵심은 계명과 제사의 차이점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제사의 절차를 계명으로 이해하는 틀의 변화이다. 그것만이 아니다. 제사장 문헌의 핵심은 하나님의 현현을 위해 제사를 이행한다고 본다. 만약 인간이 제사를 무시할 경우 인간은 끊쳐진다고 말한다. 인간에게 거룩에 반하는 부정(不淨)이 남겨질 경우 그 인간은 반드시 끊쳐진다는 것이다. 구약의 여러 본문에서 하나님 앞에서 부정하였기 때문에 생명이 끊쳐진 경우를 보게 된다(창 17:14; 출 12:19; 레 15:31; 민 19:20). 그러나 대체로 이스라엘은 제사법을 통하여 생명을 위협하는 악을 제거한다. 다양한 제사법이 다양한 죄를 해결하도록 돕고, 인간이 고의로 지은 죄는 일년에 한번씩 대제사장을 통하여 완전히 해결하는 절차를 가지고 있다(레 16장). 그러나 이 경우에도 고의적인 죄악으로 인하여 공동체에게 남겨진 죄를 해결해야하며, 고의적인 죄를 지은 당사자의 경우에는 끊쳐지는 위험을 가지고 있었다. 유대교는 이렇게 끊쳐진다는 제사장 문헌의 교리를 계명을 이행하지 않는 자들에게 적용을 하였다. 유대교는 어떻게 교리를 발전시켰는가? 제사법을 계명으로 이해하고 제사법의 실천에 따라 인과응보의 기준을 만들었다. 제사법이란 특정한 하나님의 현현을 위한 절차법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지켜야 하는 계명이 되었고, 이 중 어느 하나를 지키지 않으면 그것은 하나님의 현존을 위협하는 부정이 되므로 결국 처음 얻은 구원이 취소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유대교의 교리는 바로 신명기와 제사장 문헌에 대한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해석이 만든 결과인데, 제사를 계명으로 만들고 제사법을 지키지 않으면 끊쳐지는 것처럼 계명이 된 제사를 지키지 않으면 처음 구원을 잃는다고 본 것이다. 신명기에서 원래 가지고 있던 선택은 이렇게 제사장 문헌의 “끊어짐”의 교리에 의하여 포기되었다. 이러한 이해는 구약에서 신명기 신학과 제사장 문헌의 신학을 구별하지 않고 신명기 신학의 관점에서 제사장 문헌의 신학을 해석함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해석은 유대교의 해석일 뿐 아니라, 지난 몇 세기 동안 개신교 학자들의 해석임을 알 수 있다. 개신교는 오랫동안 유대교를 공격하면서도 유대교의 그늘아래에 있으면서 제사장 문헌을 오해하고 결국은 제사장 문헌이 담고 있는 거룩의 신학적 의미를 상실해 왔던 것이다.

 

문헌

신명기

제사법전

유대교

신관

내재적 신관

초월적 신관

내재적 신관

거룩의 의미

선택

지속적인 명령

유대인으로의 선택

인간이 행해야 할 명령

계명

제의

계명(제의는 계명에 포함)

행동의 평가

인과응보

(축복 또는 저주)

제사장의 완전

또는 끊쳐짐

끊쳐짐.

중심개념

인간

하나님

인간

 

 

2. 바울의 유대교 비판

바울이 직면한 유대교는 구약의 종교로부터 변형된 종교였다. 구약의 신명기와 제사장 문헌이 율법이라는 형태로 주어졌다. 선택의 교리는 신명기의 선택 사상에서 나온다. 신명기의 선택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이지만 사실상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전제한다. 유대교가 이해한 신명기의 선택은 바로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는 할례와 안식일, 음식법 등이 전제가 된다. 이렇게 유대교 백성이 된 이후에 그들이 유대교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계명을 지켜야 한다. 이 때 계명은 신명기에서 온 계명과 제사장 문헌에서 온 제사법 모두를 지킬 의무가 있다. 구약에서 계명에 대한 준수 여부에 따라 인과응보의 원리가 존재하여 계명을 지키면 복을 받고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저주를 받는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는 신성모독이라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제사를 통하여 회복이 가능한 것들이다. 이것이 샌더스가 말한 언약적 율법주의의 형태이다. 그러나 언약으로부터 멀어진 유대교는 엄격한 유대교 율법주의를 채택하면서 이 원리가 문제시 된다. 즉, 신명기의 윤리를 의미하는 계명만이 아니라 제사장 문헌에 담긴 제사법을 지키지 않는다면 처음의 유대교 백성으로의 선택이 무효화 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본 것처럼 선택의 무효화는 제사장 문헌에서 나온 끊쳐진다는 원리의 적용이다.

바울의 유대교 비판은 두 가지 원리에서 나온다.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을 취득하는 선택을 백성으로서 지켜야 하는 계명의 준수로부터 분리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선택은 유대교 백성으로의 정체성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유대교인이 되지 않고도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제의와 윤리를 통하여 어떻게 성화를 이룰 것인지를 보여준다. 이중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것은 바울이 유대교로부터 어떻게 칭의를 성화로부터 구별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유대인의 정체성을 획득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던(J. Dunn)을 비롯한 학자들이 민족주의를 의미한다고 했던 율법의 내용이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기독교인이 되기 위하여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유대인들의 주장과 맞서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갈 2:16)

 

이 본문에서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대립되어 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유대인이 되던 유대인이 되지 않던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바울이 말하는 의는 그리스도인이 될 때의 칭의를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 의보다는 성화를 말한다. 그러나 바울이 전제한 유대교의 의는 신약의 의와 다르다. 바울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이라고 말할 때 유대인이 전제하는 의는 바울이 말하는 의와 다르다. 유대교에서 유대인이 되는 정체성은 유대 백성으로의 선택을 통하여 이루어지되 이들은 그리스도를 통해서가 아니라 할례를 통해서라고 전제한다. 이어서 유대교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계속되는 제의법의 실천을 통하여 실현된다. 유대인들이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신명기적인 진술이 아니라 제사장적인 진술이다. 여기에서 의로움이라는 것은 제의법을 통하여 계속적인 정화가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의로움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시작이며 계속적으로 추구되어야 하는 것이고 중단될 경우에 처음의 선택이 무효화되는 것이다. 즉, 유대교의 경우에는 칭의와 성화에 대하여 의롭다는 말을 사용하고, 바울의 경우에는 칭의를 위하여 의롭다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바울이 제시한 이신칭의는 바울신학의 전체가 아니라 기독교 신학의 내용 중에서 유대교 율법주의를 공격하는 틀인 것이다. 바울은 칭의를 말하면서 율법의 행위와 대립시키고 있는데, 이때 “율법의 행위”는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행함”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칭의에 대한 성서적인 근거를 들 때 바울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를 얻는 장면은 창세기 15장 6절을 제시하는 반면에(갈 3:6; 롬 4:3), 행위로 구원을 얻는 근거는 할례를 행한 창세기 17장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롬 4:9-12). 구약성서에서 할례는 계명이 아니다. 제사법전에서 성결을 강조하는 법으로서 후대에 유대인의 정체성을 위하여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이러한 바울의 관점은 믿음과 행위를 대립시키는 야고보서와 다르다. 야고보서에서 믿음은 창세기 15장 6절을 가리키지만(약 2:23) 행위는 창세기 22장을 언급하고 있다(약 2:21). 즉 야고보서에서는 신명기의 전통을 따라 믿음과 계명을 대립하는 것이 논쟁의 초점이라면, 바울서신에서는 선택을 의미하는 믿음과 제의적인 의미를 가진 할례를 행위로 여기는 유대교 율법주의와의 논쟁이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이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서 믿음과 대립시키는 율법의 행위는 수평적인 계명의 실천이 아니라 제의를 계명으로 여기는 유대교 율법주의의 내용이다.

바울은 칭의와 성화로 이루어진 의로움이라는 용어를 칭의에만 사용함으로 구원과 성화를 분리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한번 선택하시면 뒤에 오는 계명을 이루지 못했다고 해서 이 구원이 무효화되지 않는다(창 15:6; 롬 1:16-17). 그러나 신앙의 과정이 끝난 것은 아니고 성화의 과정이 남아 있다. 그리하여 바울에게 신앙의 여정은 구원과 성화의 단계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주목하여야 하는 것은 성화는 신명기에서 말하는 계명이아니라는 것이다. 성화는 언약으로부터 분리되어 율법주의로 가는 계명의 실천이 아니다. 성화는 하나님의 현존을 준비하는 도구이다. 성화는 구약의 성결법전의 뒤를 이어 제의와 윤리를 내용으로 하나님의 현존을 매개하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Ⅳ. 종교개혁의 유산: 성화의 재이해

유대교 율법주의와 바울의 대결은 다시금 천주교회와 종교개혁의 대결을 떠오르게 만든다. 종교개혁 이후의 개신교 스콜라 정통신학의 한 축인 개혁신학은 루터파와 함께 성화론을 칭의론과 구별하여 다룬다. 이에 반해 천주교회는 중세 스콜라 신학의 전통을 따라 칭의론과 성화론을 동일시하여 한 주제로 다룬다. 인간의 죄에 대한 이해는 두 가지 요소를 내용으로 하는데 하나는 죄의 책임성이고 다른 하나는 성품의 부패성이다. 천주교회는 죄를 영원한 형벌을 초래하는 치명적인 대죄와 일시적 형벌을 초래하는 가벼운 소죄로 구별한다. 치명적인 죄의 영원한 형벌은 그리스도의 속죄로 사하여졌다고 이해하지만, 일시적인 형벌을 초래하는 속죄의 해소는 그리스도의 속죄로부터 분리하여 사람이 속상(贖償)하여야할 몫으로 규정한다. 이 속상의 노력들은 여러 가지 고해성사와 관련된 일, 기도, 긍휼 그리고 사랑의 실천 등인데, 이 행위들을 통하여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는 의가 실현되며 의가 실현된다고 이해한다. 천주교회에서 의화론 또는 성화론이란 신자 스스로 감당해야 할 몫을 자신의 책임으로 충실히 감당함으로 신자가 의롭게 변하는 것이다.

이에 반하여 개혁교회는 죄의 이해와 관련하여 죄책과 이에 따른 형벌은 칭의와 연결하고, 죄의 성품은 성화와 연결한다. 그리스도의 칭의로 말미암아 중생 이후에 그리스도인이 범하는 모든 과실의 책임과 그에 따른 형벌이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공로 안에서 완전히 해소되었기에 성화는 이제 죄책과 형벌의 속상과는 상관이 없다. 즉, 중생 이후에 남아 있는 옛 성품에 의한 죄로 인하여 성화가 불완전하게 된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칭의가 취소되거나 약화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여전히 남아 있는 부패한 심령과 싸우도록 하시는 가운데 성화를 경험하도록 하신다. 그렇지만 개혁신학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이 의식적인 범죄를 피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완전주의를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중생이후에도 잔존하는 옛 성품으로 인하여 죄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이 땅에서 경험하지는 못하겠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거룩해져가는 경험을 하는 것이다. 개혁신학에 따르면, 성화는 하나님이 인간의 부패한 성품을 새롭게 하시는 은혜를 베푸시고, 인간으로 하여금 그 새로운 성품에 따라 영적인 선을 바라고 행하도록 하시며, 순종을 이끌어 내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악의 행실은 전적으로 인간의 책임이지만, 성화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하여 이루어지고, 중생한 인간이 선한 일을 택하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은 그분의 은혜의 작용에 의하여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성화로 이루어진 선행이라는 열매는 인간이 자신의 공로라고 자랑할 수 있는 근거는 사라지게 된다. 성화의 외적 실현으로서 선행은 필수적이지만,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의 열매이며 증거일 뿐이다.

위의 주장들을 살펴 볼 경우 천주교회나 개혁교회의 경우 모두 구원 이후에 이루어지는 성화와 관련하여 성품의 변화와 선행을 중요한 주제로 삼고 있다. 천주교회의 경우에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영원한 형벌로 인도하는 죄를 사하는 것으로 제한한다. 그리고 그 밖의 소죄는 인간이 해결해야 할 것으로 이해하고 성품의 변화와 선행의 과제를 인간의 책임으로 돌린다. 이 논리의 강점은 인간이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인간이 해야 할 과제를 제시함으로 인간이 태만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거룩해 지기 위하여 고해성사와 관련된 일, 기도, 긍휼 그리고 사랑의 실천 등을 실천하게 하는 힘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견해의 약점은 예수의 속죄를 불완전하게 여기고 인간의 행위가 구원을 위하여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되게 함으로 행위로 인한 구원의 길이라는 잘못된 교리를 제시한다는 것이다.

개혁교회의 주장의 강점은 구원과 성화를 구별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 인간의 원죄만이 아니라 중생이후의 모든 과실과 형벌까지도 모두 제거해 주셨기에 성화의 과정에서 인간이 속죄의 역할을 담당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이제 성화의 과정은 부패한 성품을 변화시키고 선행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부패한 성품의 변화와 선행은 인간의 의지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하다고 고백한다. 개혁교회의 약점은 논리적인 것보다는 실천적인 것에서 나타난다. 성화의 모든 과정을 은혜로 일임하는 것은 자칫 무도덕주의와 율법주의의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인간이 실천해야 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은혜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실천을 막을 수 있다. 동시에 인간의 노력을 장려하는 것이 행위를 자랑하는 율법주의로 나아갈 위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개혁교회의 목회 현장에서 이러한 위험성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가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Ⅴ. 결론: 거룩의 재발견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종교개혁의 전통 위에서 실천적으로 모호한 것들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개혁을 위하여 우리의 전통을 구약과 신약에 이르는 신학적인 전체성 아래에서 조명해야 한다. 이 글을 통하여 우리는 이 시대에 거룩을 어떻게 재발견할 수 있겠는가?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제사법전과 성결법전으로 이루어진 구약의 제사장 문헌을 폐기하지 말고 재해석하는 것이다.

첫째, 거룩의 출발은 존재론적인 거룩이다. 이는 개신교에서 칭의로 설명괴고,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천주교회로부터 개혁할 때 개신교의 출발점이다. 개신교의 중요한 특징은 칭의와 성화를 구별함으로 칭의의 확실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칭의는 성화에 종속되지 않음으로 성화가 실패한다고 해서 칭의가 무효화되지 않는다. 신약의 칭의교리는 구약의 신명기에 나타난 선택 사상으로부터 온다. 신명기에서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이 민족이라는 한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이스라엘은 할례라는 제도를 통하여 이 선택이 민족이라는 한계 안에서 이루어짐을 확인한다. 신약에서 이제 민족이라는 울타리가 극복되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 선택이 이루어진다. 선택으로 인한 칭의는 곧 우리를 죄악의 사슬로부터 해방함을 의미한다. 칭의는 곧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존재론적인 거룩으로 신분이 변화됨을 의미한다.

둘째, 거룩의 근원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거룩은 오직 전적 타자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는 분이지만 지상에 특별한 장소를 지정하시고 그곳에서 우리를 만나주신다. 인간은 그분 안에서 거룩을 경험한다. 성전에서 인간은 제사를 통해 정결케 되고 하나님을 만남으로 거룩해진다. 인간이 하나님의 현존으로 말미암아 거룩해지는 경험이 바로 거룩의 출발점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날 하늘과 땅이 만나는 성전의 의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넘어갔지만 공동체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에 하나님은 현현하신다. 즉, 세상에서 한 주일을 보낸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과 구별된 성전에서 전적인 타자인 하나님을 만남으로 거룩해 지는 것이다. 구별된 시간에 구별된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 가운데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예배는 우리의 죄를 처리하며 부패한 인간의 본성이 치유되는 시간이다. 제사법전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제사의 효과는 그리스도의 피로 전이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말미암아 구약의 제사는 더 이상 반복될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의 피는 인간의 원죄와 실제 죄를 위하여 흘려졌다. 그렇다면 예배 때에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가? 원죄로 인하여 부패한 품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성화의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품성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아직 변화되지 못한 품성은 실제적인 죄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 이와 같이 실제적인 죄에 대한 속죄조차도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미 이루어졌다. 원죄의 문제는 반복할 필요는 없지만 인간의 타락한 품성이 하나님을 대면함으로 인하여 변화된다. 곧 예배는 한 주동안 우리의 죄로 인해 더러워진 것을 정결케 하고 우리의 타락한 품성을 변화시킨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인간의 상황은 부패한 품성을 유지하고 동시에 그 부패한 품성이 만드는 실제적인 죄를 처리해야 한다. 이때 그리스도의 속죄가 우리와 어떻게 관련되는가? 이 문제에 관하여 개혁교회가 구체적인 안을 제시하지 않기에 개혁교회는 죄에 대하여 무지하고 무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원죄와 실제 죄를 속하기 위하여 죽으셨지만, 우리가 지은 죄는 저절로 사라지지 않는다. 죄를 지은 직후에 우리 죄는 남아 있다. 그 죄가 속함을 얻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케 하는 것은 바로 예수의 피이다(요일 1:7). 이미 우리의 원죄와 실제 죄로부터 구원하신 그리스도의 피를 의지하며 죄를 씻어야 하는 것이다. 이미 발현된 그리스도의 속죄의 능력이 죄를 지은 인간 안에 유효해져서 죄를 씻음으로 부패한 인간이 점차로 거룩해져가는 것이다. 이 부분은 기존의 천주교회와 다른 개신교회의 교리를 비교하되, 개신교의 교리를 어떻게 실천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한다. 성도의 거룩함은 아직 덜 이루어진 구원의 일부를 인간이 담당함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들이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의 피로 죄 씻음을 통하여 날마다 이루어진다. 이 성결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 구약의 제사문헌이 폐해질 것이 아니라 재해석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성도들이 날마다 짓는 죄 씻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구약의 제사장 문헌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제사법전에서 가르쳐 주는 제사의 결과는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남으로 완전 또는 흠없음 (타밈)의 단계에 다다르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동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이 거룩에 이르는 길을 우리는 완전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창 6:9; 17:1; 신 18:13; 마 5:48).

우리가 구원을 얻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필요하지만, 그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역할이 끝난 것은 아니다. 한 주 한 주 삶을 살아가면서 인간이 초래하는 더러움으로부터 우리가 정화되기 위하여 예수의 피가 필요하다.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온몸을 씻을 필요는 없지만 더러워진 손을 씻어야 한다. 오늘날 거룩의 실천에서 빠진 것은 바로 계속 되는 죄 씻음이다. 우리는 구원을 얻을 때 예수의 피의 효력이 다 끝났다고 생각하지만, 예수의 피의 효력은 구원을 이룬 후에도 그분으로 말미암아 날마다 새롭게 짓는 죄와 허물을 씻는 것이 우리에게 남겨진 것이다.

셋째, 예배를 통하여 거룩을 경험한 성도들은 이제 삶의 현장에서 거룩을 보존해야 한다. 구약의 성결법전에서 땅에서 사는 백성의 거룩의 내용으로 제사와 윤리를 다룬다. 신약에서 바울은 우리가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기를 명령한다(롬 12:1).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거룩해진 하나님의 백성들은 일상의 삶에서 이 거룩을 유지해야 한다. 이는 삶의 현장에서 악과의 싸움과 선행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구약의 성결법전은 일상생활 속에서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것인지를 보여준다. 제사법전이 성전에서 전적인 타자요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남에 관한 것이라면, 성결법전은 구체적인 일상의 삶에서 어떻게 거룩한 삶을 살 것인지를 보여준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땅에서 거하는 백성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땅을 거룩하게 보존할 책임이 있다. 땅을 더럽히는 가증한 행위를 금하고 정의와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즉,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거룩을 해치는 속함과 부정으로 여겨지는 행위를 금하고, 정의와 사랑을 실천함으로 하나님의 거룩에 동참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거룩을 보존해야 할 땅으로서 가정, 교회, 직장, 사회 곳곳의 영역을 들 수 있다. 하나님은 중보자의 기도를 사용하여 이 땅을 고치시는 분이다 (대하 7:14). 이러한 성결법전의 정신은 바울에게 전해진다. 바울은 일상의 삶에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릴 것을 명하고 있다. 원래 땅을 더럽히는 것은 피를 흘리는 살인인데 차차 모든 사회적인 불의와 성적인 죄악을 포함하게 된다. 정의와 사랑은 거룩을 이루어 나가야 할 백성들을 향한 명령이다.

개혁교회의 문제는 믿는 자에게 성령을 의식하지 않은 채 윤리 곧 선행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계명, 즉 성령의 역사를 의식하지 않는 계명을 강조할 경우 이는 윤리적인 종교와 율법주의를 만들 위험이 있다. 윤리는 바로 제의적인 성결함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윤리 자체에 초점을 맞출 때 성령 없는 율법주의가 될 위험이 있다. 성결법전에서처럼 인간은 윤리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함에로 나아간다. 즉 하나님의 거룩으로 나아가는 것은 제의적인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행하는 윤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우리의 의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행의 능력은 하나님의 현존, 즉 성령을 통하여 가능한 것이다. 성령의 능력이 없는 선행은 곧 의지로 인한 것이며 자기 자랑을 향하여 나아가게 된다.

기독교는 구약과 단절된 새로운 종교가 아니다. 오히려 유대교는 구약의 풍부한 신앙유산 중에서 유대교 율법주의로 변형된 바리새주의만을 권위있는 전통으로 받은 반면에, 기독교는 구약의 유산인 구원과 계명, 그리고 제사와 거룩을 조화롭게 받아 들였다. 유대교 율법주의를 넘어서 하나님의 현존을 갈망했던 쿰란 공동체를 이어 교회 공동체는 모든 성도들에게 제사장의 거룩함을 통해 하나님의 현존을 기다리고, 한편으로는 예수의 사건 안에 재해석된 토라의 완성을 요청함으로 두 전승의 조화를 이룬다. 거룩은 하나님의 현존을 준비하는 방법인데 그것은 이제 예수의 피를 의지하여 인간의 악을 제거하게 하고, 제사대신 찬양 안에 성령이 역사함으로 하나님의 현존을 매개한다. 또한 인간의 윤리는 계명의 범주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현존을 매개하도록 변형된다. 윤리는 율법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실천되는 순간 하나님을 가리켜야 한다. 윤리의 실천이 남으면 하나님의 현존을 방해하고, 하나님을 대신한다. 성화를 계명이 아니라고 강조하는 이유는 인간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신명기 신학의 잔재인 율법주의의 위험을 극복하기 위함이다. 이제 구원과 성화에서 성화를 이해할 수 있다. 성화의 목표는 거룩함을 통하여 하나님의 현존에 이르는 것이다. 살아있는 하나님을 만나려는 기독교인의 갈망을 이루는 도구로는 제의적인 것과 윤리적인 두 가지가 있다. 제의적인 것은 구약의 제사에서 온 것으로 예수의 피로 정결함을 얻고, 찬양을 통해 거룩으로 나아가 하나님을 만나게 하며, 윤리적인 것은 일상의 삶에서 악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를 실천하도록 돕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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