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잃어버린 부모
누가복음 2:41-52
오늘 본문은 소년 예수가 12살이 되어 유월절을 지키는 때에 일어난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두 가지의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의 부모님들이 소년 예수를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래서 걱정하면서 예루살렘까지 가 보니 소년 예수가 성전에서 선생들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들을 잃어버렸다고 생각되었을 때는 엄청난 걱정을 하였을 것입니다.
당시 유월절 때는 하나님께 드려진 짐승의 수가 25만 마리정도였다고 합니다.
그것을 기준으로 바클레이 같은 주석가는 최대 100만의 사람들이 운집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사렛에서 올라온 시골 아이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걱정이 되고 낙심이 되었을까요?
그런데 막상 찾고 보니 전혀 걱정할 일이 없었습니다.
아니 오히려 아들을 통하여 더 큰 격려와 위로와 안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다시 한 번 어린 시절의 신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한국교회가 지키는 5월 첫 번째 주일 어린이 주일입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교회에서 어린아이들이 사라졌다고 난리입니다.
큰일이라고 하고 이 문제를 잘 해결해야 된다고 목소리는 높이지만 막상 현실 앞에 어떻게 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되어 집니다.
이런 때 다시 한 번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자세를 가다듬어야 할 줄 믿습니다.
먼저, 우리는 내가 예수를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당시에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은 동네별로 무리를 지어 갔습니다.
오늘과 같이 차를 타고 가는 길이 아니고 한 두 시간에 가는 길이 아니라 며칠을 걸려 가야했고 가다가 숙영도 해야 했고 때로는 도둑이나 강도의 위협도 있었기에 여러 사람이 함께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도 바로 그런 일행들과 함께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일행 중에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별 생각 없이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가 어디 있나 생각하고 일행 중에 다니면서 찾아보지만 아무도 예수를 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한 순간 ‘큰일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돌아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다행히 성전에서 예수를 만났기에 망정이지 정말 예수를 잃어버렸다면 얼마나 낭패였겠습니까?
이 부모들의 모습은 신앙 생활하는 우리들을 돌아보게 하는 너무나 귀한 모습입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는 예수를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 예수를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생각으로는 예수님과 동행한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는 예수가 옆에 없지는 않습니까?
직분은 장로님 권사님 안수집사님 등으로 불려 지면서 형식은 예수를 믿는 것 같은데 실제로는 예수를 잃어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자녀들을 신앙으로 잘 교육시킨다고 했는데 막상 자녀들에게는 예수를 심어주지 못하고 엉뚱한 세상적인 성공만을 주입시키고 있지는 않는지요?
우리가 예수의 부모들처럼 실수할 때가 정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주님께서 심판하실 그때에 많은 사람들이 주님, 우리가 선지자노릇하고요, 귀신도 쫓아내고요,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도 행하였습니다.’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들은 당연히 천국 영광에 들어갈 것으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입에서는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는 전혀 엉뚱한 심판의 말씀이 떨어졌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까?
자기들은 예수님과 동행하였다고 생각했지만, 겉으로 볼 때는 그렇게 보였을지 모르지만 실상은 주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은 분명하지만 실상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나 혼자서 주님과 동행한다고 착각하면서 인생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우리는 열심히 주님의 일을 하면서 신앙의 기치아래 우리의 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혹시 우리 속에 주님을 모시지 못하고 내 혼자의 삶을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주님을 잃어버리고 주님과 동행하지 못하고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세상사는 일에 바빠서 주님을 잃어버리고 사는 것을 당연시 여기는 성도들도 있을 것입니다.
당분간은 ‘주님 없이 살아가겠습니다. 이해해주세요.’ 그렇게 작정하며 살아온 성도들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겉으로는 주님과 동행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주님은 없고 나만 있고 세상만 있는 삶을 살아온 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삶이 얼마나 무서운 삶인지요?
예수를 잃어버린 부모들은 예수를 찾기 위해 사흘 길을 헤맸습니다.
사흘 동안 시간을 허비했고, 하루 동안 길을 갔던 발걸음도 헛수고가 되었고, 얼마나 많은 근심과 고통으로 힘들었습니까?
다행히 하루 만에 예수를 잃어버린 사실을 알았기에 사흘 만에 찾았지 만약 나사렛 집에 까지 가서 그 사실을 알았다면 얼마나 큰 손해를 보았겠습니까?
예수를 잃어버린 삶은 그 수고의 여정이 다 헛되고 헛될 뿐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몇 년 동안 자식들 공부를 위해 예수님을 잃어버린 삶을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잘 가르친 것 같은데 나는 영적으로 얼마나 곤고한지 모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따라 살아간 인생을 회복하고 그 잃어버린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그렇게 힘써서 공부를 시킨 자식들이 신앙이 없으니까 엉뚱한 일을 하고 사고를 일으켜서 더 큰 문제덩어리가 되고 근심거리가 됩니다.
예수님 없이 예수님을 잃어버리고 간 길은 간 것이 아니고 성과도 아니고 좋은 결실도 될 수 없습니다.
그 길은 다시 돌아와야 할 길이며 그만큼 힘들고 어렵고 짜증나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길이 지금 어떤 길인지, 주님과 동행하고 있는 길인지, 아닌 길인지를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지금이라도 잘 살펴서 주님과 동행하는 길이 아니고 주님을 잃어버린 길이라고 한다면 지금 이 순간 당장에 그 길을 돌이켜야 합니다.
더 이상 그 길을 가서는 안 됩니다.
가면 갈수록 돌아오기가 더 힘들고 더 손해고 더 낭패와 실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예수님을 잃어버렸으면 빨리 가능한 빨리 찾아야 합니다.
금년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우리의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정말 내가 가장 귀한 것을 심어주고 있는지, 아니면 헛된 것을 심어주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서 자녀들에게 가장 귀한 예수님을 선물하고 그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힘써야 할 줄 믿습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예수님의 부모들의 신앙교육이 잘 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49절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이 말씀을 보통 예수께서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은 첫 번째 예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이 비록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셨지만 영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을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우리가 조금 다르게도 생각할 수 있다고 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성전이 하나님 아버지의 집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 하나님 아버지의 집으로 우리가 예배하러 올라간다.
그것이 얼마가 귀하고 소중한 것인가를 늘 가르쳤습니다.
성전에 올라갈 때는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준비하였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가르쳤기 때문에 아들 예수의 입에서도 자연스럽게 성전이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말이 나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교육의 중요성입니다.
며칠 전 ‘안녕하십니까?’ 라는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었습니다.
고민을 갖고 나온 사람은 아들 두 명을 가진 주부인데 남편이 10시 11시 정도에 퇴근하면 꼭 집에서 술을 먹는다고 합니다.
술을 먹으면 아내는 옆에서 꼭 고기를 구어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돈도 많이 벌어오지 못하는 상황에서 금전적인 것도 문제지만 옆에서 고기를 구어주어야 하는 부담을 아내는 떨쳐버릴 수 없어서 이 프로그램에 출연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남편 옆에 어머니가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의 말씀이 자기는 평생 동안 그 일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가 한 일을 아들이 그대로 반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버지가 보여 주었던 그 모습을 아들이 그대로 본받아 생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도 잘못된 모습을 보여서는 안 되겠습니다만 특별히 신앙생활에서 잘못된 모습을 보이고 있지는 않는지 우리 자신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내가 잘못된 모습을 보이면 자녀들이 그대로 본받습니다.
예배를 소홀하게 여기면 자녀들도 예배를 소홀하게 여깁니다.
내가 헌금을 적당히 하면 자녀들도 헌금생활을 적당히 합니다.
내가 적당히 기도하면 자녀들도 적당히 기도하던지 아니면 기도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올바른 신앙의 모습을 보이면 자녀들도 올바르게 신앙생활하게 됩니다.
마리아와 요셉은 어린 예수에게 올바른 신앙교육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소년 예수는 자연스럽게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의 신앙생활을 위하여 여러분 자신이 먼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대 그리스도교회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로 알려진 어거스틴은 (혹은 아우구스티누스) 후일에 자신의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북아프리카의 소시민의 아들로 태어났고 그의 아버지는 자수성가한 사람으로 자녀를 출세시키는 것이 유일한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이 목적을 위해서는 좋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가난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그를 공부시켰습니다.
그러나 회심한 어거스틴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잘못 정해진 방향이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아버지의 자녀교육을 위한 희생에 대해서는 감사했지만 그러나 ‘아버지는 내가 하나님을 향하여 잘 나아가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 정결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았다.
당신이 경작할 마음의 밭이 불모지가 되든지 말든지 간에 내가 웅변에만 능하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학교에 들어가서 라틴어를 배우게 되었는데 당시 로마제국에서는 라틴어를 바로 구사하는 것이 출세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학교 교사들은 만일 학생들이 문법을 틀리면 엄격한 벌을 내렸습니다.
여기에 대해 어거스틴은 ‘인간의 자식들이 이전 사람들로부터 배워온 글자와 음절의 관습적인 법칙들은 열심히 따라 지키지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영원한 구원의 법도는 얼마나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까?’라고 질문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사춘기를 지나면서 성욕 때문에 괴로워했고 그래서 죄를 짓느니 차라리 정식으로 결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부모들은 반대하면서 공부를 다 마친 후에 상류층의 여자와 결혼하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 대신 성욕을 피하는 방법으로 아들이 잠정적으로 동거하는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어거스틴의 아버지는 이교도였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이었던 어머니가 여기에 동의했다고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여기에 대해 어거스틴은 ‘어머니의 희망은 내세에 관한 것이 아니고 출세에 관한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고 회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보면서 얼마나 우리들의 모습과 똑같은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이 공부를 잘 하고 좋은 대학가서 출세하고 좋은 여자 좋은 남자를 만나 잘 사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의 목표는 거기에 머물면 안 됩니다.
영혼이 잘 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영혼이 구원받지 못하고 창조주가 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세상에서 아무리 성공했다고 해도 결코 칭찬받는 삶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삶이 되는 것입니다.
52절에 “예수는 지혜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가시더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더 사랑스러워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하나님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저 세상에서 잘 되면 그만이다고 그것만을 위해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 모습을 우리 자녀들에게까지 심어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래 전 한 병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소년이 열세 살 때 수술을 받는 중 수혈이 잘못되어서 에이즈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병원의 실수로 그는 속수무책으로 죽음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부모나 형제, 특히 실수한 의사를 원망하지 않고 항상 밝은 웃음을 보였고, 모두에게 감사했습니다.
이러한 사실이 방송매체를 통해 전해지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그 아이의 쾌유를 위해 기도하게 되었고, 대통령까지 선물을 보내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5년을 더 살다가 18세에 이 소년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아버지와 나눈 대화가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아들아, 미안하다. 나는 너에게 더 이상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아빠를 이해해다오.”
그러자 아들은 “아닙니다. 저는 많은 선물을 아빠로부터 받았습니다.
그 중 가장 귀한 선물은 예수님을 믿게 해 주시고, 말씀을 통하여 영생을 얻도록 인도해 주셨습니다. 아빠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아이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게 해 주고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비록 아들을 잃어버리는 실수를 한 순간 했지만 그러나 신앙교육을 잘 시킨 결과 아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자녀들을 신앙으로 잘 키울 수 있는 우리 모든 부모들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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