ㆍ‘이재용 뇌물사건’ 재판 증거 효력 논란
법원이 각각 뇌물수수와 뇌물공여 혐의를 받고 있는 박근혜 전 대통령(65)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49)의 독대 대화가 기록돼 있다는 이른바 ‘안종범 수첩’을 직접증거가 아닌 간접증거(정황증거)로 인정한 것을 두고 일각에서 혐의 입증이 어려워진 것 아니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직접증거나 간접증거나 증거능력은 똑같이 인정되는 것이고, 오히려 대통령 수석비서관의 메모라는 점에서 재판부의 심증 형성에 강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법조계의 분석이다.
이 부회장 사건을 심리하는 서울중앙지법 형사27부(재판장 김진동 부장판사)는 지난 6일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이 독대에서 나눈 대화 내용이 담겨 있다는 ‘안종범 수첩’ 기재 내용은 진술(직접)증거로서 증거능력을 인정할 수 없다”며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 사이에 그와 같은 대화 내용이 있었다는 간접사실로서의 정황증거(간접증거)로는 채택하겠다”고 밝혔다. 안종범 수첩이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 간 대화 내용을 입증하는 직접증거라 할 수는 없지만 박 전 대통령이 이 부회장과 나눈 대화를 바탕으로 안 전 수석에게 지시한 내용 등은 확인할 수 있는 간접증거는 될 수 있다는 취지다.
박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61), 이 부회장이 얽힌 ‘뇌물 사건’의 주요 쟁점은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이 독대에서 삼성 승계 관련 정부의 편의 제공과 최씨 딸 정유라씨(21)에 대한 승마 지원 등이 대가로 오갔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독대 때 어떤 말이 오갔는지 아는 사람은 박 전 대통령과 이 부회장 둘뿐이다. 배석한 사람도 없고 독대 내용을 녹음한 파일이나 폐쇄회로(CC)TV 영상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런 상황이 뇌물 사건에서 특이한 것은 아니다. 청탁은 은밀하게 이뤄지므로 뇌물을 주고받는 사람 외에는 알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뇌물 사건에서 직접증거가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 따라 법원은 간접증거들을 근거로 뇌물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실제 당사자 간 만남조차 없어도 뇌물죄가 인정되기도 한다. STX그룹으로부터 뇌물수수 혐의로 유죄가 나온 정옥근 전 해군참모총장 사건에서 강덕수 STX그룹 대표와 정 전 총장은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지난 2월 서울고법은 “강 대표는 업무상 현안에 대한 음성적인 혜택 및 이익을 기대해 돈을 주라고 했고, 정 전 총장은 무기체계 획득 사업 등 현안에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는 점을 알면서 돈을 받았다”고 판단했다.
이번 사건에서도 안종범 수첩은 두 사람의 독대 이후 박 전 대통령이 안 전 수석에게 내린 각종 지시를 간접적으로 입증한다. 법조계 관계자들은 “간접증거든 직접증거든 증거라는 점(증거능력)에는 차이가 없고, 오히려 법관이 얼마나 믿을지(증명력)가 문제”라며 “안종범 수첩은 대통령 수석비서관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강한 증명력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삼성 측은 안 전 수석이 자의적으로 수첩에 기재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그러나 안 전 수석 스스로가 법정에서 “대통령이 전화로 불러준 것을 적은 것”이라고 밝혔다. ‘수첩에 가필한 적이 있느냐’는 박영수 특별검사팀 질문에도 안 전 수석은 “제 기억에는 없다”고 했다. 안 전 수석은 대통령의 전화 지시사항은 수첩 뒤에서부터 기재해 공식석상 발언을 수첩 앞에서부터 적은 것과 구별했다며 상세히 수첩 기재 방식을 설명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