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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죽음, 의료화: 질병의 은유 (2) / 한겨레

성령충만땅에천국 2017. 8. 7. 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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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신, 죽음, 의료화: 질병의 은유 (2)


김준혁 2017. 08. 04

  시 각   | 질병과 은유 ② |


☞ 먼저 읽기: 질병과 은유 ①




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어릴 때에는 동네마다 비디오 대여점이 있었다. 부모님이 영화관에 데려가주시거나 비디오 테이프를 사주시는 일은 드물었기에, 만화영화를 보려면 친구들과 대여점에 몰려가곤 했다. 유행하던 <후뢰시맨> 시리즈를 고심 끝에 골라 모은 돈을 치르고나면, 집에 돌아가는 길은 마음속 영웅들의 외침과 뒤섞여 행복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만화영화를 보려면 비디오를 켜자마자 반드시 지나쳐야 하는 통과의례가 있었다.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 마마, 전쟁 등이 가장 …”으로 시작하며 청소년 유해 비디오를 시청하지 말자는 성우의 계몽성 공익광고. 호랑이, 천연두, 무당, 전쟁의 참상에 뒤이은 성과 폭력 등 비행에 대한 경고가 이어지면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


지금 생각하면 촌스럽게 느껴지기만 하는 이 공익 광고가 당시에는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얼굴 가득한 발진으로 걱정스레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아동 소설에서 읽었던 "곰보"라는 단어의 의미를 깨달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아무런 연관성은 없지만, 이상하게도 며칠 뒤에 수두에 걸렸던 기억이 이어진다. 온몸에 묘한 향이 나는 연고를 바른 채로, 유치원에 가지도 못하고 요 위에 누워 이틀을 보내야 했던 기억이.


[ 공익 광고, 한 편의 비디오, 사람의 미래를 바꾸어 놓을 수도 있습니다.

  https://youtu.be/LCtQbh-DxCQ ]


연두는 강력한 전염성, 높은 치사율로 손님, 마마라고 불렸다.[1] 이 병은 일상을 위협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무기의 일종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16세기 아스테카 제국을 무너뜨리는 데 크게 이바지한 것은 스페인 군이 옮긴 천연두였다.[2] 또, 18세기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전인 '프렌치 인디언 전쟁'에 이바지하여 지명과 대학에 그 이름을 남긴 제프리 앰허스트 공은 인디언에게 천연두 균에 오염된 담요를 건네주려 했다는 기록이 발견되어 캠퍼스의 상징에서 퇴출당하였다.[3] 다행히 1977년 소말리아에서 마지막 환자가 발생한 것을 끝으로, 천연두 균은 표본으로만 남아 있다. 하지만, 북한을 위시한 몇몇 국가는 무기로 사용하기 위해 천연두 균 표본을 보관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4] 그러니 천연두의 위험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리라.


한국에 우두법을 보급한 것은 지석영이라고 한다. 우두법은 우두 고름을 사람에게 접종하여 천연두 면역을 획득하는 방식을 말한다. 물론 인두법이라고 해서, 천연두에 걸린 환자의 고름을 사람에게 접종하는 방식은 예전부터 있었다고 하며, 정약용이 우두법을 소개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진위는 제쳐두자.[5] 여하튼, 1880년 사설 우두국을 설치하여 종두법을 보급한 지석영 덕에, 더불어 일본의 제국주의적 야심에서 출발한 근대 위생 운동에 힘입어 "마마"는 서서히 한국에서 사라져 갔다.[6] 이렇게, 다행히 천연두를 위시한 여러 전염병이 백신 접종을 통해 사라져 갔지만, 최근 한편에서는 반백신 운동(anti-vaccine movement)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반백신 운동, 과연 일부의 어리석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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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과학주의의 첨병으로 나서고 있는 반백신 운동은 백신 자체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것을 그 중핵으로 삼는다. 백신이 효과가 없다고 주장하기보다는, 백신 성분이 질병을 유발할 수 있다는 것을 근거로 하여 백신 접종을 반대하거나, 자기 선택권을 토대로 백신 의무접종을 거부하려는 움직임을 보인다. 최근에는 트럼프 대통령이 백신과 자폐증의 관련성을 주장하는 로버트 케네디를 백신 안전위원회 의장에 임명하는 것을 고려하고, 또한 트위터를 통해 백신과 자폐의 관련성을 주장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7] 반백신 운동가들은 백신의 수은과 알루미늄 함량을 문제로 삼으며, 홍역-볼거리-풍진 백신(MMR 백신)이나 백신의 티메로살(Thimerosal) 성분이 자폐증을 유발한다고 설파한다.[8]


론, 과학적으로 이를 반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학저널 <사이언스> 4월 28일자 표제는 '백신 전쟁(Vaccine Wars)'이었다.[9] 백신이 주요 전염병을 얼마나 감소시켰는지를 한 눈에 보여주는 인포그래픽(infographic)은 그 자체로 드라마를 전달한다. 수만 명의 아이가 걸리던 감염병이 백신 개발 이후로 얼마나 줄어들었는지를 보면서, 백신의 유효성을 부정하기는 쉽지 않다. 1998년 백신과 자폐증의 관련성에 관한 논문을 출판하며 백신 반대를 주장했던 앤드루 웨이크필드는 논문 출판과 관련하여 윤리적, 의학적, 과학적 비행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그의 주장은 "지난 100년 동안 나타난 의학적 거짓말 중 가장 유해하다"는 평가를 받았다.[10] 과학 기자인 타라 할레는 테드(TED) 강연에서 집단 면역(herd immunity)이 무엇인지, 백신 접종이 줄어들면 왜 인구 집단 전체가 감염성 질환에 취약해지는지를 설명한다. 그는 물론 백신이 위험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길을 가다 벼락에 맞을 위험이 12,000분의 1, 비행기가 추락할 위험이 347,000분의 1이라면, 백신으로 심각한 위해 반응이 나타날 위험은 1,000,000분의 1이다.”[11]


[ 타라 할레의 테드 강연, "왜 부모들은 백신을 두려워하는가." 그는 사소한 위험을 피하기

위한 행동이 더 큰 위험을 불러온다는 점을 강조하며, 백신 접종을 피하는 것도 이것과 동

일하다고 말한다. https://youtu.be/ggtkzkoI3eM ]


이렇게 보면 굳이 반백신 운동을 상대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황승식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의 말처럼 "(백신의 안전성과 필요성은) 이미 과학계에서 논쟁이 끝난 사안"이다.[12] 그러나 일상 담론의 공간에서 이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다. 얼마 전 시끄러웠던 '안아키'를 이끌었던 한의사가 일간지 인터뷰에서 “전 국민이 수두 파티를 했으면 좋겠다”라고 말하고, 의학에 대한 불신을 '자연치유'에 관한 맹신으로 돌린 것처럼.[13] 수많은 부모가 그와 그 공동체의 ‘자연주의’ 처치법을 신봉하고 확산시켰다.


들은 ‘반지성주의’의 첨병이며, 자신의 아이들을 잘못된 과학으로부터 지키고 싶었던 것일까? 또는, 그저 몽매한 부모의 극단적인 믿음이 낳은 결과일 뿐일까?[14] 관련 글에서 시민건강증진연구소 연구원인 김새롬은 반백신 운동 담론의 의사소통 전략을 살핀 존스홉킨스대학 매건 모란 교수팀의 연구를 소개한다.[15] 반백신 운동가들은 자신의 아이가 예방접종 후 아팠던 ‘서사적 사례’를 제시하고, 주류 학계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전문가의 의견으로 이를 보충하며 현대 의학이나 정부, 의사, 제약회사 등에 대한 불신을 부추긴다. 그리고 그 대안으로 생활 습관의 개선, 대체의학적 치료, 유기농 식품 등을 제시하며, 자유, 선택권, 자연주의, 총체적인 삶의 강조 등을 기반 가치로 내세운다.


그렇다면 이를 과학, 의료에 대한 무지가 낳은 대중의 어리석음으로 치부해 버릴 수는 없을 것 같다. 두 가지가 눈에 띄는데, 일단 서사 전략이 동원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주제는 다시 한번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다음, 이것은 가치의 문제, 즉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가, 삶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관점의 충돌일 수 있다. 어떤 관점이 과연 문제가 되고 있는가? 이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어떤 의미들을 살펴보아야 하는가?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죽음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조금 팍팍한 길을 걸어보아야 한다.



세상 사람(das Man)과 죽음의 병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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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학교 윤리학과 이왕주 교수는 카프카의 <심판>을 독해하며 죽음에 관한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시선을 설명한다.[16] 우리는 모두 필멸자,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 '죽음을 향한 존재(Sein zum Tode)'이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두 가지 태도를 보인다. 그것은 "죽음 앞에서 도피하는 세상 사람의 태도"와, "죽음을 앞질러가는 본래적 실존의 태도"이다. '나'는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절대로 그 죽는 사람은 내가 아니다는 핑계로 죽음을 끊임없이 유예하여 회피한다.


때로 영혼을 옥죄는 불안 앞에, '나'는 죽음의 대상을 바꿔치기 한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 그러나 "죽는 것은 내가 아니라 세상 사람이다." 하이데거는 이런 태도를 '비본래적'이라면서 사람들이 죽음을 넘어서지 못하고 피하기만 한다고 비판한다. 그렇지만, 나는 하이데거의 이런 비판 이전에 사회적 맥락을 먼저 살펴보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죽음과 일상의 분리, 죽음의 '병원화'이다.


서구 문화권의 죽음의 문화사를 세밀하게 살폈던 두 학자가 있다. 필립 아리에스와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프랑스 역사학자 아리에스는 강의와 저서를 통해 수천 년 동안의 인류 문화에서, 그리고 서구 문화권에서 죽음이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를 살핀다.[17][18] 죽음에 관한 태도를 시대적으로 구분한 그는, "길든 죽음", "자기 죽음", "그대, 죽음이여", "금지된 죽음"이라는 책의 각 장 제목을 통해 각 시대가 죽음에 관해 취한 태도를 요약한다.


중세의 죽음은 정상적인 것으로서, 사람들은 제 죽음을 준비하고 수용했다. 중세 초기, 죽음은 천국을 바라보며 침상에서 맞이하는 공동체의 의식이었다. 그러나 11세기에 들어서면서, 죽음 이후의 생에 관한 종교적 해석이 변한다. 믿기만 하면 모두 심판의 때에 부활할 것이라던 생각이, 죽을 때 행위에 관한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는 식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점차 죽는 순간의 중요성이 두드러지고, 죽음은 점차 개인적인 것이 되어간다. 18세기 초, 낭만주의 사조와 더불어 죽음은 낭만화되어, 숭배의 대상으로 여겨진다. 성에 관한 태도가 바뀌는 것과 나란히 하여, 죽음은 더 이상 정상이기를 멈추었다. 이전 사람들은 죽은 자 옆에 모여 죽음의 증인이 되었으나, 이제 그들은 모여서 죽음을 "슬퍼하게 되었다." 더는 죽음은 가족의 일이 아니게 되었으며, 사자를 기념하는 것이 장례의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는다.


death.jpg » 18세기를 휩쓴 낭만주의 사조는 죽음과 상실 또한 낭만으로 물들였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단적인 예. 들라크루아는 그림의 주인공 사르다나팔로스가 적들이 들어닥치기 전, 자신의 모든 것을 직접 파괴할 것을 명하고 지긋이 바라보고 있는 장면을 시각화하여 비장미를 극대화한다. Delacroix E. La Mort de Sardanapale (1827). 출처/ Wikimedia Commons

제, 현대의 죽음은 부끄러운 것이고 금지된 것이다. 아리에스의 책을 다시 독해하는 독일 사회학자 엘리아스는 그가 과거의 죽음을 "고요한" 것으로 보았으며, 현대의 "난폭한" 죽음을 그에 대비시키고 있다고 말한다.[19] 이제 죽음은 타인의 것이자, 보이지 않는 것이 되었다는 아리에스의 분석에 더하여, 엘리아스는 현대의 죽음이 갖는 은폐, 불멸, 고독의 층위를 살핀다. 그리고 그 층위들은, 분주한 병원에 놓인다. 죽음 앞에서 마땅해야 할 존중은 "종종 기계적이고 비인간적"이 되며, "낯선 상황 속에서 가족조차 죽어가는 사람에게 위안이 될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해" 당황한다. 그는 죽음의 불안을 강화하고 있는 사회적 억압을 걷어내기 위해 죽음에 관해 더 공개적이어야 한다고, 죽음을 삶 일부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죽음의 태도에 관한 역사적, 사회학적 탐구에 더하여, 의료인문학적 탐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족일까. 엘리아스가 넌지시 던지는 것처럼, 죽음의 은폐는 병원을 통해서 이뤄진다. 죽음이 점차 타인의 것이자, 보이지 않는 것이 되기 위해서는 의료의 개입은 필연적이다. 타인의 죽음이 되기 위해서는 죽음은 객관화되어야 하며, 보이지 않기 위해서는 죽음을 전담하는 기관이 필요하다. 죽음의 공동체적, 영적 의미를 의과학적 사실이 대체하면서 죽음은 보편적인, 건조한 사실이 된다. 과거 공동체가 보증하던 죽음은 이제 "사망하셨습니다"라는 의사의 선고, 그리고 그의 사망진단서로 대체된다.


death2.jpg » 동전의 양면으로 여겨지며 서로 얽혀 있던 삶과 죽음 대신, 이제 둘 사이의 간극 만이 남았다. Gilbert CA. All Is Vanity (1892). 출처/ Wikimedia Commons 헤겔을 통해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라캉을 다시 독해하는 지젝은 우리가 두 번 죽는다고 말한다.[20] 상징적 죽음(symbolic death)이 있고, 실제적 죽음(actual death)이 있다는 것. 후자가 생물학적 죽음이라면, 전자는 상징계에서 겪는 죽음, 즉 사회적 죽음과 죽음의 상징화 모두를 의미한다. 상징적으로 죽었으나 실제적으로 죽지 않은 대표적인 예로 뒤마의 소설 <몽테크리스토 백작> 주인공 에드몽 당테스가 있을 것이다. 모함에 빠진 그는 자기 죽음을 가장하고서 탈옥하여, 몽테크리스토 백작으로 귀환해 화려한 복수극을 획책하니까. 반대로,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 전체를 사로잡고 있는 유령, 햄릿의 아버지는 실제적으로 죽었으나 원한을 청산하지 못하여 계속 되돌아온다. 그는 아직 상징적으로 죽지 않은 것이다.


편, 현대 사회에서 의료는 두 죽음을 모두 보증하는 기능을 한다. 의료적 확증 없이 우리는 실제적으로 죽지 못하며, 거꾸로 의료적 확증만 있으면 우리는 사회적으로도 죽을 수 있다. 뇌사, 그리고 연명 치료를 둘러싼 끊임없는 논쟁은 이 죽음의 선언을 둘러싼 권리의 다툼이리라. 그리고 죽음의 보증이 의료적 판단이 되면서, 과거 사회적, 문화적으로 구성되어 온 '나'의 죽음은 사라진다. 보편적인 죽음만이 남을 뿐.


또한 과거의 장례와 현재의 장례를 구분하는 가장 큰 차이는, 과거 장례가 고인의 집에서 진행되었지만, 지금은 병원과 연결된 장례식장에서 치러진다는 점일 듯하다. 죽음의 과정은 철저히 병원화 되어, 일상과는 격리된다. 그것은 쉬쉬할 비밀이 되어, 부끄러움의 베일에 가려진 채로 의료인의 손에 내어 맡겨진다. 출산이 산파에서 산부인과로, 집에서 병원으로 옮겨지면서 철저히 의료화 되었듯이, 죽음 또한 철저히 '의료적인 것'이 된다. 두 학자가 관찰한 죽음의 문화사적, 사회적 변화는 죽음의 '병원화'로 다시 읽어낼 수 있다.


죽음은 종교적인 것이었고, 한때 낭만적인 것이었다. 이제 죽음은 의료적인 것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의료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죽음은 의학적인 것이라는 사고, '죽기 위하여' 의료가 필수적이라는 것, 결국 죽음을 관장하는 것은 '사신'도, '저승사자'도, '죄와 벌'도 아닌 의학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 삶의 조건과 의미를 주관하는 것은 목적으로서 개인의 존엄함이 아니라, 의료 시스템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편입시키고 있는가, 그에 어떤 지위를 부여하는가로 결정된다. 이제, 의료 없이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의료화, 의원성 질환, 그리고 현대 의료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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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의 신학자 이반 일리치는 이런 일상의 의료화(medicalization)에 도전장을 던진다. 그는 해방신학에 깊이 관여하면서 학교, 병원, 시장 등 제도화의 기제에 반발하며, 자율적이고 소박한 삶을 추구하는 데에 일생을 바쳤다. 그의 1976년 저작 <병원이 병을 만든다>는 "현대 의학은 건강을 부정한다"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통해, 의료화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21] 의료 제도가 건강을 위협한다고 주장하기 위해, 그는 치료나 약품의 부작용, 잘못된 적용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의원성 질환(醫原性--, iatrogenic disease. 의료행위에 수반되는 부작용이나 의료과오 등으로 인해 발생하는 장애나 질병의 총칭)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더 많은 치료는 더 많은 고통을 낳는다." 그는 사회적, 구조적 의원성 장애, 즉 의학이 스스로 돌볼 수 있는 생명체의 능력을 구획하고 제한하여 각 조건을 질병으로 편입시키고 분류하는 것으로 문제를 확대해 나간다.


리치가 보기에, 사회는 구성원들에게 과도한 노동과 쉼 없는 삶으로 발생하는 문제, 생명체의 신음에 '질병'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다음, 의학이 이런 질병의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리치는 이것이 거짓말이라고 말한다. 애초에 무리한 산업화로 인해 발생한 문제인데, 병 주고 약 주기를 남발하는 것은 기만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회주의적 의학의 "전문적 진료에 관한 공평한 접근"에도 관심이 없으며, 불평등한 의료 접근성도 문제 삼지 않는다. 의학이 약속하는 치료는 거짓 또는 '악'이기 때문에, 부자들이 자신의 부로 의사들에게서 악을 사고 있다고 해도 그에게는 상관없기 때문이다. 의학은 “치료적 효과에 중독“되어, 그 결과를 과장하고 있다. 그러나 현대의 건강 개선은 의료의 결과보다는 백신 접종, 출산 과정에서 감염을 줄이려는 노력, 상수도 정수 등의 결과이지, “의사들의 기여” 때문이 아니다.


그의 책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는 의료 전문가가 독점한 의료를 다시 각 개인과 가정의 손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과거에, 병자를 돌보는 것은 각 가정의 역할이었으며, 개인은 자신의 건강에 관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의료화'는 건강에 관한 모든 결정권을 병원으로 이관한다. 반면, 우리의 삶, 구획 지어 분리할 수 없는 총체적인 이 삶을 오랫동안 주관해온 것은 자연이었다. 또한, 선택권은 개인에게 주어져야 한다. 의학이 건강에 관한 자유를 구속해서는 안 된다. "건강은 각 개인이 질환을 극복하기 위해서 주어진 방법과 책임의 정도에 달려 있으며", 의료는 이를 증가시켜주지 않는다. "최소한의 의료적 개입이 있을 때만" 세계는 더 건강해질 수 있다. "고통과 병, 죽음을 자율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개인에게 주어질 때, 우리는 건강해질 것이다.


앞서 들었던 외침과 정확히 같은 반향을 일으키고 있음이 보인다. 반백신 운동의 의사소통 수단, 자유, 선택권, 자연주의, 총체적 삶의 테제가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의료의 정치적 차원에 관한 논의이며, 의료가 과연 무엇을 함의하고 있는가를 놓고 벌어지는 논쟁일 것이다. 물론, 일리치의 주장과 공격을 무지 때문으로 돌릴 수는 없다. 터스키기 매독 연구(Tuskegee Syphilis Study)로 불거진, 개인의 자율성에 관한 의료윤리적 논의가 시작된 것이 1970년대이며, 생의학 및 행동연구에 관한 인간 피험자 보호 위원회가 현대 의료윤리 4원칙, 자율성, 선행, 악행 금지, 정의의 초안을 담은 ‘벨몬트 보고서’를 발행한 것이 1978년이기에.[22] 그렇다고 해도 일리치는 의료의 역사가 인류의 문명과 함께했으며, 이미 그리스, 로마에도 병원이 있었다는 사실도, 수많은 내과-외과 의사가 전쟁터를 비롯한 모든 장소에서 보낸 고뇌와 노력의 순간도 기억하려 하지 않는다.[23][24] 수천 년간 여러 돌팔이가 회복을 약속하며 벌인 사기 행각도 그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 것 같다.


물론 정책적 차원에서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하고 있는가에 관해서는 앞으로도 무수한 토론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하나 생각해 봐야 할 것이 있다. 과학과 의학의 결과, 같은 현실, 또는 라캉의 표현을 빌리자면 '실제'는 왜 다르게 받아들여지고 있을까? 과가 없지 않겠지만, 의학이 가져온 이득이 보는 사람에 따라 '선'과 '악'으로 뒤바뀌는 이유는 무엇인가를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는 그것이 앞서 살핀 의료화, 즉 ‘삶과 죽음을 의료 없이 생각하기 어렵다’는 점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의료는 이제 삶과 죽음의 은유가 되어, 삶을 사고하는 방식,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 지배하고 있다. 그렇다면, 삶과 죽음의 조건, 그 사태를 놓고 싸우려면, 의학을 친구 또는 적으로 삼아야 하며, 같은 현실은 입장에 따라 다른 해석의 틀에 놓이게 된다. 예컨대, 일리치가 공격하고 싶었던 것은 산업사회가 끊임없이 저해하는 삶의 현상이었을 것이다.[25] 문제 제기를 위해 일리치는 사회가 만드는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덮어서 계속 곪게 하는 '의학'에 비난의 화살을 돌린다. 이것은 우리네 삶에 관한 담론이 그것을 둘러싼 '의료화의 은유'로 확장되는 순간이다. 이 그림에서, 의사와 환자는 '의학은 누구의 것인가'의 주도권을 놓고 날카로운 칼을 벼린다.


death3.jpg » 뒤샹은 판매 중인 기성품을 골라 미술관에 전시하는 레디메이드 예술 작품을 통해 예술 개념을 전복하고, 예술과 예술가의 관계를 새로 정립하려 시도했다. 자전거 바퀴를 엎어놓은 <Bycycle Wheel> (1913), 다빈치의 모나 리자를 패러디 한 <L.H.O.O.Q> (1919) 등의 작품을 통해, 그는 예술이 무엇인가, 그리고 예술가란 누구인가라고 관객들에게 되묻는다. Duchamp M. The Fountain (1917). 출처/ Wikimedia Commons 이런 다툼을 보고 있자니, 현대 예술을 둘러싼 논쟁이 떠오른다. 20세기 초 마르셀 뒤샹이 “레디메이드(Readymades)”를 통해 예술의 개념을 뒤집어, 예술은 미와 추에 관한 것이 아니라 감상자를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며, 예술가가 예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을 하는 사람이 예술가라고 주장한 것처럼.[26] 그러나 우리는 그의 작품이, 그리고 현대 미술이 끊임없이 논란과 불화를 불러오고 있음을 계속 본다. 예술이 끊임없이 "탈주"하는 것으로 생각한 아도르노에게 뒤샹의 작품은 너무도 훌륭한 예술일 것이다.[27] 그러나 사람들은 예술 작품에서 여전히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기를 바라며, 점차 난해해져 가는 현대 예술에 소외되어 있음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의학은 모두의 것이며 의료 행위를 하는 모두가 의료인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은 그 발을 정당한 지점에 드리우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점차 복잡해져 가는 현실 앞, 질병이라는 고통과 좌절 앞에서, 누구의 것인지를 놓고 다툴 필요가 있을까. 지금 필요한 것은 뻗어 미는 팔이 아니라, 손잡기 위해 벌린 손일 것이다. 그리고 사실 이 질문은, 정답이 정해져 있는 것 같다. 의학은, 그리고 의료는 모두의 것이라는.



다시 의학을, 은유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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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백신 운동, 그리고 반과학 운동의 기반 가치를 살피고 그 내포를 따져보기 위해서 무척 먼 길을 왔다. 의료화가 무엇인지 알아보기 위해, 죽음에 관한 태도의 변화를 통해 삶이 의료로 포섭되어간 방식을 살폈다. 그리고, 이에 저항하기 위해 내세운 가치, 자율과 통합적 삶, 자연주의가 여전히 반의학적 태도의 핵심에서 반복되고 있음을 보았다.


학과 반의학이 내세우는 회복과 자율의 가치 충돌에서, 우리는 의학의 이미지가 삶을 사고하는 방식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느냐는 질문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의학을 전쟁에 은유하는 것이 의학에 관한 태도를 전쟁에 관한 사고에 복속시킨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 삶을 묻기 위해 이제 우리는 의료를 따져보아야 할 텐데, 그 탐구의 여정, 삶과 의료의 틈새에서 이런 경고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의료화는 삶을 의학에 복속시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의학은 인생을 지배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가?" 이것은 단순하게 누가 지배하고 종속 당하느냐의 문제로 의료를 환원하면서 발생한 잘못된 이미지이다. 이런 생각은 현대 의학에 지배층의 권력을 위한 도구인 의학, 사회의 구속을 강화하기 위한 의학이라는 허수아비를 덧씌우게 되어, 의과학의 결실이 마치 온통 거짓일 뿐이라는 생각을 일깨운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의학사를 밝힌 수많은 의사와 학자들은 건강과 질병을 놓고 씨름했고, 치료에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한 명의 환자라도 더 돕기 위해 당직실에서 밤을 지새우는 의사, 간호사들, 혹시라도 자신의 지적 탐구가 인류에게 도움이 될까 싶어 연구에 삶을 바치는 연구자들이 옆에 있다. 이들의 노력이 지배의 도구로 격하되고 오해받는 이유는, 의학에 관한 전쟁 은유, 의료화의 은유 모두 의학을 지배-종속의 틀로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꿈꾸는 의료가 의사와 환자가 질병이라는 고난 앞에서 함께 힘을 합쳐 나아가는 것이라면, 이 꿈을 함께 그려 나가기 위해 의료를 생각할 수 있는 새로운 틀이 필요하다. 그 과제는 다음 글에서 함께 살펴주시길 부탁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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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혁 미국 펜실베이니아대학 대학원생(의료윤리학)   

@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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