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극적 요구’-‘소극적 대응’을 정경유착으로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는 명백한 증거 부족
2, 3심에서 뇌물 성격 둘러싼 법리 다툼 예상
그러나 재판부는 “이 부회장이 박 전 대통령에게 승계작업을 명시적으로 청탁한 증거가 없다”고 했다. 대신 ‘묵시적 청탁’이라는 논리를 폈다. 그리고 "묵시적 청탁의 결과로 박 전 대통령의 권한행사를 통해 이 부회장이 부당하게 유리한 성과를 얻었다는 사실도 확인되지 않는다”고 했다. 법리와 증거에 기반한 결정적 물증이 없는 상태에서 정황증거를 받아들였다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는 대목이다.
형사재판에선 범죄 사실에 대해 유죄로 판단하려면 ‘합리적인 의심이 없는 정도의 증명’이 뒷받침돼야 한다. 판사가 거리낌 없이 유죄임을 확신하는, 즉 합리적인 의심을 완전히 배제할 수 있는 증명력이 입증됐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묵시적 청탁이 이에 해당되는지 의문이다. ‘합리적인 의심을 넘는 정도’로 피고인의 유죄가 입증되지 못할 때엔 무죄추정의 원칙, 즉 ‘의심스러울 때에는 피고인의 이익으로(in dubio pro reo)’의 원칙에 따라야 한다.
이번 판결은 기업이 권력의 반복적이고 적극적인 요구에 소극적으로 응한 점을 감안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판결문에서 지적했듯이 “경제 정책에 관해 막강하고 최종적 권한을 가진 대통령”의 요구에 대놓고 거절할 수 있는 기업이 있겠는가. “박 전 대통령의 적극적 요구에 수동적으로 뇌물공여를 했다”고 하면서도 중형을 선고한 것이다. 이러한 취지의 판결이 이어진다면 앞으로 기업인들은 교도소의 담장 위를 걷는 심정으로 경영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걱정된다.
재판부는 “이 사건의 본질은 정치 권력과 자본 권력의 유착”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기소된 5개 혐의를 모두 유죄로 인정하면서 가장 낮은 수준의 형량을 선고한 것은 법리와 정치·사회 분위기 사이에서 확실한 물증 없이 판단을 내려야 하는 재판부의 고민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1심이 끝났다. 2심을 거쳐 대법원의 최종 판가름까지 치열한 법리와 증거에 의한 재판이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