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일보, 전직 교도관 증언 보도
“계엄군이 주검 싣고와 암매장”
교도소장 관사 뒷편 등 3곳 지목
“교도소 인근 28명 사망 중 17명 명단 밝혀야”
“계엄군이 주검 싣고와 암매장”
교도소장 관사 뒷편 등 3곳 지목
“교도소 인근 28명 사망 중 17명 명단 밝혀야”
옛 광주교도소 전경 사진 속 붉은 원안 1~3은 5·18 당시 교도관이 암매장 추정 장소로 지목한 장소다. 4는 시위대 중상자들이 수용된 창고, 5는 계엄군 조사실, 6은 교도소 정문 검문소. <전남일보> 제공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교도소에서 계엄군들이 연행한 시민들을 암매장했다는 전직 교도관의 증언이 나왔다. 이들 전직 교도관들은 당시 광주교도소장 관사 등 3곳이 암매장 추정지라고 구체적으로 적시해 주목된다. 향후 조사권을 갖는 5·18진상규명위원회가 꾸려져 5·18 암매장 의혹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13일 <전남일보>의 보도를 종합하면, 계엄군들이 광주시 북구 옛 광주교도소(현재 광주교도소 일곡동으로 이전) 안 3곳에 다수의 사망자를 암매장했다. 5·18 당시 광주교도소에서 근무했던 한 교도관은 자신이 직접 본 것과 동료 교도관들의 목격담 등을 토대로 계엄군들의 암매장 추정 장소로 △교도소장 관사 뒤편 △간부 관사로 향하는 비탈길 △교도소 감시대 옆 공터등 3곳을 구체적으로 지목했다.
이 전직 교도관이 지목한 광주교도소장 관사 뒤편은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의 핵심 증인이었던 고영태씨의 아버지 고 고규석(당시 37)·임은택(당시 35)씨 등 8구의 주검이 묻혀 있다가 80년 5월27일 발견됐던 곳이다. 고씨 등 담양군 대덕면에 사는 주민 4명은 5월21일 저녁 7시30분께 화물차를 타고 광주교도소를 지나가던 중 총격을 받고 고씨 등 2명이 숨졌다.
80년 5월 광주교도소에서 내·외곽 치안을 담당하는 보안과에서 재직했던 이 교도관은 “계엄군이 며칠 동안 군용 트럭에 여러 구의 주검을 싣고 와 교도소 곳곳에 암매장하는 모습을 목격했다”고 <전남일보>에 증언했다. 이 교도관은 “군인 6~7명이 야전삽을 이용해 직사각형 형태로 잔디를 걷어내고 야전삽 길이 만큼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묻고 잔디로 다시 덮었다”고 <전남일보>가 보도했다. <전남일보>는 ‘이때 나온 흙은 판초 우의에 차근차근 쌓아놓고, 남은 흙은 인근 논에 뿌리거나 먼 곳에 버리는 방식으로 시신을 묻은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며 이 전직 교도관의 증언을 전했다.
‘광주사태시 소요체포자 치료현황(이하 치료현황)’ 문건 등을 보면, 5·18 당시 광주교도소에 구금된 중상자는 150여 명으로 파악됐다. 5월18일 전남대 앞에서 붙잡혀 5월21일 광주교도소로 끌려갔던 강길조(75)씨는 계엄군의 총칼에 희생된 사망자 숫자를 쪽지에 ‘바를 정’(正)자로 표시해 52명까지 집계했다고 한다. 그는 <전남일보>와 한 인터뷰에서 “창고에서 하루에도 여러명이 죽어 나갔다. 그럴 때마다 헬기가 오르내리는 소리가 들렸다.…많은 시신들이 헬기로 이송됐거나 암매장됐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교도소 인근에서 암매장 상태로 발견된 이는 고규석씨 등 모두 11명이다. 교도소 인근에서 암매장 상태로 발견된 사례는 1건(3명)이 더 있다. 이용충(당시 26)씨는 5월22일께 광주교도소 앞 길에서 공수부대의 총격으로 사망해 암매장됐다가 5월27일 고규석씨 등 7명과 함께 주검으로 발견됐다. 서만오(운수업·1955년생)씨 등 3구의 주검도 5월26일 광주교도소 앞 야산 비탈에 묻혀있다가 서씨 가족들에 의해 발견됐다. 정수만 5·18연구소 비상임연구원은 “당시 3구의 주검 중 1구의 주검이 누구인지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문제는 계엄사령부가 80년 5월31일 ‘광주사태 진상 조사’ 결과를 보면, 이른바 ‘교도소 사건’으로 민간인 28명이 사망했다고 밝표했다는 점이다. 그런데 1995년 검찰의 관련 수사 기록에서 확인된 희생자는 고규석·이용충·서만오씨 등 11명에 불과하다. 이 때문에 향후 국방부가 교도소 관련 사망자라고 밝히고도 찾지 못한 17명의 명단부터 공개해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관련기사:
계엄사령부는 80년 5월31일 ‘광주사태 진상 조사’ 결과에서 ‘교도소 습격사건’으로 민간인 28명이 사망했다고 밝표했지만 희생자로 확인된 이는 11명에 불과하다. 사진은 당시 <동아일보> 보도 기사.
5·18 당시 수백여 명이 암매장됐다는 의혹을 37년동안 끊이지 않고 제기돼왔다. 5·18 당시 광주교도소 외 다른 곳에서도 암매장 주검이 발견됐다. 5월23일 광주시 동구 지원동 주남마을에서 11공수여단의 미니버스 총격으로 17명이 숨졌다. 당시 미니버스에 타고 있던 채수길·양민석씨 등 2명은 부상을 입고 살아남았으나 공수부대원 3명이 채씨 등 2명을 인근 야산으로 끌고가 사살하고 매장했다. 채씨의 주검은 80년 6월2일 발견됐고 주검으로 발견됐고 22년 만인 2002년 유전자 검사를 통해 신원이 확인됐다. 80년 6월2일 송암동에서도 박아무개씨가 가매장 상태로 발견됐다.
암매장과 관련한 ‘합리적 의심’의 근거는 각종 기록이다. 5·18항쟁에 참여했으나 주검을 찾지 못해 행방불명자(5·18유공자 인정)로 인정된 81명 가운데 나중에 주검을 찾은 이는 6명에 불과하고 나머지 75명의 행방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80년 5월 구속·훈방자는 2604명 중 5·18특별법에 따라 1~6차 심사 보상자 등을 제외하고 인적 사항조차 파악되지 않는이가 310여 명에 달한다. 정수만 비상임연구원은 “구속·훈방자 뿐 아니라 당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도 주소불명으로 행방을 찾지 못한 이들까지 합하면 800~900여 명이 5·18 이후 행방이 제대로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