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경찰관 등 137명 증언·자료로
‘전두환 회고록’ 조목조목 반박
북한군 수백명 활동했다?
당시 경찰 정보망에 흔적 없어
광주교도소를 폭도가 습격?
당시 교도소장 “공수여단 주둔…
습격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
광주는 무법천지였다?
금융기관들 피해 전혀 없어
‘전두환 회고록’ 조목조목 반박
북한군 수백명 활동했다?
당시 경찰 정보망에 흔적 없어
광주교도소를 폭도가 습격?
당시 교도소장 “공수여단 주둔…
습격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
광주는 무법천지였다?
금융기관들 피해 전혀 없어
지난 4월 나온 전두환 회고록은 경찰 조직에 적지 않은 내상을 입혔다. 전두환씨가 경찰의 무능으로 1980년 당시 계엄군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말했는데도 마땅히 반박할 자료가 없었기 때문이다. 회고록 가운데 문제가 된 대목은 “광주사태 초기 경찰력이 무력화되고 계엄군이 시위진압 전면에 나설 수밖에 없게 된 것은 전남경찰국장(안병하 경무관)의 중대한 과실 때문이었다”는 부분이다. 경찰 영웅이자 5·18 유공자로 선정된 선배를 폄하하는 발언에 경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강성복 전남지방경찰청장은 “5·18 경찰 책임론에 대해 진상조사나 기록이 없는 경찰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더 늦기 전에 생존 경찰관의 증언과 자료를 수집해 역사 왜곡을 바로잡고 진실을 규명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며 조사팀을 꾸렸다.
발포 명령자나 헬기 기총사격 등 진실을 찾지 못한 부분이 많지만 당시 현장에 가장 가깝게 있었던 경찰이 이제라도 말하고 밝혀야 할 내용은 네 가지 정도로 요약됐다. 시민이 무장해 군이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했고, 계엄군 철수 이후 광주시내는 범죄가 판치는 무법천지였다는 해묵은 주장이다. 또 시민군이 광주교도소를 여러차례 습격했고 북한군 수백명이 광주에 잠입해 시위를 주도하고 사라졌다는 어처구니없는 설도 대상이다. 그는 이런 터무니없는 주장들이 광주시민과 일반 국민을 이간질하는 고도의 심리전이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경찰은 시민군이 6차례 광주교도소를 습격했다는 군의 주장은 당시 교도소장의 증언으로 뒤집었다. 1980년 5월 광주교도소장이던 한아무개씨는 경찰 쪽과의 면담에서 “3공수여단 병력이 중무장을 하고 있어서 교도소 습격이란 상상할 수도 없었고, 계엄군이 시 인근 지역에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무차별 발포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대신 담양권 등 외곽으로 진출하려는 시민군의 활동을 의도적으로 과장하거나 왜곡함으로써 폭력성을 부각하기 위해 조작한 사실로 추정했다. 당시 교도소에는 공수부대 여단병력이 주둔 중이어서 카빈총으로 무장한 시민군이 공격한다는 것은 무모하고도 비현실적이었다.
경찰은 북한군 개입설을 두고는 상식 밖의 주장이라고 결론내렸다. 1980년 당시 경찰은 시위 인원, 구성 성향, 주의주장, 시위용품 등을 세밀하게 분석해 대응 방향을 정했고 계엄군이 철수한 5월21일 이후에도 광주시내 23곳에 정보센터를 운영하고 정보·보안 형사 130명이 활동 중이었다. 중앙정보부 등 다른 기관을 포함해 촘촘한 정보활동이 집중되어 있는데도 수백명의 북한군이 활동하다 일시에 사라졌다는 것은 터무니없다는 결론이다. 이를 대다수 현장 경찰관들의 증언으로 재확인했다. 당시 작성된 군과 정보기관의 서류 어디에도 이런 내용은 언급된 적이 없다.
광주시내에 강력범죄가 빈발했다는 설은 당시 경찰 신고 내용과 관련 기록, 증언을 검토한 결과 근거가 없는 것으로 결론지었다. 무장폭도에 의해 시내 일원이 살인과 약탈 등 범죄가 판치는 무법천지였다는 주장은 계엄당국의 왜곡이란 것이다. 당시 광주의 수많은 금융기관들은 피해를 전혀 입지 않았고 광주시내 질서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됐다는 게 근거다. 경찰은 생필품이 부족한데도 광주시민이 서로 돕고 배려하는 공동체 정신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