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석규
논설위원
논설위원
‘배신자’란 오명은 치명적이다. 배신자로 낙인찍는 것만큼 손쉽게 적으로 몰아갈 수 있는 수단도 없다. 독일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의 말대로 ‘정치적인 것’의 본질이 ‘적과 동지의 구별’이라면, 누군가를 배신자로 지목하는 것이야말로 고도의 정치 행위다.
배신자 낙인을 누구보다 능란하게 활용한 정치인이 박근혜다. 국무회의에서 ‘배신의 정치 응징’을 공언했고, 실제로 유승민을 배신자로 몰아 찍어냈다. ‘배신자 응징’이 곧 ‘통치 이데올로기’였다. ‘최순실에게 배신당한 가녀린 공주’로 행세하면 상황이 반전될 거라고 믿는 걸까. 옥중에서도 “한 사람에 대한 믿음이 배신으로 돌아왔다”며 주술처럼 배신론을 되뇌고 있다.
배신은 상대적 개념이다. 내가 하면 대의, 남이 하면 배신이다. 배신당했다는 사람은 많아도 배신했다는 사람은 드물다. 이 대목에서 홍준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살인범도 용서하지만 배신자는 용서하지 않는다는 게 티케이(TK) 정서다.” 유승민을 졸지에 ‘살인자보다 못한 배신자’로 만들었던 이 말이 ‘박근혜 출당’을 주도하고 있는 홍준표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배신은 신의를 전제로 한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면 배신감에 몸을 떨지만, 애초 신뢰하지 않았다면 배신감 느낄 이유도 없다. 박근혜와 홍준표는 믿음과 의리를 나눈 사이가 아니니 출당에 앞장섰다고 홍준표에게 배신자 딱지를 붙이긴 애매하다. 문제는 이걸 혁신이라고 우기는 억지다. 정치생명이 끝난 옥중의 전직 대통령을 출당해 ‘부관참시’한다고 그 당이 새롭게 거듭날 리 없다.
홍준표가 반발을 감수하며 박근혜를 출당하고 서청원·최경환을 제거하려는 이유는 자명하다. 자유한국당으로 돌아오려는 김무성 일파에게 최소한의 복당 명분을 주려는 것이다. 바른정당을 창당한 게 불과 9개월 전이다. 김무성은 창당대회에서 ‘가짜 보수’와 결별하겠다며 무릎 꿇고 대국민 사과문을 직접 낭독했다. 그랬던 사람이 탈당 행렬 선봉에 섰으니 ‘허무개그’가 따로 없다. 바른정당을 지키려는 쪽에서 보면 김무성은 배신자일 수밖에 없다.
김무성에겐 강렬한 ‘배신의 추억’이 있다. 박근혜에 대한 배신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탄핵에 앞장선 건 국민 다수의 뜻을 따랐으니 배신이 아니라 대의였다. 하지만 유승민에겐 차마 못 할 일을 했다. 원내대표 유승민의 ‘목을 치는 악역’을 수행한 사람이 바로 김무성이다. ‘배신자 응징’이란 박근혜의 ‘국무회의 교시’를 충실히 받들어 원내대표 사퇴 권고서를 직접 전달했다. 믿었던 동지가 배신하면 누구든 속수무책으로 무장해제되고 만다. 버티던 유승민도 ‘비박 동지’ 김무성이 나서자 스르르 무너져내렸다. 2015년 7월이었다.
2015년 7월 8일 김무성 당시 새누리당 대표가 ‘유승민 원내대표 사퇴 권고안’을 전달하려고 의원회관 유승민 의원실로 향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배신자는 때로 희생양을 필요로 한다. 엄청난 비난이 쏟아질 때 책임을 지우고 돌팔매를 대신 맞아줄 눈속임용 제물 말이다. 어쩌면 박근혜는 김무성의 배신을 위한 희생양일 수 있다. ‘자유한국당 1호 당원증’을 몰수하고 보수를 몰락시킨 원죄를 덮어씌워 박근혜를 쫓아낸 뒤에야 김무성은 유유히 돌아올 것이다.
‘비운의 공주’가 되길 희망하는 박근혜 역시 주어진 희생양의 소임을 애써 피하지 않으려 한다. 역대 대통령들과 달리 스스로 탈당계 내기를 거부하고 출당을 감수하며 기꺼이 제물을 자임하고 나섰다. 유승민 밑에서 옹색하게 지내느니 민망하더라도 자유한국당으로 돌아가 ‘거물’로 행세하려는 김무성, ‘희생양 코스프레’를 펼치며 재기의 발판을 도모하려는 박근혜, 두 사람의 이해관계가 기막히게 맞아떨어지는 지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