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득불 해야 할 복음증거
고린도전서 9:16-23
어떤 목사님의 설교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미국행 비행기를 타고 한 두 시간 정도 갔을 때 승무원의 다급한 기내방송이 들렸습니다.
비행기 안에 응급환자가 발생했는데 혹시 의사분이 계시면 앞으로 나와 달라는 것입니다.
목사님 옆의 한 분이 그 방송을 듣고 앞으로 나갔다가 얼마 후 옷에 여기저기 피를 묻힌 모습으로 돌아왔습니다.
수고했다고 인사를 하고 대화를 나누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의사는 분명히 의사로서 이 비행기를 탄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저 의사의 일을 뒤로하고 여행을 위해 비행기를 탔을 것입니다.
그러나 응급환자가 발생했다는 순간 이 의사는 여행객으로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의사의 책임이며 숙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사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환자를 돌보는 책임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이 책임을 다할 때 의사는 의사로서의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에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권리와 함께 책임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의사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환자를 돌보는 책임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부모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자녀들을 잘 양육하고 인도하는 책임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대통령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이 나라와 백성을 지키고 보호하는 책임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이 책임을 다할 때 부름 받은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엉뚱한 일을 할 때 그는 역할을 잘 감당하지 못한 존재로 낙인찍히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부름 받았다고 하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갈릴리 호수를 다니시며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습니다.
‘나를 따라 오라’고 부르신 주님은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고기 낚는 어부를 제자로 부르실 때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책임으로 제자들을 부르시고 우리를 부르신 줄 압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고 주님을 따라가는 성도들은 그 부름에 합당한 책임이 주어졌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조선에 들어온 최초의 선교사 중 한 명인 언더우드 선교사의 초기 선교 보고에 ‘보이지 않는 조선의 마음’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주여,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주님,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 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고 있는 땅에 저희들을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그 넓고 넓은 태평양을 어떻게 건너왔는지 그 사실이 기적입니다.
주께서 붙잡아 뚝 떨어뜨려 놓으신 듯한 이곳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은 고집스럽게 얼룩진 어둠뿐입니다.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사람뿐입니다.
그들은 왜 묶여 있는지도 그것이 고통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고통을 고통인 줄 모르는 자에게 고통을 벗겨주겠다고 하면 의심부터 하고 화부터 냅니다.
조선 남자들의 속셈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 나라 조정의 내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가마를 타고 다니는 여자들을 영영 볼 기회가 없으면 어쩌나 합니다.
조선의 마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해야 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은 예배드릴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고
그저 경계의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이곳이지만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되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주여! 오직 제 믿음을 붙잡아 주소서.
여러분, 언더우드를 비롯한 수많은 선교사들이 조선 땅에 들어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데에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사명이 주어졌음을 믿고 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이 멀고만 조선 땅에,
어둠과 가난과 인습에 묶여 있는 조선 땅에 발을 디딘 것입니다.
주님은 모든 당신의 제자들을 향하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다는 것은 복음 증거의 책임과 사명을 받았다는 말에 다름 아닙니다.
이 책임을 얼마나 잘 느끼고 감당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주님께 칭찬받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책망 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책임과 사명을 철저하게 깨달은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께 부름 받으면서 자신은 주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해 택한 주님의 그릇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 책임과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그는 세 번에 걸쳐 선교 여행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가는 곳 마다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많은 반대와 고통과 어려움을 당했는가는 그의 간증을 통하여 생생하게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복음을 위하여 이렇게 애쓰고 힘쓰고 있었을 때 가장 정성을 기울여 세운 고린도교회에서 이상한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사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증거로 바울이 사도로서의 권리를 요구하지 않는 것을 예로 들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자신의 사도직과 효과적인 복음 증거를 위해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 본문에서는 자신의 복음 증거에 대한 자세와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밝히고 있는 사도 바울의 복음 증거는 무엇보다도 부득불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부득불 할 일이라는 말을 다른 성경번역에 보니까 ‘마땅히’ ‘필연적으로’ ‘반드시’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자랑할 차원이 아니라 부득불 할 일임을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복음을 전하는 일이 부득불, 마땅히, 필연적으로, 반드시, 어쩔 수 없이 해야 할 일이겠습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구원의 유일성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그를 믿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을 믿는 자 외에 누구도 인간을 구원할 사람이 없습니다.
오직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이 진리를 분명하게 믿는 바울은 부득불 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복음밖에 구원의 방법이 없는데 이 구원의 복음을 나에게 맡겨주셔서 사람을 구원하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이 복음을 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부득불 어쩔 수 없이 반드시 복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8,90년 전에 한 부인이 이유도 알 수 없이 사경을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제법 양반집 가정이고 여유가 있어서 유명하다는 의사, 좋다는 약을 다 썼습니다.
그래도 차도가 없이 죽어가자 이 부인이 마지막 소원이라며 제발 교회에 가게 해 달라고 사정하였습니다.
죽어가는 사람 소원을 못 들어주겠냐? 며 허락을 하였습니다.
허락을 받은 이 부인이 열심히 교회에 다니며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은 살아계셨고 이 부인을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기적적으로 병에서 회복되었고 건강하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부인은 열심히 교회에 다니게 되었는데 문제는 이 때부터 이 가정에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래도 양반 집인데 어떻게 우리 가문에서 교회에 다니게 할 수 있느냐?
그렇다고 다른데서 고칠 수 없었던 병을 교회에 가서 고쳤는데 교회에 가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고민 끝에 부인에게 두 가지를 제시합니다.
교회에 나가지 않고 우리 가정에서 여유 있게 살든지 아니면 우리 가정을 떠나 멀리 지방으로 내려가 예수를 믿으면서 혼자 살던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입니다.
이 부인은 자기를 구원해주신 주님을 버릴 수가 없었고 믿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헤어지는 아픔이 있었지만 지방에 홀로 내려와 어려운 살림을 해 가면서 자기 병을 고치고 자기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해주신 주님을 믿고 증거 하였습니다.
그래서 설립된 교회가 충북 괴산군에 있는 괴산 남 교회입니다.
여러분,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복음증거는 부득불 전해야 할 책임이며 사명입니다.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저들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알고 있는 성도들이 어떻게 가만히 앉아있을 수 있겠습니까?
지옥에 들어가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알고 있는데 지옥 가는 자들에게 어떻게 천국 가는 길을 알리지 않겠습니까?
마땅히 당연히 해야 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나 때문에 구원을 받지 못하고 멸망 길에 빠진다면 우리가 어떻게 그 책임을 면할 수 있겠습니까?
열왕기하 7장에 보면, 아람과 이스라엘과의 전쟁이 나오는데,
아람 왕 벤하닷이 사마리아 성을 둘러싸고 성을 고립시키는 작전을 구사합니다.
자연히 성안의 식량과 물이 동나서 엄청난 기근에 시달리게 되는데, 심지어 자녀들을 먹는 초유의 일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이때 사마리아 성과 아람의 포위망 사이에 살고 있던 문둥병자들이 기왕 죽을 것 아람진영에 가서 구걸이나 해보자는 이판사판 생각으로 아람 진영을 찾아갑니다.
가서보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는데 모든 물자와 장비만 남겨두고 사람은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천지였습니다.
지금껏 굶주렸던 배를 채우고 보물들을 찾아 숨기고 한참 법석을 떨던 문둥병자들이 한순간 하던 일을 멈춥니다.
지금 성안에서는 굶주려 죽어가는 백성들이 얼마나 많은데 이 구원의 사실을 알리지 않고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것인가?
어떻게 굶어죽는 사람들을 구원할 길이 있는데 그 구원의 길을 알리지 않고 그 구원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내 배나 채우고 내 욕심이나 채울 수 있는가?
그 시로 사마리아 성으로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려 그들을 구원하게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복음증거는 부득불 마땅히 필연적으로 해야 할 일인 줄 믿습니다.
복음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할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구원의 방법을 알고 있는 우리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복음 증거를 사명으로 받았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사명은 사신이나 사절이 받은 명령 혹은 맡겨준 임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주님으로부터 이 복음증거의 임무와 명령을 받았습니다.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주님이 맡겨주신 명령이나 임무 앞에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그 일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자세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어떻게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를 자신이 여러 모양이 되었다는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은 모든 사람에게 자유롭지만 스스로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을 얻기 위해서 유대인들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이 율법 없는 자였지만 율법 있는 자같이 된 것은 율법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의 율법아래에 있는 자신이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구원하고자 함이라고 말합니다.
약한 자들에게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였다고 말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보면서 그가 얼마나 맡겨준 복음증거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얼마나 복음 증거의 사명, 주님이 맡겨주신 임무와 명령 앞에 충성을 다하고 있습니까?
정말 사도 바울처럼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은 복음증거를 위해 그렇게 호락호락한 상황이 아닌 줄 압니다.
이런 시대에 어떻게 저런 구태의연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때때로 우리가 복음 전하는 자들을 비난할 때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런 비난을 쏟아내기에 앞서 과연 우리는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였는지 한 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복음 전하는 자들을 비난만 하는 모습만 보여서는 안 될 줄 압니다.
현명하기로 소문난 왕에게 한 젊은이가 찾아와 어떻게 하면 내가 성공할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왕은 그릇에 물을 따르게 하고 젊은이에게 엄하게 명령합니다.
‘이 그릇의 물을 조금도 흘리지 않고 궁궐을 한 바퀴 돌아오너라.’
‘만약 물을 조금이라도 흘리면 네 뒤를 따라가는 내 신하가 네 목을 칠 것이다.’
졸지에 생명의 위협을 당한 이 젊은이는 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여 궁궐을 돌아 다시 임금님에게 왔습니다.
그의 이마에는 식은땀이 송송 배어 있었습니다.
‘궁궐을 돌면서 너는 무엇을 보았느냐?’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무슨 소리를 들었느냐?’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 네가 성공하기 원한다면 지금처럼 네 맡겨준 일에 집중하면 될 것이다.’
성도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맡겨준 복음 증거의 사명에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이것저것 세상 것에 신경 쓰지 마시고 맡겨준 사명 앞에 집중하시고 집중하여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주님은 여러분들을 잘 했다 칭찬하시고 여러분들에게 놀라운 상을 주시고 여러분의 삶은 승리하는 삶, 가장 보람된 삶이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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