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에 의한 조선인 위안부 학살 사실을 기록한 미·중 연합군의 영상이 공개됐다. 아시아·태평양전쟁 패전 직전인 1944년 중국 윈난성 텅충(騰沖)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이 학살된 후 버려진 모습을 담은 19초 분량의 흑백영상이다. 일본군이 위안부를 학살했다는 증언과 기사 등이 공개된 적은 있지만 학살 현장이 촬영된 영상이 공개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서울시는 3·1절 99주년을 기념해 27일 시청사에서 개최한 한·중·일 ‘일본군 위안부 국제컨퍼런스’에서 일본군이 조선인 위안부를 학살했음을 보여주는 영상을 처음으로 공개했다. 영상은 서울시와 서울대인권센터 정진성 교수 연구팀(서울대 연구팀)이 2016년과 2017년 두 차례 실시한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 현지조사에서 발굴한 것으로 촬영된 지 70여년 만에 세상에 공개됐다. 서울시와 서울대 연구팀은 이 영상자료 1점을 비롯해 사진자료 2점, 당시 미·중 연합군이 작성한 작전일지를 비롯해 일본군의 위안부 학살 사실을 뒷받침하는 문서 14점도 함께 공개했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계속된 증언에도 불구하고, 학살을 실증적으로 입증할 문서를 요구하면서 학살설을 부정했다. 학살된 위안부들의 시신을 찍은 사진에 대해서도, 미·중 연합군의 포격 및 폭격으로 희생되었거나 자결했을 것이라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시와 연구팀은 “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특히 전시에 여성을 전쟁터로 동원하고 성적 ‘위안’의 도구로 사용하다가 최후에 ‘특종군수품’ 폐기라는 발상으로 학살하는 일은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하며, 이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인정하고 사과해야만 이런 상황의 반복을 막을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다”고 밝혔다.
이번에 연구팀이 공개한 자료는 1944년 9월 중국 송산과 텅충에 주둔했던 일본군을 공격한 미·중 연합군이 생산한 것이다. 영상에는 조선인 위안부들이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한 후 버려진 참혹한 모습이 담겨있다. 주변에는 시신을 매장하러 온 것으로 보이는 중국군 병사들의 모습도 보인다. 연합군 164통신대 사진중대 B파견대의 볼드윈 병사가 같은해 9월15일 촬영한 것으로, 영상 속 장소는 중국 윈난성 텅충으로 추정된다.
패전이 임박한 1944년 9월 중국 송산과 텅충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에게 당시 일본 작전참모였던 츠지 마사노부 대좌는 “지원병력이 도착하는 10월까지 계속 저항하라”는 사실상‘옥쇄’(강제적 집단자결) 지시를 내렸고, 이를 거부했던 조선인 위안부들은 일부 민간인들과 함께 일본군에 의해 살해당했다. 당시 중국 송산에는 24명, 텅충에는 최소 30명 이상의 위안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연합군은 같은 해 6월부터 중국-미얀마 접경지대인 중국 윈난성 송산과 텅충의 일본군 점령지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 9월7일 송산을, 1주일 뒤인 14일에 텅충을 함락했다. 송산과 텅충에는 각각 2000여 명의 일본군 수비대(송산 56사단 113연대 주력, 텅충 148연대 주력)와 조선인 위안부들이 민간인들과 함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송산에서 조선인 여성 6명, 텅충에서 13명의 여성이 포로로 잡혀 생존했고, 나머지는 옥쇄를 거부하다 일본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일본군의 위안부 총살은 텅충 함락 직전인 13일 밤 탈출에 앞서 이뤄졌다.
연구팀은 당시 연합군이 일본군의 조선인 위안부 학살을 분명히 인지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연합군 보고문서도 함께 공개했다. 연합군이 9월14일 오후 6시55분에 보고한 정보 문서를 보면, “(1944년 9월)13일 밤 일본군은 성(중국 윈난성 텅충) 안에 있는 조선인 여성 30명을 총살했다.(Night of the 13th the Japs shot 30 Korean girls in the city)”고 기록돼 있다.
이번에 공개된 영상은 서울대 연구팀이 앞서 2016년 수집한 조선인 위안부 학살현장 사진 원본(2장)과 같은 곳에서 촬영된 것으로 확인됐다. 연구팀은 전쟁 당시에는 사진촬영과 영상촬영이 함께 이뤄졌었다는 점에 주목해 2016년 위안부 학살 사진 수집 이후 그 후속작업으로 영상에 대한 수개월간의 목록화 과정을 진행해 1년 만에 영상 발굴에 성공했다.
연구팀은 이번에 발굴한 영상과 2016년 수집한 사진원본이 각도만 다를 뿐 동일한 장소에서 촬영된 것을 입증할 수 있는 근거로 영상과 사진 속 시신의 옷차림, 매장을 하러 온 것으로 보이는 사진 속 중국군 병사가 영상 속에도 등장하는 점 등을 제시했다. 앞서 공개된 사진 자료는 텅충에서 조선인 위안부가 학살된 모습을 담은 2장이다. 영상 속에는 사진에 등장하는 중국 병사가 시신의 양말을 벗기는 모습이 나온다.
이날 콘퍼런스에서는 서울대 연구팀의 강성현 교수와 국사편찬위원회 황병주 편찬연구관이 발표자로 나서 일본군 위안부 관련 연합군번역통역부가 생산한 모든 자료들을 소개했다. 강성현 교수는 “일본정부가 위안부 학살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상황에서 전쟁 말기에 조선인 위안부가 처했던 상황과 실태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는 자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여성들의 전쟁과 평화자료관(WAM)’의 와타나베 미나 사무국장은 ‘위안부 아카이브의 현황과 전망’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역사수정주의 정권의 장기화, 교과서나 박물관에서의 위안부 관련 기술 삭제, 언론·지식인 등의 학습부족과 무관심 등 일본 사회에서 일본군 위안부가 잊혀지고 있는 현실에서 위안부 자료의 기록과 아카이브의 중요성에 대해 발표했다. 중국 길림성당안관의 자오위제, 뤼춘위에 연구관원은 길림성당안관에 보관된 일본의 중국 침략 기록문서와 발굴 상황에 대해 소개하고, 일본군 가족의 위안소 공정(公定)요금 이용에 관해 새로 발굴한 기록을 발표했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 중인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할머니는 영상 메시지로 인사를 전했다. 김 할머니는 “언젠가는 끝이 날 때가 오지 않겠나. 전세계가 다 아는 일을 일본만 아니라고 하는게 말이 안된다. 역사는 역사다”라며 “언젠가는 해뜰날 오겠지. 모진 병이 들려서 가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서울시는 지금까지 발굴한 문서, 증언, 사진, 영상 자료를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대중 콘텐츠 제작 등에 활용할 예정이다. 오는 3월에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과 사료를 교차분석한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 사례집을 시리즈로 출판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