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정보원장 재직 시절 박근혜 전 대통령(66)에게 특수활동비 8억원을 부당 제공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이병기 전 국정원장(71)이 법정에서 “박 전 대통령에게 배신감을 느꼈다”고 주장했다. 청와대 예산을 지원하는 차원에서 특활비를 건넸을 뿐 박 전 대통령이 사적인 용도로 사용할 줄 몰랐다는 취지에서다. 남재준 전 국정원장(74)와 이병호 전 국정원장(78)도 이 같이 주장하며 뇌물공여 혐의를 부인했다.
이병기 전 원장은 15일 서울중앙지법 형사32부(재판장 성창호 부장판사) 심리로 진행된 ‘국정원 특활비 상납’ 사건의 첫 공판에서 “이런 자리에 앉게 된 데에 국민 여러분께 송구하다”며 이 사건에 대한 심경을 토로했다. 이병기 전 원장은 “(박 전 대통령에게) 올려드린 돈이 제대로 된 국가운영에 쓰일 것으로 기대했는데, 기대가 반대로 돼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검찰)조서에도 썼지만 배신감을 느낄 정도였다”고 말했다.
검찰 조사 결과 박 전 대통령은 2013년부터 2016년까지 남재준·이병기·이병호 전 국정원장에게 특활비 35억원을 상납받고, 이를 기치료·운동치료·주사 비용과 차명폰 구입 비용 등으로 사용했다. 특활비 전달을 담당한 이재만·안봉근·정호성 전 청와대 비서관 등 ‘문고리 3인방’에게 활동비·휴가비 명목으로 특활비를 지급한 사실도 드러났다.
전직 국정원장들은 모두 “특활비를 전달한 사실은 인정하나, 대통령이 사적으로 사용하는 지는 전혀 몰랐다”며 뇌물공여 등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박 전 대통령이 국정원 특활비를 국정운영에 사용할 것으로 믿고 건넸을 뿐, 대가를 바라고 특활비를 뇌물로 건네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이병호 전 원장 측은 “사용처를 박 전 대통령에게 물어볼 수도 없었다”고 밝혔다.
검찰은 국정원 업무 전반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대통령에게 인사와 예산 편성 등과 관련한 편의를 제공받으려는 목적으로 국정원장들이 특활비를 뇌물로 상납했다고 주장했다. 검찰은 “국정원 특활비의 용처는 ‘사건수사 및 정보수집 활동’ 등으로 제한돼있다”며 “국정원 예산을 책임지는 국정원장이라면 대통령의 특활비 사용처를 확인할 의무가 있다. 확인이 안되면 주지 말았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병호 전 원장은 이날 “이 사건은 개인비리의 문제가 아닌 제도적 미비에 따른 것”이라며 “뇌물공여 혐의는 개인적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직접 말했다. 남 전 원장은 ‘추가로 하고 싶은 말이 있나’는 재판부의 질문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병호 전 원장과 남 전 원장은 박 전 대통령에게 각각 21억원·6억원의 특활비를 상납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국정원장 특활비를 청와대에 직접 건네는 실무 역할을 맡은 이헌수 전 국정원 기획조정실장도 이날 함께 법정에 섰다. 이 전 실장은 “특활비 상납을 끊었어야 했다. 다른 국정원장님들이 고초를 겪게 돼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 전 실장은 2014년 경제부총리였던 자유한국당 최경환 의원에게 1억원의 특활비를 건넨 혐의를 제외한 나머지 공소사실을 대체로 부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