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모론은 대중사회가 출현한 이후 더 기승을 부린다. 음모론을 받아들이고 전파할 사람이 많을수록 음모론의 위력도 커지기 마련이다. 여기에 국제화·세계화가 진척되고 정보화 혁명이 더해지면서 음모론은 유례없는 질적 도약기를 맞고 있다.
음모(론) 정치는 이런 민주주의 원리를 모두 파괴한다. 대중은 참여의 주체가 아니라 선동 대상이 돼 적대감을 키우도록 요구받는다. 또 정당의 대표성을 인정하고 키워나가기보다는 대중의 정서를 겨냥한 포퓰리즘 행태가 우선한다.
“뭔가 오래전부터 기획된 것이 아니냐 하는 그런 느낌도 지울 수가 없어요.”
나라를 바로잡으려는 대규모 촛불집회가 계속되던 2017년 1월,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한 보수 인터넷 매체를 통해 제기한 음모론이다. 음모를 꾸며본 사람일수록 음모론에 쉽게 쏠리는 법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과 관련된 온갖 국정농단 의혹은 거의 사실로 확인됐다. 성추문을 폭로하는 미투 바람이 정치권으로 확산하자 음모론이 거론되는 것도 우리나라 정치의 오랜 행태와 무관하지 않다.
음모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정치 수단이다. 음모와 일맥상통하는 책략은 대개 잘못 구사하거나 부족해서 문제였지 그 자체가 기피 대상은 아니었다. 사실 ‘일을 꾸미고 이뤄나가는 교묘한 방법’이 없다면, 정치와 거의 동의어로 쓰이는 권력 투쟁은 성립하기조차 어렵다. 음모론은 대중사회가 출현한 이후 더 기승을 부린다. 음모론을 받아들이고 전파할 사람이 많을수록 음모론의 위력도 커지기 마련이다. 여기에 국제화·세계화가 진척되고 정보화 혁명이 더해지면서 음모론은 유례없는 질적 도약기를 맞고 있다.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음모론이 횡행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거꾸로 음모론의 빈도와 형태는 그 시대의 모습을 보여주는 징표가 된다. 이런 면에서 지금 시대는 난세임이 분명하다.
현재 지구촌에서 성행하는 음모론은 명확한 의도를 가진 ‘정치적 음모론’이 주류다. 상대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거나, 상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해 권력을 강화하는 게 최우선 목표다. 음모론의 유포와 음모가 함께 이뤄지는 사례도 적잖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댓글·블랙리스트 공작을 ‘종북좌파 색깔론’과 함께 진행한 게 그렇다.
정치적 음모론의 일반적 형태는 체제 전복을 꾀하는 나라 밖의 적을 설정하고 이를 나라 안 정치세력과 연결하는 것이다. 유럽 나라들의 경우 주요 적은 밀려드는 이주민이다. 이들은 범죄자와 테러범의 온상이자 국가 정체성을 흔들고 결국은 체제를 파괴할 위험집단으로 상정된다. 어느 인구집단에나 나타나는 이민자의 작은 범죄가 과장되고, 살길을 찾아 떠도는 난민이 옛 몽골 기병과 같은 침략자로 규정된다. 이들에 온정적인 정치세력은 나라를 떠넘기려는 반역자가 돼버린다. 여러 나라에서 극우세력이 세를 넓히는 것은 대중의 불안 심리에 기댄 음모론의 힘을 보여준다. 기존 정치를 믿지 못하는 대중은 알면서도 속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는 이에 더해 ‘미국의 부를 빼앗는 무역 도적’이라는 외부 적을 하나 더 설정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수입 철강·알루미늄에 대한 고율의 관세 부과를 시작으로 지구촌 전체를 향해 무역전쟁의 닻을 올렸다. 그는 미국이 적자를 보는 무역은 모두 잘못이라는 상식 밖의 논리를 내세우지만, 지지자들은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는 중국 체제를 비난하는 외국과 이에 동조하는 모든 중국인이 적이다. 서구식 자유민주주의 자체가 음모론의 대상인 셈이다. 이에 더해 부패한 관료와 기업인도 체제를 위협하는 존재로 척결 대상이 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에게는 ‘위대한 강대국 러시아의 부활’을 막는 모든 이가 적이다. 두 사람은 이런 적들의 음모를 내세우며 장기 집권을 꾀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외부 적이 있다. 북한이다. 정치적 음모론에 익숙한 이들에게 북한은 ‘만능 괴물’이다. 음모론을 유포하는 주체가 이제 박근혜·이명박 정부 때처럼 정부 기관이 아니라 자유한국당과 일부 극우세력으로 줄었으나, 그 위력이 사라진 건 아니다. 자유한국당은 대북 포용정책을 주장하는 더불어민주당뿐만 아니라 문재인 정부 자체를 내부의 적으로 공격한다. 음모론을 뒷받침할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주사파의 청와대 장악’이라는 근거 없는 궤변이 시도 때도 없이 등장하고, 과거 군사정권 시절의 관변단체를 뿌리로 하는 극우 시위대는 이런 궤변을 거리에서 외친다. 북한 관련 음모론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보수세력을 결집하고 군사대국화를 추구하는 주된 빌미이기도 하다.
미국의 언론인·작가인 크리스토퍼 히친스는 ‘음모론은 민주주의의 배기가스’라고 했다. 그의 말대로 여러 정치세력의 자유로운 경쟁을 필수 요소로 하는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음모론이라는 ‘정보의 찌꺼기’가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음모론은 인류의 값진 유산인 민주주의를 뒤흔든다는 점에서 단순한 찌꺼기에 그치지 않는다.
무엇보다 앞으로도 전략적인 목표 아래 음모론을 조직적으로 유포하고 음모를 꾀할 이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과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브렉시트)를 주도한 미국과 영국의 국수주의자들, 주류 정당에까지 침투한 유럽 대륙의 극우세력,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대표하는 일본 우익, 서방의 정치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허위·과장 정보를 유포하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러시아 정부, 시진핑의 장기 집권을 꾀하는 중국의 강경 민족주의자, 우리나라의 극우파 등이 그들이다.
20세기를 대표하는 경제학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자본주의·사회주의·민주주의>라는 책을 쓴 조지프 슘페터는 ‘민주주의는 엘리트 사이의 선거 경쟁을 통해 정부를 구성하는 체제’라고 했다. 이른바 ‘가장 좁은 의미의 민주주의’다. 그는 이런 민주주의가 성공하기 위해서도 네 가지 조건이 요구된다고 했다. 우선 정당, 의회, 내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충분히 높은 자질을 갖춰야 한다. 아울러 정치적 결정의 범위가 지나치게 확대돼선 안 된다. 정치는 국민 일반이 완전히 이해하고 심각한 의견을 표명하는 문제만을 취급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리고 아마추어에 의한 통치라는 덫에 빠지지 않으려면, 강력한 의무감과 이에 못잖게 강력한 단결심을 구비한 잘 훈련된 관료의 서비스가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민주주의적 자제’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민주주의 자체를 파괴할 수 있는 주장과 행동에 대한 유혹을 극복해야 한다.
음모(론) 정치는 이들 조건 가운데 첫번째와 네번째에 정면으로 어긋난다. 음모(론) 정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상대의 파괴를 추구함으로써 증오와 갈등을 키운다. 선진국을 자처하는 나라들에서도 민주주의적 자제가 무시되는 현실은 자유민주주의의 취약점을 드러낸다. 물론 러시아와 중국식의 권위주의가 그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음모(론) 정치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민주주의의 앞날은 험난하다. 민주주의 이론의 권위자인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는 민주주의의 핵심 원리로 참여, 대표, 책임성을 꼽는다. 민주주의는 대중참여의 정치를 의미하므로, 참여는 가장 기초가 되는 원리다. 또 현대 민주주의는 정당 중심의 대표 체제에 근간을 두고 있어, 모든 사회 갈등을 포괄할 수 있는 경쟁적 정당체제가 중요하다. 여기에다 ‘선거를 통해 선출된 정부가 재임 동안 대표적이고 민주적일 수 있도록 묶어내는 제도적 장치’가 있어야 책임성이 담보된다.
음모(론) 정치는 이런 민주주의 원리를 모두 파괴한다. 대중은 참여의 주체가 아니라 선동 대상이 돼 적대감을 키우도록 요구받는다. 또 정당의 대표성을 인정하고 키워나가기보다는 대중의 정서를 겨냥한 포퓰리즘 행태가 우선한다. 무역전쟁을 시작한 트럼프 대통령처럼 일단 상대를 공격하고 보는 돌격대식 행동과 ‘모든 이민자(또는 실체를 알기 어려운 종북세력)를 축출하겠다’는 식으로 자신이 설정한 적의 전면 파괴를 내세우는 ‘싹쓸이 공약’이 성행하게 된다.
민주주의는 주권자인 민(인민·국민·민중)이 지배하는 정치 체제다. 핵심은 민의 폭넓은 참여, 주기적인 선거, 정체성 있는 복수 정당, 치열한 정책 경쟁, 책임 있는 실천이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도 빠져선 안 된다. 우리나라는 꾸준한 노력을 통해 기본 제도는 모두 갖추고 있지만, 주기적 선거 외엔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 민주주의 심화와 음모(론) 정치는 정확하게 반비례 관계에 있다.
김지석 대기자 jkim@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