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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익 칼럼] 고흐의 증례

성령충만땅에천국 2018. 3. 31. 03:42

[김병익 칼럼] 고흐의 증례

등록 :2018-03-29 18:42수정 :2018-03-29 19:08

 

김병익
문학평론가

그 망연한 생각들에 젖던 밤, 나는 미국의 마종기 시인에게 보낸 메일에 이런 구절을 보탰다. 이 세계가 허망하기에 신뢰를 지켜야 한다는 것, 이 시대가 죄스럽기에 존중할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 사회가 위선이기에 관용이 필요하다는 것, 인간들이 포악한 존재이기에 선의가 피어나야 한다는 것, 삶이 고통스럽기에 유머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해 내가 가진 이미지는 광야에서 외치는고독한 세례 요한의 모습이다. 젊었을 때 읽은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가 깊이 박아준 인상이었다. 무대에서 공중으로 부상한 발레리노 니진스키가 신과 절망적인 대화를 했다는 묘사와 함께 화가 고흐가 고통받는 선지자적 영상으로 잊히지 않고 남은 것은 그 책에 빠질 즈음 신을 잃은 허망감에 깊이 젖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러시아의 무용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희미해졌지만, 고흐에 대해서는 그의 그림과 그에 대한 글들, 동생 테오와 나눈 편지들 덕분에 자주 환기되었고, 가려진 그의 생애에 대한 궁금증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스티븐 네이페와 그레고리 화이트 스미스의 <화가 반 고흐 이전의 판 호흐>를 읽은 것은 내가 알 수 없었던 그의 삶의 실제를 확인해 그를 탈신비화하고 싶어서였다. 1천쪽의 <판 호흐>는 내가 본 어떤 전기보다 길고 객관적이며 자상했기에 고흐(옮긴이 최준영은 굳이 네덜란드 음일 판 호흐로 표기했다)에 대한 내 궁금증은 거의 풀렸다. 우선 사후에는 최고의 값으로 거래되었지만 생전에는 단 한 점만 팔렸다는 그의 그림의 구입자는 누구였을까란 의문은 벨기에 화가 외젠의 누이가 <붉은 포도밭>400프랑(지금이라면 얼마가 될까?)에 구입했다는 것으로 풀렸다. 그 그림이 팔릴 즈음의 그는 <판 호흐>에 따르면 거리를 배회하다 정신을 놓은 채 자신이 누구인지, 그곳이 어디인지, 왜 거기 있는지 기억도 못 하고정신병원에서 치료받아야 할 지경에 던져져 있었다.

누구의 주목도 받아보지 못했고 스스로도 자신을 재주 없는 환쟁이로 생각한 그가 프랑스 혁명 100주년 기념 박람회의 전시회에 출품한 그림으로 한 젊은 비평가로부터 뜻밖의 극찬을 받는다. 최초로 그를 조명한 사람은 법학 공부만 제외하고 시, 비평, 소설, 희곡, 그림에 펄펄 끓는 재기를 발휘한 젊은 법학도알베르 오리에였다. 발작 속에 광적으로 일그러진 만물은 분노의 지경까지 이른다. 형태는 악몽이 된다. 비정상적으로 강렬하게, 심지어 고통스러울 정도로 강렬하게, 끓는 용암으로 예술의 협곡에 쏟아부은고흐에게서 그는 저주받은 시인이고 설교자, 예언자이자 낯선 자를 발견한다. 그의 그림은 이 평을 받은 후에 팔렸고 정신병원에 수감된 고흐에 대한 인식도 극적으로 달라져 생애의 마지막에야 비로소 화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고흐의 뜨거운 존경에도 불구하고 그와의 동인 활동을 걷어치운 고갱이 그를 다시 보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프로방스의 노란 집에서 자화상 때문에 고갱과 다투고는 자기 귀를 잘라 그에게 보이고 따졌다는 극적인 에피소드는 좀 달랐다. 고흐는 독특한 화풍의 고갱과 함께 동인으로 작업하고 싶었고 남태평양에서 돌아온 그에게 이 뜻을 간곡하게 호소했다. 두 화가는 드디어 프로방스에서 함께 작업을 시작하게 되지만, 이미 높은 평가를 받고 권위를 자부하는 고갱과 아직 아마추어 수준으로 자평하면서도 완강하게 자기를 고집하는 고흐 사이가 결코 원만할 수 없었다.

고갱이 자기를 버리고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짓눌린 고흐는 크리스마스 이틀 전 세면대에 놓여 있던 면도칼을 집어들고 세게 귓불을 잡아당겼다. 면도날은 귀의 위쪽 부분을 놓치고 중간부분에서 내려와 턱까지 쓱 그어버렸다.빈센트는 고깃덩어리인 양귀를 조심스레 씻어 신문지로 싸서는 피를 흘리며 고갱이 좋아하는 성매매 여성을 찾아가 던져주었다. 의사들은 (고갱이 혹은 테오가) 빈센트의 병례, 즉 난폭한 자해와 격렬한 동요, 이상한 행동에 놀라고 당황스러워했다고 진단했다. 그리고 그는 정신병원에 들락거리기 시작한다.

빈센트와 테오의 우애와 그들 사이의 편지는 참으로 감동적이다. 유능한 화상인 테오가 자기 형에게 매달 100프랑씩 보내고도 주책없는 낭비로 끊임없이 더 달라고 재촉하는 형의 청에 못마땅해하면서도 꼬박꼬박 돈을 보내준다. 그 형제애는 부러운 모습이다. 그랬기에 빈센트가 운명한 한 해 후에 젊은 아내를 두고 작고한 테오의 죽음이 운명처럼 불가사의해졌다.

그러나 두 형제는 함께 매독을 앓고 있었고 테오의 죽음도 그 병 탓이었다. 저자는 두 형제의 관계를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다시 껴안는 발레의 파 드 되로 본다. 돈 문제에서부터 당시 화단의 주류인 인상파 기법을 거부하는 고흐의 화법까지 테오의 형에 대한 불평이 만만찮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잇달아 세상을 버린 두 형제를 테오의 아내는 오베르의 무덤에 나란히 안장해주었다.

빈센트는 아버지처럼 목사가 되지 못하고, 전도사 일에도 좌절하고 아우의 청으로 붓을 들었다. 밀레의 그림을 모사하면서 시작한 화가 생활은 불과 8년 동안이었다. 그러기까지, 그리고 그 후에도 줄곧 그는 이 세상과 그 시대를 매우 불편하게 살아야 했던 애물이었다. 그는 끊임없이 자학하며 불평했고 헤프게 쓰면서 곤핍했고 괴팍하며 세상과 불화했다. 그는 아버지 집에서 쫓겨났고 친척들로부터 외면당했으며 동네 사람들도 그를 미치광이로 손가락질했다.

자식 둘 딸린 성매매 여성과 결혼하겠다고 우기고 등유를 마시고 물감 튜브를 먹는 등 광기와 간질 증세로 극한 상황까지 빠졌다. 그 발작들은 그를 기억의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 그 자신은 그 발작에 두려움을 느꼈고 나날은 고독과 번민으로 가득 차고 잠은 혐오스러운 악몽이었다. 외로움에 공허했지만 사라지지 않는 죄책감이 늪의 물처럼가슴에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화가가 다른 눈으로 본다면 미쳤다고 한다고 조소하면서 그는 그것이 광기라면 햇볕에 지나치게 강타당해 생겨난 광기라며 자신의 운명을 예감하고 있었다. 살아서 괴물, 죽어 모두가 사랑하는 고흐의 기구함!

이랬기에 나는 그의 자살에 이의를 품지 않았는데 이 책은 여기에 강력한 반론을 제기한다. 그는 죽음을 반가워했지만 자살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으며 그가 권총을 가진 적이 없었고 총상도 자살자의 것으로 맞지 않으며 사후에 경찰이 그 권총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증거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김형영 시인이 구해준 디브이디 <반 고흐: 위대한 유산>과 애니메이션 <러빙 빈센트>를 보았다. 두 영화는 불량청년들에게 놀림을 당하다 피살되었을 가능성에 심증을 주면서도 그 결정적인 장면은 감추고 있었다. <판 호흐>는 그가 경찰에게 아무도 고발하지 마세요. 내가 나를 죽이고 싶었던 겁니다라고 말했다고 썼다. 테오에게 안겨 죽음을 맞으며 그는 이렇게 죽고 싶구나라고 했고, 두 눈을 크게 뜨고 그의 광적인 가슴이 멈추자 아우는 형은 열망하던 휴식을 찾았다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는 이 전기로 여러 궁금증을 풀면서 더 깊은 미스터리에 젖었다. 노란색 밀밭 위로 나는 검은 까마귀들, 꿈틀거리며 솟구치는 나무들과 소용돌이치는 배경의 색깔들 그 모두에 어딘지 막막한 불길함이 배회한다. 그의 광기는 니체처럼 벨 에포크의 풍요와 평온을 깨고 살육과 고통의 시대를 예고하고 있다. 그런데 미친 영혼은 어떻게 세계를 투시하고 광포한 시대의 파탄을 예감할까. 내가 느끼는 것을 그리고 내가 그리는 것을 느끼고 싶다는 그의 열망은 어떻게 들린 영혼으로 20세기의 절망을 직관할 수 있었을까.

그 망연한 생각들에 젖던 밤, 나는 미국의 마종기 시인에게 보낸 메일에 이런 구절을 보탰다. 이 세계가 허망하기에 신뢰를 지켜야 한다는 것, 이 시대가 죄스럽기에 존중할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 사회가 위선이기에 관용이 필요하다는 것, 인간들이 포악한 존재이기에 선의가 피어나야 한다는 것, 삶이 고통스럽기에 유머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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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38293.html#csidx92676bdcbbbdaf3aa3fbb1d1399cf79